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1.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다
저는 1948년 동북(東北)의 한 외딴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제 위로 두 명의 오빠가 있었는데, 한 명은 8살에 요절했고 한 명은 3살에 요절했습니다. 아마 어머니께서 오빠들을 그리워하며 기분이 좋지 않으셔서 그런지 저는 태어날 때부터 허약하고 병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젖을 떼기도 전에 어머니께서 바로 아래 여동생을 임신하셨고, 젖을 먹지 못하게 된 저는 매일 감자를 먹었습니다. 집에서는 매 끼니 식사 후에 아궁이에 감자 두 개를 묻어두었는데, 그것이 저의 다음 끼니 식사였습니다.
감자를 오랫동안 먹다 보니 위장이 견디지 못해 저는 온종일 설사를 했고, 나중에는 목조차 가누지 못하게 됐습니다. 어른들이 안아 올리면 관절이 어긋날 정도였고(탈수 증상), 몸에서는 악취가 났으며,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는 놀라서 계속 우셨습니다. 이웃에 어머니와 아주 친하게 지내는 루(路)씨 큰언니가 있었는데, 의술을 행하는 연로한 아버지에게 가서 작은 환약 한 봉지를 얻어다 줬고 그것을 먹자 나았습니다. (수련한 후에야 저는 그때 이미 사부님께서 저를 보살펴 주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릴 때 저는 하늘을 나는 꿈을 자주 꿨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자주 보았습니다. 때로는 온돌 돗자리 무늬가 아주 크게 변하는 것을 보기도 했는데, 말해도 어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저는 9살에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비록 작고 마른 데다 병약했지만, 저는 아주 총명했고 공부를 잘해서 선생님들이 모두 저를 좋아해 학습 위원과 학급 간부를 맡기셨습니다. 중학교 3년 동안 저는 체육 수업과 노동 수업을 들어본 적이 없었고, 중학교 졸업 신체검사 때 체중이 35kg도 되지 않았습니다. 중등전문학교에 합격해 외지로 학교에 가던 기차 안에서 옆자리에 앉은 노부인이 대뜸 제게 “아가씨, 병원에 진찰받으러 가는 거야?”라고 물었을 정도였으니, 그때 제 몸 상태가 어땠는지 알 만할 것입니다.
남편은 저의 중등전문학교 동창이었습니다. 교제할 때 저는 그에게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해. 내가 당신과 20년은 함께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라고 말했습니다. 제 몸이 그 정도 시간밖에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결혼 후 위로는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할머니 등 세 분의 노인을 모셔야 했고, 아래로는 연년생 두 아이가 있었으니 생활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일도 바빴고, 저 자신이 승부욕이 강한 사람이어서 무슨 일이든 성과를 내고 싶어 했습니다. 오로지 저 혼자 힘으로 악착같이 일하면서 적지 않은 고생과 고통을 겪은 끝에 중간 간부 자리까지 올랐습니다(당시에는 뇌물을 주는 일이 없었습니다). 본래부터 허약한 체질이었는데 이렇게 무리하다 보니 점차 각종 병이 찾아왔습니다. 저혈당, 위하수, 담낭염, 두통, 심각한 류머티즘을 앓았고, 엉덩이 아래부터 양발까지 일 년 내내 얼음처럼 차가웠습니다.
해마다 한두 번씩은 병원에 입원해야 했습니다. 낮에 출근해서는 멀쩡한 사람 같았지만 집에 돌아오면 온몸이 부서져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남편은 저를 바람만 불어도 쓰러질 듯한 임대옥(林黛玉, 소설 홍루몽의 연악한 여주인공) 같다고 조롱했고, 시어머니는 파리가 뒷발질만 해도 제가 사흘은 누워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 고목이 봄을 만나다
지난 세기 70년대 말, 중국에 기공 열풍이 불었습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 저는 여러 기공을 찾아다니며 배워 연마했지만 모두 효과가 없어 포기했습니다. 1996년 여름, 한 미용사가 제게 파룬궁(法輪功)을 추천했습니다. 저는 다른 기공과 똑같을 것으로 생각하고 단번에 거절했습니다. 그 미용사가 말했습니다. “이 공법은 달라요.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하게 하는 데 신기한 효과가 있어요. 여기 파룬궁 수련 이야기 책이 한 권 있으니 일단 가져가서 읽어보고 나서 말해요.” 건강에 신기한 효과가 있다는 말에 이끌려 저는 간이 제본된 ‘수련 이야기’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상하게도 저는 이 ‘수련 이야기’만 보면 졸음이 쏟아져서 한숨 자고 일어나 다시 읽기를 반복했습니다. 다 읽고 나니 이 공법이 매우 신기하고 조금은 오묘하고 신비롭다고 느꼈습니다. 저는 이런 호기심을 안고 현지 파룬궁 보도소에서 여는 제6기 파룬궁 전수반에 참가했습니다. 그곳에서는 사부님의 지난(濟南) 설법 비디오를 틀어줬습니다. 제 상황은 딱 사부님께서 ‘전법륜(轉法輪)’에서 하신 말씀과 같았습니다. “어떤 소수의 사람은 또 잠을 잘 것인데, 내가 강의를 끝내면 그도 잠을 깬다. 무엇 때문인가? 그의 머리 안에 병이 있어 그에게 조정(調整)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머리를 조정하면, 그는 전혀 견뎌내지 못한다. 그래서 반드시 그를 마취 상태로 들어가게 하는데, 그는 알지 못한다.” 저는 첫날 강의를 들을 때 주체할 수 없이 졸려서 책상에 엎드린 채 강의 시간 내내 잠을 잤습니다. 둘째 날에는 조금 일찍 가서 맨 앞줄에 앉았고 이러면 졸리지 않을 줄 알았는데, 결과는 여전히 졸려서 또 한 시간 내내 잠을 잤습니다. 그 후로 저의 두통이 나았고 난시 안경도 벗었으며 30년 동안 한 번도 재발하지 않았습니다. 은사님, 감사합니다!
저는 원래 일을 앞장서서 처리하기 좋아하는 성격이라, 수련생들이 만장일치로 저를 법공부 장소의 책임자로 추천했고 저도 기꺼이 맡았습니다. 20~30명 정도 모이는 법공부 장소에 마땅한 공간이 없으면 안 되기에 공장 관련 부서를 찾아가 상의했습니다. 그들은 적극 지지해주며 비어 있는 탁아소를 무상으로 빌려줬습니다. 어떤 동료는 “퇴직하더니 자기 스스로 또 벼슬자리를 하나 만들었네”라며 비웃었지만 저는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 돈을 내어 법공부 장소에서 연공에 쓸 녹음기, 카세트테이프, 비디오테이프를 샀고, 비디오 플레이어와 컬러 TV는 우리집 것을 사용했습니다. 수련생들이 돈을 갹출하려 했지만 제가 못 하게 했습니다. 제가 재직 중에 받지 말았어야 할 돈을 챙겨서 덕을 잃고 업을 지었으니, 그 돈을 대법에 쓰는 것이 양심에 거리낄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당시에는 그렇게 깨달았습니다). 저는 매일 아침 5시에 녹음기를 들고 법공부 장소로 갔고 다 같이 동공을 연마했으며, 저녁 6시에는 다 같이 법공부를 하고 정공을 연마했습니다.
저의 그 많던 병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다 사라졌고 언제 나았는지조차 몰랐습니다. 정말 고목이 봄을 만난 격이었습니다. 저는 매일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기쁨을 느꼈고, 태어나서 그때까지 병이 없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처음 알게 됐습니다!
그 당시 저는 수련생들과 함께 농촌에 내려가 홍법을 했는데, 40~50리 길을 왕복해도 피곤하지 않았고 25kg짜리 밀가루를 메고 5층까지 올라가도 숨이 차지 않았습니다. 시어머니는 너무 놀라워하셨습니다. “늘 시름시름 앓던 사람이 파룬궁을 배우더니 어쩜 이렇게 순식간에 딴사람이 됐을까?!” 그래서 시어머니는 사람만 만나면 파룬궁이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3. 자비심을 닦아내어 다른 사람을 선하게 대하다
1) 시아버지를 선하게 대하다
시아버지는 농민 출신으로 아주 부지런하고 고생도 잘 견디셨지만, 생활 태도가 방탕해 여기저기서 외도를 하셨고 나중에 강간죄로 8년형을 선고받으셨습니다. 1년도 안 돼 시아버지는 병보석을 받아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저는 시아버지를 똑바로 쳐다본 적도 없고 말도 섞지 않았으며, 밥상에 같이 앉아 밥을 먹지도 못했습니다. 쳐다보기도 역겨웠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시어머니도 감히 반박하지 못했고, 시어머니는 심지어 “똑같은 밥 반찬인데 어디서 먹든 다 똑같지”라고 하셨습니다. 손님이 와도 시아버지가 창피해 방에서 나오지 않게 했습니다. 시아버지는 제가 퇴근해서 돌아오는 소리만 들으면 얼른 자기 방으로 들어가 계셨고, 어쩌다 마주치기라도 하면 즉시 몸을 돌려 벽을 향해 서 계셨는데 마치 감옥에 있을 때처럼 하셨습니다.
이 일 때문에 친정어머니가 천 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찾아오셔서 저를 타이르셨습니다. 아무리 상대방이 잘못했어도 그 업보는 본인이 짊어질 테니, 그래도 어른인데 무안을 줘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저의 친오빠와 남편의 외삼촌까지 오셔서 저를 말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저는 오히려 그럴듯하게 “마왕야(馬王爺)에게 눈이 세 개 달린 걸 알게 해줘야 해요.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줘야 한다고요”라고 말했습니다.(역주: 마왕야는 눈이 셋 달린 사나운 중국 민간의 신으로 ‘마왕야 눈이 셋인 줄 알게 해준다’는 ‘따끔한 맛을 보여준다’는 뜻) 그러면서 제가 꽤나 대단해서 시아버지를 꼼짝 못 하게 제압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법을 얻은 후, 제가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시아버지에 관해 제가 어리석은 짓을 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제가 온종일 그분을 노려보고 호통치며 밥상에서 같이 밥도 못 먹게 했으니, 그분께 제가 얼마나 많은 덕을 주었겠습니까? 게다가 이것은 큰 불선(不善)이었습니다. 저는 얼른 사부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사부님, 제가 틀렸다는 걸 알았습니다. 반드시 고치겠습니다.” 법의 위력은 참으로 컸습니다. 저는 시아버지를 다시 쳐다봐도 짜증이 나지 않았고, 밥 드시는 모습을 봐도 구역질이 나지 않았습니다. 시아버지는 너무 기뻐서 밖에 산책을 나가셨다가 남들이 버린 대법 자료를 보면 다 주워 제게 가져다주셨고, 주워 온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 작은 현수막을 자기 침대 머리맡에 걸어두기까지 하셨습니다.
시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시아버지는 12년을 더 사셨고 반년 동안 앓아누우셨는데 거의 제가 병간호를 했습니다. 시아버지는 예전에 성 기능 강화 약을 드신 탓에 골다공증이 생겼고, 통증이 시작되면 어디가 아픈지도 모를 정도로 송곳으로 찌르듯이 아파서 “아이고 아버지, 아이고 어머니!”를 연발하셨으며 진통제를 먹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분께 “진심으로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를 외워보세요. 저희 사부님만이 아버님을 구해주실 수 있어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시아버지는 정말로 믿으시고 그 구절을 외우셨을 뿐만 아니라, “파룬따파 사부님, 저 좀 구해주세요!”라고 소리쳐 부르기까지 하셨습니다. 외우다 보니 시아버지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았고 마치 주무시는 것처럼 편안해졌습니다. 그렇게 5일 밤낮을 보낸 후 시아버지는 평온하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2) 사돈댁을 선하게 대하다
사돈댁은 저와 나이가 비슷했습니다. 학교에 며칠 다니지 못해 말투가 거침이 없었고, 남을 쏘아붙이는 말이 입 밖으로 툭툭 튀어나왔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사돈댁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두 집안이 사돈을 맺은 후 어떤 지인들은 제게 “딸이 시댁을 잘못 골랐군”이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사돈댁의 평판이 좋지 않고 집안도 가난하다는 뜻이었습니다. 사돈어른이 병환이 있어서 손자를 보지 못할까 걱정하셨기에 두 아이는 서둘러 결혼했습니다.
딸이 결혼한 지 3년 만에 사돈어른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사돈댁은 경제적 수입원이 없었기에 저는 딸 부부를 우리집으로 이사 오게 하고, 집을 비워 사돈댁이 세를 주어 수입을 얻게 했습니다. 저는 좀 특별한 반찬을 만들 때마다 사돈댁을 불렀습니다. 시간이 지나니 습관이 돼서 어쩌다 한 번 빼먹으면 사위가 “우리 엄마는 왜 안 오셨어요?”라고 묻거나, 제 외손자가 “우리 할머니는 왜 안 왔어요?”라고 물을 정도였습니다. 마치 한 가족처럼 지냈습니다.
제 심성이 아주 큰 시험을 받은 일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딸이 결혼할 때 제가 혼수로 해준 금목걸이를 잃어버린 사건입니다. 그 금목걸이는 제가 금광에 있는 지인에게 부탁해 세공한 것으로, 디자인이 독특하고 예뻤으며 30여g 나갔고 귀걸이와 세트였습니다. 딸이 화장대 서랍에 넣어두었는데 감쪽같이 사라졌고, 다른 귀걸이나 반지 같은 패물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때는 사돈어른이 아직 살아계셨는데, 마음씨 착한 제 딸은 시아버지께서 속상해하실까 봐 제게 계속 말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여름이 되어 제가 딸에게 왜 목걸이를 차지 않느냐고 묻자 그제야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다들 “도둑이 훔쳐 갔다면 몽땅 다 쓸어 갔겠지, 그럼 누가 그랬는지 뻔한 거 아니야?”라고 수군거렸습니다. 저도 마음속으로 오랫동안 얽매였습니다. 수련인은 법에서 깨달아야 합니다. 사부님께서는 “모든 것이 다 인연관계가 있다”(전법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도 전생에 제가 사돈댁께 빚을 졌을 테니 그걸 갚은 셈 치자고 여겼습니다. 저는 변함없이 사돈댁을 대했습니다.
기억하기로 제가 어느 해에 고향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고향집에 도착한 지 이틀째 되던 날 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시어머니가 발목을 삐어 골절상을 입었는데, 시어머니 댁이 너무 추워서 우리집으로 모셔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딸과 딸의 시누이, 아주버니 부부는 모두 직장에 다니고 있어서, 딸이 제게 돌아와 시어머니를 좀 보살펴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두말없이 돌아왔습니다. 사돈댁은 우리집에서 한 달 넘게 머물렀고, 저는 맛있는 음식과 마실 것을 대접하며 정성껏 모셨습니다. 사돈댁은 계단을 내려갈 수 있게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사돈댁은 사람만 만나면 제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어떻게 정성껏 간호해 줬는지 이야기하셨습니다.
사돈댁은 자주 고물을 주우러 다녔는데, 가끔 진상 소책자나 CD를 주우면 깨끗이 닦아서 제게 가져다주셨습니다. 원래 사돈댁은 허리와 다리가 아파서 약을 먹고 물리치료를 받아도 소용이 없었는데, 나중에 어느 틈엔가 저절로 나았습니다. 제가 사돈댁께 대법 자료를 주운 덕분에 복을 받은 것이라고 알려드리자 아주 굳게 믿으셨습니다. 어느 해 사돈댁께서 농촌 고향에 가실 때 제게 진상 스티커를 달라고 하셔서 제가 좀 챙겨 드렸습니다. 고향에서 돌아온 후 사돈댁은 마을 전체에 스티커를 다 붙였다고 하셨습니다. 나중에 마을 치안 보위 주임이 찾아와 더 이상 못 붙이게 해서, 남은 몇 장은 제게 도로 가져다주셨습니다.
3) 시동생을 선하게 대하다
시동생은 저희가 결혼하기 전에 군대에 입대했습니다. 저희 부부는 결혼 후 어르신들의 호적 문제를 해결해 도시 호구로 바꿨습니다. 덕분에 시동생도 제대 후 혜택을 봐서 도시 호구가 됐고 직장도 배정받았습니다. 나중에는 저희가 장가까지 보내 가정을 꾸려줬습니다.
동서는 아주 무뚝뚝한 사람으로, 돈을 끔찍이 아꼈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렇게나 낭비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마음에 드는 옷이 있으면 사서 며칠 입다가 버렸고, 솜옷과 솜바지는 해마다 겨울에 샀다가 봄이 되면 내버렸습니다. 반면 타인이나 가족에게는 아주 이기적이어서 살림살이 하나 장만하지 않았고, 집에 외부 사람이 두 명만 와도 덮을 이불조차 없었으며, 솥이나 그릇 등 주방 집기도 아주 적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사할 때는 손수레 하나면 다 해결될 정도였습니다. 해마다 설이 되면 그들은 빈손으로 와서 밥만 먹고 훌쩍 가버렸고, 어르신 부양비는 아예 입 밖에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시아버지는 살아생전에 저희에게 불공평하다고 여기셔서 몇 번이나 그들을 불러 따지려 하셨지만, 그때마다 제가 막았습니다. 저는 “저희 집에 계시면 먹고 마실 게 부족하지도 않고, 비록 큰 호강은 못 하셔도 그렇다고 딱히 고생하시는 것도 아닌데 그깟 돈 몇 푼 받아내서 뭐 하시게요? 기분만 상하잖아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2020년에 동서가 장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시동생은 겁이 많은 성격이라 혼자 집을 지키며 살기 힘들어했습니다. 저는 남편과 상의해 시동생을 우리집에 와서 살게 하자고 했습니다. 우리집은 방이 3개라서 시동생에게 방 하나를 내어줄 수 있었습니다. 남편은 무척 기뻐하며 제가 이렇게 도량이 넓을 줄 몰랐다고 했습니다. 시동생은 우리집에서 3년이 채 안 되게 살았습니다. 처음에는 생활비를 내지 않았는데 나중에는 자기 스스로도 그건 아니라고 여겼는지, 자신도 퇴직연금이 있고 이곳에서 방세도 안 내니 아무래도 생활비라도 보태야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시동생은 때로는 500위안을 내고, 때로는 조금 더 많이 내기도 했습니다.
시동생은 밖에서 누가 파룬궁이 안 좋다고 말하기만 하면 그 사람과 논쟁을 벌인다며 자주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형수가 바로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인데 원래는 병을 달고 사는 약골이었지만, 파룬궁을 연마하고 온몸의 병이 다 나아서 20여 년간 주사 한 번 안 맞고 약 한 번 안 먹었어. 어르신들께 효도하고 우리한테도 아주 너그럽고 관대해.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누구든 도와주는 정말 착한 사람이야. 사람들이 다 형수 같으면 이 사회가 좋아질 텐데.” 나중에 시동생은 외지에서 다시 가정을 꾸렸고, 매년 아내를 데리고 저희를 보러 왔습니다.
다른 사람을 선하게 대하고 기꺼이 베푸는 것이 이미 저의 일상이 됐습니다. 이것은 대법이 저를 이렇게 빚어주신 것이고 사부님께서 제게 하사하신 은혜입니다. 제 이야기는 아직도 많지만 모두 지극히 평범한 일들입니다. 저는 지금도 ‘진선인(眞·善·忍)’에 따라 저의 서약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2026년 명혜망 중국법회 원고)
원문발표: 2026년 11월 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6/11/2/51593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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