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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님 따라 만리 길(그림)

글 / 미국 대법 제자

【명혜망】편집자의 말 : 이 글은 한 파룬궁 수련생이 1993년도부터 그가 사부님을 따라 중국 대륙 각 대도시를 다니면서 설법을 들은 과정이다.그의 소박하고 상세한 문장에서 장쩌민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혹독하게 파룬궁을 대하고 무엇 때문에 이런 엄중한 박해 속에서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파룬궁 수련을 견지하는가 하는 것을 더욱 똑똑히 알 수 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질문하고 있다: 장쩌민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이홍지 선생을 시기하고 미워하며 무엇 때문에 5억 달러라는 무역 적자로 이 선생의 귀국을 인도(引渡)하며 무엇 때문에 파룬궁 수련생을 이렇게 무서워하는가 하는 이것은 어쨌든 그 무슨 원인이 있지 않겠는가? 내가 생각하건대 이 문장은 특수한 과도기적 역사시기에 상세하게 파룬궁 창시인이 대륙에서 법을 전할 때의 많은 구체적인 실례를 기재한 문장으로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만족하는 구체적인 답안을 찾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문장은 비록 길지만 읽기만 하면 감촉(感觸)이 비교적 깊어 존경하는 독자들과 함께 향수하기 위하여 특히 이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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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輪大法홍법9년사진전시회 ―《정법의 길》곧 열리게 된다. 이 생기 넘쳐 흐르는 지난날의 사진을 보니 몇 년간 자신이 대법이 세간에서 전해지는 갖가지 쓰라린 경력이 떠 오른다. 뿐만 아니라 나는 사부님이 친히 지도하시고 8개월의 오랜 시간을 거쳐 선발하고 제작하고 끝끝내 완성한 위대한 작품에 능히 실증할 수 있는 것을 온 정력을 다 하여 조금이라도 써서 헌납하려고 생각한다.

나는 젊어서부터 병이 있어 늘 병 때문에 약을 먹었다. 이렇게 몇 년 지나니 의사와 약물에 대해 이미 신심을 잃었다. 92년 말 나의 신체는 급속히 나빠져 집 식구의 부추김을 받아 비행기를 타고 북경에 와서 기공사를 찾았다. 내가 찾은 기공사는 뽑아 내고 보충하고 하면서 오랫동안 치료하였으나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다. 93년 7월 한 친구의 집에 놀러 갔다가 책꽂이 속에서 《파룬궁》이란 책을 보고 본능적으로 꺼내어 보니 거기에는 연공인의 아래 배 부위에 하나의 파룬을 넣어 준다고 하였다. 나는 그때 깜짝 놀랐다. 종래로 생명의 오묘함을 어떠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는데 기공사가 능히 영혼이 있는 생명체를 만들 수 있다니 정말 상상하기 어렵다, 이 일은 너무나도 크다. 또 생각하여 보니 하나의 파룬이 나의 아래 배 부위에 있으면 꼭 나의 병을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한시가 급하게 그 친구를 보고 나를 도와서 파룬궁을 찾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7월 25일 나는 베이징에서 열리는 제11기 파룬궁 전수반에 참가하였다. 이로부터 나의 수련의 길이 시작 되였다.

나는 48년 생으로서 불, 도, 신 및 전통 문화에 대하여 그 이름만 알고 실질은 몰랐다. 더군다나 기공과 수련에 대하여서는 개념마저도 없었다. 비록 무신론에 대한 교육을 받았지만 학생은 점수를 위하기에 신앙은 말할 수 없어 머리는 텅 비여 있었다.


98년 동방 건강 박람회 표창장

11기 학습반은 베이징 공안 대학 강당에서 열렸는데 나는 20 번째 줄에 앉았었다. 제1강의시간은 곧 나를 흡인하였다. 선생님께서 사전 문화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들으면서 속으로 놀랐다. 이러한 일들을 이 몇 년 동안에 자신도 생각하였는가?

우리 이 세대들은 소녀시절에 문화대혁명을 맞이하여 인간 세상의 각종 슬프고 쓰고 매운 것, 울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할 정치 유희를 직접 목격하였으며 침통한 현실 중에서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정치, 권력 각종 사조에 대하여 모두 빠져 나와 냉정히 그를 관찰하고 그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을 학습하였다. 그러나 이 망망한 세계에 대하여서는 마음에 잡히는 데가 없어 어떤 기준으로 그것을 판단하고 무슨 표준으로 자신의 행위를 가져야 하는가 하는 것을 몰랐다. 직장에서 매일 서로 다투고 빼앗고 서로 속이고 속이는 환경에 포위 되어 마음 속으로 아주 역겨웠다. 한가할 때면 늘 《오묘한 비밀》과 같은 잡지를 뒤적이면서 인생 이외의 문제를 사고하였다. 이 때의 마음은 세상 밖에서 날아다니는 것과 같았고 가볍고 자유로움을 감지하게 되였다.

오늘 한번에 이렇게 새로운 것을 듣고 나니 마음이 탁 트이는 것 같고 아주 흥분하였다. 매 시간을 나는 아주 흥미진진하게 들었으며 매 시간이 끝나면 신체의 고통이 아주 많이 완화 되였다. 나는 매일 오후마다 일찍이 길 떠날 준비를 하였다. 한기 학습반이 결속 되었다. 나는 또 한번 학습반에 참가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12기 학습반은 ‘우커쑹’ 어느 지역에서 열린다고 하여 나는 급히 방법을 동원하여 표를 구입하였다. 우커쑹은 내가 거주하는 곳에서 아주 멀었다. 몇 시간의 강의를 들은 후 나는 열이 나기 시작하였고 기침을 한번 짖으면 목과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아 말도 할 수 없었다. 노 수련생은 나보고 어떻게 고통스럽더라도 꼭 견지하라고 하였다. 3, 4일 후 열이 내렸으며 아프던 곳에 큰 덩어리가 없어진 감을 느꼈다. 그 후 나는 또 13기 학습반에 참가하였다. “2-7차량 공장”에서 열었는데 더욱 멀었다. 먼저 ‘시뺀먼’에서 차 타고 다음 309 교외로 나가는 차를 갈아타서 종점에 도달한다. 매일 오후 4시 남짓하면 길을 떠나서 7시 반에 강의를 듣고 집에 돌아오면 12시가 넘었다. 3번의 학습반이 끝나니 나는 보모를 내 보내고 나 스스로 일상 생활을 하였다.

한기 또 한기 강의를 들었으며 선생님의 강의는 점점 더 높아져 모두 내가 종래로 들어 보지 못한 참신한 것들이었다. 그러면 믿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한 사람이 그의 아내를 보고 “만약 계란에 자루가 달린다면 나는 곧 수련하겠다.”고
하였는데 이튿날 그들의 집 닭이 자루가 달린 알을 낳았다

나는 어렸을 때 베이징 교외의 한 농촌에 몇 년 있었다. 불, 도, 신 및 귀신에 대한 개념은 모두 그 때 작은 의자에 앉아서 할머니가 한 이야기에서 들은 것이다. 그 때 농촌에는 전기가 없어 어린 아이들은 저녁에 늘 별들을 보았다. 온 하늘의 별들은 모두 이야기로서 매개별마다 모두 한 단락의 기이한 전설이 담겨 있다. 일체 아름다운 동경, 일체 알 수 없는 비밀 그 모두가 너무 멀어서 미칠 수 없는 하늘 위에 있다. 아이들이 나쁜 일을 하게 되면 할머니들은 곧 귀신으로 그를 위협하면서 인과 응보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 시절의 경험은 나의 마음 속에 종자를 심어 주었다. 커서 학교에 가니 학교의 선생님은 이런 것은 없다고 말하였다. 도시에 들어가니 도시 사람들은 모두 아주 현실적이어서 그런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나도 종래로 자세히 생각하여 본적이 없었다. 오늘 이 문제가 단번에 눈앞에 놓이자 그야말로 조금 머리가 땡하고 눈앞이 아찔하였다. 나는 사람의 생명은 짧고 경험 또한 유한한 것으로 무엇이나 모두 친히 가서 체험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면 믿고 믿지 않는 것은 선생님을 보아야 한다. 선생님이 믿을 만 하면 선생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선생님을 자세히 관찰하였다. 오직 선생님이 있으면 나의 눈은 항상 선생님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매 하나의 목소리와 웃는 모습 매 하나의 미소한 동작도 모두 눈으로 보고 마음속에 담아 두었다. 때문에 강의가 끝나면 나는 늘 머뭇거리면서 뒤에서 걸었다. 어느 날 12기 학습반이 끝이 난 다음 우커쑹역에서 지하철을 기다릴 때 선생님이 뒤에서 걸어오시는 것을 보았다. 옆에는 그의 집 식구들과 또 수련생 한 명이 있었다. 그들은 도시락을 들고 있었다. 차가 오니 사람들은 차 문 쪽으로 모여들었다. 나는 되도록 선생님이 계시는 쪽으로 비집고 가서 선생님과 한 차간에 오르려고 생각하였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밀고 들어가면서 어디에 빈자리가 있는가 살피고 일단 빈자리가 있기만 하면 다른 사람 먼저 가서 거기에 앉으려고 하였다. 내가 차 칸에 들에 와서 보니 선생님은 옆 칸에 올라탔었다. 나는 급히 두 차 칸의 연결된 문으로 가서 그곳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조금도 급해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먼저 들어 보내고 거의 제일 마지막에 올랐다. 그가 올랐을 때 그래도 한 두 자리는 있어 서두르면 능히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나는 마음 속으로 급하여 빨리 빨리 하고 생각하였으나 그는 조용하였으며 근본적으로 어떤 감각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사람들은 순식간에 비집고 자리에 앉았고 거의 그만이 그곳에 서 있었다. 나의 마음은 설래였다. 그와 우리는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묵묵히 그는 어떤 마음으로 주의의 세계를 대할까 고 생각하여 보였다. 점차적으로 나의 마음 속엔 하나의 글자, 바를 “正”자가 떠올랐다.

이 선생님은 어째서 이렇게 바른가, 너무 똑발라 상상하기 어렵다. 인간의 어떤 표면적인 것도 가려진 것이 없고 일체는 그렇게 진실하고 지어내는 것이 없고 과장하는 것이 없고 억지를 쓰는 것이 없고 가식이 없다. 강의하는 것도 내가 본 그 어떤 하나의 강의 방식과 달리 시간이 되면 강의를 하고 겉돌지 않고 직접 강의 내용으로 들어간다. 가는 곳마다 어떤 사회 유명 인사가 부추기는 것도 없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앞뒤에서 절을 하고 읍하면서 병을 치료하여 달라는 것도 없다. 학비도 아주 싸서 10번 강의 9일에 40원을 받고 노 수련생은 또 절반을 할인한다. 후에 기공 과학 연구회에서 파룬궁 학습반 학비를 너무 싸게 받아 다른 기공 학습반에서 학비를 받아들이는데 지장을 준다고 하여 겨우 50원으로 올리고 노 수련생은 의연히 절반을 할인하였다. 선생님의 각지에서의 강의는 모두 그곳의 기공 협회를 초청하여 주최하였으며 학습반을 꾸린 수입은 기공 협회와 4대 6으로 나누었다. 얻은 절반도 안 되는 돈에서 수행 인원의 식사와 숙박비, 여행비용을 제하고 나면 곧 얼마 남지 않는 것이다. 그 때 나는 생각하였다. 선생님은 돈을 벌기 위한 것도 아니고 병도 치료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는 도대체 어떤 일을 하는가?

매기 학습반 강의시간에서 선생님은 사람들에게 신체를 조정하여 주었다. 학원들의 반응은 아주 컸다. 한기 학습반이 끝나면 어떤 분은 한평생 얻은 병이 모두 나아져 아주 신기하다고 느꼈다. 신체상에서 이익을 얻어 놀라고 기쁠 뿐만 아니라 아울러 나는 일생에서 이렇게 마음이 활짝 열려 본 적은 없다는 것을 느꼈다. 일체는 모두 그렇게 투명하고 어떤 비밀도 없고 가깝고 멀거나 귀천이 없고 인간 세상의 변천이 모두 우리 이 강의시간에 들어 올 수 없어 사람마다 서로 알지 못하지만 마음은 한곳으로 쏠리고 모두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모두 수련하려 하며 매 강의시간이 끝날 때면 모두 떠나기 아쉬워한다. 조용할 때 나는 참지 못하고 자신에게 ‘나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마음이 흔들리는가’하고 물었다. 나는 점차적으로 선생님의 타인을 위하는 정신과 선생님이 강의한 일체가 모두 나의 내심 속의 아주 깊고 깊은 곳과 일종 호응 혹은 일종 공명 혹은 일종 감응이 일어났음을 감지하였다. 어느 하루 나는 끝끝내 알아 내였다, 그것이 곧 “眞”이라는 것을. 나는 일생 동안“眞”을 숭상하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眞”이라고 느꼈다. 이를 위하여 나는 필사적으로 세속에 빠지지 않고 인파에 휩쓸리지 않기 위하여 일생에서 거대한 대가를 치려 신심이 아주 고달팠다. 오늘 선생님을 만나 묵묵히 체험하고 보니 그것은 진정으로 그렇게 고결하고 그렇게 견고하여 파괴할 수 없는 것이다. 나의 마음은 진동 되였다.


사부님이 우한(武漢) 제2기 전수반에서 설법 및 공법전수(1993.3)

베이징 13기 학습반이 결속된 다음 기는 우한(武漢)이였다. 나는 계속하여 들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나 혼자 길을 떠난다는 것은 나로 볼 때 너무나도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비록 신체가 이미 아주 크게 좋아졌지만 그러나 원래 신체 조건이 너무나도 좋지않아 그때 나는 보온병 마저도 들 수 없는 신세였다. 생각하고 생각하여도 뾰족한 수가 없어 나는 용기를 내여 길을 떠났다. 나의 표는 중층 침대여서 기실 오르기도 아주 힘들었다. 차에 오른 후 나는 아래 침대에 앉아 있었으나 침대 주인은 나를 쫓지 않았다. 내가 물을 마시려고 허리를 굽히니 옆 사람이 금방 나에게 부어 주었다. 저녁이 되니 아래 침대 젊은이가 나보고 “중층 침대에서 잘 수 있겠습니까? 안 되면 나와 바꿉시다.”고 말하였다. 나는 미안하여 한번 실험하여 보자고 대답하였다. 겨우 침대에 올라 누우니 뒤흔드는 것이 마치 바다와 같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다시 내여 와 그와 자리를 바꾸자고 하였다. 그는 두 마디 소리 없이 올라갔다. 우한역에서 내릴 때 한 차간의 사람들이 나를 도와서 짐을 역까지 날라 갔다. 당시 나는 아주 행운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몇 년이 지난 후 나는 사부님이 나를 보살펴주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때 우한(武漢)에서는 연속적으로 3기를 열었다. 즉 우한의 3, 4, 5기로서 제3기는 우창의 재정 학원에서, 제4기는 한커우의 시강당에서, 제5기는 우한 강철 공장에서 열었다. 우한 3기 학습반이 모두 끝나니 이미 9월 말이 되였다. 다음 기는 광쩌우(廣州)에서 꾸린다. 나는 또 광쩌우로 따라 가서 광쩌우 제2기 전수반에 참가하였다.

선생님의 매기의 강의는 모두 대체로 같았다. 그러나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같은 문제를 강의할 때 많은 말씀은 같았으나 어떤 때에는 다른 각도로 강의하여 그 몇 마디에서 나는 단번에 깨우치게 되였다. 이렇게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 알게 되였고 들으면 들을수록 이 일이 대단히 크다는 것을 느꼈다. 기실 백성들이 부처에 대한 이해는 사람을 도와 고난을 해결하는 보살이라는 것이고 도에 대한 이해는 악을 제거하고 선을 선양하는 의사라는 것이다. 나는 마음 속으로 선생님의 강의가 불과 도보다 높다는 것을 점차적으로 느끼었다. 그것이 곧 온 하늘의 도리인 것이다. 선생님이 능히 파룬을 만들 수 있고 선생님이 이렇게 똑똑히 생명을 요해하고 당신의 업을 제거한다. 이것은 일반적인 기를 내보내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누구인가? 나는 긴장하여 감히 계속 생각할 수 없었다. 이 일은 크기가 대단하다. 나는 나의 남편을 보고 배우라고 하였고 또 국외에 있는 아이들에게 전화를 하여 빨리 돌아 와서 강의를 들으라고 하였다.

그 때 선생님이 어디에서 강의한다는 소식만 들으면 나는 최대한 노력하여 참가하려고 하였다. 만약 한기 한기씩 따라 다니자면 그 번 학습반의 마지막 저녁 강의시간이 끝나자마자 곧 기차역으로 달려가서 사전에 기차표를 끊어야 하였다. 당시 대륙에서는 기차표 사기가 아주 어려웠다. 한곳에 가서는 될 수 있는 한 비용이 싼 여관을 찾아 소비를 절감하여야 하였다. 어떤 때에는 멈추어 좀 휴식도 하려 생각하였으나, 그러나 매기 학습반이 결속될 때 선생님의 말씀은 나로 하여금 격동을 금할 수 없게 하여 결심을 내리고 또 따라 가게 되였다. 탠진(天津) 제2기 학습반이 결속될 때라고 생각된다. 선생님은 처음으로 이 대법을 여러분에게 남긴다고 말씀하였다. “남기다”는 것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그것은 이 일이 영원히 계속 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때 나는 선생님이 이 지구에서 강의를 하기만 한다면 하늘 끝 바다 끝이라도 내가 될 수만 있다면 나는 꼭 참가하겠다고 결심을 다졌다. 당시 나에게는 바퀴가 달린 여행 가방이 있었는데 그때 국내에서는 고급적이었다. 안에는 전기 가마, 쌀, 조미료, 녹음기, 테이프, 후레시, 의복, 우산 등이 있었다. 당시 나는 기름과 소금을 먹을 수 없었다. 가장 먹기 쉬운 것이 우유와 죽이었다. 그래서 어디를 가나 나 스스로 끓여야 하였다. 이런 몸으로 선생님을 따라 다니기는 확실히 고생이 막심하였다. 아무리 어려워도 학습반이 열려 강의마당에 앉아 선생님이 강당에 오르시는 것을 보기만 하면 모든 것이 가뭇없이 사라진다. 그 기쁨은 마음 속으로부터 우러러 나오고 그 친절은 표현할 방법이 없으며 오직 비할 바 없이 위대하며 무한한 빛을 뿌려 인간의 일체가 모두 존재하지 않고 오직 선생님을 따라 신성하고 장엄하고 아름다운 곳을 따라 가고 싶은 느낌이었다. 매 한기 학습반 최후에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심득 체험을 쓰라고 하였으나 나는 언제나 아주 미안하게도 한편도 쓸 수 없었다. 병을 떼고 신체가 건강하게 되여 감지덕지 하다는 것이 마음 속엔 하나도 없고 마음 속엔 항상 한 마디 말이 솟구쳤다: 바라건대 선생님은 영원히 우리와 같이 있고 선생님의 빛나는 광채가 영원히 우리 생명의 길을 밝게 비추어 주십시오.

94년 4월로 기억된다. 나는 허페이(合肥) 제2기 학습반에서 북경으로 돌아와 침대에 하루 낮 하루 밤을 누워 있었다. 정말 지쳤다. 다음 기는 장춘(長春)이다. 장춘은 선생님의 고향이다. 속담에 걸출한 사람의 거주지가 유명하다고 선생님의 고향으로 가 보는 것은 나의 오래된 소원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침대에서 일어나 또 열차에 몸을 실었다. 열차가 장춘에 도착하였다. 장춘의 수련생들은 안내표식을 들고 번갈아 가면서 외지에서 오는 수련생들을 맞이하였고 시 중심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는 여관에 우리를 안내하였다. 그곳이 비교적 싸기 때문이다. 길에서 장춘의 수련생들은 열정적으로 우리들에게 정황을 소개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처음 왔는데 모두 아주 신선하다고 느끼어 피로를 깡그리 있고 행복한 마음으로 공공 버스 차장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한 장춘 수련생이 손으로 먼 곳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빨리 보세요, 저것이 선생님의 집입니다!” 우리는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그것은 아주 수수한 외벽에 아무것도 붙이지 않은 벽돌 아파트로서 기껏 하여야 4, 5층이 되었다. 선생님은 그렇게 재간이 있는데 이런 곳에 계시다니 너무나 쉽지 않다. 여러 사람들은 마음 속으로부터 경의의 마음이 솟아올라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춘해방대로103호 서쪽건물의 4층 서쪽문이 바로
이홍지사부님과 모친이 장춘에서 거주하던 곳이다

학습반은 지린 대학의 밍팡궁에서 열었다. 외지에서 온 수련생이 많아서 선생님은 오전 9시∼11시,저녁7시∼9시까지 하루에 두 번씩 강의하였다. 오전 표는 일찍이 구입하였는데 저녁 표는 살 방법이 없었다. 첫날 방과 후 숙소에 돌아와 있으니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 우리는 강의를 들으려 온 것이다. 선생님이 저녁에 강의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가 숙소에 있자니 속이 정말 답답하였다. 이튿날 강의가 끝난 다음 우리는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강당 밖의 풀밭에서 저녁 강의시간이 시작할 때까지 기다렸다. 모두 문 어구에 서서 표를 물리는 것을 사서 들어가기를 원하였다. 시간은 일분 일초 지나갔다. 우리는 무척 조바심 나게 기다렸다. 문뜩 한 수련생이 누가 표를 구하는가 하였다. 나는 얼른 표를 받고 그에게 돈을 주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강당으로 들어가서 자리에 앉자고 할 무렵 익숙한 노 수련생이 멀리서 달려오면서 외쳤다. “당신을 찾느라고 여기 저기를 뛰어다녔어요.” 나는 생각하였다. “어이구, 이 표를 보존할 수 없구나.” 짐작대로 그는 칭하이에서 한 수련생이 왔는데 처음으로 강의를 들었지만 보통말(普通話)을 잘 몰라 한번 더 들으려고 한다, 당신은노 수련생이니 그에게 표를 양보하여 주라, 그는 칭하이에서 제일 처음으로 참가하였다고 하였다.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표를 주고 자리를 떠나 또다시 큰 문 어귀에 가서 서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들어갔고 강의는 시작 된지 오래 되였다. 우리 표 없는 사람들은 의연히 문 어귀에 서 있었다. 이 때 강당의 관리 일꾼은 강당의 정문을 닫았다. 작은 문으로 드문드문 사람들이 드나든다. 우리는 모두 그 작은 문으로 몰려갔다. 작은 문과 멀지 않은 곳에 한 젊은이가 서 있다. 금방도 나는 그곳에 묵묵히 서 있는 그를 보았었다. 내가 그의 옆을 지날 때 그는 갑자기 표를 요구하는가 고 물었다. 나는 멍해 있다가 요구한다고 말하였다. 그는 나에게 표를 주고 나는 손에 움켜 지고 있던 그 칭하이 사람이 준 돈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나는 또 표가 있게 되였다! 옆에서 부러워하는 눈길을 보고 나는 미안한 감을 느끼고 옆에 있는 늘 학습반을 따라 다니는 쩡쩌우 한 젊은이를 보고 그더러 들어가라고 하였다. 그는 이것은 응당 당신이 들어가야 하는 것이니 당신이 들어가라고 하였다. 그때 밍팡궁 지하실에서는 무도를 하였는데 무도 표를 사 가지고 작은 문으로 들어가면 강당으로 가서 능히 강의를 들을 수 있었으나 누구도 이렇게 하지 않았다. 탠진의 젊은이는 우리가 이런 속임수를 써서 들어가서 강의를 듣는다 하여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고 하였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내가 들어가서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 강당 문을 지키는 사람이 수련생들의 간절하고 끈질긴 모양을 보고 감동 되여 문을 열어 모든 사람들을 들여보냈다고 하였다.

그 번의 학습반에서 우리는 여러 조를 나누어 선생님과 같이 기념 사진을 찍었다. 여러 사람들은 자각적으로 조를 묶고 선생님은 여러 사람과 차례로 사진을 찍었다. 선생님은 매일 집으로부터 걸어서 강의하러 다녔다. 어떤 학원은 차가 있어 선생님을 모셔다 드리자고 하여도 선생님은 모두 간곡히 사절하였다.


이른 아침 연공 중에 나타난 파룬

우리가 머문 여관은 지린 대학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때 공공 버스 표는 아주 싸서 몇 십 전이였다. 어떤 수련생들은 매일 아침 일찍 길을 떠났다. 어느 한번 나는 한 수련생에게 이렇게 먼 길을 어째서 차를 타고 다니지 않는가 고 물었다. 그는 말하기를 그의 아내가 지지하지 않기에 한푼한푼 절약하여 돈을 모으면 곧 다음 기 학습반에 참가할 수 있다고 하였다. 나는 듣고 아주 감동 되였다. 이것은 선생님이 고향에서 꾸리는 마지막 학습반이다. 마지막 강의가 결속 될 때 선생님께서는 간곡하고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나와 몇몇 수련생들의 열차 표 발차 시간은 이제 반시간도 남지 않았지만 그래도 여러 사람들은 계속하여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떠나려 하지 않았다. 밍팡궁을 떠나 길가로 나왔을 때에는 십 몇 분밖에 남지 않았다. 열차 시간을 놓치면 나는 아주 시끄럽다고 생각하였다. 표는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산 것인데 보통석으로 탠진에 가서 베이징으로 가는 열차를 갈아타야 하였다. 택시에 올라타서 기사더러 차를 빨리 몰아 달라고 부탁하여 십 분에 도착하였다. 택시는 역전 광장의 변두리에 섰기에 플랫홈과는 거리가 멀었다. 남은 시간은 몇 분 안되고 어느 플랫홈인지도 모른다. 탠진의 젊은이가 나의 무거운 상자를 들고 날듯이 달리고 몇 사람은 짐을 어깨에 둘러메고 달렸다. 무엇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역전에 들어서서 곧추 플랫폼으로 달려갔다. 틀리지 않았다. 탠진의 젊은이가 열차에 발을 들여놓고 풍하고 꼬꾸라졌다. 순간에 열차는 떠났다. 그 날은 정말 기적이었다.

듣는 말에 의하면 5월 29일 청뚜(成都)에서 학습반을 연다고 한다. 전번 기는 충칭이었다. 나는 이전에 충칭에서 학습반을 열지 않았기에 파룬궁 보도원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학습반을 따라 다니며 선생님이 그렇게 신고하시는 것을 보았다. 탠진(天津)에서 학습반을 꾸릴때 든 여관은 20몇 원으로 목욕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강의를 듣고 돌아가서 자지만 선생님은 24시간 우리를 조정한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은 억지로 선생님 계시는 곳에 찾아가서 절을 하면서 일어나지 않고 선생님 더러 자기 집사람의 병을 고쳐 달라고 하며 선생님이 어떻게 말씀하여도 듣지 않는다. 이 많은 중생을 보노라면 어떠한 마음도 다 있어 노 수련생들은 모두 아주 괴로워서 종래로 선생님의 곁으로 가지 않고 선생님이 더 많이 휴식하기를 희망하였다. 당시 나의 남편은 청뚜에서 사업하였다. 나는 이 유리한 조건을 이용하여 무엇을 좀 도와야 할 것이 있겠는가 고 먼저 청뚜를 갔다. 나는 청뚜에서 기공 협회를 찾아 가 나는 차를 내 놓을 수 있고 무슨 할 일이 있으면 온갖 노력을 다 하겠다고 하였다.기공 협회는 스스로 손익을 책임지기에 학습반을 꾸리는 것은 돈을 벌기 위한 것이다. 때문에 아주 인색하였다.

그 날 선생님은 차에서 내렸고 같은 차에는 많은 수련생들이 충칭으로부터 따라 왔다. 이미 5월 하순이라 남방은 아주 더웠다. 차에는 에어컨이 없어 모두 아주 피곤해 보였다. 수행 인원은 큼직큼직하게 묶은 책­《파룬궁》(수정본)을 지고 있었는데 온 몸에 땀이 비 오듯 하였다. 기공 협회에서는 택시 한대를 보내 왔다. 선생님은 수행 인원들더러 물건을 갖고 먼저 가게 하였다. 나의 남편은 정차장에서 차를 몰고 역 출구까지 가 선생님의 걸음을 줄이려고 생각하였다. 차가 정차장을 금방 벗어나자 갑자기 역 앞의 사거리에 어디에서 왔는지 물샐 틈이 없이 차가 모여들었다.다행이 나의 남편 차는 수입 차여서 자동으로 변속하기에 스타터가 빨라 온갖 애를 다 써서 포위를 빠져 나왔다. 어찌도 급하였든지 입에는 물집이 다 생겼다. 그 때문에 선생님은 역 앞에서 40몇 분이란 긴 시간을 기다렸다. 나는 마음 속으로 어찌도 미안한지 몇 일 동안 안정되지 않았다. 후에 선생님은 이것은 교란이라고 말씀하시며 오는 길에 이런 시끄러움이 아주 많았다고 하셨다.

청뚜(成都) 학습반은 한 접대소 강당에서 진행 되였다. 선생님의 학습반은 종래로 광고하지 않았다. 그때 각종 기공반이 많아 사람들은 대수로워 하지 않았다. 때문에 첫날에는 빈자리가 많았다. 그러나 선생님의 강의가 다르다는 소리를 듣고 소식이 재빨리 펴져 결속할 때에는 이미 800여명이 되였다. 매번 강의가 끝나면 나의 남편은 차를 몰고 선생님을 여관으로 모셔 갔다. 사람들은 모두 꾸물거리며 선생님이 차에 오른 다음 비로소 집으로 돌아갔다. 선생님의 피로를 조금이라도 경감할 수 있어 마음으로 아주 기쁘고 위로가 되었다.

우리들의 학습반은 독립적이다. 사회상의 누구와도 교섭하지 않으며 기공 협회에서는 돈만 받는다. 선생님이 공을 전수하는데 노정, 숙식을 모두 자신이 안배하기에 정말 고생하신다.

청뚜에서의 그 나날들을 나는 평생 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선생님을 따라 많은 곳을 다녔다. 첫날에는 문수원(文殊院)으로 갔다. 우리의 차는 앞에서 달렸다. 같은 차에는 홍콩의 한 상인이 앉았다. 그는 청뚜에서 학습반을 꾸린다는 말을 듣고 줄곧 청뚜에서 기다렸다. 그는 국어를 잘 못하여 강의를 듣는데 지장을 받았다. 선생님은 가는 길에 해석하여 주었다. 차에서 내렸다. 뒤차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우리는 먼저 큰문으로 들어갔다. 선생님은 앞에서 걸었다. 문에 들어서니 양옆에는 4대 금강이 서 있었다. 선생님은 뒤를 돌아보며 내가 강의할 때 그들은 모두 현장에 있었다고 나에게 말씀하였다. 내가 그들은 어째서 이렇게 보기 흉측한 가고 물으니 선생님은 그들의 위력이 대단하다고 말씀하였다. 그때 사찰은 아주 혼란하였다. 여우, 족제비, 귀신, 뱀 무엇이나 다 있었다. 선생님은 가는 곳마다 청리 하였는데 손만 한번 휘저으면 되었다.


쓰촨 러싼에서의 위풍 당당한 대법 (1998)

몇 일 후 선생님은 칭청싼(靑城山)에 갔다. 동행한 이들로는 따랜 보도원, 꾸이쩌우 보도원, 우한 보도원과 기타 몇몇 수련생이었다. 그때 나는 갑자기 옛날 사람들이 말한, 산은 높지 않지만 신선이 있으면 영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 밖으로 나의 이 신체로 산꼭대기까지 올랐다가 내려 왔다. 돌아 온 후 나의 남편의 동료는 아주 놀라 하였다. 청뚜 학습반이 결속한 후 우리는 선생님과 같이 러산과 어메이산(峨眉山)으로 갔다. 러산의 라한당에서 동행한 한 수련생이 달려 와서 선생님에게 말하기를 XX 보살(지금 이름이 기억나지 않음) 이 선생님을 보고 아주 미안하여 선생님에게 인사를 하였다고 말하였다. 선생님은 말씀하기를 우리가 돌아갈 때 그들은 아주 멀리까지 배웅할 것이다 고 하셨다. 나는 들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다. 나는 하나 하나의 흙으로 빚은 조각상을 보았을 뿐이다. 라한당을 나올 때 뒤에서 한 중이 이 무리 사람들은 대단하다고 말하였다. 기필코 그는 무엇을 보았을 것이다. 어메이싼은 확실히 기타 곳과 달랐다. 진딩(金頂)에서 나는 처음으로 천목을 진실하게 감각하였다. 선생님과 같이 다니니 신기한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나의 머리는 정말 견디어 내기 힘들었다. 나는 《서유기》와 기타의 전설을 생각하고 선생님에게 물었다, “어째서 신화 이야기가 모두 진실한 것입니까?” 선생님께서는 신화 이야기도 아무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다음 기는 쩡쩌우였다. 어렵게 침대표를 샀다. 나와 선생님은 같은 차를 타고 쩡쩌우(鄭州)를 갔다. 떠나는 날 날씨는 아주 더웠다. 역에 들어서니 사람이 몹시 붐비었다. 선생님도 우리와 같이 물건을 들었는데 온몸이 비 오듯이 땀으로 적시였다. 나의 마음은 아주 괴로웠으나 아무런 방법도 없었다. 차에 올라서야 임시로 가한 침대 칸임을 알았다. 앞에 것과 한 개 부서(局)의 것이 아니었다. 열차는 청뚜 부서의 것이고 우리의 침대 칸은 쩡쩌우 부서의 것이었다. 앞 열차에서는 우리 차 칸에 일체를 공급하지 않았고 심지어 물도 주지 않고 앞 차 칸과 통하는 문마저 잠가 버렸다. 이 차 칸에 또 일부 수련생들도 있었다. 나의 마음은 아주 조급하였다. 길에서 먹을 것은 라면밖에 없는데 뜨거운 물이 없이 되겠는가? 나와 동행하는 수련생이 차에서 뛰어 내려 앞 차 칸에 가 더운물을 담았다. 그러나 돌아 갈 시간이 없어서 다음 정거장에서 차가 선 다음 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가져 온 물은 마실 물 밖에 안 되였다. 선생님에게 매 끼니마다 라면 한 그릇으로 대접하였다. 우리와 선생님이 같이 산 표는 모두 6장으로서 이 차 칸의 가장 마지막 좌석이었다. 차가 화싼(華山)을 지날 때 선생님은 차 끝 부분에 서 계시였다. 그 차 칸의 연결 부분에는 유리가 없었다. 선생님은 그곳에 오래 동안 서서 먼 산을 바라보았다. 나는 아주 이상하게 생각하여 호기심을 갖고 걸어가서 바라 보았다. 선생님은 나에게 화싼의 많은 수도하는 사람들이 모두 산에서 내려 와 선생님을 보러 왔으며 열차를 따라 오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선생님은 그들에게 물었다: “나의 제자들이 어떻습니까?” 그들 어떤 분은 아주 오래 수련하였지만 비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 안 된다고 말하였다. 이 사람들은 줄곧 쩡쩌우까지 따라 가서 설법을 들었다. 후에 선생님은 강의에서 그 날의 이야기를 하셨다.

쩡쩌우 학습반 조건이 가장 형편없었다. 기공 협회에서는 방치한 체육관을 찾았다. 중간은 낡은 마루 바닥이고 사방의 관람 대는 벽돌로 쌓은 층계로서 파괴 되여 온전하지 못하고 오랜 창문은 어떤 것은 유리조차 없었다. 선생님이 이런 조건에서 강의하게 되니 정말 말이 아니어서 노 수련생들은 모두 한숨만 내쉬었다. 6월 11일 학습반을 시작하였다. 몇 일 후 주말 그 날은 오후 4시에 수업하였다. 시간을 중간쯤 보았을 때 돌연히 광풍이 세차게 불고 하늘땅이 다 같이 어두워지고 큰비는 우박과 함께 하늘땅을 뒤덮으며 내렸다. 비는 창문으로 뿌리여 들어왔다. 관람석에 앉은 사람들은 안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잠시 후 호두 만한 우박이 체육관의 철기와를 뚜드려 요란한 소리를 내였다. 나는 광풍 폭우, 우박 또 번개가 한데 뒤엉킨 이런 장면을 종래로 본적이 없었다. 그때 나는 교단의 왼쪽 마루 바닥에 앉았다. 자신은 노 수련생이므로 심성을 지키고 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조용히 앉아 있으면서 관람석에서 내려 온 사람들에게 자리를 남겨 주었다. 우박은 더 요란하게 두들겨 마치 지붕을 뚫으려는 것만 같았다. 선생님의 교단 우 지붕이 뚫려 비 물이 줄줄 흘려 내렸다. 연이어 스위치가 떨어지고 전등이 꺼져 버려 온통 새까맣게 되였다. 이 일체 발생은 오직 몇 분이란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은 선생님을 바라보았고 어떤 이는 조용히 앉아 가부좌를 하였고 나는 마음 속으로 어떻게 할 것 인가고 조급하게 생각하였다. “누가 위에 있는가?”하는 선생님의 외침이 들렸다. 선생님을 바라보니 두 눈을 감고 두 손바닥을 우로 향하고 가슴 앞에 놓았다. 옆에 있는 수련생들은 눈을 떼지 않고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의 손을 빨리 보라고 한 수련생이 말하였다. 잠시 후 선생님은 주먹을 꽉 쥐였다. 무슨 물건을 손에 잡은 것 같았다. 다음 탁상 우에 있는 샘물 병을 열고 물을 마시고 손의 물건을 병 안에 넣었다. 이때 비가 멎고 태양이 나타났으며 해 빛이 집 안으로 비쳐 들어 왔다. 여러 사람들은 박수를 치고 환호하였다. 그 다음 선생님은 대수인(大手印)을 하셨다. 선생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아주 큰 일을 하였으며 당신들을 위하여 아주 많은 물건들을 떼버렸다. 이때 하나 하나의 전등이 켜져 계속 강의하였다. 사후에 경상적으로 학습반을 따라 다니는 쩡쩌우 수련생이 자기는 당시 공제실에 있었는데 스위치가 떨어 진 후 선로에는 줄곧 전류가 없었지만 전등은 하나하나 켜졌다고 말하였다. 그 날 강의가 끝난 후 거리에 나와 보니 적지 않은 나무들이 부러지었다. 아이스크림을 파는 할머니 한 분이 우리를 잡고 물었다. “금방 벌어진 일은 당신들 때문이 아닙니까?” 일반 사람들이 다 이런 일을 아는 것을 보고 나는 또 놀랐다. 이튿날 쩡쩌우 신문에는 많은 곳의 지붕이 날려 갔다고 보도하였다. 기상국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일어났으며 사전에 전혀 아무런 징조도 없었다고 말하였다. 기공 협회 주최자는 오늘 시야를 크게 넓혔다고 하였다. 이튿날 쩡쩌우시 시장이 강당에 와서 공경하는 마음으로 선생님과 악수하였다. 듣는 말에 의하면 그와 그의 며느리도 우리의 학습반에 참가하였다고 한다.

그 다음 학습반은 지난(濟南) 제2기였다. 지난 체육관은 3, 4천 명을 용납할 수 있는데 빈 좌석이 없었다. 지난 학습반에서 선생님은 아주 상세히 강의하셨으며 이후에 발생할 일도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다.


지난(濟南) 파룬궁 1998년 수련 심득 교류회

다음 기는 따랜(大連)이다. 선생님은 여러 사람 모두가 다 따랜으로 가지 말기를 희망하였다. 따랜은 막힌 골목이고 열차가 적으며 표는 이미 다 팔렸다고 말씀하셨다. 아울러 30일 그 날에는 비행기로 따랜을 가지 말라고 하셨다. 그 번 선생님은 가는 길에 많은 저해를 받았고 마의 교란이 아주 심하여 선생님은 부득불 배를 타고 바다로 간 것 이였다.

따랜 보도원이 청뚜에서 말한 것으로 기억된다. 그들이 선생님과 같이 찍은 사진 위에 용이 있다고 말하였다. 나는 아주 기이하게 생각하여 따랜에 가면 보여 달라고 하니 그는 동의하였다. 이번에 따랜에 가서 나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에게 보여 달라고 졸랐다. 어느 하루 그가 가져 왔다. 내가 사진을 보니 정말로 그들과 선생님이 선 뒤쪽 하늘에 두 마리의 용이 앞뒤에 가지런히 있었다. 머리는 크고 코와 눈의 윤곽도 아주 똑똑하였다. 또 우에는 사람이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또 나에게 두 자루의 보검을 가리키며 보라고 하였다. 내가 보니 아주 작지만 똑똑하여 분간할 수 있었다. 칼은 칼집에서 나와 있었다. 나는 망연히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그는 사진은 한 장 밖에 없다면서 검판을 가지고 가서 현상하려 하였으나 현상이 되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그의 아들은 어떻게 말하여도 믿지 않고 사진을 찍은 곳에 20여 번이나 가서 고찰하였으나 마지막에 포기하고 말았다. 그 번 제10번째 강의에서 물음을 해답할 때 한 수련생이 《파룬궁》 책을 볼 때 두 보검을 본 것을 물어 보았다. 선생님은 “내가 우주 중에서 갖고 왔는데 위력이 비할 바 없습니다.”고 말씀하시었다.

8월5일에는 하얼빈에서 학습반을 열었다. 지점은 하얼빈 아이스 하키 장이었다. 그때 아이스 하키 장은 채 건설하지 못하여 3면에는 좌석이 있었지만 한쪽 벽은 베니어 합판을 붙이었다. 아이스 하키 장의 사업 일군은 이렇게 많은 사람이 기공반에 참가하였다는 말은 종래로 들어 보지 못하였는지라 그도 와서 강의를 들었다. 어느 하루 강의 시간이 아직 멀었다. 선생님이 들어 와서 장내를 한 바퀴 돌면서 여러 사람을 문안하였다. 선생님이 수련생 앞으로 갈 때 선생님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수련생들은 한꺼번에 욱하고 일어서서 경건한 마음으로 선생님을 향하여 경의를 표시하였다. 선생님이 앞으로 가면 앞의 수련생들이 또 욱하고 일어섰다. 이렇게 선생님이 한 바퀴 도는데 수련생들이 정연하게 일어섰다 앉았다 하는 것이 기복을 이루어 그 장면이 그야말로 장관을 이루었다. 그 시각 온 장내에는 신성하고 숭고함이 충만 되여 수련생 자신들마저도 어리둥절하여 졌는데 이것은 사전에 아무런 준비도 없었던 것이다. 내 곁에 처음으로 강의를 들으러 온 분이 낮은 소리로 말하였다.“아야, 종래로 이러한 장면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 어떤 국가 자도자가 와도 모두 불가능한 것입니다. ”


파룬궁 수련생이 1998년 썬양에서 거행한 아시안 스포츠절 개막식에서

연길 학습반은 연길 체육관에서 열었다. 열심히 개최한 분은 연길에서 제일 처음 타지에 가서 강의를 들은 조선족 수련생이였다. 그는 고향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하려고 한다고 말하였다. 듣는 말에 의하면 그의 사업 단위의 70% 되는 사람들이 학습반에 참가하였다 한다.그 번 기의 마지막 날 조선족 수련생들은 산뜻하고 아름다운 민족 복장을 입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복장은 그들이 가장 성대한 예절로서 선생님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며 선생님을 배웅하기 위함이었다. 강의가 끝난 후 간단한 의식을 거행하였고 선생님은 수입한 7천원 전부를 연길 홍십자회에 증정하였다.

그 날 강의실에서 나와 나는 곧장 열차 역으로 달려가서 도문강1호를 타고 장춘으로 간 다음 차를 갈아타고 하얼빈으로 갔다. 전번 기 하얼빈 학습반에서 신 수련생 한 분이 비디오카메라를 빌려 가지고 녹화하였는데 나한테도 한 부 주겠다고 하였다. 당시에는 녹화기를 모두 살 수 없었으며 녹음기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주 적었기에 나는 빨리 가서 찾아야 하였다.

하루 밤 열차를 타고 이른 아침 장춘에 도착하였다. 나는 짐을 들고 다니기가 너무나도 힘들었다. 지하 도로 어구에 멈추어 서서 짐 상자를 세워 놓고 숨을 몰아 쉬면서 뒤를 돌아다보니 선생님이 뒤에 서서 자애롭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기쁘기도 하고 감동되기도 하였고 또 선생님이 나를 도와 짐을 들까봐 (주: 이것은 수련계의 사부와 제자 관계의 계정(界定)과 수련 방식에 관계 됨) 황망히 말하였다. “선생님, 나를 관계하지 마십시오. 선생님이 먼저 가십시오. 나는 아무 일도 없습니다. 나는 정상적으로 길을 떠나 다니기에 될 수 있습니다.”선생님이 앞으로 가신 다음 나는 비로소 짐을 한 계단 한 계단씩 옮기기 시작하였다. 나는 짐을 끌고 줄을 서서 출입구를 나서 머리를 들어 바라보니 선생님이 앞에서 내가 역에서 나오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의연히 그렇게 자애롭게 나를 바라보고 있어 당시 온 몸에 뜨거운 것이 솟구쳐 올라 정말 선생님 앞에 달려 가 엎드려 절하고 싶었지만 주위에 사람이 많고 선생님 곁에 또 수련생이 있어 방법 없이 선생님에게 합장하면서 “선생님 나 때문에 근심하지 마십시오. 나는 정말 될 수 있습니다.”고 말하였다. 그 날 나는 순조롭게 하얼빈에 도착하였고 이튿날 기적과 같이 북경으로 돌아갔다.

몇 달 후 12월 21일에 꽝쩌우에서 제5기 학습반을 꾸리었다. 이것은 중국에서 최후의 한기였다. 그때는 이미 파룬궁이 아주 넓게 전파 되였고 또 아주 빨리 전파 되였다. 거기에다 몇 달 동안 학습반을 꾸리지 않았기에 많은 사람들은 손꼽으며 학습반이 다시 열리기를 기다렸다.또 마지막 기라고 하니 뚱베이, 씬쟝 등 전국 각지에서 모두 찾아 왔으며 도를 얻기 위한 이 생명 중의 가장 큰 일에서 아주 많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일들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너무 일찍이 와서 호주머니에 있는 돈으로 강의 기간의 생활비를 유지하기 위하여 매일 식사비용을 2원씩 썼다. 광쩌우에서는 2원을 가지고는 배불리 먹을 수 없는 것이다. 북경의 수련생들은 자기의 돈을 내놓아 매 사람에게 100원씩 나누어주었다. 뚱베이 한 여자아이는 대중형 기업이 생산을 중지하여 수입이 없기에 채소를 팔아 번 돈으로 강의 들으려 왔으며 얼마 되지 안는 돈으로 다른 사람을 방조하였다. 또 형제가 이불 짐을 둘러메고 여행의 괴로움을 맞보면서 동냥하다시피 하면서 학습반에 왔다.


사부님이 광쩌우 제2기 전수반에서 설법하고 공을 전하다(1993)

듣는 말에 의하면 광쩌우 제5기 학습반에 5천 여명이 참가하였다 하는데 가능하게 더욱 많을 것이다. 광뚱썽 기공 협회에서는 일찍 표를 다 팔았다. 나의 표는 광쩌우에 있는 친척에게 부탁하여 10월에 산 것이다. 후에 온 수련생들은 표를 살 수 없었다. 첫날 강의 시간이 아직 멀었는데 체육관 앞의 광장에는 사람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500여명이 표가 없다 하였는데 체육관직원은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사람을 초과할 수 없으며 통로에는 사람이 앉을 수 없다고 하였다. 북경의 일부 수련생들은 신 수련생들에게 표를 양도하였다. 표를 교환할 때 쌍방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을 머금었고 곁에 있는 사람들도 격동의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강의가 시작 되였다. 표가 없는 수련생들은 체육관 문 앞의 광장에서 계속 지키고 있었다. 이러한 포기할 줄 모르는 노력은 체육관 사업 일꾼을 감동시켰다. 그들은 전례를 타파하고 옆 칸의 문을 열고 동시에 녹화하는 텔레비전을 연결하고 밖에 있는 모든 수련생들이 들어 와서 강의를 듣게 하였다.

광쩌우 제5기 학습반은 전에 없는 성황을 이루었다. 이로 보아 사람들이 법을 구하려는 마음이 얼마나 절박하며 중생의 각오가 계발 되여 그들이 사부님에 대한 경의 역시 그 어떤 언어로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어느 하루 수련생들이 아주 일찍이 왔었다. 그들은 체육관 정문에서 강당으로 통하는 길 양옆에 사람들이 겹겹이 서고 중간에 한 갈래 길을 남겨 놓고 조용히 서서 줄곧 선생님이 오시기를 기다렸다. 선생님께서 오시니 사람들은 무리 지어 선생님을 에워싸고 선생님에게 경의를 표시하였다. 체육관 직원들은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부터 우러러 나오는 숭배하는 모습을 보고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들은 수련생들에게 당신들의 선생님은 누구인가고 물었다. 체육관에서는 큰 일이 적지 않았지만 이러한 장면을 종래로 본적이 없었다.

광쩌우 제5기 학습반은 사람의 마음을 격동 시켰다. 여러 사람들은 선생님이 우리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하는 것을 알았으며 자기가 걸어가야 할 수련의 길이 무엇인가도 알았기에 모두 결심을 내리고 견지하였다. 나의 아이는 미국에서 유학하였는데 93년도 말에 귀국하여 광쩌우 제3기 학습반에 참가하였다. 미국으로 돌아 간 후 날마다 견지할 수 없었다. 제5기 광쩌우 학습반에 참가한 후 그녀에 대한 진동이 아주 커서 미국으로 돌아 간 후 혼자서 날마다 연공을 견지하였으며 또 주위의 사람들에게 소개하였다. 후에는 어떠한 고난과 좌절에 부딪쳐도 모두 수련하려는 그의 마음을 동요할 수 없었다.

광쩌우 제5기는 이 선생님이 중국 대륙에서 꾸린 제일 마지막 학습반이였다. 그 후 몇년동안 파룬궁은 중국에서 보급되는 것이 고조에 올랐었다. 그 번 학습반에는 미국, 홍콩과 또 구라파 일부 나라에서 일부러 강의 들으려 온 사람들이 있었다. 이러한 사람들이 돌아가서 그 곳에서의 제일 처음으로 되는 파룬궁 수련생이 되였다. 이 수련생들은 이후 파룬궁이 세계 각지에서의 홍법 중에서 모두 아주 많은 사업을 하여 그들이 응당 일으켜야 할 작용을 하였다.


하늘 다리 ─ 대륙 파룬궁 수련생이 연공할 때 나타난 기묘한 정경이다.
사진 중의 금빛 다리는 방안에 원래 없던 것이다.

8년이래 걸어 온 길을 되돌아 보면 자신이 대법이 전해질 때를 맞추어 친히 선생님의 설법을 공손히 들을 수 있었고 친히 선생님이 공을 전수하는 것을 받을 수 있은 이것은 십분 경하할 일인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흠모하는 지극히 진귀한 기연인 것이다. 비록 이 몇 년이래 아주 많은 고생을 하였고 아주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것을 이전에 막무가내로 질병의 시달림을 받을 때와는 마음이 완전히 같지 않은 것이다. 자기가 고생을 사서 수련하는 것을 통하여 몸에 있는 더러운 물건이 한 덩어리 한 덩어리씩 떨어져 나가는 것을 똑똑히 감수할 수 있었다. 지금은 온몸이 활력으로 넘쳐흐르고 생명이 희망으로 충만 되여 광활하고 아름다운 미래를 본 것이다. 기실 생명은 원래 아름다운 것이다. 오직 우주의 법리를 모르기 때문에 모르는 중에서 적지 않은 업을 쌓아 자신을 고통의 심연에 빠뜨린 것이다. 선생님이 우주의 진법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었고 또 우리의 신체를 청리하여 주고 법륜과 일체 수련하는 요소를 넣어 주어 우리들로 하여금 능히 대법 중에서 수련할 수 있게 하였으며 신심이 부단히 승화되게 하였다. 수련하지 않는 사람들은 연공 하는 사람을 보고 아주 고통스럽다고 보겠지만 연공 하는 사람은 아주 행복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은 향상하는 하는 생명이며 능히 하늘땅과 같이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이는 오직 사람의 아름다운 소망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지금은 도리어 확실하고도 확실하게 그것을 체험하고 실행하는 이 길을 걷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로 고해를 뛰쳐나와 반본귀진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겠다. 이미 아주 길다. 내가 쓴 목적은 그 무엇을 나타내자고 한 것이 아니라 사부님이 법을 전수하는 것이 너무나도 쉽지 않았으며 법을 전한 이 9년이래 일분 일초도 정지한 적이 없었다. 우리들은 많고 많은 것은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며 우리의 마음도 영원히 담지 못할 것이다. 그의 품격은 숭고하고 위대하며 그의 지혜는 광대하고 광활함을 사람의 언어 내포로 그 만분의 일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99년 7월 대륙의 방송국, TV에서는 미친 듯이 요언을 날조하여 비열한 수단으로 사람의 나쁜 마음을 꾀어 내였다. 속인은 말하지 않더라고 어떤 수련생은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이것은 너무나도 황당하고 가련하다. 어떻게 사람의 마음으로 부처님의 마음을 추측할 수 있으며 사람의 도리로 불가의 도리를 평가할 수 있겠는가?

법이 건곤을 바로 잡는 최후의 시기에 나는 내가 걸어 온 길을 회상하고 그것을 또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은 우리들이 과거를 기억하고 자만하지 말고 게으름을 부리지 말며 한결 같이 사부님을 따라 앞으로 걸어가기 위하여서이며 자기를 위하고 더욱이는 우주의 중생의 영원한 미래를 위하여서이다.

(2001년 4월 뉴욕 법회 발언고 )
成文:2002-9-15 發稿:2002-9-16 更新:2002-9-27 2:21:06 PM

문장분류: 종합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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