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의 박해: 가족 연좌제에서 초국가적 탄압까지

– 우리 집안의 사례

[명혜망] 나는 레이잉췬(雷映群)이고 올해 73세다. 1997년 몸이 질병에 시달려 정말 어찌할 방도가 없었을 때 다행히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 수련에 들어섰다. 수련 전에는 여러 질병에 시달렸으나 수련 후 병 없이 몸이 가벼워졌고 심신으로 큰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1999년 7월 20일 중국공산당(중공)은 파룬궁을 전면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했다. 나와 남편이 파룬따파 수련을 견지하고 대법을 위해 공정한 말 한마디를 하려고 베이징에 청원하러 간 이후 우리집의 생활은 완전히 바뀌었다.

‘7·20’ 박해 시작, 부부가 박해를 받다

‘7·20’ 청원 이후 우리 부부는 잇달아 부당하게 공직에서 해고됐다. 남편 우루이룽(吳瑞榮)은 원래 중국 남방항공그룹 후난(湖南)성 지사의 대형 버스 기사였고 나는 원래 후난성 헝양(衡陽)시 금속재료총공사의 회계사였다. 나는 연이어 일곱 차례 중공 공안, 국안 및 ‘610사무실’(중공이 불법적으로 설립한 파룬궁 박해기구)에 납치됐는데 그중 한번은 부당하게 4년형을 선고받았다. 남편은 연이어 여섯 차례 납치됐고 두 차례 부당하게 강제노동을 당했으며 감옥에서 4년 넘게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우리는 모두 여러 차례 공안, 감옥경찰, 죄수에게 맞아 죽을 뻔했다.

하지만 우리가 받은 박해는 시작에 불과했다. 중공은 파룬궁을 박해할 때 여태껏 수련자 본인만 겨냥한 것이 아니라 가족에게까지 박해를 확대해 온 집안이 함께 고난을 겪게 했다.

가족 연좌제: 생계 단절, 친척과 친구 괴롭힘

우리가 출옥한 이후 집에는 부양해야 할 연로한 어머니와 어린 딸이 있었다. 우리집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남편은 큰 남동생이 운영하는 가구 공장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경찰이 큰 남동생을 찾아와 “매형이 여기서 일하게 해서는 안 돼”라고 위협했다.

이후 우리는 둘째 남동생의 가게에서 일하려고 했으나 마찬가지로 경찰의 위협을 받아 둘째 남동생은 우리를 고용할 수 없었다.

그 이후 우리는 셋째 남동생이 운영하는 웨딩 스튜디오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2008년 5월 우리가 스튜디오에서 일할 때 다시 납치됐다. 당시 함께 납치된 다른 파룬궁수련자 두 명이 있었는데 한 명은 스튜디오에서 일하는 수련자였고 다른 한 명은 단지 스튜디오를 지나다가 들러서 앉아있던 사람이었다. 이번 납치 사건은 셋째 남동생 스튜디오의 정상적인 영업에 심각한 지장을 줬고 이후 우리도 더 이상 그의 가게에서 일할 수 없게 됐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떤 친척이든 우리를 도우려 할 때마다 중공은 그 친척을 찾아가 괴롭히고 위협해 그들이 감히 우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생계를 유지할 일자리도 주지 못하게 했다.

중공은 우리의 생활 출처를 끊었을 뿐만 아니라 가족을 인질로 삼아 우리가 신앙을 포기하도록 핍박했다.

2001년 헝양시 공안국 청난(城南) 분국은 나를 잡기 위해 그해 아직 16세도 안 된 내 딸을 학교에서 곧바로 청난 분국으로 잡아갔다. 추운 날씨에 그녀는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20여 시간 동안 감금됐다. 동시에 공안은 내 셋째 남동생을 잡아가 감금하고 반복적으로 심문하고 위협하며 그들에게 내 행방을 말하라고 핍박했다.

당시 나는 박해를 피해 유랑 생활을 하느라 집에 돌아갈 수 없었다. 그들은 언니 집까지 달려가 나를 잡으려 했고 언니네 가족도 편안할 날이 없게 만들었다.

내 가족뿐만 아니라 친척, 친구들까지 모두 연루됐다. 그들은 공안에게 반복적으로 괴롭힘과 위협을 받았고 나와 남편은 직장도 없고 머물 곳도 없이 내몰렸다. 그러나 중공은 도리어 우리가 ‘일도 원하지 않고 가정도 원하지 않는다’라며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오늘날까지 이 일들을 회상할 때마다 중공의 가장 잔인한 점은 수련자 본인만 박해하는 것이 아니라 박해를 온 집안으로 확대해 모든 친척을 두려움 속에서 살게 한 것이라고 여전히 느낀다.

어쩔 수 없이 해외로 망명, 중공의 마수가 초국가적으로 탄압하다

나는 시종 수련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중공은 또 인터넷에 나를 수배했다. 나와 남편은 중국에서 이미 정상적으로 생활할 방법이 없었고 직장도 거처도 없었으며 어디를 가든 붙잡힐 위험에 직면했다.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중국을 떠나 말레이시아로 갈 수밖에 없었고 자유롭게 살며 다시는 박해받지 않는 곳이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우리가 중국을 떠났음에도 중공은 국내에 남은 친인척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중공 국안은 우리집 명의가 둘째 남동생 앞으로 이전된 것을 발견하고 둘째 남동생이 우리의 출국을 지원했다고 의심했다. 사실은 우리가 너무 서둘러 떠나는 바람에 집을 잠시 동생에게 맡겨 돌보게 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중공은 우리집의 수도, 전기, 가스를 모두 끊고 집을 ‘블랙 리스트 주택’으로 지정해 팔 수도 없고 임대할 수도 없게 했다. 더 심각한 것은 그들이 다시 둘째 남동생에게 화살을 겨눴다는 것이다.

어느 날 둘째 남동생이 운전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에게 가로막혔다. 그들은 검은 복면을 그의 머리에 씌우고 그를 경찰서로 끌고 가 감금한 뒤 위협과 핍박을 가하며 우리의 출국 상황과 해외에서의 일들을 자백하라고 강요했다. 집에 돌아온 후 둘째 남동생은 자신이 겪은 일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그는 분노하며 “그 사람들은 모두 깡패야”라고 말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두 번째로 잡혀갔다. 나는 중공이 우리의 전화를 도청했기 때문이라고 의심한다. 두 번째로 감금됐을 때 그들은 강렬한 불빛을 계속 둘째 남동생의 눈에 비추며 잠을 재우지 않았고 그를 장시간 고문했다. 이후에도 그들은 자주 전화를 걸어 그를 괴롭히고 갈취했으며 심지어 자신들이 발 마사지를 받거나 안마를 받는 등의 소비조차 내 동생이 대신 계산하게 했다.

거듭된 위협과 고문을 겪으며 둘째 남동생의 신체와 정신은 모두 거대한 상처를 입었다. 두 번째로 집에 돌아온 후 그는 과묵해졌고 아무 말도 감히 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아내에게조차 감히 알리지 못했다. 나는 당시 그가 받은 압력이 이미 그의 감당 능력을 훨씬 넘어섰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째 남동생은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나는 한 달이 넘어서야 다른 사람을 통해 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집안 사람들이 연루될까 두려워 아무도 감히 내게 알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일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마음이 너무 아프다.

나는 어떤 법도 어기지 않았고 그 누구도 해치지 않았으며 단지 ‘진선인(眞·善·忍)’을 믿고 더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랐을 뿐인데 내 친인척이 하나둘 연좌제 피해를 보았다. 이 박해 속에서 상처받은 것은 나와 남편뿐만 아니라 내 딸, 언니, 세 남동생 그리고 한때 우리를 기꺼이 돕고자 했던 다른 친척과 친구들이었다.

중국에는 ‘건드릴 수 없으면 숨으면 된다’라는 옛말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중국을 탈출했음에도 중공의 박해에서 진정으로 벗어나지 못했다.

2011년 5월 15일 남편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독립광장에서 중국 관광객들에게 파룬궁 진상을 알렸다. 당일 오전 10시경 많은 말레이시아 경찰과 사복 직원이 와서 남편을 강제로 끌고 갔고 6일간 감금한 뒤에야 석방했다. 남편은 풀려난 후 경찰에게 왜 자신을 잡았는지 물었다. 경찰은 중공과의 ‘우호적인’ 교류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라고 알려주었다.

두 달 뒤인 2011년 7월 13일 남편은 여전히 독립광장으로 가서 중국 관광객들에게 진상을 알렸다. 한 가이드가 말리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전화로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다시 남편을 경찰서로 끌고 갔고 이번에는 14일간 감금했다. 7월 27일 경찰 측은 정식으로 법원에 기소해 남편이 경찰을 습격했다고 모함했다. 2012년 6월 7일 법원은 우리가 인적 증거와 물적 증거를 제공했음에도 1심에서 여전히 남편에게 1년형을 선고했다.

우리는 이것이 일반적인 사건이 아니라 중공이 해외에 침투하고 영향을 미친 결과이며 남편에게 강제로 씌운 터무니없는 죄명임을 알고 있다.

맺음말: 가족 연좌제부터 초국가적 탄압까지, 20년 넘는 박해는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20년이 넘게 지났지만 이 박해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우리집이 겪은 일을 되돌아보며 내가 가장 깊이 느낀 것은 중공이 파룬궁수련자를 박해할 때 여태껏 수련자 본인만 박해하는 것이 아니라 박해를 한 걸음 한 걸음 온 집안으로 확대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직장을 잃고 자유를 잃으며 정상적인 생활을 잃게 만들었고 또 위협, 공갈, 납치 등 수단을 통해 우리의 부모, 자녀, 형제자매와 친척 친구들을 연루시켜 우리를 돕고자 했던 모든 사람이 화를 입고 두려움 속에서 살게 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조국을 떠났고 중국을 떠나면 박해에서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중공은 이로 인해 우리에 대한 탄압을 멈추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국내에 남은 친인척을 박해했고 심지어 박해를 해외까지 뻗쳤다. 남편이 말레이시아에서 두 번 잡히고 경찰을 습격했다고 모함받은 것은 바로 중공의 초국가적 탄압의 한 가지 사례다.

지난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우리는 직장과 가정생활뿐만 아니라 친인척과 만날 기회도 잃었다. 둘째 남동생은 장기간의 위협과 압력 속에서 세상을 떠났지만 나는 그의 마지막 모습조차 보지 못했고 심지어 한 달이 넘어서야 다른 사람을 통해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것은 내 평생 만회할 수 없는 아쉬움이자 중공의 이 박해가 우리집에 가져다준 영원한 상처다.

나는 누구를 증오하거나 동정을 얻으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우리집의 경험을 사실대로 기록해 이 20년이 넘게 지속된 박해 속에서 피해를 본 사람이 파룬궁수련자 본인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 그리고 선량함으로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모든 사람임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기 바랄 뿐이다.

또한 나는 중공의 박해가 이미 중국 국경 안에만 국한되지 않고 초국가적인 탄압을 통해 검은 마수를 해외로 뻗쳐 전 세계 각지의 신앙의 자유와 인권을 위협하고 있음을 더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다.

나는 역사가 결국 진상을 복원하고 선악에는 결국 응보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이 20년이 넘게 지속된 박해가 하루빨리 끝나 모든 선량한 사람이 두려움 없고 거짓 없는 환경에서 살며 신앙의 자유를 누리고 정상적이고 존엄성 있는 생활을 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원문발표: 2026년 7월 18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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