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혜망](헤이룽장성 통신원) 2025년 9월 8일 오전 헤이룽장성 다칭시 자오저우현 파룬궁수련자 쑹루이샹(宋瑞香)이 인근 자오위안현 바오허타이 장터에서 민들에게 진상을 알려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알게 하려다 현지 공안분국에 납치됐다. 현재 쑹루이샹은 다칭시 제2 구치소에 불법 구금돼 있다.
쑹루이샹은 현재 70대로 1998년 대법 수련을 시작했다.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 수련 전 그녀는 요추디스크 3절, 위장병, 자궁근종 등 온몸이 병투성이였다. 파룬따파를 수련한 후 모든 질병이 감쪽같이 사라져 몸이 가벼워졌다.
1999년 7월 20일 원흉 장쩌민이 파룬궁에 대한 잔혹한 박해를 발동한 후 쑹루이샹은 5차례 이상 납치돼 온갖 고통을 겪었다. 그녀의 남편 마시청(馬喜成)과 남동생 쑹루이이(宋瑞義)는 파룬따파 수련을 고집했다는 이유로 중국공산당(중공)의 박해로 사망했다. 아래는 쑹루이샹이 당한 5차례 납치와 두 가족이 박해로 사망한 상황을 간단히 서술한다.
1. 쑹루이샹 5차례 납치돼
1) 베이징 청원 가서 구금당해
2000년 1월 쑹루이샹이 딸 마리리(馬麗麗), 남동생 쑹루이이와 함께 베이징 청원판사처에 파룬궁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하러 갔다가 경찰에게 체포되어 이란현 베이징 사무소에 구금됐다. 7일 후 쑹루이샹 등 3명은 이란현 구치소로 납치됐다.
당시 이란현 구치소에는 청원을 간 파룬궁수련자 약 100여 명이 갇혀 있었다. 쑹루이샹이 있던 감방만 해도 20명이었고 매일 베이징에서 납치되어 온 수련자들이 있었다. 어느 감방이든 모든 파룬궁수련자들이 함께 법을 외우는 소리가 하늘을 진동시켰고 경찰들은 할 수 없이 유행가를 틀어 덮으려 했다. 어느 날 검찰원에서 사람을 데려가려 온다는 소식에 구치소에서 검찰원 사람들이 들을까봐 경찰이 멈추라고 했지만 아무도 멈추지 않았다. 경찰들이 화가 나서 모든 대법제자를 밖으로 끌어내어 찬바람에 얼게 하고 몸에 물까지 끼얹었으며 쑹루이샹의 딸 등 몇 명의 파룬궁수련자를 철의자에 묶어 고문했다.
쑹루이샹과 딸은 이란현 구치소에서 매일 거의 12시간씩 강제노동을 해야 했고 5개월간 구금되어 1500위안을 갈취당한 후에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2) 야만적인 강제급식 당해
2000년 섣달그믐날 쑹루이샹이 자기 집 비닐하우스에서 일하고 있다가 이란현 구치소로 납치됐다. 당시 집에는 설 준비도 못 한 채 아이 둘만 남았다. 경찰이 쑹루이샹에게 ‘보증서’ 작성을 강요했다.
7일째 되는 날 쑹루이샹이 단식으로 박해에 항의하기 시작했다. 단식 6일째에 구치소에서 쑹루이샹에게 진한 소금물을 강제급식하기 시작했다. 이란현 구치소 부소장 정쥔(鄭軍)과 린중(林忠)이 남자 죄수 4명을 시켜 쑹루이샹의 팔다리를 누르고 위관을 삽입해 진한 소금물을 강제급식했다. 진한 소금물 4병을 모두 강제급식해서 그녀의 옷깃이 온통 하얀 소금 자국투성이가 됐다. 당시 쑹루이샹의 위가 불에 타는 것처럼 아파서 바닥을 뒹굴었다. 대법제자들의 집단 항의로 쑹루이샹이 병원으로 옮겨졌는데 병원 의사마저 차마 보지 못하고 소장 정쥔에게 “몇 병이나 강제급식해서 이렇게 됐나요?”라고 말했다. 병원에서 돌아온 후 쑹루이샹이 피를 토하기 시작해 더욱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됐다. 단식 9일째에 쑹루이샹이 이미 숨이 끊어질 지경이 되자 구치소에서 책임을 질까봐 쑹루이샹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2000년 10월 쑹루이샹의 남편 마시청, 남동생 쑹루이이가 또 다른 파룬궁수련자와 함께 다시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 현수막을 들고 갔다가 천안문 광장에서 또 납치되어 이란현 구치소로 끌려가 박해당했다. 쑹루이샹이 구치소에 납치됐을 때 남편 마시청, 남동생 쑹루이이, 딸 마리다(馬麗達)가 동시에 구치소에 구금됐다. 나중에 남편과 남동생이 창린 노동수용소로 보내져 2년간 불법 강제노동을 당했다.
3) 만가 노동수용소에서 혹형 ‘십자가형’ 당해
2001년 9월 어느 날 쑹루이샹이 남편과 함께 도로 양쪽에 현수막을 걸다가 악인의 신고로 다시 한 번 이란 구치소에 납치됐다. 보름 후 쑹루이샹과 남편이 동시에 2년 불법 강제노동 판결을 받아 각각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만가 노동수용소와 창린 노동수용소로 보내져 박해당했다.
만가 노동수용소는 매우 사악한 곳으로 대법제자를 박해할 때 결코 봐주지 않았다. 쑹루이샹이 구금된 7대대에 나중에 많은 남자 경찰들이 들어왔는데 교대당 평균 4명으로 모두가 사람을 때리는 흉수들이었다. 수갑, 전기봉, 철의자, 주먹을 사용해 대법제자들에게 강제로 죄수복을 입히고 가슴패를 달게 하고 번호를 부르고 체조를 하고 수칙을 외우게 한 뒤 마지막에 삼서(三書) 작성을 강요했다. 한때 도처에서 대법제자들이 철의자에 묶여 맞는 장면을 볼 수 있었고 멀리서도 독방에서 전해오는 전기봉 방전 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경찰의 고함과 강요하는 소리, 그리고 수시로 들려오는 처참한 비명소리가 함께 들렸다.
7대대에 구금된 대법제자가 거의 100명에 달했는데 거의 모든 사람이 폭력 박해를 당했으며 많은 사람이 독방으로 끌려가 구타당하는 일을 여러 번 겪었다. 파룬궁수련자 뤄훙옌(羅紅豔)은 온몸에 전기고문을 당했는데 나중에 전기로 생긴 물집이 고름이 되어 병원으로 이송되어 고름을 긁어내고 링거 주사를 맞았으며 밥을 먹으러 식당에도 갈 수 없었다.
노동수용소의 파룬궁수련자에 대한 육체적 박해는 매일 세끼 식사에서도 나타났다. ‘전향’한 자들은 명절에 만두, 쌀밥, 볶음요리를 먹었지만 ‘전향’하지 않은 사람들은 조잡한 옥수수 가루 큰 떡, 찐빵, 짠지를 먹었으며 배불리 먹지도 못하게 했다.
노동수용소는 파룬궁수련자 박해를 감옥경찰의 보너스와 연결시켜 한 명을 ‘전향’시키면 1000위안의 상금을 줬기 때문에 여기 경찰들이 온갖 악랄한 수법을 동원해 파룬궁수련자를 더욱 심하게 박해했다. 전향하지 않은 수련자들에게는 바닥벽돌 위에 쪼그리고 앉게 하는 박해를 했는데 이런 박해는 듣기에는 잔혹하지 않아 보였다. 쪼그리고 앉게 하되 때리지는 않으니 혹형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에는 한계가 있어서 장시간 쪼그리고 앉아 있게 하면서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심지어 밤낮으로 쪼그리고 앉아 있게 했으며 쪼그리고 앉을 수 없으면 구타했다. 그러고는 다른 방식으로 바꿔 서 있게 하고 벽에 기대 서 있게 하면서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게 했으며 이렇게 서 있는 것도 매우 오랜 시간이었다. 하루가 지나면 다리와 발이 모두 부어올랐다.
한번은 노동수용소에서 파룬궁수련자들에게 집단 ‘전향’ 박해를 가할 때 바닥벽돌 위에 쪼그리고 앉히는 수단에서 점차 ‘도태법’으로 격상시켜 ‘전향’하지 않은 모든 파룬궁수련자들을 쪼그리고 앉게 하고 몇 시간 동안 움직이지 못하게 하며 움직이면 구타했다. 3일 동안 서 있게 한 후 마지막에 쑹루이샹 혼자만 남았다. 그러자 그들이 쑹루이샹에게 ‘십자가형’을 가했는데 이는 수갑으로 양손을 묶어 사람을 매달아 올리고 뒤쪽에 철의자를 놓아 발끝만 땅에 닿게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6시간 넘게 매달린 후 경찰이 쑹루이샹이 여전히 굴복하지 않자 남자 경찰 3명[그 중 스둥레이(石冬磊), 쉐훙보(薛洪波) 포함]이 각자 가장 굵은 전기봉을 하나씩 들고 쑹루이샹 몸에 물을 뿌린 후 온몸에 전기고문을 가했다. 마지막에 쑹루이샹의 무릎과 머리카락이 모두 타버렸고 양말이 발에 달라붙었다. 그들이 쑹루이샹이 여전히 굴복하지 않자 또 작은 전기봉으로 바꿔 쑹루이샹을 더 높이 매달아 계속 박해했다.
노동수용소는 이렇게 폭력과 혹형으로 파룬궁수련자들의 ‘전향’을 강요했다. 다음날 쑹루이샹이 그 경찰들에게 말했다. “폭력으로는 제 신앙을 바꿀 수 없습니다.” 이번 십자가형을 당한 후 쑹루이샹의 팔을 두 달 넘게 들 수 없었는데 바로 이런 혹형이 얼마나 많은 파룬궁수련자들을 장애인으로 만들었던가.
4) 부부 납치돼 남편 또 불법 강제노동
2006년 7월 5일 쑹루이샹과 남편이 진상자료를 배포하다가 신고를 당해 쑹루이샹 부부가 다시 한 번 이란현 구치소에 납치됐다.
그날 밤 노모가 쑹루이샹에 의해 집에 갇혀 있었는데 딸과 사위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자 노인이 화장실에 급히 가고 싶어서 할 수 없이 창문으로 뛰어내려 발목을 접질렸다.
구치소에서 쑹루이샹은 이튿날부터 단식으로 박해에 항의하기 시작했다. 쑹루이샹이 13일간 단식한 후 구치소에서 사람이 이미 숨이 끊어질 지경이 되자 인명사고가 날까봐 쑹루이샹에게 링거주사를 놓기 시작했는데 놓는 과정에서 쑹루이샹이 바늘을 계속 뽑아서 놓지 못하게 했다.
이때 밖에서는 겁에 질려 병이 난 큰딸이 거의 80세가 된 절뚝거리는 노모를 데리고 매일 현 공안국에 사람을 달라고 찾아갔다. 현 공안국에서 쑹루이샹이 13일간 단식한 후 쑹루이샹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또 2년 불법 강제노동을 받아 창린 노동수용소로 끌려가 계속 박해당했다.
5) 또다시 납치 구금돼
2013년 5월 14일 저녁 9시가 넘어 쑹루이샹과 딸, 수련 동료 총 5명이 함께 법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다칭 채유10공장 차오양 공안분국의 양밍제(楊明傑)가 10여 명의 경찰을 데리고 갑자기 수련 동료 집에 침입해 아무런 정당한 이유 없이 쑹루이샹 등 5명을 모두 납치해 형사구금하고 각각 자오저우현 구치소와 다칭시 제1 구치소로 끌고 가 불법 구금했다. 쑹루이샹은 다칭시 제1 구치소로 납치됐다.
2013년 5월 14일 저녁 구공조서를 작성할 때 쑹루이샹이 그들의 서명에 협조하지 않자 그들이 쑹루이샹에게 수갑을 채웠다. 경찰 리옌쑹(李岩松)이 수갑을 일부러 꽉 채워 살 속에 파고들게 하고 쑹루이샹을 위협하며 “다시 서명하지 않으면 당신을 다칭 제1 구치소로 보내겠다!”고 말했다.
다음날 오후 4시가 넘어 경찰이 쑹루이샹 등을 강제로 자오저우현 병원으로 끌고 가 신체검사를 했는데 쑹루이샹의 혈압이 매우 높아서 또 다칭 병원으로 보내 검사했다. 검사 결과 쑹루이샹의 혈압이 260에 달해 다칭 제1 구치소에서 수용을 거부했다. 경찰이 또 여러 차례 반복 검사했지만 쑹루이샹의 혈압이 여전히 높았음에도 그들이 여전히 강제로 쑹루이샹을 구치소에 가둬 9일간 박해했다. 마지막에 구치소에서 쑹루이샹의 혈압이 너무 높다는 이유로 쑹루이샹을 집으로 돌려보내 ‘거주지 감시’했다.
2. 남편 마시청 박해로 사망
쑹루이샹의 남편 마시청(馬喜成)은 수련 전 심각한 기관지염과 정맥염을 앓았다. 1998년 대법을 수련한 후 질병이 완치되고 몸이 건강해졌으며 도덕이 승화됐다. 마시청은 수련하기 전에는 마을의 다른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지방세를 제대로 낸 적이 없었는데 수련 후 차오양촌 전체에서 그 혼자만이 밀린 모든 지방세를 다 보충해 냈다.
1999년 ‘7·20’ 장쩌민이 공개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하자 마시청이 베이징에 청원을 갔다가 납치되어 1년간 불법 강제노동을 당했다.
2001년 10월 마시청 부부가 파룬궁 진상자료를 배포하다가 납치되고 가택수색을 당했으며 같은 해 12월 말 부부가 함께 2년간 불법 강제노동을 받았다. 각각 창린쯔 노동수용소와 만가 노동수용소로 끌려갔다. 당시 집에는 70세가 넘은 장모가 손자 4명을 데리고 어렵게 지내고 있었다.
2006년 7월 4일 마시청과 쑹루이샹이 현내에서 파룬궁 진상자료를 배포하다가 이란현 둥청 파출소 경찰 린중(林忠)에게 또다시 납치됐다. 병든 딸이 80세 할머니를 데리고 사람을 달라고 찾아가자 경찰이 그제서야 그의 아내를 돌려보냈다. 경찰은 야만적인 강제급식으로 극도로 허약해진 마시청을 또다시 창린쯔 노동수용소로 끌고 가 2년간 불법 강제노동을 가했다.
2008년 2월 마시청이 창린쯔 노동수용소에서 박해받아 결핵성 흉막염에 걸려 온몸에 힘이 없었다. 가족과 국내외 수련자들의 강력한 규탄 하에 창린쯔 노동수용소 경찰이 2008년 3월 1일에야 마시청을 석방했다. 이때 마시청은 이미 뼈만 남을 정도로 말랐고 양쪽 귀가 들리지 않았으며 온몸에 힘이 없어서 어떤 일도 할 수 없었고 밥도 많이 먹지 못했다. 마시청은 2008년 12월 14일까지 버티다가 억울함을 품고 세상을 떠났는데 나이가 겨우 58세였다.
3. 남동생 쑹루이이 박해로 사망
1998년 3월 쑹루이이(宋瑞義)가 파룬따파 수련을 시작해서 온 가족이 혜택을 받았다. 요추간판탈출증이 그를 생사의 지경으로 괴롭혔는데 한때 매우 강장했던 몸이 병고로 뼈만 남을 정도로 말라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대법을 수련한 후 병고가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흡연, 음주 등 일부 나쁜 습관도 모두 끊었으며 예전의 불같은 성격도 완전히 고쳤다. 마치 다른 사람으로 바뀐 것 같았다. 나중에 가족들이 그의 그렇게 신기한 변화를 보고 가족 중 3명이 연이어 대법을 수련하게 됐으며 이후 질병도 이 가족을 멀리했다. 온 가족이 대법을 수련하며 수련의 즐거움 속에 젖어 있었다.
1999년 7월 20일 장쩌민이 파룬궁에 대한 잔혹한 박해를 발동하자 순식간에 먹구름이 중국 대지를 뒤덮었다. 쑹루이이는 모든 대법수련자들과 마찬가지로 베이징에 청원을 가서 파룬따파의 명예를 회복시키기로 결심했다.
2000년 1월 6일 쑹루이이가 베이징 신방국에 청원을 갔다가 이란현으로 납치되어 제2 구치소에 구금되어 잔혹한 고문을 당했다. 벌서기, 구타, 종일 변기에 머리를 처박기, 수건으로 목 조르기, 잠을 재우지 않기 등이었다. 한번은 경찰 린중이 수건으로 그의 목을 세게 조르고 걸레로 입을 막은 뒤 그를 창문에 매달아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며 힘껏 고문했는데 그가 기절할 때까지 계속하다가 그제서야 놓아줬다. 그러나 집에서는 현 공안국, 이란진, 교통대대에 총 6900위안을 갈취당했다.
2000년 11월 9일 쑹루이이가 또다시 베이징에 가서 천안문에서 현수막을 들고 파룬따파하오를 외치다가 체포되어 이란현으로 돌아왔다. 청난 파출소에서 관할 경찰 류칭타오(劉淸濤)에게 구타당한 후 이란 제2 구치소로 보내졌다가 나중에 하얼빈시 창린쯔 노동수용소로 보내져 1년간 불법 강제노동을 당했다.
2001년 11월 29일 쑹루이이가 아내 징훙화(景洪花) 등 9명의 대법제자와 농촌에 진상자료를 배포하러 갔다가 현지 파출소 경찰에게 납치됐다. 이란현 610, 정보과, 공안국이 이란현 빈관에서 연합해 대법제자들에게 36시간 동안 미친 듯한 고문을 가했다. 쑹루이이는 ‘배검식’ 묶어 매달기(양손을 등 뒤로 돌려 한 손은 위로, 한 손은 아래로 해서 수갑으로 채우고 수갑을 살 속에 파고들게 해서 극도로 고통스럽게 하는 것)를 당했다. 마지막에 그가 수련 동료가 너무 큰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고 책임을 자신이 뒤집어써야 고문이 중단됐다. 쑹루이이는 나중에 이란 제2 구치소로 보내져 단식으로 박해에 항의하기 시작했다. 3일 후 구치소에서 경찰 소장 정쥔의 지시로 강제로 진한 소금물을 강제급식했는데 위부에 심각한 손상을 입어 생명이 위험해지자 구치소에서 그제서야 집으로 돌려보냈다.
2001년 12월 29일 이란현 경찰이 대법제자들을 불법 수색·체포했다. 쑹루이이와 아내가 유리걸식하는 기간 중 이란현 청난 파출소의 지시로 촌간부들이 추격하러 왔다. 쑹루이이는 구치소에서 잔혹한 육체적·정신적 박해를 당해 위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부어올라 밥을 먹을 수 없었다. 몸이 장기간의 혹형 박해를 받은데다 정신적으로도 무거운 압박을 받아서 쑹루이이의 몸이 극도로 허약해져 음식을 먹을 수 없었고 나중에는 침대에서 일어날 수도 없었다. 2002년 11월 3일 억울함을 품고 세상을 떠났는데 나이가 겨우 48세였다.
이제 이미 70대가 된 쑹루이샹이 자비로운 마음으로 민중들에게 진상을 전했다는 이유로 납치되어 현재 다칭시 제2 구치소에 불법 구금되어 있다.
원문발표: 2025년 9월 13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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