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혜망](종합 보도) 허베이성 지둥(冀東) 감옥은 탕산시 차오페이뎬구 난바오 경제개발구에 위치하며, 본부는 ‘젠퉈쯔(尖坨子)’라는 지역에 있다. 이곳은 35만 무(畝, 1무는 약 200평)에 달하는 염전 지대로 보하이만의 일부이며, 본부에서 해안까지 수십 킬로미터가 모두 지둥 감옥 관할 구역이다. 끝없이 펼쳐진 염지와 산처럼 쌓인 크고 작은 소금더미들이 있고, 전신주 외에는 나무 한 그루 없어 몇 리 밖에서 사람이 움직이는 것도 선명하게 보인다.
중국공산당(중공) 공식 자료에 따르면 지둥 감옥은 1956년 3월에 설립되기 시작했으며, 전신은 허베이성 제1노개총대였다. ‘허베이성 지둥 감옥’이라는 명칭은 1995년 5월부터 2011년 8월까지 사용됐고, 2011년 8월 이후에는 ‘허베이성 감옥관리국 지둥분국’으로 개칭되어 산하에 8개 감옥을 두고 있다. 탕산시 차오페이뎬구는 2012년 7월에 설립됐으며 탕하이현, 펑난구의 빈하이진, 루안난현의 류짠진으로 구성된다.
1999년 7월 중공이 파룬궁에 대한 광적인 박해를 시작한 이후, 지둥 감옥은 중공에 의해 불법 판결을 받은 성내 남성 파룬궁수련자들을 대량으로 수용했으며, 최소 30여 명의 파룬궁수련자가 지둥 감옥의 박해로 사망했다.
제1부: 박해 과정, 수단과 목적, ‘독수리 길들이기’의 보편성
1. 전형적인 박해 사례
류융왕(劉永旺)은 톈진대학을 졸업한 후 베이징에 정착했다. 처음에는 서우강에서 일했고 이후 베이징의 한 외국계 기업에서 부서 매니저와 총엔지니어로 근무했다. 파룬궁을 수련한 후 진선인(眞善忍-진실·선량·인내)에 따라 노력하며 살았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존경받았다. 1999년 7월 파룬궁 박해가 시작된 후 진선인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파룬궁 진상 알리기 때문에 여러 차례 납치됐고, 3년의 강제노동과 8년의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온갖 잔혹한 고문으로 여러 번 생사를 넘나들며 마구잡이로 학대와 모욕, 유린을 당했다. 2006년 6월 16일 류융왕은 탕산의 지둥 감옥으로 끌려가 2013년 8월 25일까지 박해받았으며, 이 기간 중 박해에 항의하며 652일간 단식했다.
1) 그를 위해 특별히 설치한 ‘감옥 속 감옥’에서 구타와 모욕, 세 차례 쇼크
류융왕이 2006년 6월 지둥 감옥 1지대에 수용된 후 8개월 동안 그를 위한 ‘감옥 속 감옥’이 설치됐다. 감옥경찰 정야쥔(鄭亞軍)은 감시범(그를 전담 감시하는 형사범) 류젠리(劉建立) 등을 부추기고 지시해 류융왕에게 일련의 비인간적인 체벌, 학대, 구타를 가했다. 그들은 류융왕을 구타하고 고문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으며, 눈을 가리고 집단폭행을 가해 류융왕을 3차례나 쇼크 상태에 빠뜨렸다.
첫 번째는 2007년 1월, 류융왕이 학대에 항의하자 야만적인 강제 급식을 시행해 쇼크를 일으킨 것이다. 두 번째는 2007년 5월 감방에서 감시범 류젠리와 리진청(李金成)이 각자 류융왕의 팔 하나씩을 잡고 강제로 끌고 매달아 걷게 해 쇼크를 일으킨 것이다. 세 번째는 2007년 6월 지무중대 대청에서 류융왕이 의자에 앉아 있을 때 감시범 장훙빈(姜鴻彬)과 리진청 두 사람이 주먹을 휘둘러 마구 때려 쇼크에 빠뜨린 것이다.
류융왕은 말했다. “그들이 때릴 때 내가 소리 지르지 못하게 냄새나는 양말과 더러운 속옷으로 입을 막았습니다. 도움을 요청해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 상황에서 계속 구타와 고문을 당했고, 구타로 쇼크에서 깨어날 때마다 구타와 모욕은 멈추지 않고 오히려 더욱 심해졌습니다.”
2) 범죄자들이 강제로 바지, 침대, 의자에 소변 보게 하고 8개월간 세면 금지
감시범들은 공개적으로 류융왕을 짐승처럼 학대해야 한다고 말하며 “네가 사람의 길을 가지 않으니 우리가 짐승처럼 대하겠다”고 욕했다. 때로는 짐승만도 못하다며 “짐승은 언제든지 대소변을 볼 수 있지만 너는 안 된다. 바지에 오줌 싸라면 바지에 싸야 하고, 의자에 오줌 싸라면 의자에 싸야 한다”고 말했다. 가오젠민(高建民)과 장훙빈은 두 차례 강제로 류융왕을 눌러 침대에 소변을 보게 했다. 수백 차례에 걸쳐 류융왕은 그들에게 강제로 바지와 의자에 소변을 봐야 했다.
정야쥔은 또한 그들을 시켜 8개월 연속으로 류융왕이 세면하지 못하게 했다. 몇 달간 세면할 수 없어 손에 각질이 한 겹 생겼다. 여름에는 땀으로만 때를 문질러 빼야 했고, 겨울에는 땀이 나지 않아 변기에서만 씻을 수 있었다. 그들은 또한 류융왕이 화장지 사용도 못하게 해서 어쩔 수 없이 양말을 벗어 닦은 후 씻어 보관했다가 다시 사용해야 했다. 이런 상황이 한 달 넘게 지속됐다.
3) 공포스러운 모욕과 희롱: 강제 운동, 강제 ‘마사지’로 살점 두 덩어리를 벗겨내
류융왕의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는데도 감옥경찰 정야쥔의 지시로 감시범들은 그에게 강제로 ‘운동’을 시켰다. 감시범 왕젠구어(王建國)는 발로 류융왕을 차며 “짐승이 걷지 않으면 채찍질해야 한다”고 말했다. 2007년 5월 상순 한 번은 감방에서 류융왕이 걸을 수 없게 되자 류젠리와 리진청이 강제로 부축해 끌고 갔고, 류융왕은 또다시 쇼크로 쓰러져 식은땀을 흘렸다.
장기간의 단식으로 류융왕의 양다리 근육은 이미 위축됐는데, 그들은 ‘마사지’를 구실로 고통을 가중시켰다. 강제로 힘을 써서 류융왕의 몸을 비비고 문지르며 틈을 타 그의 몸을 악의적으로 주물렀다. 이렇게 그들은 주먹으로 류융왕의 양발 복사뼈 안팎을 모두 청자색으로 만들었고, 한 번은 종아리 앞쪽과 콧대에서 각각 10cm와 5cm 정도의 살점을 억지로 벗겨냈다.
4) 집단폭행, 학대와 치를 떨게 하는 모욕이 그들의 오락거리
감시범을 하면 작업장에 가서 일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감옥에서 억압받던 폭력범들에게는 드문 발산 기회였다. 류융왕을 유린하면서 그들은 마음속에 오랫동안 감춰둔 추악함, 악독함, 저속함을 모두 드러냈다. 장훙빈은 류융왕에게 “너는 우리의 즐거움거리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한 번은 정야쥔이 감시범들이 류융왕을 눌러 강제 급식시키는 것을 보며 “너희들 생활이 꽤 풍부하구나. 오전에는 강제 급식하고 오후에는 ‘즐거운 시간’을 갖는구나”라고 말했다. 그가 말한 ‘즐거운 시간’이란 오랜 기간 오후 식사 시간에 감시범들이 류융왕의 머리카락을 잡고 이름을 부르며 욕설을 퍼붓는 것이었다.
나중에 그들의 이런 ‘오락 프로그램’은 류융왕 머리에 종이상자를 씌워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한 다음, 둥글게 둘러서서 마치 단체 배구를 하듯 류융왕을 이리저리 밀치고 주먹과 발로 차는 집단폭행으로 발전했다. 이처럼 짐승만도 못한 수단으로 류융왕을 마음대로 고문하는 것이 그들의 무미건조한 감옥 생활의 즐거움이 됐다.
5) 치명적이고 악독한 냉동형
북방의 겨울은 유난히 춥고, 감옥 사면이 모두 염전으로 농축된 바닷물이 있는 곳이었다. 류융왕을 강제 전향시키기 위해 한겨울에 감방 창문을 열어 뼈를 에는 듯한 바람이 직접 들어오게 하고, 변기를 문틈 바람구멍에 놓았다. 밤에는 감시범들이 솜옷을 입고 문 뒤에 숨어 있으면서 류융왕에게는 속옷만 입고 바람구멍에 서 있게 했고, 소변을 볼 때도 반드시 밖으로 내놓고 있어야 했으며, 한 번에 30분씩 얼렸다.
류융왕은 말했다. “그 얼어붙는 듯한 찌르는 고통은 형언할 수 없었습니다. 이불 속으로 들어가도 한참을 떨어야 겨우 진정됐고, 마비되고 아픈 몸이 막 회복되려 하고 아직 잠들지도 못했는데 그들이 또 부르기 시작하면서 또 한 번의 얼음 고문이 시작됐습니다. 이런 혹독한 형벌이 겨울 내내 계속됐습니다. 그들은 6명이 3교대로 한 조에 두 명씩 돌아가며 저를 고문했습니다.”
2. 박해 과정
명혜망의 ‘허베이성 탕산 지둥 감옥의 죄악적 과정 폭로’라는 글에 따르면, 허베이성의 남성 파룬궁수련자들이 각 지역 법원에서 불법 판결을 받은 후 잔여 형기가 3개월 이상일 경우 일반적으로 탕산 지둥 감옥에 불법 수용된다. 남성 파룬궁수련자들은 제1, 2, 4, 5감옥에 불법 수용된다. 이 글은 타지역의 한 남성 파룬궁수련자를 예로 들어 탕산 지둥 감옥이 파룬궁수련자를 박해하는 죄악적 과정을 폭로했다.
1) 수감 전. 수련자가 불법 판결을 받은 후 감옥으로 보내지기 직전, 구치소는 파룬궁수련자에게 건강검진을 실시하고 본인의 기본 상황, 신체 상황, 소지금과 물품 등 일부 서류를 작성한다. 주의할 점은 타지역(탕산 출신이 아닌) 수련자에 대해 감옥이 송금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구치소의 돈과 물건 인수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구치소는 돈을 수련자 가족에게 돌려주고 감옥으로 가져가지 못하게 한다. 여기에 숨겨진 문제가 있다. ‘전향’을 거부하는 파룬궁수련자에 대해 감옥은 면회, 구매, 전화를 제한한다. 돈이 없으면 파룬궁수련자는 기본 생활용품(화장지, 치약 등)조차 없어 감옥 생활이 더욱 어려워진다. 따라서 수련자 가족은 구치소가 돌려주는 돈을 받지 말고 그 돈이 수련자와 함께 감옥으로 가도록 하는 것이 좋다. 이 돈은 구치소 기간에 가족이 수련자 계좌에 넣은 돈으로 구치소 영수증이 있어 일반적으로 분실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파룬궁수련자 가족은 돌려받은 돈을 받았다가 나중에 다시 감옥에 가서 수련자 계좌에 돈을 넣어야 한다. ‘전향’을 거부하는 수련자는 면회할 수 없어 돈을 넣지 못할 수도 있다. 어떤 파룬궁수련자 가족은 돌려받는 돈 수령을 거부했고, 이 돈은 해당 수련자와 함께 가서 수련자의 감옥 생활에 편의를 제공했다.
2) 입감대(入監隊): 수련자가 지둥 감옥으로 보내진 후 일반적으로 먼저 4감옥에 수용되는데 여기에 입감대가 있다. 탕산 지둥 감옥의 모든 수용자들이 이 과정을 거친다. 수련자가 4감옥 정문에 들어서면 감옥은 일련의 절차를 시작한다. 먼저 수련자에게 두건을 씌우고 큰 작업장으로 끌고 가 모든 옷을 강제로 벗기고 죄수복으로 갈아입힌 뒤, 개인 물품(속옷 포함) 일체를 ‘자발적으로 포기’한다는 서류에 서명하도록 강요한다. 그다음은 조 편성으로, 같은 사건의 수련자들을 다른 층과 감방에 분산 배치한다. 감옥은 죄수복, 이불 등 기본 생활용품을 지급하는데 이는 재정에서 지출한다. 세면대야, 치약, 밥그릇 등도 지급하는데 이런 물품은 감옥이 나중에 수용자 개인 계좌에서 돈을 공제한다. 수련자는 입감대에서 보통 1~2개월 수용된다. 여기서 모든 수용자는 건강검진과 혈액검사를 받고 ‘허베이성 복역자 행동규범’을 암송하며 일부 대열, 기거, 행진 규칙을 연습하고 노예노동을 시작한다. 파룬궁수련자에게는 감옥이 다른 수용자와 마찬가지로 감옥의 각종 요구에 복종하고 자신이 범죄자임을 인정하도록 요구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간단히 밑바닥을 파악하고 파룬궁수련자에게 죄를 인정하고 신앙을 포기하며 ‘사서(四書, 4가지 수련 포기 각서)’를 쓰도록 시험 삼아 요구하기 시작한다. 악당의 박해는 경찰의 이익과 연결돼 있어 어떤 수련자가 ‘사서’를 쓰면 관리 감옥경찰이 상응하는 금전 보상을 받는데 구체적인 액수는 알려지지 않았다.
3) 하대(下隊): 입감대가 끝난 후 잔여 형기가 2개월 미만인 수련자는 일반적으로 4감옥에 남고, 다른 사람들은 각 감옥으로 분산 수용되는데 이를 소위 ‘하대’라고 한다. 대부분 파룬궁수련자가 죄 인정을 거부하면 감옥은 상황에 따라 파룬궁수련자를 제1, 2, 4, 5 등 다른 감옥에 수용한다. 신앙 포기를 거부하고 불법 형기가 긴 수련자는 일반적으로 5감옥에 수용된다. 탕산의 많은 일반인이 알듯이 5감옥이 가장 잔혹하고 가장 비인간적이다.
4) 노예노동: 수련자가 제5감옥으로 보내진 후 일반적으로 당일 작업장으로 데려가고 오후나 다음날부터 일을 시작한다. 중공 악당의 감옥법에 명확한 근무시간 요구사항이 있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사람을 속이는 거짓말임을 알고 있으며 감옥경찰조차 믿지 않는다. 제5감옥은 ‘감옥업무 공개’에 “주 5일 근무제, 하루 8시간”이라고 적혀 있다. 현실은 매일 최소 10시간 정도 일한다. 매주 반나절 학습일은 휴식으로 계산하는데 화장실, 복도, 감방 등의 위생 청소도 함께 한다.
5) 전향 박해: 파룬궁수련자는 강제 노예노동 외에도 신앙 포기를 강요받는다. 감옥은 포기를 거부하는 수련자에게 ‘3정지’ 박해를 실시한다. 즉 면회 정지, 전화 정지, 구매 정지다. 또한 원래 많지 않은 식사에서 밥을 빼거나 절반으로 줄이는 등의 조치를 취한다. 수용자들의 3끼 식사는 기본적으로 매일 아침 찐빵 하나와 죽, 점심 찐빵 두 개와 반찬, 저녁 찐빵 하나와 반찬, 죽이다. 절반으로 줄인다는 것은 50%의 양만 주거나 반찬과 죽을 주지 않는 것이다. 어떤 수련자는 전향 거부와 소위 규정 위반 등의 이유로 엄관대에 수용돼 구타와 학대를 당한다. 엄관대는 감옥 속의 감옥으로, 그곳은 더욱 비인간적이고 박해가 더 심각하다.
3. 박해 수단
허베이성 장자커우시 줘루현 파룬궁수련자 추이루(崔祿)는 중공에 의해 9년형을 불법 선고받고 2009년 9월 1일 허베이성 지둥 감옥 1지대(2011년 지둥분국 1감옥으로 개명)로 이송됐다. ‘추이루가 허베이성 지둥 감옥에서 당한 잔인한 박해’라는 글은 추이루가 9년간 겪은 주요 박해 수단을 정리했다. 추이루의 경험은 파룬궁수련자가 지둥 감옥에서 겪은 잔혹한 경험의 축약이라 할 수 있다.
1) 야만적인 강제 급식, 누적 5개월 넘게 진행
2) 독수리 길들이기(강제로 잠 못 자게 함) 연속 한 달 정도
3) 주먹질과 발길질, 나무판자로 때리기, 집단 구타. 자주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돼 앉지도 서지도 못했다. 한 번은 앞니 하나가 빠졌는데 악당이 진상을 은폐하려고 가족 면회를 여러 차례 거부했다.
4) 바늘로 손톱 사이 찌르기. 열 개 손톱 사이를 모두 ‘대두침(大頭針)’으로 찔렀다.
5) 불붙인 담뱃불로 목 지지기
6) 여러 차례 온몸을 화장실 청소용 더러운 물통에 넣어 익사시키고 물 먹이기, 심할 때는 배가 부를 정도로 물을 먹였다.
7) 한겨울에 강제로 옷을 벗기고 몸에 찬물 끼얹기
8) 강제로 독방[엄관대(엄중관리대) 수용, 장시간 한 자세로 고정시켜 박해. 누적 10여 차례 독방 수용, 총 200일 정도.
9) 여러 차례 얼굴과 눈에 고춧물 뿌리기, 가장 심할 때는 얼굴 전체 껍질이 벗겨져 화상으로 얼굴이 망가질 뻔했다. 여러 차례 강제로 입에 소금 넣은 고춧물을 부어 악의적으로 입, 목, 위를 자극하고 손상시켰다.
10) 강제로 악당이 대법을 비방하는 영상과 서적을 보게 하고, 강제로 ‘악당이 좋다’는 말을 쓰고 말하게 했다.
11) 자주 수갑, 족쇄, 전기봉으로 때리기. 한 번은 전기봉으로 때려도 분이 풀리지 않자 전기봉으로 머리를 때려 전기봉을 부러뜨렸다.
12) 강제로 호랑이 의자에 앉히고 구속대로 호흡이 매우 어려울 정도로 구속, 15분마다 끈을 풀어 몇 번 숨 쉬게 한 후 계속 구속하기를 연속 7시간 넘게 해 폐가 압박돼 피를 토했다.
13) 여러 차례 시체침대 고정, 누적 2개월 이상
14) 식사, 물 마시기 등 기본 생존조건 통제. 자주 연속 한 달 넘게 매일 1냥(약 30g)짜리 옥수수빵 하나만 주고 물도 주지 않아 몸이 뼈만 남고 행동이 어려워졌다.
15) 입에 천 집어넣기, 입 막기, 입 조르기. 한 번은 천으로 기관을 막아 약 10분간 호흡이 정지됐는데, 나중에 이상을 발견하고 천을 빼내 인공호흡을 해서 살아났다.
16) 냉동 박해: 한겨울에 창문을 열고 요와 깔개를 주지 않으며 솜옷도 입지 못하게 하고 사지를 맨 나무판에 고정시켜 얼리기를 연속 10여 일 밤낮 동안 해 몸이 반신불수 상태가 됐다. 특히 오른손과 오른팔이 마비돼 움직일 수 없었고, 양다리 무릎 아래가 심한 동상으로 장기간 빨갛게 붓고 마비됐으며 발톱 네 개가 빠졌다.
17) 2018년 3월 6일 지둥 제1감옥 광장 대회에서 단지 “파룬따파는 좋습니다”라고 외쳤다는 이유로 엄관대에 수용돼 박해받았다.
이런 박해 수단 하나하나를 말로 하면 간단한 몇 마디일 수 있지만, 그 속에서 직접 고문당하는 사람에게는 매 분 매 초가 삶보다 못한 고통이다.
4. 박해 목적
중공이 파룬궁수련자를 광적으로 고문하는 최종 목적은 단 하나다. 바로 소위 ‘전향’으로, 파룬궁수련자들이 파룬따파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도록 강요하고, 심지어 거꾸로 ‘회개서’, ‘폭로비판서’ 등을 써서 파룬따파를 모독하게 하는 것이다.
1999년 중국공산당(중공) 악당이 파룬궁 박해를 시작한 이래, 지둥 감옥은 죄악스러운 행위를 시작했고 파룬궁수련자에 대한 박해를 지속적으로 강화하면서 사악한 ‘경험’을 축적했다. 중국 다른 지역의 사악한 박해 ‘모범’과 서로 ‘경험’을 교류하고 ‘배우면서’ 일련의 완전한 박해 경험과 절차를 축적했다. 파룬궁수련자를 가장 심하게 박해하는 악질 경찰들은 이 과정에서 양심이 거의 완전히 마비됐다. 이들 감옥경찰은 자신들의 업무나 ‘전향 업무’, ‘전향 지표’, ‘전향률’을 위해 각종 수단과 방식을 거리낌 없이 사용해 파룬궁수련자를 ‘전향’시키려는 목적을 달성한다.
예를 들어, 허베이성 감옥관리국 지둥분국의 교육처는 산하 각 감옥의 교육과를 지도 관리하여 파룬궁수련자에 대한 ‘전향 박해’를 진행하며, 교육처 위에는 분국급 주관 지도자(아마도 모 부국장)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허베이성 감옥관리국 지둥분국’ 제4감옥은 ‘허베이성 감옥관리국 지둥분국’의 입소 교육 감옥으로, 일반적으로 ‘허베이성 감옥관리국 지둥분국’에 갇히는 모든 죄수나 파룬궁수련자는 먼저 이 감옥으로 보내져 ‘입소’ 수속을 밟는다. 수속이 완료된 후 일반적으로 ‘제4감옥 입소대 1조 또는 2조’에 갇혀 폐쇄식 교육과 관리를 받는데, 즉 위엄을 세우고 규칙을 정하는 것으로 보통 몇 개월이 걸린다.
파룬궁수련자 중 일부는 ‘입소대’에 갇히면 처음부터 ‘간병인’(즉 엄밀하게 감시하는 포위 죄수)이 붙고, 어떤 이들은 매일 교육과로 끌려가 ‘전향’을 당한다(예를 들어 비방 영상, 서적 시청, 소위 각종 ‘면담’, ‘유다(배신자)’의 설교 등). 제4감옥 교육과에는 과거 대법을 수련했다가 사악에 의해 ‘전향’된 후 사악하게 깨달은 ‘유다’가 있는데, 교육과에 거주하면서 사악의 앞잡이가 돼 악을 도와 파룬궁수련자의 바른 신앙을 교란하려 한다.
예를 들어, 사악이 한 차례 박해 과정(예를 들어 한 달 또는 며칠)을 거쳐도 파룬궁수련자의 근본 신앙을 흔들 수 없으면, 때로는 분노해서 직접 ‘엄관대’(또는 엄관감구라 불리며, 일반적으로 교육과가 수직 지도하고 옥정과와도 직접적인 관계가 있음)로 보내 파룬궁수련자에 대한 박해를 가중시킨다. 그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파룬궁수련자를 ‘전향’시키려 한다.
어떤 경우는 아예 파룬궁수련자 고향의 친인척을 데려와 가족정을 이용해 협박하며 ‘전향’ 박해를 진행한다. 예를 들어 허베이성 추현(邱縣) 추청진(邱城鎭) 추청서가(邱城西街) 파룬궁수련자 왕웨이차오(王偉超)는 베이징에서 불법으로 3년형을 선고받은 후 ‘허베이성 감옥관리국 지둥분국’ 제1감옥 제5감구 1조에 불법 수감됐는데, 제4감옥 입소대에 있을 때 제4감옥 교육과는 그를 ‘전향’시키기 위해 그의 어머니 등 친인척을 고향에서 데려와 압력을 가하고 위협했다.
어떤 경우는 다시 하위 입소 감옥으로 보내 파룬궁수련자를 박해한다. 어떤 경우는 제4감옥에서 ‘입소’ 수속을 마친 후 제4감옥에서 ‘전향’을 진행하지 않고 직접 하위 입소 감옥으로 이송해 먼저 회유하고, 회유가 안 되면 폭력적 ‘전향’을 시작한다. 어떤 경우는 ‘입소’ 수속을 마친 당일 바로 하위 입소 감옥의 엄관감구로 직접 이송해 폭력적 ‘전향’을 시키는데, 수단이 극도로 잔인하다.
그래서 ‘허베이성 감옥관리국 지둥분국’의 제4감옥은 파룬궁수련자를 박해하는 시작점, 중추이자 중심이고, 기타 각 감옥은 파룬궁수련자를 박해하는 검은 소굴이다. 그리고 예전 그들의 관례에 따르면 경제적 이익이 있었는데, 파룬궁수련자 한 명을 ‘전향 박해’하면 그들은 보너스를 나눠 받을 수 있었다(예를 들어 하위 기타 감옥에서는 대략 2만 위안 정도의 보너스).
이렇게 그들은 파룬궁수련자를 박해하는 인사와 구조 시스템을 형성했다. 예를 들어 ‘허베이성 감옥관리국 지둥분국’의 교육처, 각 감옥의 교육과, 옥정과, 엄관대 또는 엄관중심 또는 엄관감구 등이다. 인원은 교육처의 처장과 직원, 교육과의 과장과 파룬궁수련자 박해를 전담하는 일부 경찰, 엄관대의 대장과 일부 경찰 및 죄수, 일부 감구의 구장 또는 이 방면의 능력이나 특기가 있는 악질 경찰들이 포함된다. 어떤 이들은 학력이 매우 높아 고학력 파룬궁수련자를 전담 상대하고, 어떤 이들은 폭력 박해를 전담 실시한다. 그 외에 파룬궁수련자를 ‘포위’하는 재소 죄수들이 있어 타격수와 흉수 역할을 한다.
일반 감구의 감구장이나 주업무 경찰은 현재 일반적으로 파룬궁수련자 박해에 참여하지 않지만,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며 신앙을 포기하라고 한다. 만약 그들의 작업이 ‘통하지 않으면’ 교육과가 직접 나서서 ‘전향’ 박해를 진행한다. 하지만 일부 감옥 감구 지도자와 악질 경찰은 재소 죄수를 사주하고 지시해 파룬궁수련자에 대한 악독한 박해에 참여시킨다.
박해에 참여하는 곳에는 각 감옥의 병원 분원도 있다(예를 들어 탕산시 난바오 염전병원 제1감옥 분원, 사실은 감옥의 위생실과 위생과). 그곳의 경찰과 ‘죄수 의사’(재소 죄수가 경찰 의사를 보조해 재소 죄수를 진료하는 죄수)는 단식하는 파룬궁수련자에게 강제 급식 박해를 담당한다.
그리고 각 감옥에서 박해를 주관하는 주모자와 원흉은 주관 부감옥장이거나, 감옥장과 부감옥장이 한통속이 돼 못 본 척, 못 들은 척하며 함께 뒤에서 파룬궁수련자를 박해한다.(‘허베이성 감옥관리국 지둥분국의 죄악’)
이 수많은 고문 수단 중에서, 마치 독충을 기르듯이 중공 경찰이 총결해낸 사람의 정신과 의지를 가장 잘 무너뜨릴 수 있는 수단이 바로 소위 ‘독수리 길들이기’다.
5. 수면 박탈의 남용
● 나중에 악경 천카이(陳開)는 이것만으로는 충분히 악독하지 않고 사람을 괴롭히는 효과가 부족하다고 여겨 왕지쥔(王繼軍)의 수면시간을 줄여 박해를 가중시켰다. 매일 왕씨를 3시간 정도만 재우고 겨울 가장 추운 때에는 원래도 어둡고 습하며 극도로 추운 작은 방에 얼음덩어리까지 놓아 냉동고문으로 왕지쥔을 괴롭혔다. 그가 여전히 굴복하지 않자 마지막에는 천카이의 지시로 ‘독수리 길들이기’라는 잔인한 수단을 동원해 그를 다스렸다. 연속 11일 밤낮으로 왕지쥔을 강제로 재우지 않고 24시간 벽을 보고 서 있게 했다. ‘서 있는 형벌’로 왕지쥔을 괴롭혀 다리가 멍들고 어지럽고 얼굴이 검게 말라가며 허리와 등이 견딜 수 없이 아프고 몸이 버틸 수 없게 될 때까지 계속했다. (‘탕산 지둥 감옥 2지대 ‘교육과’ 과장 천카이의 죄행’)
● 탕산 파룬궁수련자 리원둥(李文東)은 2013년 2월 지둥 감옥으로 끌려갔다. 감옥은 6명을 배치해 그를 ‘감시’하며 강제로 ‘전향’ 박해를 가했다. 처음에는 매일 2시간만 재웠고 나중에는 연속 4일 4밤 동안 리원둥을 재우지 않았다. 이런 고문이 한 달 넘게 지속됐다. (‘리원둥이 지둥 감옥에서 4일 4밤 수면 박탈을 당하다’)
● 2001년 8, 9월 지둥 감옥 1지대는 수용된 파룬궁수련자들에 대한 박해 강도를 높였다. 리후이민(李會民)이 감옥에서 박해에 저항하자 악경들이 그를 독방에 가둬 고문했다. 악경 장푸량(張福良)과 리쥔루(李俊儒)가 형사범들을 시켜 신문지로 리후이민의 눈을 때리고 그의 눈에 청량유를 바르며 잠들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양손을 뒤로 수갑을 채웠다. 하지만 이 모든 것으로도 리후이민을 굴복시키지 못했다. (‘지둥 감옥이 파룬궁수련자 리후이민을 박해한 일부 죄행’)
● 지둥 감옥 2지대에 불법 수용된 대법수련자 장창(張強)은 2지대 감옥수사과 부과장 천카이에 의해 강제로 독방에 갇혔다. 장창이 신앙을 포기하지 않자 천카이는 죄수 마쥔(馬俊) 등을 시켜 장창을 주먹과 발로 때리게 했다. 또한 며칠 밤낮으로 수련자를 재우지 않았는데, 내가 아는 것 중 가장 긴 것은 4일 4밤 동안 수련자를 재우지 않은 것이다. 이 모든 비열한 행위의 최종 목적은 수련자의 수련 의지를 파괴해 수련을 포기하고 대법을 배신하게 하는 것이었다. (‘허베이 지둥 감옥이 대법수련자를 박해하는 갖가지 수단’)
● 창저우시 윈허구 차오양가에 사는 거화이창(葛懷強)은 허베이 창저우 중서의결합병원(구 창저우시 2병원) CT/MR실 의사이자 부주임의사 직책을 가진 재직 석사과정생이었다. 대법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불법적으로 4년형을 선고받아 지둥 감옥 5지대에 수용됐다. 악질 경찰들이 5일 5밤 동안 그를 재우지 않았다. (‘허베이 지둥 감옥의 파룬궁수련자 박해’)
● 당시 가장 심하게 박해받은 사람은 7중대에 불법 수용된 자오(趙)씨 성을 가진 파룬궁수련자였다. 20여 일 동안 각종 수단으로 그를 재우지 않아 의지를 소모시키고 ‘진선인(眞善忍-진실·선량·인내)’ 신앙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자오씨 수련자는 조금도 타협하지 않고 앞뒤로 몇 달간 단식해 사악한 세력의 참혹한 박해에 항의했다. 5지대 병원에서 나는 직접 악질 경찰들이 수갑으로 그의 양손을 침대 양쪽에 채우고 그가 벌거벗은 채 침대에 누워 죽을 지경까지 고문당하는 것을 봤다. 그가 생명이 위태로워지자 악질 경찰들이 비로소 가족에게 연락해 집으로 데려가게 했다. 나중에 들으니 자오씨 수련자가 집에 돌아간 지 한 달 후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탕산 지둥 감옥에서 당한 박해’)
● 2001년 7월 2지대에서 진상을 아는 한 형사범이 바오딩의 징원우(荊文武)와 창저우의 류쩌성(劉澤升) 두 대법수련자를 위해 몰래 소식을 전달했다는 이유로 모두 차례로 엄관대로 보내져 박해를 당했다. 악질 경찰들은 그들을 각각 3, 4평방미터밖에 안 되는 작은 방에 가두고 낮과 밤 24시간 동안 죄수와 경찰(성명 미상)이 감시했다. 장시간 체벌로 서 있게 하고 작은 의자에 앉게 하며 며칠 밤낮으로 재우지 않고 대법과 사부님을 비방하는 글들을 듣도록 강요했다. 특히 장시간 재우지 않을 때는 머리가 터질 것 같고 졸리고 피곤하고 아프고 저리며 사람이나 물건을 볼 때 겹쳐 보이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런 장기간의 밤낮 구분 없는 정신적, 신체적 박해하에 일부 수련자들이 견디지 못해 사악한 세력에게 더 이상 수련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허베이 지둥 감옥 악질 경찰들의 범죄 사실 폭로’)
● 오후 작업이 끝난 후 허샤오창(賀曉強) 등 악인들이 또 연속 4일 3밤 동안 나를 재우지 않고 화장실 옆에 특별히 만든 길이 20cm, 폭 5cm, 높이 10cm의 나무판 위에 앉혀 앉기 체벌을 가했다. 며칠 연속으로 내 양쪽 눈이 붓고 아파 대변을 볼 때도 쪼그려 앉을 수 없었고 눈이 충혈되고 청력이 떨어지며 귀가 울렸다. 밤에 두 명의 감시범 왕옌신(王豔新)과 두궈쥔(杜國軍)이 강제로 쉬지 않고 나와 대화하며 내가 잠들지 못하게 해 내 심신 건강을 심각하게 해쳤다. 사실 이전 오랜 기간 동안 허샤오창은 내가 새벽 1시 30분에야 잘 수 있게 했고, 이렇게 늦은 시간에도 야간 근무를 서는 감시범 시옌후이(西豔輝)와 조장 장둥창(張東強)이 수시로 나를 건드리며 내가 잠꼬대를 한다거나 이불을 덮어주는 척하며 나를 깨웠다. 이때부터 나는 불면증, 신경쇠약, 정신 혼미, 두통 등의 후유증이 남았다. 신체적 고통은 견딜 수 있지만 정신적 유린과 파괴, 고문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괴로웠다. 위의 타격을 겪은 후 나는 몇 년 동안 늘 두려움에 떨며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고 자주 가위눌림으로 깨어나면 다시 편히 잠들 수 없었다. 심각한 불면증, 신경쇠약, 기억력 저하, 두통, 귀울림, 시력 감퇴에다가 허리와 다리 통증, 관절염까지 더해져 7년 감옥살이로 온몸이 병덩어리가 됐다. (‘스자좡 판칭쥔이 지둥 감옥 악질 경찰 허샤오창을 고발하다’)
● 허베이 첸안시 파룬궁수련자 쑨융성(孫永生)은 2008년 중국공산당(중공) 경찰에게 납치됐고 2010년 4월 불법적으로 7년형을 선고받아 현재 탕산 지둥 감옥 2지대에 수용돼 있다. 감옥은 그가 파룬궁 수련을 포기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그에게 혹독한 고문 박해를 가했다. 쑨융성은 먼저 ‘엄관중대’에서 3개월 박해를 당한 후 2지대 1중대로 이송됐다. 2010년 9월 11일 그는 다시 엄관중대에 수용돼 박해를 당했는데, 교육과 부과장 천카이가 그를 장기간 철제 감옥에 앉히고 손발을 수갑으로 채워 움직이지 못하게 하며 연속 일주일 동안 재우지 않았다. (‘허베이 첸안시 쑨융성이 지둥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다’)
● 2007년 4월부터 12월까지 나를 감시하는 죄수 리젠리(李建立), 후젠밍(胡建鳴), 하오나이민(郝耐民), 가오젠민(高建民) 등 6명이 수백 차례에 걸쳐 나를 강제로 의자 위와 바지 안에 소변을 보게 했다. 장기간 세면을 허락하지 않았고(정야쥔(鄭亞軍)은 또한 “너는 죽는 것도 상관없다면서 무슨 세수를 하느냐”고 말했다) 변기에서 손을 씻도록 강요했다. 한 달 넘는 시간 동안 내가 대변을 본 후 화장지 사용을 허락하지 않았다(류젠리(劉建立)). 3차례에 걸쳐 강제로 나에게 자위행위를 했다(장훙빈(薑鴻彬), 가오젠민). 겨울에 나를 얼렸다(장둥훙(張東宏), 왕취안타오(王全濤)). 나를 강제로 밤을 새우며 재우지 않았다(장훙빈, 가오젠민, 장둥훙). (‘엔지니어가 지둥 감옥에서 범죄 감옥경찰을 계속 고발하다’)
● 허베이성 줘저우시 광산국 고급 엔지니어이자 파룬궁수련자인 둥한제(董漢傑)는 대략 2015년 8월 23일 오후 허베이성 감옥관리국 지둥분국 제5감옥으로 끌려갔다. 그 감옥으로 가기 전 신체와 정신 상태가 모두 매우 양호했다. 제5감옥에 도착한 후 감옥장 가오리장(高立江), 부감옥장 왕슈쥔(王秀軍, 음), 부감옥장 자오젠신(趙建新), 교육과 과장 왕썬후(王森虎), 부과장 리펑(李鵬) 등의 음모하에 둥한제는 엄관감구에 수용됐고 엄관감구 구장 리훙리(李宏力)가 구체적으로 둥한제에 대한 박해를 실시했다. 이 기간 둥한제는 장기간 기아, 전기봉 전기고문, 잠들지 못하게 하는 등 각종 비인간적 고문을 당했다. 두 달이 안 되는 시간에 둥한제는 얼굴이 초췌해지고 안색이 창백해지며 장기가 쇠약해졌다. 2015년 10월 10일 박해로 사망했다. (‘허베이성 감옥관리국 지둥분국의 죄악’)
● 2015년 자젠융(賈建勇)이 죄수복 착용을 거부하고 ‘전향’을 거부하며 강제노동 참여를 거부하자 엄관대에 수용돼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자젠융은 옷을 모두 벗겨진 채 알몸이 됐다. 단식 기간 중 강제 급식으로 목이 부어 음식을 삼킬 수 없게 됐는데 죄수들이 그를 부축해 강제 급식을 시킬 때 틈을 타서 그를 꼬집었다. 이런 박해에도 파룬궁수련자 자젠융은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을 굳건히 했다. 그래서 2층에 있는 교육과로 끌려갔는데 당시 이 층에는 교육과 경찰들과 교육과에서 ‘근무’하는 10여 명의 수감 죄수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기서 그들은 마음대로 했다. ‘강제 폭력 전향 박해’ 중에 악질 경찰들은 또 독수리 길들이기 수단을 사용해 연속 오랜 기간(대략 710일? 정확히 기억나지 않음) ‘간병’ 죄수들이 자젠융을 재우지 않았다. 이런 박해에도 자젠융은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을 굳건히 했다. 나중에 2층 교육과로 이송됐는데 당시 이 층에는 교육과 경찰들과 교육과에서 ‘근무’하는 10여 명의 수감 죄수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기서 그들은 마음대로 했다. 전향 박해를 실시하기 위해 악질 경찰들은 또 독수리 길들이기 수단을 사용해 연속 오랜 기간(대략 710일? 정확히 기억나지 않음) ‘간병’ 죄수들이 자젠융을 재우지 않고 자젠융을 때려 코와 얼굴이 멍들게 하고 얼굴이 높이 부어오르고 입이 삐죽 튀어나오게 했다. 자젠융을 때린 죄수는 오히려 “자젠융이 어떻게 저팔계가 됐느냐”고 말했다. 죄수들은 또 자젠융의 눈에 청량유를 떨어뜨려 눈 전체가 빨갛게 부어오르고 실틈만 남을 정도로 부어올라 아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했다. (‘허베이성 감옥관리국 지둥분국의 죄악’)
● 대략 2018년 초에 제4감옥에서 직접 이송된(지둥분국 제1감옥으로 이송을 의미) 두 명의 파룬궁수련자가 있었는데 한 명은 루안난 출신이고 한 명은 헝수이 출신이었다. 제1감옥에 온 후 직접 엄관대에 수용돼 한바탕 구타를 당하고 며칠 밤낮 ‘독수리 길들이기’로 재우지 않았으며 마음대로 때리고 마음대로 욕했다. 그 루안난 출신인 양머우촨(楊某川)이라는 사람은 때림을 당해 고막이 뚫렸고 그 헝수이 출신으로 안경을 쓴 사람은 통신이동 엔지니어인 것 같은데 멍해질 정도로 맞았다. (‘허베이성 감옥관리국 지둥분국의 죄악’)
제2부: 박해사망 사례
1. 천아이리, 남성, 35세, 허베이성 장자커우시 화이라이현 베이신바오진 찬팡잉촌 거주
천윈촨(陳運川) 가족 7명이 파룬따파를 수련했는데, 천윈촨, 아내 왕롄룽(王連榮), 큰아들 천아이중(陳愛忠), 둘째아들 천아이리(陳愛立), 큰딸 천수란(陳淑蘭), 작은딸 천훙핑(陳洪平) 그리고 큰딸의 딸 리잉(李穎)이었다. 천윈촨 노인 가족은 중국 본토에서 중국공산당(중공) 사악한 당에 잔혹하게 박해받은 사례 중 하나가 됐다.
2000년 12월 29일, 천윈촨 가족이 베이징 천안문에서 대법을 증명했다. 2001년 1월 1일 천안문 분국에 체포됐다. 어머니 왕롄룽, 언니 천수란, 여동생 천홍핑, 언니의 딸 리잉은 후아이러우 구치소에 구금됐고, 아버지와 아들 3명은 차례로 하이뎬구 구치소에 이송됐다.
2001년 1월 9일 아버지와 아들 3명이 함께 화이라이 구치소로 이송됐다. 천윈촨과 천아이리는 7월 17일 화이라이 법원에서 불법으로 2년형을 선고받았고, 8월 27일 천윈촨은 스자좡 북쪽 교외 감옥 3감구로 이송됐고, 천아이리는 탕산 지둥 감옥 5지대 7중대로 이송됐다.
천아이리가 구금된 지둥 감옥 5중대 7팀은 사악한 검은 굴이었고, 들어가자마자 처음 마주친 것이 강제 세뇌였다. 둘째 날부터 교도대 책임자 디스진(邸仕金), 황하오(黃浩) 등이 차륜전술을 써서 리진강(李金剛), 샤오밍리(邵名利) 등 죄수들을 시켜 교대로 천아이리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수갑으로 천아이리의 양손을 각각 나무의자에 채워 11일 동안 밤낮으로 잠을 자지 못하게 했다. 끓는 물을 천아이리 머리에 부었고, 화장실에 갈 때도 수갑을 풀어주지 않아 의자를 끌고 화장실에 가게 했으며, 팔 전체가 짓물러진 후 12일째 되는 날 의자에서 떠나 기립 벌을 서게 하기 시작했다. 밤에 하룻밤 서 있으니 다리가 모두 부어올랐고, 낮에는 천아이리를 마당 중앙의 쇠고리에 매달았다. 한밤중에 다른 사람들이 잠들었을 때를 틈타 천아이리의 양손을 각각 중대의 철문에 채우고, 두 명의 죄수가 힘껏 양쪽으로 밀어 그의 양팔을 늘어뜨렸는데, 당시 천아이리는 양팔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천아이리가 타협하지 않자 황하오는 또 리하이롱(李海龍), 자오페이(趙飛), 허쉬(何旭) 등 죄수들을 시켜 교대로 입을 때리고, 얼굴을 주먹으로 때리며, 강제로 약을 먹이고, 몸을 발로 차며 차렷자세로 기립 벌을 서게 하고, 전기곤봉, 밧줄 결박, 수갑, 매달기 등 고문도구를 사용해 천아이리에게 온갖 고문을 다 가했으며, 온갖 고문으로 천아이리를 꼬박 두 시간 넘게 괴롭혔다. 6일 후 현직 지대 책임자 악질 경찰 디스진이 직접 나서서 가죽신발을 벗고 감방 안에서 그의 얼굴을 마구 때렸고, 죄수들이 천아이리의 양팔을 잡게 한 뒤 경찰이 얼굴을 마구 때리고, 천아이리의 머리를 눌러 벽에 부딪치게 했다. 중대의 모든 경찰이 천아이리 박해에 모두 참여했는데, 그중 대장 황하오가 천아이리를 가장 심하게 박해했다.
천아이리는 작은 매점의 빈 방에 구금됐는데, 황하오가 주먹으로 천아이리의 머리와 얼굴을 마구 때려 천아이리의 얼굴이 모두 터져 피를 흘렸고 양 뺨살이 으깨졌다. 그런 다음 황하오는 그의 머리를 눌러 벽에 격렬하게 부딪치게 하고, 사무실에서 전기곤봉으로 그의 머리와 목을 전기고문하며, 전기곤봉 끝을 그의 입에 넣고 전기고문하고, 또 천아이리 얼굴에 침을 뱉으며, 죄수들이 천아이리와 말하지 못하게 하고 격리 감시했다. 악질 경찰 황하오는 죄수들에게 감형을 미끼로 죄수들을 부추겨 천아이리를 24시간 폭행하며 박해하게 했다. 죄수들은 밤에 그가 지켜보는 상황에서 라이터로 천아이리의 귀를 태웠는데, 타서 그을린 후 탄 냄새가 났다. 죄수들이 끓는 물을 천아이리 머리에 부어 화상을 입힌 후, 책임을 피하기 위해 악질 경찰은 어쩔 수 없이 천아이리를 데리고 감옥 총대 병원에서 검사를 받게 했는데, CT, 뇌파검사, 심전도, 촬영, 혈액검사를 한 결과 매우 심각했다. 12월 어느 날 또 천아이리를 데리고 탕산 싼유병원에서 검사했는데, 검사 결과는 뻔했고, 천아이리는 옆에서 심장병이 매우 중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다른 것은 알 수 없었다.
2003년 신정을 맞아 천아이리가 지속적인 단식 항의 중에 갑자기 고열이 나고 혈변이 멈추지 않았다. 간수가 천아이리에게 수액을 놨지만 혈변은 더욱 심해졌고, 체온을 재본 후 간수들이 매우 당황해 즉시 집에 연락해 증명서를 가져와 사람을 석방하라고 통지했다. 하지만 촌간부 런자오시(任照喜)가 증명서를 써주지 않아 2003년 1월 8일이 돼서야 현지에서 차가 와서 천아이리를 집으로 데려갔다. 감옥에서의 상황을 이야기하며 천아이리는 이렇게 말했다. “감옥에서 저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습니다. 저는 단지 베이신바오진 찬팡잉촌의 파룬궁수련자일 뿐만 아니라 장자커우시의 파룬궁수련자이기도 하고, 제 언행이 장자커우 지역 파룬궁수련자들 전체의 품격을 대표할 것이므로, 절대 우리 지역 파룬궁수련자들에게 먹칠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2003년 1월 천아이리가 집에 돌아왔고, 2004년 7월 10일 사악한 감시를 벗어나기 위해 천아이리는 어쩔 수 없이 유랑하게 됐지만, 몸이 이미 극도로 허약하게 박해를 받은 상태여서 4개월 후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나이가 겨우 35세였다.
2. 천바이허, 남성, 59세, 허베이성 탕산시 첸시현 싱청진 사링쯔촌 거주
천바이허(陳百合)는 탕산시 첸시현 싱청진 사링쯔촌 농민으로, 시골 출신의 건장한 사나이였으며 몸이 매우 건강했다. 천바이허의 아내 장구이란(張桂蘭)은 원래 온몸이 병투성이로 모두가 아는 큰 병자였는데, 오래 앓다 보니 성격이 포악해져서 남편이나 아이들과 사소한 일로도 하늘이 떠나갈 듯 싸웠다. 1998년 파룬궁 수련을 시작한 후 6개월도 안 돼 몸과 마음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 온몸의 병이 다 나았고 정신적 모습이 완전히 새로워졌는데, 천바이허가 매우 기뻐했다. 2005년 천바이허 자신도 파룬궁 수련을 시작했다.
2006년 5월 13일 천바이허가 첸시현 위후자이향에서 진상자료를 배포하다가 현지 파출소와 첸시현 공안국 국보대대에 납치됐다. 2007년 1월 첸시현 법원이 법률 절차를 심각하게 위반한 상황에서 그에게 4년형을 억울하게 선고했고, 2007년 4월 16일 지둥 감옥 5지대 7중대로 끌려갔다.
입감 후 원래 정상이던 혈압이 얼마 안 돼 180-220까지 올라갔다. 감옥 측은 그에게 고혈압을 치료해준다는 핑계로 매일 보조감시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강제로 소위 ‘혈압약’을 먹게 했는데, 그 후 온몸이 극도로 가렵고 시력이 현저히 떨어졌으며, 특히 왼쪽 눈이 더 심해져서 2009년 여름에는 왼쪽 눈이 완전히 실명됐다.
2010년 5월 천바이허가 지둥 감옥 5지대 7중대에서 4년간의 억울한 옥살이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59세의 천바이허는 완전히 예전과 다른 사람이 됐다. 눈빛이 멍하고 말수가 적으며 졸음에서 깨지 못하고, 반응이 둔하며 기억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온몸에 힘이 없으며 행동이 느려졌고, 앞가슴과 등의 빨간 점들이 모두 검게 변했다. 세상을 떠나기 두 달 전에는 기억력을 거의 잃었고 말이 앞뒤가 안 맞았으며, 오른쪽 눈으로 보는 것도 흐릿했다.
2012년 9월 17일 이른 아침 6시 넘어 천바이허가 갑자기 쓰러져 끈적한 액체를 두 번 토하고 22시간 동안 혼수상태로 고열에 시달리다가 숨을 거뒀다. 대략 두 시간여 후 얼굴 전체와 귀, 손톱 등 드러난 모든 몸 부위가 청자색으로 변했고(가려진 곳은 보지 못함), 입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시신을 화장할 때 화장장 직원이 새까만 유골을 보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 “어, 이 사람 뼈가 왜 이렇게 검어? 독에 중독돼 죽은 거 아냐!?”
소식이 전해지기로는 중공이 감옥, 세뇌반 등 기관을 이용해 파룬궁수련자들을 박해하는 기간 동안 약물을 빈번히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초기의 뻔뻔한 중추신경 파괴 약물 강제 주사에서 나중에는 음식에 독을 넣거나 병을 고쳐준다는 핑계로 독을 투여하는 식으로, 수단이 공개적인 것에서 은밀한 것으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사람을 빨리 미치게 하거나 죽음에 이르게 하다가, 나중에는 사람을 풀어준 며칠, 몇 달, 몇 년 후에 만성적으로 발작해 사망하게 하는 등 수단이 음험하고 극악해 분노를 금할 수 없다.
3. 천시부, 남성, 56세, 허베이성 스자좡 신지시 다스좡 거주
천시부(陳西蔔)는 남성으로 신지시 다스좡촌 사람이며, 줄곧 신지시 상업성에 살면서 가죽옷 전문가였다. 그는 정직하고 선량하며 후덕하고 충실했는데, 친척과 친구들, 동네 사람들과 그와 접촉한 모든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정말 보기 드문 좋은 사람이었다. 그의 인품이 좋아 남을 속이지 않고 신용을 지켜 장사가 매우 잘됐다. 파룬궁을 수련한 후 그는 드디어 인생의 참된 의미를 찾았고, 온 가족도 그를 따라 차례로 파룬궁을 수련해 날이 더욱 잘 풀렸다.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천시부는 줄곧 구치소에 구금됐는데 여러 번 병이 났고, 그중 한 번은 병세가 매우 심해 병원으로 보내 치료받게 했다. 병원 비용이 너무 비싸서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보내 계속 링거와 주사를 맞게 했다. 천시부의 병세가 심할 때는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고 의식이 불분명했으며, 몸이 약해서 걷기도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도 악질 경찰들은 여전히 집에 자주 와서 괴롭히고 협박하며 가택수색을 하고, 심지어 강제로 납치하려 했으며, 그렇지 않으면 거액의 벌금을 물리겠다고 했다. 한 번 벌금을 물린 지 얼마 안 돼 또 와서 납치하려 했고, 돈을 내지 않으면 납치해갔다. 악인들이 단맛을 봤기 때문에 그 집에 돈이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이렇게 천시부는 반복해서 납치됐고, 얼마나 많은 벌금을 물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2003년 신정 전, 악질 경찰들이 천시부의 딸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기회를 틈타 한 무리 사람들(공안국, 610사무실(중공이 불법적으로 설립한 파룬궁 박해기구), 법원, 그리고 시정부에서 파룬궁 박해를 전담하는 사람들)을 조직해 불법적으로 천씨의 주택에 침입해 가택수색을 하고 마구 뒤졌다. 천시부 딸 천수다이(陳蘇戴)의 반지를 보고 강제로 빼앗았는데, 이때 천시부가 심장병이 발작해 바닥에 쓰러졌다. 구급차가 왔는데도 한 악인이 “구조하지 말라”고 버젓이 말하며, 아버지와 딸 두 사람을 강제로 구치소에 끌고 갔다.
얼마 후 천시부는 불법으로 8년형을 선고받고 지둥 감옥에 투옥됐다. 지둥 감옥에서 천시부는 계속 독방에 가두고 잠을 재우지 않는 등의 고문을 당했고, 심근경색이 심하게 악화돼 생명이 위험해지자 그제야 집으로 보내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악질 경찰들은 여전히 감시와 미행을 계속했고 끊임없이 괴롭혔다. 2007년 공안국 국보대대에 구금됐을 때 겅차오(耿超) 등 3명이 천시부에게 강제로 약을 먹여 입에서 대량의 피를 토할 때까지 계속했다. 다음 날 얼굴이 특별히 많이 부었고 몸이 극도로 허약해져 다시 유리걸식을 할 수밖에 없었다. 2008년 8월 6일 천시부 부부와 그의 딸이 다시 신지로 납치돼 밤낮 쉬지 않는 괴롭힘을 당했고, 천시부는 몸과 마음이 지쳐 2008년 8월 31일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천시부가 세상을 떠난 바로 그날 악질 경찰들이 다시 그의 집에 와서 괴롭혔는데, 사람이 죽은 것을 보고 나서야 슬금슬금 떠났다.
4. 리허, 남성, 59세, 허베이성 줘루현 샤타이푸촌 거주
리허(李河)는 부대에서 10여 년간 운전병으로 복무했는데, 제대 후 온몸이 병들었지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고 어떤 복지혜택도 없어서 병든 몸을 끌고 어려운 생활을 했다. 1996년 대법수련에 입문한 후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고 생활이 행복해졌다.
2000년 3월 진선인(眞·善·忍) 대법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지 않아 줘루현 구치소에 구금됐는데, 공안이 가족에게 1만 원을 갈취하고 40일 후에야 집에 돌려보냈다.
2008년 6월 8일 또다시 현 610 리즈밍(李志明), 자오쉬안(趙瑄), 반즈융(班志勇)이 촌민 리칭이(李慶義), 셰정화(謝正華)와 공모해 납치했고, 줘루 구치소에서 4개월간 불법 구금된 후 비밀리에 2년형을 선고받아 지둥 감옥으로 보내져 계속 박해를 당하다가 생명이 위험해졌다.
감옥에서 줘루 공안국 610에 사람을 데려가 보석으로 석방하라고 했지만 610이 거부했고, 감옥 측이 책임을 떠넘기기 위해 직접 사람을 집으로 보냈다.
숨이 끊어져가던 리허가 집에 돌아온 후에도 편히 쉬지 못했는데, 현지 610이 사람을 보내 감시하고 압력을 가해 그에게 정신적으로 큰 스트레스를 줬고, 집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2009년 6월 27일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5. 리후이민, 남성, 53세, 지저우시 샤오자이향 신좡촌 거주
파룬궁수련자 리후이민(李會民)은 남성으로 53세, 지저우시 샤오자이향 신좡촌 사람이며, 1995년 대법수련을 시작해 몸과 마음이 매우 건강했고 줄곧 무병무재했다.
1999년 7월 아내 줘수링(左書玲)과 함께 불법 구금 보름을 당했다. 나온 후 향에서 사람을 보내 밤낮으로 그를 감시하고 영업허가증을 가져가 장사를 못하게 했다. 2000년 3월 부부가 밖에서 연공하다가 불법으로 한 달간 구금됐다. 그 후 2000년 5월 현지에서 베이징으로 청원을 간 파룬궁수련자들이 많아지자 악당 인원들이 그를 다시 구치소에 가뒀는데, 그가 6일간 단식한 후 풀려났지만 당국은 여전히 그를 밤낮으로 감시했다.
2000년 6월 12일 리후이민이 한때 헝수이 수련자들과 교류해 관련 지도자를 찾아가 진상을 해명한 일로 납치됐는데, 구치소 구금 기간 동안 소위 ‘보증서’를 쓰지 않았다. 악당 불법인원들이 리후이민을 파룬궁수련자들의 ‘핵심인물’이라고 의심해 헝수이와 지저우의 악인들이 결탁해 죄명을 조작하고, 리후이민에게 불법으로 중형 5년을 선고해 지둥 감옥에서 박해했다.
2001년 8, 9월 지둥 감옥 1지대가 구금된 파룬궁수련자들에 대한 박해 강도를 높였는데, 리후이민이 감옥에서 박해에 저항하자 악질 경찰들이 독방에 가둬 괴롭혔다. 악질 경찰 장푸량(張福良), 리준루(李俊儒)가 형사범들을 시켜 신문지로 리후이민의 눈을 때리고, 리후이민의 눈에 청량유를 발라 리후이민이 잠을 자지 못하게 하고, 동시에 리후이민의 양손을 뒤로 수갑을 채웠지만 이 모든 것이 리후이민을 굴복시키지는 못했다.
이번 사악한 박해에 참여한 자들은 지둥 감옥 총대 정위 펑모, 지둥 감옥 교육처, 지둥 감옥 1지대 서기 후춘화(胡春華), 1지대 감옥장 천시자오(陳希蛟), 1지대 교육과 장푸량(張福良), 1지대 관교과 싱모, 1지대 옥정과 리쥔루(李俊儒), 엄관대 경찰 루지후이(逯繼輝) 및 엄관대의 형사범들인데, 그중 한 형사범의 이름이 렁중허우(冷中厚)였다.
2001년 12월 13일 리후이민에게 ‘오서’를 쓰도록 강요하기 위해 1지대 악질 경찰 천시자오(陳希蛟), 리쥔루(李俊儒)가 다시 리후이민을 독방에 가뒀다. 추운 겨울 독방에는 난방시설이 없었고, 리후이민은 뒤로 수갑을 찬 채 나무판 위에서 직접 잤으며, 용변을 보러 나갈 때는 4, 5명의 형사범이 따라다니며 곁을 떠나지 않았고, 돌아올 때는 형사범들이 리후이민의 바지와 상의를 벗겨야 했는데 몸수색이라고 했다.
어느 날 리후이민이 밥을 먹기 싫어하자 엄관대의 악질 경찰 루지후이(逯繼輝)가 직접 나서서 옥수수가루 찐빵을 리후이민의 입에 억지로 밀어 넣으면서 리후이민의 코를 잡고 숨을 쉬지 못하게 했다. 이번에 악질 경찰들이 리후이민을 반달 넘게 가뒀는데, 매일 밥은 찐빵 하나와 2cm 네모의 절임 채소 한 조각이었다.
5년간의 억울한 옥살이 중 리후이민은 오랫동안 정신적, 육체적 이중 박해를 당하고 강제 고압세뇌와 노예노동을 당해 리후이민의 몸과 마음에 심각한 상처를 입혔다. 2005년 출감할 때 리후이민은 이미 초췌하기 그지없었고 집에 가는 길에 계속 구토했다. 그 후 갑자기 걸음이 휘청거리고 어지럼증 등이 나타났으며, 2006년 2월 2일 밤 갑자기 쓰러졌는데 병원에서는 뇌간출혈이라고 했고, 2월 5일 새벽 세상을 떠났다.
6. 리카이, 남성, 나이 미상, 친황다오 루룽현 허예좡촌 거주
리카이(李凱)는 루룽현 허예좡촌에 살았는데, 한때 신경쇠약, 당뇨병, 고혈압, 간병 등 여러 질병을 앓았으며, 특히 당뇨병이 심해 여러 해 치료해도 호전되지 않았고, 집에서 농사짓고 일해서 번 모든 수입을 거의 다 그의 치료비로 썼다. 2009년 리카이가 《전법륜》을 배운 지 얼마 안 돼 질병들이 빠르게 모두 사라져 몸이 건강해졌다.
2015년 7월 29일 오후 리카이가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루룽현 천관툰 파출소와 사법소의 7, 8명 경찰들이 납치한 후 불법 형사구금, 체포, 판결을 내렸고, 가족에게는 형사구금증과 체포장만 우편으로 보냈다.
리카이는 2015년 12월 초 지둥 감옥에 투옥됐는데, 2016년 1월 14일 리카이 아내가 지둥 감옥에서 전화를 받고 감옥에 와서 리카이를 데려가라고 했다. 가서는 리카이를 만나지 못하고 탕산 공인병원으로 안내됐다. 2감옥, 4감옥 대장이 리카이가 뇌출혈이라고 했는데, 리카이의 아내와 자녀는 사람을 데려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수술 동의서에 서명하라고 했다. 자신의 가족이 하루빨리 깨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 리카이 아내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이름을 서명했고, 수술을 통해 자신의 가족에게 생환의 기회를 주기를 희망했다.
수술 8, 9일 후 리카이가 드디어 의식이 돌아와 리카이의 친구들이 모두 기뻐했다. 리카이의 왼쪽 팔다리가 움직일 수 있었고 힘도 있었으며, 분명히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직 사람을 알아보지는 못했다. 경찰은 당시 가족과 친구들에게 리카이를 너무 흥분시키지 말라고 말하기도 했다.
겨우 이틀 정도 지났는데, 감옥과 병원이 어째서인지 또 두개골 수술을 하겠다고 했는데, 뇌부에 적수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수술 후 사람이 호전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위독하다고 했다. 가족들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왜 이틀 전에는 이미 호전됐는데 수술 후 오히려 위독해졌는지, 또 하루이틀 지나 사람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지,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런 결과를 믿지도 않았다.
7. 류둥쉐, 남성, 40여 세, 허베이성 바오딩시 만청현 선싱진 다러우촌 농민
류둥쉐(劉東雪)는 만청현 선싱진 다러우촌 사람으로, 1999년 7월 류둥쉐가 베이징에 가서 파룬따파를 위해 공정한 말 한마디를 하려다가 납치된 후 만청현 구치소에 구금돼 비인간적 고문을 당했다.
2000년 섣달 초파일 밤, 선싱진 파출소와 현지 정부 인원들이 불법적으로 류둥쉐 집에 침입해 류둥쉐 부부를 납치한 후 만청현 구치소에 구금했다. 구치소에서 류둥쉐는 자신의 신앙자유를 고집하며 무죄석방을 요구해 한때 4개월간 단식과 단수로 불법구금과 박해에 항의했다. 단식 기간 중 현 공안국 정보과 자오위샤(趙玉霞) 등이 구치소 악질 경찰들과 공모해 그에게 야만적으로 관을 삽입해 억지로 먹이고, 구타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만청현 공안국 부국장 자오훙샹(趙洪祥)이 사람들로 하여금 류둥쉐가 갇힌 쇠우리를 밀어 이리저리 굴리게 했는데, 류둥쉐가 쇠우리 안에서 부딪쳐 온몸에 상처를 입고 고통을 참지 못해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그가 파룬궁을 배신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자오훙샹, 자루이친(賈瑞芹) 등 악인들이 그에게 대변을 먹고 소변을 마시도록 강요했으며, 뱀으로 그를 물게 하기도 했다. 또 밖에서는 “류둥쉐가 연공해서 미쳤다, 연공해서 똥을 먹고 오줌을 마신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불쌍한 류둥쉐는 3개월 후 뼈만 앙상하게 남을 정도로 괴롭힘을 당해 정신이 흐릿해지고 몸무게가 30키로 남짓에 불과했다. 만청현 610과 구치소가 서로 결탁해 책임지기를 꺼려 류둥쉐를 불법적으로 지중 감옥으로 이감했는데, 지중 감옥에서 그에게 생명 위험이 있을까 봐 또 지둥 감옥으로 옮겨 박해했다.
2001년 기간 중 류둥쉐는 4지대에서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박해를 당해 서 있을 수도 없게 됐는데, 파룬궁 박해를 주관하는 부지대장 하오바오신(郝保新)이 한 번 그를 심문할 때도 인성을 잃고 그의 뺨을 때렸다. 5월 말, 오랫동안 비인간적 박해를 당한 류둥쉐는 이미 온몸에 상처투성이가 돼 뼈만 앙상하게 남아 숨이 끊어져 가는 상태였고, 몸무게가 이미 25kg도 안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류둥쉐는 여전히 감방 침대에 결박돼 있었다. 살인자들이 사람이 이미 안 된다는 것을 보고서야 류둥쉐의 어머니에게 연락해 그를 집으로 데려가라고 통지했다. 다음 날 류둥쉐는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8. 왕강, 남성, 41세, 허베이성 줘저우시 마터우진 이허좡향 시웨이퉈촌 농민
왕강(王剛)은 허베이성 줘저우시 샤오이허좡향 시웨이퉈촌의 평범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형제자매가 6명이었다. 어려서부터 집안이 가난했지만 집에서 막내였기 때문에 부모와 형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자라 성격이 포악해졌고 다른 사람들과 자주 다투었다. 성인이 된 후 키가 1m80cm를 넘는 건장한 체격에 힘이 세서 성격이 강해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1996년부터 그는 완전히 성격이 바뀌었다. 이해에 그는 다른 사람에게서 파룬궁에 대해 들었고 파룬궁 책을 보고 나서 이것이 정말로 사람을 좋은 사람이 되라고 하는 좋은 책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며, 단숨에 인생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깨닫고 주저 없이 수련에 들어섰다. 그때부터 그는 엄격하게 진선인(眞·善·忍) 기준으로 자신을 요구했고, 집에도 기쁜 변화가 나타나 서로 관용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됐으며, 부부가 금슬이 좋고 아이가 착하며 가정이 더욱 화목하고 행복해졌다.
왕강은 진선인 신앙을 고집한다는 이유로 2004년 현지 공안, 검찰, 법원에 불법 체포돼 10년 억울한 형을 선고받고 바오딩 감옥과 지둥 감옥에서 차례로 분노를 금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2005년 5월 바오딩 감옥에서 금고에 갇혔을 때, 감옥장 가오잉(高英)이 직접 죄수들을 시켜 왕강을 침대에 결박했다. 침대면 나무판이 기형적으로 생겨 3개의 철보가 용접돼 있었고, 발 아래에는 2개의 철족쇄가 있었으며, 허리 부분에는 큰 벨트가 하나 있었고, 양손은 수갑으로 침대에 채워져 있었다. 금고에 갇힌 10일 동안 말하지 못하게 했고 물도 조금만 줬다. 5월 27일 새벽 4시경 판젠리(範建立)와 란린(冉林)(옥정과 책임자)이 금고실에 와서 왕강 밑에 요가 있는 것을 보자 판젠리가 “누가 요를 깔아주라고 했냐”고 호통치면서 동시에 왕강의 오른쪽 다리를 발로 찼다(나중에 왕강은 오른쪽 다리를 고위절단했다). 그런 다음 또 왕강 밑의 요를 잡아당겨 밖으로 던져버렸다. 이어서 판젠리가 왕강을 또 발로 차며 왕강을 감시실로 데려가자고 했다. 왕강이 다리가 아파서 걸을 수 없다고 하자 그는 사람들에게 왕강을 감시실 문 밖까지 끌어가라고 했다. 왕강이 기어서 들어가자 판젠리가 또 발로 차서 왕강을 나가라고 했는데, 이렇게 3번 반복했다.
5월 28일 병원 검사 결과 왕강의 오른쪽 다리가 골절됐고 근육과 혈관이 이미 괴사했으며 맥관에 염증이 생겼다. 감옥장 가오잉은 왕강의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강제로 왕강의 오른쪽 다리를 고위절단해 겨우 10cm만 남겼다. 왕강의 아내 런구이팡(任桂芳)이 여러 번 먼 길을 달려와 바오딩 감옥에 면회 와서 보석으로 의료받기를 요구했지만 모두 감옥에서 각종 핑계로 거절했다. 그녀가 왕강이 가족 앞에서 한 바퀴 걸어보라고 요구해 왕강이 절단수술을 당했는지 증명하라고 했다. 4감구의 쑹즈강(宋志剛)은 “왕강이 하루에 세 번 ‘파룬따파는 좋습니다’라고 외치고 전향하지 않으니, 전향한 후에 면회하게 하겠다”고 했다.
2007년 6월 바오딩 감옥이 은밀히 왕강을 지둥 감옥에 구금하고 2년 넘게 소식을 차단했다. 지둥 감옥은 왕강이 신앙을 포기하게 강요하기 위해 그의 목발을 3개월간 빼앗고 계속 왕강을 짓밟았다.
2008년 올림픽 이전 왕강의 다른 한쪽 다리도 위험한 상태가 돼 절단 위기에 처했다. 2009년 5월 지둥 감옥이 병위험 상태에 있는 왕강을 집으로 보냈지만 이허좡향 파출소도 줘저우시 정법위원회의 지시로 왕강 집에 달려와 왕강의 귀가를 극력 거부했다. 그들은 왕강이 절단수술을 당했으니 감옥에서 반드시 배상해야 한다는 이유로 지둥 감옥에 돈을 내라고 했고, 그렇지 않으면 접수에 동의하지 않겠다고 했다. 감옥 측 사람들이 몰래 왕강을 내버리고 차를 몰고 달아났다. 줘저우시 610 주임 가오젠(高建)과 파출소가 즉시 사람을 보내 오토바이로 막아서서 왕강을 데려가지 않으면 가게 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렇게 왕강은 다시 감옥으로 끌려갔다. 2009년 8월 왕강 가족이 지둥 감옥에 사람을 데리러 왔지만 지둥 감옥은 어떻게 해도 사람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2009년 10월 왕강이 임파암 말기로 확진되자 지둥 감옥이 그제야 가족에게 연락해 사람을 데려가라고 통지했다. 시웨이퉈촌 촌서기가 오히려 “그를 데려가서 뭐 해? 거기서 죽게 놔둬!”라고 했다. 왕강 아내가 “설마 뼈 한 줌도 우리에게 갖지 말라는 거예요?”라고 했다. 10월 14일 지둥 감옥이 생명이 위험한 왕강을 병보석 명목으로 집에 돌려보냈다.
2009년 10월 31일 밤 10시, 여러 해 동안 온갖 시련을 다 겪은 왕강이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는데, 나이가 겨우 41세였다. 다음 날 가족들이 중공 악당 인원들의 위협과 회유 아래 그의 시신을 급히 매장했다. 하관할 때 큰 눈이 내려 천지가 하얗게 변했다.
9. 왕젠신, 남성, 47세, 허베이성 랑팡시 구안현 제3소학교 교사
왕젠신(王建新)은 구안현 제3소학교 교사로, 파룬궁을 수련하며 대법의 진선인을 기준으로 사람이 된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온갖 방법으로 괴롭힘을 당해 급여 지급이 중단됐고, 그 후 여러 차례 납치, 구금, 판결, 강제노동을 당했다.
1999년 7월 20일 베이징에 청원을 갔다가 구안현 국보대대 런훙쥔(任洪俊), 류쉐쥔(劉學軍)에게 납치돼 구안현 구치소에 15일간 구금됐다. 2000년 다시 베이징에 청원을 갔다가 불법으로 15일간 구금됐다.
2001년 7월 1일 대법을 증명하기 위해 시내에서 글씨를 뿌렸다가 순찰경찰에게 발견돼 공안국에 납치돼 구타를 당하고 구안현 구치소에 불법 구금됐는데, 박해에 항의해 20여 일간 단식했지만 만좡 노동수용소에서 수용을 거부했다.
2001년 8월 왕젠신이 청관진 파출소 경찰에게 납치돼 불법 가택수색을 당했다.
2001년 9월 왕젠신이 톈푸추(田福秋), 네쥔(聶軍), 거윈탕(葛雲棠), 류쉐쥔(劉學軍)에게 속아 구안현 공안국에 갔다가 다음 날 탕산시 허화컹 노동수용소로 끌려가 3년간 강제노동을 당했다. 노동수용소에서 전기곤봉 전기고문과 강제로 작은 의자에 앉히는 박해를 당했고, 8개월 후 고문으로 고혈압에 걸려 보석으로 의료받게 됐다. 2002년 3월 왕젠신이 또다시 납치돼 랑팡시 세뇌반으로 끌려가 박해를 당했는데, 고혈압으로 쇼크가 와서 랑팡시 중의원으로 이송돼 독주사를 맞는 박해를 당했다. 2007년 8월 27일 공안국장 마하이린(馬海林), 천리민(陳立民), 톈푸추(田福秋), 장싱(張刑) 등 20여 명이 왕젠신을 납치하고 불법 가택수색을 해 프린터, 컴퓨터, 대법서적, 진상을 알리고 사람을 구원하는 데 쓰는 자료를 빼앗았다. 구치소에서 혈압이 무서울 정도로 높아 혈압계가 끝까지 올라갔지만 보석으로 의료받기를 거부하고 강제로 대판(즉 시체침대)에 결박해 링거를 놨다. 걷는 것도 죄수가 부축해줘야 하는 이런 상황에서도 그들은 사람의 생명을 무시하고 3년형을 선고했고, 랑팡시 중급법원에 상소했지만 기각돼 원심이 유지됐으며, 지둥 감옥으로 끌려가 3일간 고문을 당한 후 반신불수가 돼 회복하기 어려운 상태가 됐고, 2013년 3월 3일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는데 나이가 겨우 47세였다.
10. 리즈파, 보터우시 와리왕향 미자위안촌 사람
리즈파(李志法)는 1948년에 태어났고, 보터우시 와리왕향 미자위안촌 사람으로, 체격이 건장하고 큰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어려서부터 군인이었던 그는 군인의 기질을 갖고 있어서 일을 할 때 결단력 있고 시원스러우며 정직해서, 집 안팎에서 공인된 대단한 참된 사람이었다. 그는 사람됨이 온화하고 늘 남을 위해 생각하며 하루 종일 웃는 얼굴이었다. 이렇게 진선인 파룬따파 기준에 따라 사람이 되고, 건강하고 낙관적인 좋은 사람이 장장 7년간의 부당한 박해 중에 고문당해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고 정신이상이 됐다.
2001년 7월 27일, 리즈파가 창저우시 제2의원 전화박스에서 호출기를 부를 때, 창저우시 국보대대, 방폭대대 경찰에게 납치되어 방폭대대에 10여 일간 불법 구금됐다. 이 기간 동안 경찰들은 그의 양손, 양발을 철의자에 족쇄를 채우고 돌아가며 강요심문하고, 잠을 자지 못하게 하며, 폭행하고, 전기봉으로 전기고문하고, 몸에 물을 뿌린 다음 전기봉으로 몸을 전기고문하고, 전기수갑으로 전기고문하고, 생식기를 전기고문하고, 매일 나무망치로 뇌를 때렸다.
참혹한 박해로 인해 리즈파는 정신이상이 됐고, 악당 인원들은 그를 창저우시 제1구치소로 이감했다. 신지가 맑지 않아서 리즈파는 자해 행위가 나타났는데, 자신의 팔을 물어 피가 흥건했고, 자신의 뇌를 때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중공 악질 경찰들은 여전히 그를 놓아주지 않았고, 구치소 불법 구금 기간 동안 여러 차례 심문하며 형을 가해 강요했는데, 자료를 어디에 보냈는지 말하라고 하고, 말하지 않으면 구타하고 형을 가하며, 전신을 전기고문하고, 뒤로 수갑을 채우기를 한 번에 20여 일 동안 했는데, 손목이 모두 헐었고, 또 온몸에 옴이 났다. 계속 1년여를 고문했는데, 가족이 면회할 수 있게 한 것은 단 두 번뿐이었다. 첫 번째는 두 사람이 부축해서 나왔는데, 정신이 혼미하고, 사람이 이미 변해서 거의 20살 늙어 보였다. 두 번째는 4~5명이 들고 나와서 땅에 내려놓았는데 식물인간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고, 감옥 의사가 침을 놓아도 반응이 없었다.
리즈파는 박해받아 몸이 극도로 허약해져서 자립 능력을 잃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2002년 8월 16일 창저우시 윈허구 중공 악당이 조종한 법원은 억지로 리즈파에게 불법적으로 7년형을 선고했는데, 요식행위로 진행된 재판 때 그는 사람들이 부축해서 갔다.
2002년 8월 30일 탕산 지둥 감옥으로 보내질 때, 가족이 또 한 번 면회했는데, 그는 말을 할 수 없었고, 단지 손으로 뇌를 가리킬 뿐이었다. 리즈파는 탕산 지둥 감옥 제4지대로 이송되어 불법 구금됐는데, 그가 자립할 수 없어서 감옥에서 당시 두 사람을 배치해 그를 돌보게 했다. 비록 생활상에서는 그를 괴롭히지 않았지만, 정신상의 박해는 조금도 느슨해지지 않았고, 억지로 리즈파에게 소위 사상전향을 강요하며 정신적으로 그를 유린했다.
이 몇 년간 감옥에서 리즈파의 정신은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었는데, 2006년 말 병세가 명백히 악화되어 발병할 때는 온몸이 경련을 일으키고, 얼굴에 핏기가 없으며, 사지가 차갑게 웅크리고, 몸에서 식은땀이 났다. 감옥에서는 부득이 그를 4지대 병원에 보내 응급치료를 받게 했다.
리즈파의 80여 세 된 노모는 7년간 아들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아들에게 의외의 일이 생길까 걱정해서 가족들 몰래 북쪽으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창저우에서 탕산까지 480리, 탕산에서 지둥 감옥까지 100리, 감옥 본부에서 4지대까지 또 70리인데, 마음이 타는 노모는 기차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타고, 버스에서 내려 택시로 갈아타며 하룻밤을 자지 못하고 온 길을 흔들리며 아들 곁으로 달려갔지만, 4지대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노인을 만나게 해주지 않아서, 노인은 울면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가족들의 여러 차례 요구로 감옥에서는 감형이나 보석치료를 해주겠다고 답했는데, 탕산 중급법원에 보고할 때 중급법원에서 사람을 보내 리즈파와 면담하며 파룬궁에 대한 그의 견해를 물었다. 그가 “진선인이 좋지 않다면, 세상에 또 무엇이 좋은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자, 온 사람이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 “당신은 원래 ‘전향’하지 않았군요?” 또 대대로 찾아가서 한바탕 원망했고, 감형도 없어졌다.
2008년 7월 4일, 고혈압, 뇌위축, 강새성뇌경색, 간질, 중병이 온몸에 든 리즈파는 허베이성 감옥국의 승인을 거쳐 보석치료로 집에 보내졌는데, 정식 석방기까지는 단 23일 남아있었다. 가족들이 박해받아 신지가 맑지 않고 몸이 허약해 자립할 수 없는 리즈파를 보고, 또 복수를 당할까 봐 그를 숨겨두었다. 610사무실은 와리왕향 파출소에 지시해서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 가족들에게 리즈파의 행방을 추궁했고, 창저우까지 따라가서 가족들을 만나라고 강요했지만, 반드시 그를 보겠다는 것을 가족들이 거부했다.
집에 돌아온 후 리즈파의 병세가 자주 발작했는데, 발작할 때 온몸이 경련을 일으키고, 얼굴에 핏기가 없으며, 사지가 차갑게 웅크리고, 항상 뇌 속에 무엇인가 있다고 말했으며, 온몸에 힘이 없어서 나가서 산책해도 집을 찾지 못했다. 원래 글씨를 잘 쓰던 사람인데, 글자도 생각나지 않았다. 더 심각한 것은 경련이 일어나는데, 한 번 경련이 일어날 때마다 이전보다 더 심해지고, 또 경련이 일어나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져서, 나중에는 움직이지도 못했고, 대소변도 모르게 됐다. 2015년 9월 30일 당일 아주 오랜 시간 경련한 후,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다.
11. 우쥔스, 남성, 70여 세, 허베이성 탕하이현 제5농장 농민
2007년 9월 24일 밤, 우쥔스(吳俊士)는 당시 탕하이현 공안국 부국장이었던 리푸궈(李富國, 이미 업보를 받아 사망)등에게 납치됐고, 후에 3년 6개월의 부당한 재판을 받고 지둥 감옥에서 박해받아 걸을 수 없게 됐다. 생명이 위험할 때, 감옥 측에서 가족에게 통지해 우쥔스를 들고 집으로 돌아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12. 샤원중, 남성, 58세, 허베이 한단시 청안현 사람, 전 청안현 수리국 직원
샤원중(夏文仲)은 원래 청안현 수리국 직원이었는데, 그는 중학교 졸업이었지만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해서 각종 기술을 고생하며 연구했고, 8개월 시간으로 재봉틀을 개조해 오버록 재봉로 만들었다. 80년대부터 식용균 배양기술을 연구해서 성공한 후 전 현에 무상으로 보급했는데, 교육반을 열 때 전국 각지 학생들이 이름을 듣고 찾아왔고, 멀리는 중러 국경, 구이저우에서도 있었다. 학생들이 집에 돌아가 실험에 성공한 후, 연이어 현수막을 보내 감사를 표했는데, 당시 그들 집 5칸 방안에 현수막이 가득 걸려 있었고, 샤원중은 전 현 과학기술로 부자가 된 선두인물이 됐다. 비록 샤원중에게는 어떤 정치적 배경도 없었고, 선물을 보내거나 관계를 맺지도 않았지만, 그의 특수한 공헌과 좋은 품행으로 인해 청안현 정협위원으로 추천됐다.
샤원중의 아내 장란펑(張蘭鳳)은 초등학교 교사였는데, 한창 중년인 그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병이었다. 심장병, 현기증, 부인과 병으로 출혈해서 몸에 겨우 4그램의 피만 남았고, 가슴이 답답하고, 연중 기침하고, 발열하는 등의 의심스러운 중병이 있었는데, 1996년 말에 그녀는 파룬궁 수련을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다년간의 의심스러운 병이 모두 없어졌고, 이후 병 없이 온몸이 가벼워졌으며, 성격도 좋아져서 정상적인 업무를 회복했다. 아내의 하늘과 땅이 뒤바뀐 변화를 보고, 샤원중도 파룬따파 수련에 들어섰다.
1999년 7월 20일 중공 악당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한 후, 샤원중(夏文仲)은 현지 악질 경찰들이 박해하는 중점이 됐고, 이후 집에는 평온한 날이 없었다. 대낮이든 밤중이든 관계없이, 그는 앞서 10차례 청안현 공안국 국보대대 악질 경찰, 청안진 파출소 악질 경찰들에게 강제로 납치되어 불법 구금됐다. 악당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한 후부터,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구치소나 감옥에서 보냈다. 직장에서 해고된 후에도 여러 차례 갈취를 당했다.
2002년 8월 31일, 샤원중은 다시 납치됐고, 청안현 공안국 내에서 양스화(楊士花)를 우두머리로 한 5명의 악질 경찰들에게 폭행과 전기봉 전기고문을 당했다. 그는 한 손이 수갑에 채워져 철창살에 걸려 하룻밤을 보냈는데, 몸에 심각한 고혈압이 나타나서 일어날 수 없고, 말할 수도 없었으며, 후에 4년의 부당한 재판을 받았다. 허베이성 따밍감옥에서 샤원중은 악인들이 자를 사용해 옷을 다 벗기고 폭행하는 것을 당했다.
나중에 그는 또 허베이 지둥 감옥으로 이감됐는데, 1년여 구금된 후, 집 사람들이 2004년 8월 15일 면회를 갔더니, 그의 다리가 다쳐서 걸을 수 없어 침대에 누워 있었고, 다친 다리는 허공에 걸려 있었으며, 아래에 3개의 벽돌을 달아 다리를 매달고 있었는데, 무려 4개월간 이런 자세였다. 이런 식으로 다리 부상을 치료하는 법이 있는가?
4개월 후 집 사람들이 감옥에 전화를 걸어 샤원중의 몸이 어떤지 물었더니, 감옥에서는 얼버무리며 “몸이 아주 좋다”고 했다. 가족들이 강력히 요구하며 “당신이 감옥 병원에 가서 사람이 도대체 어떤지 보라”고 했는데, 오후에 전화를 걸어 ‘병세가 위독’ 해서야 가족들을 만나러 오라고 했다. 온 가족이 즉시 기차를 타고 지둥 감옥으로 갔는데, 그곳에 가서 보니 그의 다리가 아직도 매달려 있었고, 사람은 이미 고문당해 정신이 맑지 않고, 기억이 쇠퇴하며, 말할 수 없었고, 생명이 위험했다.
감옥에서는 여전히 사람을 놓아주지 않았고, 또 돈을 갈취하려고 했다. 가족들이 차표 값도 빌린 돈이라고 하자, 감옥에서는 가족들을 내보내려고 했다. 가족들이 가지 않고, 현지 여관에 머물며 매일 감옥에 가서 사람을 요구했는데, 17일 후에야 보석치료를 허락해 샤원중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바로 음력 2004년 섣달 16일이었다. 사람을 이렇게 박해했는데도, 감옥에서는 또 현지 파출소에 그를 엄밀히 감시하라고 요구했고, 섣달 29일 청안진 파출소의 3명 악질 경찰들이 또 집에 와서 괴롭혔다.
이때 그의 몸은 이미 극도로 허약했는데, 계속 변혈이 있었고, 한쪽 다리는 움직일 수 없었으며, 다리에 어혈이 생겼다. 가족들이 발견한 것은 막 뜨거운 밥을 담아주면 그가 들고 바로 마셨는데, 가족들이 그에게 천천히 하라고 하자, 그는 “안 돼, 늦으면 맞고 욕을 먹어”라고 했다. 그에게 안에서 어떤 고문을 받았는지, 어떤 고문을 당했는지 물으면, 샤원중은 고통스러워서 표현할 수 없었고, 사나이가 눈물을 흘리며 계속 “비열해! 비열해!”라고 했다.
37일 후, 2005년 3월 14일 굴욕과 고문을 당한 샤원중은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는데, 나이는 겨우 58세였다.
13. 장윈핑, 남성, 58세, 허베이성 탕산시 사람, 전 탕산철강주식유한회사 생활서비스처 직원
2003년 3월 30일, 장윈핑(張雲平)은 탕산시 공안국 1처, 펑룬구 공안분국 경찰에게 납치됐고, 후에 루베이구 법원에서 8년의 부당한 재판을 받아 허베이 지둥 감옥 제5지대에 끌려가 구금됐다.
2007년 상반기, 장윈핑의 몸에 고혈압, 심장병 증상이 나타났고, 몸이 점점 더 허약해졌다. 2009년 7, 8월간, 직속대대 2중대 중대장 리훙리(李洪利)는 장윈핑의 몸에 병이 있음을 개의치 않고 그를 강제로 작업장에 가서 일을 하게 했다. 그 기간에 장윈핑은 철못에 오른손 중지가 찔려 화농감염되어 골수염에 걸렸다. 2009년 9월 말, 장윈핑은 지둥 감옥 제4지대 감옥 중심병원에 입원했는데, 동시에 당뇨병과 폐결핵이 발견됐다. 2010년 2월 23일 이미 숨이 끊어지려던 장윈핑은 보석치료됐고, 9월 6일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14. 둥한제, 남성, 허베이성 줘저우시 광산국 고급엔지니어
둥한제(董漢傑)는 남성, 51세, 군대 영급 전업으로, 줘저우시 광산국 고급엔지니어였다. 1995년 10월 파룬따파 수련을 시작해서, 법공부와 연공 후 몇 년간 한 번도 병원에 가지 않았고, 약 한 알도 먹지 않았다. 진선인 기준으로 자신을 요구해서, 업무에서 늘 사용자를 위해 생각하고, 열정적으로 서비스하며, 공정하게 일을 처리해서, 통신소 업무에서 진정으로 고객에 대한 먹고, 갖고, 막고, 요구하는 등의 불량한 현상을 근절했고, 전체 직원들의 인정을 받았다.
2014년 2월 25일 밤, 줘저우시 공안국 국보대대 및 여러 향진 파출소 경찰들이 연합해서 둥한제, 가오춘롄(高春蓮), 왕윈(王雲), 장하이양(張海洋), 거즈쥔(葛志軍) 등 파룬궁수련자들을 납치했다. 2015년 2월 11일, 줘저우시 법원에서 6명의 파룬궁수련자에게 직접 불법 판결서를 내려서, 둥한제에게 불법적으로 5년을 선고했다.
2015년 8월 23일 오후 허베이성 감옥관리국 지둥분국 제5감옥에 끌려갔는데, 가기 전 몸과 정신상태가 매우 좋았다. 제5감옥 감옥장 가오리장(高立江), 부감옥장 왕슈쥔(王秀軍, 음역), 부감옥장 자오젠신(趙建新), 교육과 과장 왕썬후(王森虎), 부과장 리펑(李鵬) 등의 모의 하에, 둥한제를 엄관감구에 구금하고, 당시 엄관감구 구장 리훙리(李宏力)에게 지시해 둥한제를 박해했다.
안에서 둥한제는 장기간 기아, 전기봉 전기고문, 잠을 자지 못하게 하는 등 각종 비인간적인 고문을 당했다. 두 달이 안 되는 시간에, 둥한제는 얼굴이 초췌하고, 얼굴빛이 창백하며, 장기가 쇠약해졌다.
2015년 10월 10일, 부감옥장 자오젠신이 직접 나서서 둥한제에게 ‘전향’ 박해를 했는데, 노발대발한 자오젠신이 둥한제의 뺨을 때렸다. 당시 둥한제의 몸은 이미 고문당해 매우 약했는데, 몇 번 때리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쓰러져서 인사불성이 되어 병원에 보내 응급치료했지만 무효였고, 이렇게 박해당해 죽었다. 감옥에서는 책임을 질까 봐 가족들에게 둥한제가 돌발성 심장병으로 사망했다고 했다.
15. 궈다오유, 남성, 60세 전후, 허베이성 친황다오시 파룬궁수련자
10년 전, 궈다오유(郭道友)의 아내가 심장병, 백혈병, 유방암 등 다종의 질병에 걸렸는데, 당시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내렸다. 아이가 아주 어려서, 부부가 상의해 두 아이를 각각 아내의 둘째 언니와 동생에게 맡겨 돌보게 했다. 이 4인 가족이 파산하려는 것을 보고, 바로 이런 상황에서 궈다오유의 아내가 우연히 ‘전법륜(轉法輪)’ 한 권을 얻었고, 파룬따파 수련을 시작했다. 파룬따파를 배운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온몸의 병이 점차 좋아졌다. 아내의 불치병이 좋아지자, 궈다오유는 기뻐서 사람을 만나면 파룬따파의 신기함을 말했다. 그때부터 궈다오유도 파룬따파 수련 대열에 들어섰다.
2008년 7월 18일 오후, 위관파출소 소장 천궈싱(陳國星)과 지도원 왕바오이(王寶義) 및 위관진 정부의 악인들이, 푸닝현 국보대대의 대대장 리하이펑(李海峰)과 천징리(陳景利)와 결탁해서, 한 무리의 사람을 거느리고, 어떤 수속도 없이 궈다오유 집에 침입해서 뒤집어 놓았다. 불법 가택수색 후, 불법 경찰들은 물품을 정리한다는 명목으로 그를 속여 파출소에 가게 해서, 그를 납치했고, 그날 밤 푸닝현 구치소에 보내 불법 구금했다. 가택수색부터 궈다오유를 구치소에 보내기까지, 전체 과정에서 어떤 합법적인 수속도 없었다.
푸닝현 구치소 기간 동안, 온갖 고문을 당했는데, 감옥경찰이 형사범들을 사주해 그를 폭행해서, 두 다리가 맞아 행동이 불편했다. 이후 궈다오유는 불법적으로 3년형을 선고받았고, 2009년 9월 지둥 감옥에 끌려갔다. 출옥할 때는 이미 박해받아 고혈압, 뇌혈전 증상이 생겨서, 걸음이 불안정하고, 말이 불분명하며, 길에서 경찰복을 입은 사람을 보면 무서워서 두 다리가 떨리고, 서 있기 어려웠다.
악당 악도들의 궈다유우에 대한 잔혹한 박해로, 그는 장기간 고도로 긴장해서 혈압이 계속 매우 높았고, 지주막하강 파열을 압박해서, 2017년 2월 6일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는데, 나이는 60세 전후였다.
16. 리룬후이, 70세 가까이, 허베이성 바저우시 화베이석유차이유2장의 퇴직 직원
리룬후이(李潤會)는 남성, 1945년 출생으로, 40세가 안 됐을 때 온몸에 병이 들었다. 그때는 60년대로 조건이 힘들었는데, 따칭석유기업에서 생산간부로 일하며, 업무 압력이 크고, 성격이 불같으며, 승부욕이 강했다. 과로와 화를 잘 내는 것이 더해져서, 몸이 점점 더 나빠져서, 심장병, 심방세동, 조기박동을 앓았는데, 발작하면 심장 부위가 쥐어짜듯 아프고, 호흡도 곤란했으며, 때로는 자다가 갑자기 숨이 막혀 깨기도 했다. 의사를 찾고 약을 구해 각 대형병원을 다 다녔지만, 그는 여전히 사망선상에서 몸부림치며, 거의 20년을 고통스럽게 견뎠다.
1997년 7월, 리룬후이는 다행히 파룬따파를 들었고, 리룬후이의 몸이 단숨에 정화됐다. 그 후부터 리룬후이는 약 한 알도 먹지 않았고, 몸이 건강했다.
중공 악당이 파룬궁을 박해한 이래, 리룬후이는 여러 차례 납치되어 강제노동수용소, 세뇌반에 갇혔다.
2009년 3월 11일, 리룬후이는 납치되어 7년형을 선고받아 지둥 감옥에 보내져 박해받았다. 그곳에서 온갖 고문을 당해서, 심장병도 발작했고, 정신적 압력이 커서, 감옥에서 박해받아 여러 차례 심장병, 폐적수, 부종으로 생명이 위험해지자, 감옥에서 책임을 질까 봐 부득이 보석치료로 집에 돌려보냈다. 하지만 사법국 610 등이 그에게 사상보고서를 쓰라고 강요하고, 갈취하며, 특별히 그에게 휴대폰 하나를 배정해서, 언제든지 그를 감시할 수 있게 했다.
2011년 7월 6일, 두 번째로 감옥에 잡혀가 박해받았는데, 조건이 악열해서 밥을 먹지 못하고, 숨이 차서, 나중에 해방군병원에 보내졌는데, 병상에 묶여 있었고, 감옥 경찰이 교대로 감시했다. 한 달간 심장 심방세동이 완화되지 않자, 감옥에서 책임을 질까 봐, 또 보석치료를 해줬다.
2012년 7월 6일, 세 번째로 감옥에 잡혀가 박해받았다. 몇 차례 이감된 끝에, 리룬후이는 심장 심방세동이 완화되지 않아서, 몸이 생사의 극한에 달하자, 감옥에서 책임을 질까 봐, 또 보석치료를 해줬다. 리룬후이는 사악한 고압 환경에서, 마침내 심신이 극대한 상처를 받아서, 집에 돌아온 지 반년여, 610이 끊임없이 괴롭히고, 압력을 가하며, 협박해서 정신적 유린을 했고, 또 다시 감옥으로 보내겠다고 협박했다. 이렇게 거대한 정신적 압력 하에서, 리룬후이는 2013년 8월 21일 아침 런치우 딸집에서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전, 중공 사악한 분자들이 또 압력을 가해 그에게 보석치료 관련 증명 등을 하라고 했는데, 그렇지 않으면 수감한다고 했다.
17. 양전루, 57세, 허베이성 완취안현 완취안진 시난가 사람
양전루(楊振祿)는 허베이성 완취안현 사람이다. 10여 년 동안 아내 장슈란(張秀蘭)과 함께 여러 차례 중공에게 납치, 갈취당했고, 가오양 노동수용소에서 1년간 박해를 당한 적이 있다. 2008년 올림픽 전야에 부부가 다시 납치됐고, 불법적으로 비밀리에 6년형을 선고받았다.
양전루는 탕산 지둥 감옥에 끌려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당뇨병, 양안 실명, 폐결핵 등으로 박해받아, 몸이 극도로 허약해져서 사람이 말라 형편없는 모양이 됐다. 2013년 3월 1일 생명이 위험할 때, 감옥에서야 ‘보석치료’를 허락했다. 양전루는 2013년 6월 7일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18. 리진쿠, 남성, 나이 미상, 허베이 탕산시 러팅현 사람
리진쿠(李金庫)는 러팅현 중부향의 선량하고 순박한 농민이다. 원래부터 몸이 약하고 병이 많았는데, 38세 되던 해 또 류머티즘성 심장병에 걸리고, 간헐 증상을 동반했다. 베이징의 대형병원을 포함해 여러 병원에 갔지만 다 치료하지 못했고, 마지막에 의사가 그냥 몸조리를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리진쿠는 당시 걷기도 힘이 없었고, 하물며 농사일은 더욱 할 수 없었다. 이렇게 8년을 보냈다.
1997년, 리진쿠는 파룬따파를 배웠다. 공부한 지 한 달여 만에, 그의 그런 증상들이 모두 사라졌고, 온몸에 다 쓸 수 없을 정도의 힘이 있어서, 아무리 무거운 일을 해도 피곤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그로 하여금 대법의 초범성을 감탄하게 했다. 동시에 그는 노력해서 사부님이 가르치신 진선인 기준에 따라 자신을 요구하고 , 늘 남을 위해 생각했으며, 누구 집에 일이 있으면 그는 모두 자발적으로 도우러 갔는데, 마을에서 공인된 대단한 좋은 사람이었다.
중공 악당이 대법을 박해한 후, 단지 그가 ‘파룬따파는 좋습니다’라는 진심어린 말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리진쿠는 계속해서 불법 가택수색, 납치를 당하고, 세뇌반, 파출소, 구치소, 감옥에 갇혀 고문당했다.
2015년 7월 10일, 리진쿠는 진상을 모르는 세상 사람에게 무고당해서, 중부파출소에 불법 체포되어 러팅현 구치소에 보내졌는데, 구치소에서 강제로 바닥 닦기, 빨래하기를 하게 했고, 하지 않으면 밥을 주지 않았으며, 구타를 당했다. 안에서 3개월을 있었다.
2016년 1월, 리진쿠는 박해받아 말할 수 없고, 밥을 먹을 수 없었으며, 39도가 넘는 고열이 내리지 않았다. 구치소에서 책임을 질까 봐, 그를 현 병원에 보내 수액을 맞혔는데, 당시 39.6도까지 열이 났고, 후에 또 탕산 안캉병원(공안 지정병원)으로 이송됐다. 병세가 심각해서 병원에서 수용을 거부했다. 구치소와 병원이 2시간여를 대치한 후, 병원에서 억지로 받아들였다.
안캉병원에서 리진쿠를 폐렴에서 폐심병, 관상동맥 심장병으로 진단했다. 안캉병원에서 한 달 입원해서, 리진쿠의 몸이 약간 호전되자, 구치소에서 또 그를 데려가서, 3일 후 허베이성 지둥 감옥에 보냈다.
감옥에 간 지 20일도 안 돼서, 리진쿠가 또 계속 발열해서, 감구 병원에서 ‘치료’했지만, 호전되지 않고 계속 악화되어, 감옥 총병원(난옌병원)으로 이송됐다.
리진쿠의 생명이 위험한 상황에서, 감옥에서는 사람을 놓아주지 않고, 총병원과 감구 병원 사이에서 왔다 갔다 했다. 마지막에 사람이 안 될 것 같다는 것을 보고서야, 리진쿠를 탕산 공인병원에 보냈다. 그때 리진쿠는 눈으로 보지 못하고, 밥을 먹지 못하며, 숨이 차서, 누울 수 없고,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탕산 공인병원에서 또 중증근무력증으로 진단했다. 이때 감옥에서야 가족들에게 박해받아 사람 모양이 아니고, 언제든지 생명 위험이 있는 리진쿠를 집으로 데려가라고 요구했다. 2017년 5월 20일, 리진쿠는 박해당해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19. 장수톈, 청더시 룽화현 사람
2003년 9월 10일, 장수톈(張樹田)은 구치소에 납치되어, 6개월 불법 구금된 후, 지둥 감옥에 끌려가서, 염전에서 강제로 강체력 노동에 참가했고, 몸에 심각한 병적 증상이 나타나서, 생활을 스스로 돌볼 수 없었으며, 또 자주 혼수상태에 빠졌다. 2007년 3월, 장수톈을 가족들이 데려갔는데, 감옥에서 상처를 당해서, 2009년 7월 세상을 떠났다.
20. 왕비량, 40여 세, 허베이성 딩싱현 사람
파룬궁수련자 왕비량(王碧良)은 2000년 7년의 중형을 선고받아, 지둥 감옥에 구금됐는데, 안에서 박해받아 백혈병에 걸려서, 집에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처자식과 늙은 부모가 어렵게 세월을 보내게 됐다. 원래 왕비량 집에서는 자체로 공장을 운영해서, 한 가족의 생활이 아주 좋았는데, 단지 진선인을 수련했기 때문에, 장쩌민 집단에게 박해받아 가정이 파산하고 사람이 죽게 됐다.
21. 멍칭푸, 남성, 57세, 탕산시 카이핑구 카이핑진 간부
멍칭푸(孟慶福)는 카이핑진 사무소 서기를 지냈고, 1996년 파룬궁 수련을 시작했다. 2001년 5월 24일, 파룬궁수련자들을 조직해 카이핑 마광 잣나무숲에서 단체연공을 했다가 체포됐는데, 국장 천쉐쥔(陳學軍)이 죽도록 때리라고 지시했고, 카이핑분국 부국장 리궈쥔(李國軍)이 앞장서서 악행을 했다. 카이핑분국 지하실에서, 파룬궁수련자들에게 뺨을 때리고, 발로 차고, 나무막대기로 때리고, 옷을 다 벗기고 넓은 가죽띠로 때리며, 또 ‘살승(殺繩)’ 고문을 했다. 멍칭푸는 매달려서 맞았고, 여러 차례 맞아서 기절했으며, ‘사승’의 밧줄이 몇 번 끊어졌다. 멍칭푸는 카이핑법원에서 불법적으로 3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아, 먼저 지둥 감옥에 보내졌다가, 후에 바오딩 감옥으로 이송됐고, 동시에 공직에서 제명되어, 아내와 강제로 이혼하게 됐다. 감옥에서 그는 박해받아 시력이 떨어지고, 물건을 똑똑히 보지 못하며, 걸을 때 힘들어서 허리를 펼 수 없었다. 집에 돌아온 후, 매월 200위안의 최저 생활 보장금 수입만 있었는데, 2013년 3월 22일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으며, 나이는 57세였다.
22. 왕젠 , 3월 2일 체검에서 모든 지표가 정상, 4월 3일 갑자기 사망, 의혹투성이
왕젠(王建)은 72세, 허베이성 탕산시 쭌화시 왕자이향 싱왕자이촌 농민으로, 2023년 4월 3일 지둥 감옥에 박해당해 죽었다.
왕젠은 1997년 파룬궁 수련을 시작했다. 그는 수련 전에 심각한 관상동맥 심장병을 앓았는데, 자주 심교통, 가슴답답함, 심계항진, 숨가쁨 등의 증상이 나타났고, 연중 약물에 의존해 증상을 완화했으며, 무거운 일을 할 수 없었다. 그가 파룬궁을 수련한 후, 아주 짧은 시간 내에 온몸의 병 증상이 모두 사라졌고, 이후 약병을 버렸다. 새 생명을 얻은 왕젠은 파룬따파 수련을 견정했고, 노력해서 진선인 기준에 따라 사람이 되고 일을 했으며, 그는 마음이 탄탄하고, 정직하고 선량하며, 남을 돕기 좋아하고, 성실하고 신용을 지켜서, 마을에서 공인된 정직한 사람, 좋은 사람이었다.
2019년 7월 6일 새벽 3시여, 국보대대장 먀오아이둥(繆愛東)을 우두머리로, 경찰들이 담을 넘어 싱왕자이 파룬궁수련자 왕젠 집에 침입했고, 왕젠을 납치, 가택수색당했으며, 오후에 또 두 번째 가택수색을 했다. 왕젠은 7년의 부당한 재판을 받아 지둥분국 제2감옥 5감구에 끌려갔다. 2023년 4월 3일 지둥 감옥에서 갑자기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어 왕젠이 사망했다고 했다. 법의가 시신 표면 감정을 했는데 얼굴 아래 귀를 포함해서 및 등 부분이 검은 자주색을 나타냈고, 가슴에 원환 흔적이 있었으며, 오른손 등에 멍이 있었고, 허리 부분에 긁힌 자국 같은 것이 있었으며, 뒤집어서 감정할 때 왼쪽 귀에서 정체불명의 액체가 흘러나왔다.
가족들이 말하기를, 왕젠은 3월 2일 감옥에서 신체검사를 받을 때 몸이 건강했고, 모든 지표가 정상이었다고 한다. 3월 19일 가족들이 면회할 때, 그의 몸이 건강하고, 정신상태도 좋다고 봤다. 4월 3일, 가족들이 갑자기 감옥 전화를 받았는데, 왕젠이 사망했다고 하며, 가족들에게 감옥에 와서 장례를 처리하라고 통지했다.
23. 라이지창, 부당한 형기 기간이 만료되어 출옥하려는 때에 세상을 떠나, 시신이 1미터가 안 됨
라이즈창(賴志强)은 50여 세, 허베이성 탕산시 파룬궁수련자로, 운전사 일을 한 적이 있으며, 사람됨이 선량하고, 남을 돕기 좋아했다.
2016년 3월 31일, 라이즈창은 경찰에게 납치됐고, 이후 불법적으로 7년형을 선고받았다. 지둥 감옥에 끌려갔다. 곧 기간이 만료되어 출옥하려는 때에, 가족들이 그가 집에 돌아오기를 기다릴 때,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나쁜 소식을 기다리게 됐다. 2023년 1월 3일 오전 8시, 라이즈창의 아내가 지둥 감옥 통지를 받았는데 “라이지창이 이미 죽었다!”고 했다.
가족들이 허둥지둥 감옥에 달려갔는데, 감옥 측에서는 1천 위안을 내야 만나게 해준다고 요구했다. 다음날 가족들이야 시신을 봤는데, 관 안에 누워 있는 사람은 이미 거의 1미터가 안 될 정도였고, 얼굴이 변형되어 사람 같지 않았다. 4, 5명의 경찰이 라이지창의 아내를 잡아당기며,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고, 만지지 못하게 하며, 수의를 갈아입히지 못하게 했다. 가족들이 시신을 집에 가져가서 보자고 요구했지만, 감옥 측에서 동의하지 않았고, 또 라이지창의 딸을 속여 서명하게 해서, 급히 유해를 화장했다.
24. 양즈슝, 감금 1년여간 건장한 남자가 박해당해 세상을 떠나, 죽을 때 입을 벌리고 눈을 크게 뜨고 있었음
양즈슝(楊智雄)은 허베이성 바오딩시 슝현 파룬궁수련자로, 2022년 8월 10일 세상을 떠났으며, 나이는 58세였다.
2022년 8월 10일 밤 8시 46분, 양즈슝은 허베이 탕산 셰허병원 중병 감시실에서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눈을 뜨고, 입을 벌리고 있었으며,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또 한 명의 선량한 사람이 이렇게 박해당해 죽었는데, 죽어도 눈을 감지 못했다.
양즈슝은 2022년 7월 2일 탕산 셰허병원 중증 감시실에 입원하기 전에, 계속 허리아픔, 다리아픔을 말했다. 그가 이틀 밤낮 혼수상태에 빠질 때까지, 감옥에서야 그를 병원에 보냈다. 7월 2일부터 8월 10일까지, 거의 40일간, 양즈슝은 계속 병원 중증 감시실에 있었는데, 소위 ‘전향’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족 면회가 제한됐다. 양즈슝이 세상을 떠난 후, 감옥의 경찰이 가족들에게 명확히 말했는데, 양즈슝이 전향하지 않았고, 만약 전향했다면, 이렇게 대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양즈슝은 원래 허베이 ‘법제일보’ 기자였고, 후에 스자좡 줘다부동산회사에서 판매를 주관했으며, 후에 베이징의 어떤 외국기업 회사에서 사무실 주임을 맡았다. 파룬따파 수련을 견지했기 때문에, 각각 2003년, 2012년, 2019년에 세 차례 불법 형을 선고받아, 각각 4년, 3년, 6년 6개월을 선고받았고, 세 차례 지둥 감옥에 끌려가 잔혹한 박해를 당했다.
양즈슝은 세 번째로 지둥분국 제5감옥 제5감구에 끌려갔다. 1년여 시간 동안, 감옥에서는 양즈슝이 집에 전화를 한 번도 하지 못하게 했고, 더욱이 화상 면회는 한 번도 없었다. 가족들이 간 적이 있었는데, 감옥에서 전염병을 이유로, 만나지 못하게 했다.
2022년 5월 및 6월, 감옥에서 가족들에게 두 번 전화를 걸었는데, 한 번은 양즈슝에게 생활비 500위안을 요구한 것이고, 한 번은 양즈슝의 요추 디스크 치료비 3천 위안을 위한 것이었다.
2022년 7월, 가족들이 감옥의 전화를 받았는데, 양즈슝이 중병이라고 하며, 탕산 셰허병원 중증 감시실에 입원했다고 하면서, 가족들에게 보러 오라고 했다. 가족들이 탕산 셰허병원에 와서, 양즈슝의 몸이 매우 말랐고, 몸에 수갑, 족쇄를 차고 있었으며, 각종 관을 꽂고 있는 것을 봤다. 의사가 소개하기를 “양즈슝은 골수종으로 진단됐는데, 몸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서, 화학요법을 감히 하지 못하고, 단지 수혈과 단백질을 공급해서, 그가 일부 회복한 후에, 다시 화학요법을 진행할 수 있다”고 했다.
짧은 1년여의 시간에, 건강하고 명랑한 건장한 남자에서, 허약하고 많은 병에 걸려 쓰러져서 죽기까지 박해받았는데, 양즈슝이 탕산 지둥 감옥에서 어떤 고문과 학대를 당했는지 모른다.
25. 가오전차이, 두 눈이 거의 실명, 출옥 한 달 여 만에 세상 떠나
가오전차이(高振才)는 1952년 1월 5일생으로, 카이루안 탄광 퇴직 직원이며 허베이성 탕산시 루난구에 거주했다.
2019년 7월 3일 오전 7시경, 가오전차이는 집에서 침입한 탕산시 루난공안분국 국보대대, 융훙차오파출소 십여 명의 경찰에 의해 납치되어 탕산 제1구치소에 불법 구금되었고, 이후 탕산 루베이검찰원과 법원에 의해 불법적으로 3년 6개월형을 선고받아 지둥 감옥으로 끌려가 박해를 받았다.
2023년 1월 2일, 가오전차이는 억울한 옥살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 그는 이미 감옥에서의 박해로 두 눈이 거의 실명되어 사물을 볼 수 없었고, 뼈만 남을 정도로 말라 생활을 스스로 돌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이때 그는 아내가 이미 한 달 여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나중에 친척들이 더 이상 숨길 수 없어 실상을 알려주자, 그는 목 놓아 울며 말했다. “공산당이 우리 가족을 너무 참혹하게 박해했다!” 2023년 2월 26일, 극심한 고문을 당한 가오전차이는 억울함을 품고 세상을 떠났으며, 향년 71세였다.
26. 쑹나이원, 생전에 각종 고문을 당하고 처량한 가운데 세상을 떠나
쑹나이원(宋耐文)은 허베이 첸안시 옌자뎬향 티링자이촌 사람으로, 향년 58세였다.
쑹나이원은 파룬궁을 수련하며 진선인에 따라 마음을 닦고 선을 향해 나아갔지만, 중공 집단의 고문 절반을 당했다. 구타, 담배꽁초로 지지기, 초강도 ‘훈련’, 전기봉으로 생식기를 30분간 전기고문, ‘팔꿈치 살’, ‘칼로 자르는 면’ 등.
2006년, 쑹나이원은 불법적으로 7년형을 선고받아 지둥 감옥 1지대로 보내졌는데, 경찰 정야쥔(鄭亞軍)이 그에게 세뇌를 시키며 천안먼 분신 위조사건을 보게 하여 ‘전향’시키려 했다. 그가 ‘전향’하지 않자 간수는 죄수들을 시켜 밤에 잠을 재우지 않고 매일 구타했으며, 낮에는 죄수 뤄루이(羅睿)가 감형을 위한 공을 세우려고 그를 화장실로 끌고 가서 구타했고, 쑨위룽(孫玉龍), 멍판강(孟凡剛) 두 사람이 함께 나서서 그의 명치를 때렸다. 지쳐서 때리지 못할 때는 그를 오랫동안 쪼그리고 앉게 하고 벌세우기를 시켰는데, 그때 그의 느낌은 정말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였다. 그는 고문을 견디지 못해 강요당해 마음에 없는 소위 ‘오서(五書)’를 썼다. 간수는 그를 밖의 플라스틱 덮개 작업장에서 일하게 했다. 그는 1지대에서 2년간 있다가 다시 8지대로 보내졌는데, 지대장 저우홍쥔(周紅軍), 류젠중(劉建忠)이 그에게 작업장 청소를 시켰다.
쑹나이원은 억울한 옥살이 기간이 만료되어 집으로 돌아온 후, 현지 파출소의 괴롭힘으로 인해 한동안 여기저기 떠도는 생활을 보낸 후, 집으로 돌아와 혼자서 궁핍하고 처량한 생활을 보냈다. 2014년에는 여전히 쇠약한 몸을 이끌고 외지로 나가 일해서 생계를 유지했다. 2015년 7월경, 그는 자신의 몸 한쪽이 제대로 되지 않고 팔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뇌혈전 증상과 같다고 느꼈으며, 재작년 집에서 넘어진 후 걸음걸이가 비틀거리는 모습이 되어 생활을 스스로 돌볼 수 없게 되었고, 2022년 7월 8일 세상을 떠났다.
27. 한쥔더, 생전에 박해로 한쪽 눈이 실명되고, 스스로 생활할 수 없게 됐으나 감옥 측은 보석 치료를 거부함
한쥔더(韓俊德)는 파룬궁을 굳게 지켰다는 이유로 불법적으로 구금과 강제노동을 당했고, 끊임없는 문 두드리기 괴롭힘과 감시를 받았다. 그는 박해를 피하려다 집을 떠나 유랑 생활을 했고, 고향에 돌아가지도 못했다.
2019년 8월 30일, 바오딩(保定)시 롄츠구(蓮池區) 공안분국 경찰들에게 납치됐고, 그 과정에서 갑자기 쓰러졌다. 의사는 즉시 입원 치료가 필요하다고 권고했으나, 경찰은 그의 생명을 아랑곳하지 않고 구치소에서조차 거부하는 상황에서 인맥을 동원해 억지로 바오딩 구치소에 불법 수감시켰다.
2020년 2월, 한쥔더는 바오딩시 가오양현(高陽縣) 법원에서 불법으로 징역 8년 6개월과 벌금 1만 위안을 선고받았다. 그가 탕산(唐山) 지둥 감옥으로 이송된 뒤, 감옥 측은 그가 ‘전향’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가족과의 서신, 통화, 면회를 전면 금지했다. 가족들이 나중에 알게 된 바에 따르면, 그는 장기간 심각한 빈혈에 시달렸고, 한쪽 눈은 거의 실명했으며 스스로 생활이 불가능했다. 외출 시에는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고, 언제든 생명이 위험한 상태였다.
한쥔더의 아내 푸구이(付桂, 당시 70대)는 남편의 보석 치료를 요구하며 동분서주했고, 각종 법률 문서를 우편으로 제출하며 진정과 항소, 고소를 이어갔다. 얼마 되지 않는 연금을 대부분 써버렸다. 그러나 2022년 4월 14일, 지둥 감옥에서 걸려온 전화로 오전 10시 35분에 한쥔더가 세상을 떠났다는 통보를 받았다. 향년 77세였다.
28. 바이싱궈, 출소 전 독극물 주사를 맞고, 귀가 20여 일 만에 억울하게 사망
바이싱궈(白興國, 83세)는 허베이성 청더(承德)시 펑닝만족자치현(豐寧滿族自治縣) 출신이다. 그는 2018년 1월 납치된 후 불법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아 지둥 감옥에 수감됐다.출소를 6개월 앞둔 시점에 감옥은 그에 대한 박해를 더 심화시켜 정체불명의 독극물 주사를 놓았다. 그 뒤로 바이싱궈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됐고, 정신도 오락가락했다.
2022년 1월, 감옥은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데려가라고 했고, 그가 이미 스스로 생활할 수 없는 상태임을 알렸다. 집에 돌아온 그는 생명이 위태로웠고, 불과 20여 일 만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29. 판잉순, 감옥에서 뜨거운 물을 끼얹혀 사망
판잉순(潘英順)은 허베이성 친황다오(秦皇島)시 칭룽현(青龍縣) 허우뉴산촌(後牛山村) 출신으로 의사였다. 그는 아내 자이수핑(翟素平)과 함께 현성에서 약국을 운영했으며, 2014년 봄부터 파룬따파를 수련했다.
2018년 1월 19일 오전, 부부는 약국에서 칭룽현 국보대대 경찰들에게 납치됐다.
2019년 1월 30일, 판잉순은 창리(昌黎) 법원에서 불법으로 징역 4년 6개월과 벌금 1만 위안을 선고받았고, 아내 자이수핑은 징역 4년 9개월과 벌금 1만 위안을 선고받았다. 같은 해 5월, 판잉순은 지둥 감옥 제5감구로 끌려가 박해를 받았다.
2021년 7월, 가족은 감옥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판잉순이 탕산 협화병원 중환자실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의 자녀 셋은 급히 병원으로 갔으나, 병원 측은 ‘코로나 방역’을 이유로 면회를 거부했다. 자녀들이 거듭 요청한 끝에 겨우 한 번 면회를 허락받았는데, 그때 판잉순은 이미 말을 못 하고,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며, 의식조차 없는 상태였다.
가족이 현장 감옥경찰에게 이유를 묻자, 경찰은 7월 6일 같은 감방 수감자가 뜨거운 물을 그에게 끼얹었고, 11일 감옥병원에 보냈다가 치료 불가로 19일 탕산 협화병원 중환자실로 이송했다고 말했다. 가족이 CCTV 영상을 보여 달라고 했지만 경찰은 거부했다.
2021년 7월 30일, 판잉순은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30. 거즈쥔, 박해로 정신 이상에 이르고 억울하게 사망
거즈쥔(葛志軍)은 허베이성 바오딩시 줘저우(涿州)시 쑹린뎬(松林店) 출신으로, 링윈(淩雲) 그룹 직원이었다. 그는 박해로 세상을 떠날 당시 겨우 42세였다.
어릴 적부터 몸이 약했던 거즈쥔은 7~8세 무렵 폐결핵을 앓아 온몸 모세혈관 출혈, 복부 팽창, 식욕 부진, 성장 장애에 시달렸다. 부모가 그를 데리고 여러 병원을 전전했으나 호전되지 않았고, 한 민간 의사의 침술로 다소 호전됐지만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다. 그는 늘 고개를 떨군 채 기운 없이 지냈고, 장기간의 병환으로 학업 성적도 부진했다. 13세부터 18세까지는 직장 병원에서 정기적으로 주사를 맞고 약을 먹으며 수액 치료를 받았고, 엉덩이는 주사로 붓고 다리도 절뚝였다.
1996년 8월, 18세 때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한 뒤 불과 한 달 만에 모든 질병이 사라졌다. 그는 진선인(眞·善·忍)의 기준에 따라 자신을 엄격히 요구하며 어디서나 남을 먼저 배려했고, 직장에서는 성실히 일했으며, 이웃들과도 화목하게 지냈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쥔얼(軍兒)’이라고 불렀는데, 누군가 가스통을 옮기거나 짐을 나를 일이 있으면 ‘쥔얼’ 하고 부르는 순간 달려가 도왔다. 이웃들은 그를 칭찬하며 손가락을 치켜세웠고, 보기 드문 착한 청년이라 했다.
2001년, 베이징에서 진상을 알리던 중 납치돼 불법으로 징역 8년을 선고받고 만청 감옥과 스자좡 제4감옥에서 온갖 고문을 당했다.
2014년에도 또다시 불법 체포돼 징역 4년을 선고받았고, 그해 8월 지둥 감옥에 끌려갔다. 2019년 2월 5일, 그는 지둥 감옥에서 집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정신 이상 상태였고, 횡설수설하며 수염을 길게 기른 채 방 안에 틀어박혀 지냈다. 결국 2020년 11월 29일, 거즈쥔은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31. 볜췬롄, 두 차례 지둥 감옥에 수감돼, 사경에 이른 뒤에야 석방
볜췬롄(邊群連)은 허베이성 청더시 출신 파룬궁수련자다. 그는 1951년 12월생으로, 1996년부터 파룬궁을 수련해 도덕적으로 성장했고 병 없이 건강한 삶을 누리게 됐다. 그러나 그는 두 차례 지둥 감옥으로 끌려가 박해를 당했다. 2005년 4월 18일, 납치된 뒤 불법으로 징역 8년을 선고받아 지둥 감옥 제5지대 2중대로 끌려갔다. 그는 네 명의 수감자 ‘감시자’에게 24시간 교대로 감시·괴롭힘을 당하며 어떤 자유도 누리지 못했다.
2016년 7월 8일, 그는 다시 납치돼 징역 6년을 선고받고 2017년 4월 지둥 감옥으로 보내졌다. 2020년 1월 초, 병원에서 직장암 판정을 받았다. 같은 해 4월 13일 전후, 탕산(唐山) 협화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으나 감옥 측은 가족의 간호를 허락하지 않았고,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게 했다. 퇴원 후에도 그는 비인간적으로 감옥에 다시 수감됐다.
2020년 8월 8일 밤, 가족은 지둥 감옥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볜췬롄을 집으로 데려가라는 통보를 받았다. 다음 날, 경찰차가 앞장서고 뒤에 구급차가 따라오며 그를 이송했다. 그는 위관 삽입 상태였고,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거리에서 사법 인력이 사진을 찍은 뒤 절차를 거쳐 가족에게 인계했다.
당시 그는 고열로 의식이 흐렸고, 친동생조차 알아보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이미 음식을 전혀 먹지 못했고, 직장암은 전이돼 있었다. 결국 가족과 단 4일을 함께한 뒤, 2020년 8월 12일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향년 69세였다.
32. 차오진싱, 지둥 감옥에서 박해로 사망
차오진싱(曹進興)은 탕산(唐山) 출신 파룬궁수련자로, 농기국 퇴직 직원이었다. 향년 69세로 생을 마쳤다. 2020년 5월 30일 오전 8시경, 가족은 지둥 감옥 측으로부터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2020년 6월 2일 오전, 가족이 지둥 감옥에 도착했을 때, 감옥 측은 수감 중의 일부 기록을 보여줬으나 촬영이나 필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가족은 기록에서 차오진싱이 이미 2018년에 중병 진단을 받았음에도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했고, 그 사실조차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또한 그는 감옥에서 줄곧 강제노동을 강요당했다. 감옥 측은 ‘정상적인 사망’이라고 주장하며 가족에게 약간의 경제적 보상을 고려할 수 있다고 했다.
차오진싱은 2017년 6월 7일, 중공의 ‘문 두드리기 행동’(파룬궁수련자 집에 찾아가 괴롭히며 신앙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행위) 중 탕산시 루베이구(路北區) 원화로(文化路) 파출소 경찰들에게 납치됐다. 그 과정에서 경찰에게 내던져져 상처를 입고 꿰매야 했으며, 불법 가택수색으로 3시간 넘게 집안이 수색되고 많은 개인 물품이 강탈당했다. 이후 그는 불법으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았고, 2018년 11월 지둥 감옥에 수감된 뒤 가족과의 면회는 단 한 차례도 허락되지 않았다.
2020년 5월 30일 오전 8시 경, 차오진싱의 가족은 지둥 감옥으로부터 차오진싱이 ‘심장돌연정지’로 사망했다는 통지를 받았다.
그가 감옥에서 어떤 박해를 더 받았는지는 감옥 측의 철저한 봉쇄와 은폐로 인해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제3부: 허베이 지둥 감옥에서의 박해는 중공 체제적 악행의 일부
중공의 사악한 정치 아래에서는 악한 자들이 제멋대로 날뛰고, 선한 사람들은 제 자신을 지키는 것조차 어려울 뿐 아니라 오히려 중공의 박해와 ‘전향’ 대상이 된다. 중국 민간에는 여러 독충을 항아리에 넣어 서로 물고 뜯게 하여 마지막에 살아남은 독을 ‘고(蠱)’라 부르는 풍습이 있다. 중공은 사람을 속이고 통제하는 데 능숙하여, 마치 이런 ‘고’를 길러내는 고수와 같다. 사람을 이렇게 다루듯, 감옥 운영에서도 똑같이 적용한다. 수많은 감옥 가운데서 파룬궁수련자를 가두고 박해하는 장소로 선택된 감옥은 그야말로 독 중의 독, ‘고’라 할 만하다. 이 감옥들은 서로 경쟁하듯 더 잔혹한 수법을 배우고 따라 하면서, 중공이 박해를 강화하는 데 있어서 믿고 쓰는 도구가 됐다. 거꾸로 말하면, 감옥들이 이렇게 제멋대로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은 바로 중공이 체제적으로 ‘살인을 해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전폭적인 보장을 해주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살인자는 흉기를 사용하지만, 중공은 거꾸로 의술을 이용해 살인을 한다. 파룬궁수련자의 장기를 산 채로 적출하는 것이 그렇고, 감옥에서의 고문 역시 그러하다. 종종 이런 보도가 있다. 감옥경찰은 한편으로는 죄수를 시켜 파룬궁수련자를 죽을 때까지 괴롭히라고 지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의사를 대기시켜 ‘응급조치’를 준비시킨다. 얼핏 기괴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두 가지 계산이 있다. 첫째, 피해자가 고문 끝에 죽으면 ‘응급했다’는 영상이나 ‘외부 병원으로 이송했다’는 증거를 남기려는 것이다. 둘째, 수련자의 장기가 이미 손상돼 생명이 위태로울 때, 경험 있는 의사가 생존 기간을 가늠해 ‘병보석’ 형식으로 집에 돌려보낸 뒤 며칠 안에 죽도록 만드는 것이다. 명혜망에 실린 ‘남편이 한창나이에 박해로 숨지자 런구이팡(任桂芳)은 계속 억울함을 호소했다’는 기사 속 왕강(王剛) 수련자가 바로 이런 경우였다. 여기서 우리가 다루려는 주제는, 중공이 각급 정법 기관을 어떻게 조종해 유가족의 국가배상 청구를 차갑게 거부하는가이다.
허베이성 줘저우시 이허좡향의 왕강은 마을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파룬따파를 수련하며 착하게 살았다는 이유로 2002년 7월 22일 줘저우시 공안국에 의해 불법적으로 체포돼 고문을 당했고, 2004년에는 10년 징역형을 선고받아 바오딩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감옥경찰의 고문으로 오른쪽 허벅지가 괴사해 절단 수술을 당했지만, 가족에게는 철저히 숨겼다. 2007년 6월에는 비밀리에 탕산 지둥 감옥으로 옮겨져 박해를 이어갔고, 2009년 10월 14일 생명이 위급해지자 어쩔 수 없이 ‘병보석’ 형식으로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불과 17일 뒤인 10월 31일, 그는 억울하게 숨지고 두 어린 자녀만 남겼다.
향년 41세의 왕강이 숨진 후, 아내 런구이팡은 남편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곳곳을 찾아다니며 국가배상을 요구했다. 그녀는 후진타오, 원자바오에게 편지를 보냈고, 국무원 신방판, 사법부, 공안부, 허베이성 사법청, 허베이성 공안청, 허베이성 감옥관리국, 그리고 관련 감옥에까지 호소했으나 모두 묵살됐다.
2011년 8월 1일, 런구이팡은 허베이성 고급법원 배상위원회에 배상 결정을 요청하는 신청서를 제출했고, 그날 바로 접수됐다. 성 고법 배상위는 감옥 측과 배상 협의를 시도했고, 감옥 측도 일부 보상 의사를 내비쳤다. 그러나 ‘610사무실이 개입하면서 기한 내에 공정한 처리가 나오지 못했다. 13개월의 우여곡절 끝에 바오딩 감옥과 탕산 지둥 감옥은 모두 불법적으로 ‘불배상’ 결정을 내렸고, 허베이성 감옥관리국도 이를 유지하는 불법 결정을 내렸다. 결국 2011년 12월 23일, 허베이성 고급법원 배상위는 ‘유지’ 결정을 내리며 모든 사실을 부인하고 관련 가해자들에게 아무런 형사·경제적 책임도 묻지 않았다.
이에 런구이팡은 이에 불복해 2012년 1월 17일, 중국 최고법원 배상위원회에 다시 상소했다.
왕강의 배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근본적인 원인은, 단순히 두 감옥이 왕강에 대한 고문으로 왕강의 우측 대퇴부 혈액순환 장애를 일으켜 장애를 초래하고 결국 절단에 이르게 했으며, 수술 후에도 계속 학대하고 적시 치료를 받지 못하게 하며 적시에 병보석을 하지 못하게 하여 생명이 위험해져서야 어쩔 수 없이 돌려보내 집에 돌아온 지 18일 만에 억울함을 품고 세상을 떠난 사실을 부인한 것뿐만 아니라, 허베이성 감옥관리국과 성 고등법원 배상위원회 접수 기간 중에 정법위 서기 저우융캉의 직접 지시 하에 두 감옥 소재지와 성정법위, 610이 직접 개입하여 방해를 조성했기 때문이다.
제4부: 정의는 사람 마음에 있으며, 박해를 막고 줄이기 위한 건의
진선인(眞·善·忍)의 가치는 모든 사람 생명의 근본이며, 또한 모든 생명 내심 깊은 곳의 기쁨과 행복의 원천이다. 진선인을 굳게 지키며 좋은 사람이 되려는 사람은, 설령 나쁜 사람들이 모인 곳에 있더라도, 설령 한때 차별과 냉대 및 잔혹한 대우를 받았더라도, 결국 수련자의 덕행과 품행는 사람들의 존경을 얻게 될 것이다.
감옥에 있는 다수의 죄수들조차 가장 존경하는 이는 확고한 파룬궁수련자들이며, 가장 경멸하는 대상은 수련자를 박해하는 감옥경찰과 죄수들이다. 또한 두려움에 굴복해 수련을 배신하거나 악의 앞잡이가 된 수련자들도 경멸한다. 많은 죄수들은 수련자를 박해하기를 원하지 않고, 오히려 도움을 주기도 한다. 2018년, 한 파룬궁수련자가 새로 수감됐을 때, 교육과장이 죄수들에게 폭행하라고 지시했으나, 세 명의 죄수는 손을 대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너를 치면, 나중에 죄를 뒤집어쓸 수 있다. 앞으로 함께 지내야 하는데 어떻게 얼굴을 보겠느냐”고 귀띔해줬다.
어떤 파룬궁수련자들은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감옥에서 진상을 알리며 정념정행하여, 일부 간수와 죄수들이 미래를 올바르게 선택할 기회를 갖게 했다. 한 파룬궁수련자는 안전을 위해 그의 성명을 숨겨두는데, 그는 매일 가부좌를 할 수 있었고, ‘대반(大班)’(죄수의 우두머리)이 관여하지 않았으며, 다른 죄수들도 대반이 관여하지 않는 것을 보고 모두 관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수련자는 매일 작업을 마치고 돌아온 후 주동적으로 지대장 사무실에 가서, 들어가면 지대장에게 진상을 알렸다. 시간이 지나자 지대장도 그를 보기 무서워하며 늘 그를 피했다. 또 다른 파룬궁수련자는 ‘전향’하지 않았는데, 지대에서 또 ‘전향’반을 개최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대장을 찾아가 참가하기를 요구했다. 지대장은 듣고 보니 스스로 주동적으로 가기를 요구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당연히 기뻐하며 동의했다. ‘전향’반에 가서는 그는 경찰에게 진상을 알리고 사악하게 깨달은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렸다. 그곳에는 많은 대법 경문이 있었기 때문에, 이 파룬궁수련자는 또한 매일 법을 배울 수 있었다. 몇 차례 간 후, ‘전향’반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그를 오지 못하게 하며 말했다. “당신이 오면 자신은 전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전향에도 영향을 준다. 앞으로 당신이 다시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게 하겠다!”
박해받는 수련자의 가족들에게 호소한다. 감옥 속 가족의 진짜 상황을 알고, 매달 몇백 위안 정도의 생활비를 제공해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하며, 면회와 통화 권리를 적극적으로 행사해야 한다. 가족이 부당하게 학대받는 사실에 대해 용기 있게 폭로하고, 항의하고, 고소해야 한다.
법률을 아는 친구들은 박해받은 파룬궁수련자 가족들이 법률소송의 형식을 잘 활용하여 중공 감옥이 중공 자신이 제정한 법률을 준수하도록 촉진하는 것을 도와주시기 바란다. 예를 들어 정부정보공개와 옥무공개, 당사자가 감옥, 감옥관리국, 사법국(청)에 대해 행정복의와 행정소송을 하는 권리를 행사하여, 법률 형식을 이용해 중공 법정의 원고 위치에 서서 중공 감옥의 박해 악행을 고발하는 것이다.
또한 국내외 인권단체와 언론이 목소리를 내어, 중공이 신앙을 박해하는 실태를 드러내고, 감옥에서 벌어지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 진상이 널리 알려질 때, 사악은 종말을 맞게 된다.
원문발표: 2025년 9월 1일
문장분류: 중국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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