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법회] 대법에 동화되고 덕으로 원한을 갚으니 사람 구함에 위태롭지 않다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1998년 3월 아버지가 제게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를 수련한다고 하시며 이 공법이 아주 좋으니 저도 연공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파룬따파 수련에 들어섰습니다. 그때 저는 뇌경색에 걸린 시아버지를 모시고 있었는데 시아버지가 여러 해 동안 저를 학대했던 일을 생각하면 마음속에 억울함과 원망이 가득했습니다. 대법을 수련한 뒤 얼음덩이 같던 제 마음속 원망이 무너지기 시작해 조금씩 녹아내렸습니다.

1. 시부모님과 함께 생활한 10년

저는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고 올해 70세입니다. 1981년 25세 되던 해에 이웃 마을로 시집갔습니다. 남편은 집안 장남이었고 밑으로 학교에 다니는 시누이 세 명이 있었습니다. 시어머니는 병약해 겨우 밥이나 지을 정도였고 시아버지는 경찰로 무술을 익혀 체포술이 아주 뛰어났습니다. 제가 결혼해 막 시집에 들어서자 시아버지는 사나운 말투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집은 내가 결정한다. 내가 연탄이 희다고 하면 흰 것이고 내가 연탄이 네모나다고 하면 네모난 것이다. 네가 둥글다고 하면 안 된다.”

남편은 출근했기에 집안의 무거운 짐은 제 몫이 됐습니다. 집에서 늙은 어미 돼지 한 마리를 키워 매년 두 배씩 새끼를 낳았고 저는 돼지 먹이를 주고 돼지풀을 베고 돼지우리를 치워야 했습니다. 또 복숭아밭 5무(畝, 1무는 약 200평)와 텃밭 5무도 도급받았으며 날마다 생산대에 나가 일해야 해서 발 디딜 틈 없이 바빴습니다. 남편은 일주일에 하루를 쉬며 일을 거들어 줬지만 때로는 쉬지 못했습니다. 시누이 세 명이 학교에 다니느라 지출이 커 남편의 월급은 매달 시어머니에게 돌아갔습니다.

저는 임신했지만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어 사과 하나, 달걀 하나 먹어 보지 못했습니다. 신 음식이 먹고 싶으면 밭에 가서 산대추를 땄습니다.

시누이 세 명이 차례로 배우자를 찾기 시작하자 시아버지는 그들을 심문했고 저에게도 반드시 배석하라고 시켰습니다. 자주 한밤중까지 때로는 날이 밝도록 심문했습니다. 졸리고 피곤했지만 저는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텼습니다. 생활의 고난은 이를 악물면 견딜 만했지만 가장 괴로운 것은 시아버지의 욱하는 성질과 억지스러움이었습니다. 제 말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손찌검을 했고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때리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식사를 마치고 제가 설거지를 하러 갔습니다. 아들이 먹다 남긴 고구마 조각이 식탁에 있었는데 시어머니가 아까워서 주워 드셨습니다. 시아버지는 참지 못하고 와서 저를 때리며 말했습니다. “네 시어머니는 당뇨가 있어서 고구마를 먹으면 안 돼!” 시어머니는 얼른 말씀하셨습니다. “이만큼 먹는 건 괜찮아요. 죽지 않아요.” 시아버지는 듣지 않고 계속 때렸습니다. 힘이 세고 무술을 할 줄 알아 몇 번 만에 저를 바닥에 쓰러뜨렸습니다.

저는 시부모님과 10년을 함께 살았는데 가벼운 구타는 일상이었습니다. 몸에는 늘 시퍼런 멍이 들었고 묵은 상처가 낫기도 전에 새 상처가 생겼습니다. 한번은 시아버지에게 맞아 다리가 오랫동안 아파 쩔뚝거렸고 낫기도 전에 또 연이어 맞았습니다. 때로는 크게 손찌검을 했는데 시아버지뿐만 아니라 시누이 세 명도 함께 저를 때려 몇 번이나 죽을 뻔했습니다. 마지막은 버스 정류장에서였는데 시아버지가 저를 바닥에 쓰러뜨리고 몸 위에 올라타 두 손으로 목을 졸라 숨을 쉴 수 없었습니다. 마침 학교 교장과 교사가 버스에서 내려 시아버지를 끌어내고 저를 구해 줬습니다.

오랫동안 고통과 억압 속에 있다 보니 마음이 극도로 괴로웠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울 줄 모르게 됐고 미친 듯이 웃기만 했습니다. 손발도 제어되지 않아 덩실덩실 춤을 추고 펄쩍펄쩍 뛰었습니다. 저는 집에서 정신 나간 사람처럼 지냈고 시아버지를 죽이고 같이 죽고만 싶었습니다.

이번에는 시아버지도 겁을 먹고 집에 돌아오지 못한 채 자기 동생 집으로 도망쳐 숨었습니다. 이후 남편이 방 한 칸을 세내 저와 아들을 농촌에서 데리고 나왔습니다. 조용하고 편안한 환경 속에서 제 몸과 정신은 모두 정상으로 회복됐습니다.

이후 시어머니의 병이 위중해져 큰시누이가 돌아와 한동안 돌봤지만 자기 아버지를 견디지 못하고 떠나 버렸습니다. 시아버지는 집을 팔고 시어머니를 데리고 가장 아끼던 둘째 딸 집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둘째 딸과 사위도 그들을 꺼려 얼마 지나지 않아 쫓아냈습니다. 시아버지가 떠날 때 돈을 좀 달라고 하자(시아버지의 매달 월급은 둘째 딸이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둘째 딸은 일부러 돈을 바닥에 뿌려 시아버지가 줍게 했습니다. 시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렸고 돈도 포기한 채 시어머니를 데리고 떠났습니다.

시아버지는 오갈 데가 없어져 시어머니를 데리고 원래 직장의 초대소(숙박 시설)에 머물렀습니다. 이후 누군가 남편에게 전화해 부모님을 모셔 가라고 했습니다. 그때 저희는 아파트에 살게 돼 생활이 막 나아지던 참이었습니다. 시부모님이 오신다는 소식은 청천벽력과 같았고 예전에 시아버지와 시누이들이 저를 괴롭혔던 고통이 다시 떠올라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일주일을 내리 울었습니다.

시아버지는 저를 보자 부끄러운 기색이 역력했고 안절부절못했습니다. 시어머니는 병세가 심각해 이미 멍한 상태였습니다. 시어머니의 이런 모습을 보니 마음이 모질어지지 않았습니다. 선량한 시어머니는 평생 맞고 구박받으며 살아 너무 불쌍했습니다. 시어머니는 저와 얼굴을 붉힌 적이 없었고 집 안팎으로 며느리가 좋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시어머니의 체면을 봐서 저는 아주 내키지 않았지만 그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의 이 원망은 풀 수 없었고 마음 깊은 곳에 묻어 두었습니다.

우리집은 면적이 좁고 층수가 높은 데다 엘리베이터가 없어 시부모님이 진료를 받으러 다니기 매우 불편했습니다. 남편은 직장 상사를 찾아가 끈질기게 졸라 1층 방 한 칸짜리 집을 빌려 시부모님이 살게 했고 매달 월세는 저희가 냈습니다. 이후에는 돈을 빌려 그 집을 샀는데 집문서에는 시아버지의 이름을 적었습니다.

시어머니의 주요 병은 뇌경색과 당뇨였고 이후 병세가 갈수록 심해져 자주 입원하셨습니다. 모두 저 혼자 돌보며 시어머니에게 밥과 약을 떠먹여 드리고 몸을 닦아 드리며 대소변을 받아 냈습니다. 시누이들은 그저 먹을 것을 사 들고 보러 올 뿐 하루도 돌본 적이 없었습니다. 한번은 시어머니가 대변을 보실 때 마침 둘째 시누이가 왔는데 반쯤 받아 내다가 그만두며 제게 말했습니다. “저는 정말 못 참겠어요. 새언니 정말 고생이 많네요.”

1995년 11월 어느 날 밤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같은 날 밤 시아버지는 뇌경색으로 병원에 실려 가 응급처치를 받았고 저는 또 병원에 가서 시아버지를 돌봤습니다. 두 분의 상황이 정말 빈틈없이 이어져 저는 하루도 쉬지 못했습니다. 시아버지는 응급처치로 고비를 넘겼지만 걷지 못하게 돼 의사는 집에서 요양하라고 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뒤 생활을 돌보는 것 외에도 재활 훈련을 도와야 했고 매일매일 너무나 힘들었으며 마음속은 억울함과 원망으로 가득 찼습니다.

2. 억울함과 원망에서 벗어나 시아버지를 선하게 대하다

1998년 저는 파룬따파를 수련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련에 들어선 뒤 이번 생의 고난은 모두 자신이 지은 업보이며 빚을 졌으면 갚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시아버지와 시누이 세 명을 원망하는 것은 모두 옳지 않으며 어쩌면 어느 생엔가 제가 그들을 괴롭히고 나쁜 짓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법공부를 할수록 마음이 환해졌고 시아버지를 향한 얼음덩이 같던 원망이 무너지기 시작해 조금씩 녹아내렸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시아버지에게 잘해 드리기 시작했고 친아버지를 대하듯 분별심 없이 대했습니다.

저는 어릴 적에 학교를 띄엄띄엄 2년 다녀서 모르는 글자가 많았습니다. 모르는 글자를 베껴 적어 놓으면 남편과 아들이 틈날 때마다 글자를 가르쳐 줬고 이후에는 대법서적을 다 읽어 내려갈 수 있게 됐습니다. 제가 매일 법공부를 할 때 시아버지에게 읽어 드리면 시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사부님 말씀이 참 좋구나. 사부님은 어쩌면 저렇게 다 아실까!” 제가 매일 가부좌를 하면 시아버지도 따라 가부좌를 하셨습니다. 시아버지의 건강은 갈수록 좋아져 매일 제가 모시고 단지 안을 산책했습니다. 때로는 제가 삼륜차에 태워 작은 공원이나 시장에 놀러 가면 시아버지는 더욱 기뻐하며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셨습니다.

1999년 7월 중공이 파룬따파를 박해하기 시작하자 시아버지는 감히 가부좌를 하지 못하셨습니다. 경찰이었기에 공산당의 사람 해치는 수법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시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공산당원이라 중앙의 말을 들어야 해. 내 월급이 끊기게 해선 안 돼.” 시아버지는 더 이상 법을 듣지 않았습니다.

2005년 저는 2년간 불법 강제노동 처분을 받았습니다. 남편이 노동수용소로 면회를 왔고 저를 보자 슬프게 통곡하며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한참 지나서 남편이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위독하신데 돌볼 사람이 없어.” 저는 말했습니다. “우선 가정부를 구해요. 집에 돌아가면 제가 돌볼게요.”

제가 인신의 자유를 회복해 집에 돌아왔을 때 시아버지는 이미 거동을 전혀 할 수 없었습니다. 밥을 먹고 물을 마시는 것도 남이 떠먹여 줘야 했고 대소변도 조절하지 못해 상태가 아주 좋지 않았습니다. 시아버지는 자주 입원했고 밤낮으로 저 혼자 간호하려니 너무 피곤했습니다. 밥 먹을 시간도 없어 시아버지에게 밥을 떠먹여 드릴 때 밥그릇 하나를 같이 쓰며 시아버지 한 입 드리고 저도 한 입 먹었습니다. 어떨 때는 방금 밥을 드리고 나서 곧바로 대변을 치우기도 했습니다. 간호사가 이를 보고 말했습니다. “정말 대단하시네요. 더럽다고 꺼리지도 않으시고.” 저는 아주 자연스럽게 대답했습니다. “더럽지 않아요. 사람은 누구나 늙고 병들 때가 있으니 피할 수 없는 일이죠.” 이때의 저는 진심으로 시아버지를 꺼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수련인이기에 누구에게나 선하게 대해야 하며 하물며 제 시아버지이니 더 말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지금 병통으로 괴로워하시니 제가 관심과 따뜻함을 드려 위로해 드려야 마땅했습니다.

사정을 아는 한 사람이 제게 말했습니다. “위로는 밥을 떠먹여 주고 아래로는 똥을 받아 내다니. 예전에 그 영감이 당신을 그렇게 독하게 때렸는데 잊으면 안 돼. 굶겨서 죽여 버려. 밥을 주지 마!” 저는 이 말을 듣고 담담하게 웃어넘겼습니다. 그렇습니다. 만약 제가 대법을 수련하지 않았다면 정말 무슨 짓을 저질렀을지 모를 일입니다.

저는 자주 마음속으로 ‘정진요지-경지’를 묵묵히 외웠고 선한 사람이 되어야지 악한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저 자신을 일깨웠습니다.

시누이 세 명은 예전처럼 먹을 것을 조금 사서 병원에 와 시아버지를 들여다보고는 한 바퀴 돌고 가 버렸습니다. 제 마음은 매우 평온했고 일말의 원망도 없었습니다. 저는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았고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시누이들은 모두 시집가서 각자의 가정과 남편, 자녀가 있었으며 저마다의 어려움이 있어 살아가기가 녹록지 않았을 것입니다.

시아버지가 퇴원하셨고 날씨가 좋아 저는 휠체어로 시아버지를 모시고 밖으로 나가 바람을 쐬고 햇볕을 쬐게 해 드렸습니다. 몇 번인가 길에서 사람들이 시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따님이신가 봐요?” 시아버지는 자랑스럽게 대답했습니다. “딸보다 나은 며느리요!”

시아버지는 아직 탈당하지 않았고 제가 몇 번이나 권해 봤지만 늘 침묵하셨습니다. 2012년 시아버지의 병세가 다시 악화돼 이미 말씀을 할 수 없게 됐고 남은 날이 얼마 없었습니다. 어느 날 저는 시아버지의 손을 가볍게 쥐고 말했습니다. “아버님, 그 당을 탈퇴하세요. 탈퇴하면 좋은 곳으로 가서 사부님의 보살핌을 받을 거예요. 동의하시면 제 손을 꽉 쥐어 보세요.” 시아버지는 알아들으시고 제 손을 꽉 쥐고는 한참 동안 놓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시아버지가 구원받고 그의 미래가 아름다울 것이란 생각에 진심으로 기뻐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르신은 별다른 고통 없이 평온하게 가셨습니다.

3. 덕으로 원망을 갚고 돈을 담담하게 보다

수년간 제가 시부모님을 모시며 한 모든 일을 시누이 세 명도 눈으로 지켜봤습니다. 그들은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새언니는 정말 대단해요.” 작은시아버님은 저를 본보기로 삼아 마을과 가족들 앞에서 제가 어른을 공경하는 보기 드문 좋은 며느리라고 자주 칭찬하셨습니다. 가끔 농촌 고향에 돌아가면 사람들이 제게 엄지를 치켜세우며 칭찬하곤 했습니다. “자네는 최고야!”

우리 대가족 수십 명은 모두 중공의 당, 단, 대 조직에서 탈퇴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대법을 인정했고 제가 대법을 수련해 변화한 것이며 대법이 제 여러 해 묵은 원망을 풀어 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집은 해마다 ‘문명 가정’으로 선정됐고 주민센터 주임이 매년 직접 사람들을 데리고 우리집에 와서 상장과 상품을 전달했습니다. 어느 해에는 제가 ‘좋은 며느리’로 뽑혀 시급 잡지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잡지를 가져와 보여 줘서야 저도 알게 됐지만 그들은 제가 파룬따파를 수련해서 이렇게 좋아졌다고는 감히 말하지 못했습니다.

한번은 제가 ‘전향’ 세뇌반에 붙잡혀 갔습니다. 주민센터 직원이 ‘전향’을 맡았는데 주임이 세 사람을 데리고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저를 보자 눈빛에 선의가 가득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떠날 때 주임이 온화하게 제게 말했습니다. “며칠 뒤에 모시러 올게요.” 다음 날 그들은 바로 저를 집으로 데려다줬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주민센터 직원들은 한 번도 우리집에 와서 괴롭히지 않았고 속으로 진상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당초 저희가 시부모님을 위해 샀던 방 한 칸짜리 집에는 어르신들이 돌아가신 뒤 제 아들이 계속 살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집 명의 이전을 하려 했는데 시누이들의 서명이 필요했습니다. 남편이 시누이 세 명에게 전화로 상황을 설명하자 그들은 모두 흔쾌히 서명했습니다. 시누이들은 말했습니다. “이 집은 새언니 덕을 톡톡히 봤어요. 부모님이 노년에 호강하셨고 새언니가 고생 많았죠.” 제가 말했습니다. “대법을 배우지 않았다면 저는 정말 하지 못했을 거예요.” 시누이들은 대법을 깊이 인정했고 저의 진실함과 선량함, 인내심을 인정했습니다.

시부모님이 우리집에 계시는 동안 두 어르신은 자주 진료를 받고 입원하고 약을 드셔야 해서 항상 돈이 필요했습니다. 시아버지는 일찍 퇴직해 월급이 적어 진료비와 입원비의 일부만 환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시어머니는 농민이라 전액 자비로 부담해야 했기에 저희는 자주 남에게 돈을 빌렸습니다. 우리에게는 장부가 있어 어느 집에 2000위안, 어느 집에 2000위안 하는 식으로 10여 가구에서 돈을 빌렸고 돈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서둘러 갚았습니다. 수년 동안 시부모님이 몇 번이나 입원했고 돈을 얼마나 썼는지 이미 다 기억하지 못합니다. 두 어르신의 장례를 모시는 비용도 모두 저희가 냈고 시누이들은 돈 한 푼 내지 않았으며 하루도 돌본 적이 없었습니다.

시아버지를 보내 드린 뒤 시아버지 직장에서 8만 6000위안의 장례비를 줬습니다. 남편이 돈을 받아 오자 저희는 시누이 세 명을 초대해 식당에서 밥을 한 끼 먹었습니다. 시누이 세 명과 남편이 각각 2만 위안씩 나눴고 제 아들이 6000위안을 받았으며 시누이들은 모두 아주 만족해했습니다.

만약 파룬따파를 수련하지 않았다면 저는 절대 이렇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동안 저희가 시부모님을 위해 쓴 돈은 이 금액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이 돈을 제가 주겠다고 나서지 않았다면 아무도 감히 제게 달라고 하지 못했을 것이며 만약 누군가 달라고 했다면 저는 따지고 들었을 것입니다. 대법을 수련하게 됐으니 저는 사부님 말씀을 듣고 진정으로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남편은 집안 장남이었고 옛말에 맏형은 아버지와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으니 맏형은 아버지처럼 동생들을 보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익을 담담히 보고 시누이들을 선하게 대하려 했습니다.

지금 저는 매일 마음속이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사부님께서 저희에게 이타적이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이 되라고 하셨는데 저는 그렇게 해냈습니다. 이 기쁨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며 오직 진정으로 착실히 수련해야만 체득할 수 있습니다.

작은시아버님은 시아버지의 유일한 동생이셨고 형제간의 우애가 아주 깊었습니다. 고향에 아직 5무의 땅이 남아 있었는데 만약 다른 사람이 빌려 농사를 지었다면 매년 적어도 수천 위안은 저희에게 줘야 했을 것입니다. 작은시아버님이 농사를 짓고 싶어 하셔서 계속 짓게 해 드렸고 저희는 돈 얘기를 꺼낸 적이 없었습니다. 이후 이 땅은 한 공공기관에 수용돼 주차장이 지어졌습니다. 토지 수용 보상금에 대해 작은시아버님은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고 저희는 묻지도 않았습니다. 작은시아버님은 연세가 많으셔서 돈을 벌기가 쉽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작은시아버님은 시아버지와 같은 분이라 마땅히 공경하고 효도하며 어르신이 건강하고 즐거우며 근심 걱정 없이 편안한 노후를 보내시게 하는 것이 저희 소원입니다.

작은시아버님도 저희의 선의를 느끼셨는지 저희를 볼 때마다 항상 환하게 웃으셨습니다. 작은시아버님의 낭랑한 웃음소리는 제가 받은 최고의 상이었고 좋은 사람이 되니 정말 즐거웠습니다!

4. 남편과 아들이 사람 구하는 일을 돕다

수년 동안 제가 걸어온 길을 남편과 아들은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수혜자이자 증인입니다. 그들은 파룬따파가 저를 구했고 우리 가정을 구했다는 사실을 깊이 알고 있습니다. 남편과 아들은 순박하고 선량해 겉으로 표현은 잘 안 하지만 실제 행동으로 사부님께 감사하고 대법에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2008년 저는 집에서 진상 자료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는 제가 직접 나가 배포하기 위함이고 또 하나는 일부 수련생들에게 나눠 주어 배포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자진해서 종이를 사다 주며 싱글벙글 웃으며 위층으로 짊어지고 올라왔고 단 한 번도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직장 일로 바빴지만 자주 저녁에 차를 몰고 저를 외진 지역이나 농촌으로 데려가 진상 자료를 배포하게 해 줬습니다. 남편은 자주 낮에 오토바이에 저를 태우고 나가 자료를 배포했는데 저희 주변 수십 리 일대는 기본적으로 다 배포했습니다. 남편과 아들은 모두 재치가 있어 가는 길에 주변을 살피며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저를 내리게 했습니다. 저는 진상 자료를 만들고 배포하는 11년 동안 줄곧 아주 평온했습니다.

5. 세상 사람들이 진상을 알고 복을 받다

시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하루는 삼륜차에 시아버지를 모시고 바람을 쐬러 나가려 했습니다. 고개를 숙여 보니 차 아래에 지갑이 하나 떨어져 있었습니다. 열어 보니 안에는 500위안짜리 지폐와 잔돈이 약간 들어 있었습니다. 저는 즉시 분실자에게 전화를 걸었고 주인은 한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방금 월급을 받았는데 지갑을 잃어버려서 밤새 한숨도 못 잤어요.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도무지 생각이 안 나서 속이 새까맣게 탔어요.”

그녀는 지갑을 찾으러 오면서 시아버지께 드릴 두유 가루 두 봉지를 사 왔습니다. 제가 안 받겠다고 하자 그녀는 화를 낼 정도였습니다. 그녀는 감동하며 말했습니다.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네요! 지갑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정말 감사해요!” 저는 말했습니다. “저는 대법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사부님께서 저희에게 좋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셨고 내 것이 아닌 물건은 가지면 안 됩니다. 제게 감사할 것 없이 대법 사부님께 감사드리세요!” 그녀는 사부님 법상 앞으로 걸어가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하게 세 번 외쳤습니다. “대법 사부님 감사합니다! 대법 사부님 감사합니다! 대법 사부님 감사합니다!”

저는 그녀에게 진상을 알려 주었고 그녀는 즉시 삼퇴(중국공산당의 3가지 조직 탈퇴)에 동의했습니다. 저는 또 그녀에게 대법 진상 호신부(護身符)를 주며 늘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외우고 좋은 사람이 되면 복을 받는다고 알려 줬습니다. 그녀는 “기억할게요”라고 말하며 지갑을 들고 기분 좋게 돌아갔습니다. 우리 아파트 단지에는 이 여성을 아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녀가 나중에 암에 걸렸다가 완치됐다고 했습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는 아주 건강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우리 단지의 경비원 한 명은 외지 사람으로 고향이 농촌이었고 그의 아내는 우리 단지에서 가정부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제가 그에게 진상을 알려 주자 그는 시원스럽게 삼퇴했습니다. 그는 대법을 아주 깊이 인정하며 제게 대법을 배우고 싶어 했습니다.

저는 몇 번 그를 불러 진상 스티커를 붙이러 가자고 했고 그도 동행했습니다. 제가 그를 이끌고 아파트 단지 두 곳과 도로 몇 군데를 다녔는데 그는 꽤 능숙하게 잘 붙였습니다. 우리 단지에는 대법을 비방하는 진열장이 있었는데 유리가 너무 두꺼워 그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힘이 세서 도끼로 여러 번 내리치고 나서야 겨우 틈을 냈고 저는 그 틈으로 억지로 손을 밀어 넣어 그 종이를 뜯어냈습니다.

저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에게 복이 곧바로 찾아왔습니다. 그의 아들이 대학을 졸업한 후 우리 단지의 한 아가씨를 만나 결혼하게 됐습니다. 아가씨 집안 형편이 넉넉해 그들에게 새 아파트 단지의 신축 집을 신혼집으로 사 줬고 경비원에게는 돈 한 푼 내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아가씨의 어머니가 재혼해 떠나면서 아가씨에게 집 한 채를 더 남겨 주었고 아가씨는 신혼집을 경비원에게 내주어 살게 했습니다.

지금 경비원 부부는 일도 그만두고 집에서 손자를 돌보고 있습니다. 나중에 경비원이 저를 그들 집에 놀러 오라고 초대해 그 단지에 가서 진상 전단도 배포했는데 단지가 깨끗하고 아름다우며 집 구조도 아주 좋았습니다. 경비원 집안에 경사가 연이어 생기자 두 부부는 기뻐서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대법을 선하게 대하는 일념에 하늘이 행복과 평안을 내려 주신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6. 시련을 겪어도 뜻은 물러서지 않다

2005년 저는 2년간 불법 강제노동 처분을 받았습니다. 2019년에는 십여 명과 함께 회식을 한 뒤 식당을 나서는 사람마다 진상 자료 꾸러미를 하나씩 나눠 주었는데 그중 한 명이 악의적으로 신고하는 바람에 또 불법적으로 4년 반형을 선고받았습니다.

2024년 집에 돌아온 후 비록 진상 자료를 계속 만들지는 못했지만 저는 꾸준히 공원에 가서 얼굴을 마주하고 진상을 알렸습니다. 사부님께서 인연 있는 사람을 제 곁으로 보내주셨고 제가 입을 열어 진상을 알리기만 하면 상대방은 대체로 삼퇴를 했습니다.

꿈속에서 사부님은 제가 큰 풍작을 거뒀다며 격려해주셨습니다. 저는 어깨에 메고 손으로 주워 담으며 엄청나게 많은 호두를 모았고 어떨 때는 커다란 복숭아를 잔뜩 땄습니다. 때로는 사부님께서 맛있는 것을 아주 많이 주셨는데 모두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들이었고 꿈에서 깬 뒤에도 입안에 향기가 감돌았습니다!

이상은 저의 이번 교류 내용입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끈기 있게 끝까지 읽어주신 수련생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2026년 명혜망 중국법회 원고)

 

원문발표: 2026년 11월 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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