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존께서 위험과 난관을 넘도록 보호해주시다

글/ 랴오닝성 대법제자

[명혜망] 저는 1999년 ‘7·20’ 이후부터 정식으로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 수련을 시작했으며 올해 62세입니다. 제가 파룬따파를 수련한 것은 병을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예전부터 수련이나 기공 같은 화제에 관심이 많아 1990년대 초에는 당시 크게 유행하던 어떤 기공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이것이 제가 찾던 것이 아님을 느끼고 더는 배우지 않았습니다.

1996년 아내는 병을 고치기 위해 파룬따파 수련을 시작했는데 큰 혜택을 받았습니다. 원래 온몸에 있던 천식, 두통, 어지럼증, 산후풍 등 온갖 병이 전부 나았고 성격도 좋아졌습니다.

예전에 우리 부부는 성격이 맞지 않아 늘 말다툼을 했지만 아내가 파룬따파를 배운 뒤로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습니다. 때로 제가 훈계하며 꾸짖어도 그녀는 저와 따지지 않고 늘 싱글벙글했습니다. 아내는 저에게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이 공법은 정말 좋아요. 믿지 못하겠다면 ‘전법륜(轉法輪)’을 한번 읽어봐요. 그러면 알 거예요.”

어느 날 저는 ‘전법륜’을 집어 들고 아무 생각 없이 책장을 넘기다가 마침 ‘불가공과 불교’라는 구절을 보게 됐습니다. 다 읽고 나서 저는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당신 열심히 배워. 이건 진법(眞法)이야. 이 구절만 봐도 다른 사람이 책 한 권을 쓴다 해도 이렇게 명확하게 쓰지는 못할 거야.” 아내는 말했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알았어요? 나는 왜 못 알아봤을까?” 저는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1999년 ‘7·20’ 장쩌민(江澤民)과 중국공산당(중공)이 미친 듯이 파룬따파를 비방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좋은 대법이 어째서 비방을 받는 걸까?’ 그래서 저는 정식으로 진지하게 파룬따파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1. 박해 속에서 수련에 들어서다

저는 늦게 법을 얻었기에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 다그쳐 법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배울수록 마음이 탁 트이며 환해졌고, 배울수록 더욱 소중히 여길 줄 알게 됐으며, 배울수록 이것이 만고에도 만나기 어려운 진법임을 알게 됐습니다. 당시 텔레비전, 라디오, 신문에는 거짓말이 온 하늘을 뒤덮었고 직장과 경찰, 주민센터의 온갖 괴롭힘이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악의 명단에 올라 있지 않았기에 한 번도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2. 정념으로 아내가 마의 소굴에서 벗어나도록 돕다

2000년 하반기 아내가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다가 납치됐고 이후 3년형 강제노동 처분을 받아 가장 사악한 마싼자(馬三家) 노동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제가 처음 그녀를 면회하러 갔을 때 떠나면서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다음에 다시 올 때는 당신을 집으로 데려갈게!”

당시 저는 자신이 왜 그토록 확신했는지 몰랐습니다. 그때 우리집 두 아이는 아직 어렸습니다. 아들은 10살도 안 됐고 딸도 겨우 12살이어서 저는 정말 아빠이자 엄마 역할을 다해야 했고 출근도 해야 했으며 시간을 짜내 법공부와 연공을 해야 했습니다. 또 가능한 한 법을 실증하는 일도 해야 했고 친척과 친구들의 원망과 비난에도 지혜롭게 대처해야 했습니다. 비록 매우 바쁘고 힘들었지만 저는 한 번도 고생스럽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저에게는 사부님이 계셨고 자유롭게 법공부하고 연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의 소굴에 갇힌 아내는 저처럼 운이 좋지 않았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아내 수련생의 정념을 가지(加持)해 주시어 하루빨리 마의 소굴에서 벗어나 정법의 큰 흐름 속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힘껏 정념을 발해 아내와 박해받는 다른 수련생들의 정념을 가지(加持)하며 그들이 모두 하루빨리 집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어느 날 제가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갑자기 마싼자 노동수용소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저쪽에서 저에게 물었습니다. “○○○(아내 이름) 가족인가요?” 저는 맞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녀가 말했습니다. “당신 아내가 병이 났으니 돈을 가져와서 치료해 줘요.”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병을 다 고쳐놓으면 당신들이 또 계속 그녀를 박해할 거잖아?’ 저는 그녀에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그 병은 당신들이 박해해서 생긴 거니 저는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그러고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잠시 후 자신을 대대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다시 전화를 걸어 말했습니다. “그래도 한번 오세요. 사람을 한 명 데리고 와요. 당신 혼자는 감당하지 못할 테니 그녀를 데려가서 집에서 치료받게 하세요.” 이 말을 듣고 저는 속으로 기뻤습니다. 저는 수련자에게 병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것은 틀림없이 사부님께서 연화하신 가상으로 그녀를 나오게 하시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러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당시 이미 정오였습니다. 저는 즉시 선양(瀋陽)으로 가는 고속버스에 올라 마싼자로 곧장 달려갔습니다.

7~8시간 동안 덜컹거리는 차를 타고 선양에 도착했습니다. 날이 밝아올 무렵 택시를 타고 마싼자에 도착해 경비실에서 기다렸습니다. 경찰이 출근한 뒤 나이 든 한 경찰이 저를 접견실로 데려갔습니다. 저는 그 대대장이 겨드랑이에 서류 봉투를 끼고 있는 것을 보았고 현장에는 몇 명의 경찰이 더 있었습니다. 대대장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뒤에 누워 있어요.” 제가 “상태가 많이 안 좋은가요?”라고 묻자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남자 경찰 한 명에게 물었습니다. “이 사람(저를 가리킴) 연공해?” 그 남자 경찰이 말했습니다. “안 해.” 대대장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강제노동 수감자를 집에 보내 치료받게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이렇게 하죠. 당신이 그녀를 대신해 보증서에 서명해요.” 저는 말했습니다. “저는 서명할 수 없습니다. 요즘 세상에 누가 누구를 보증합니까? 안 되면 저는 그냥 가겠습니다. 어쨌든 당신들의 박해를 받아 이렇게 된 것이니 저는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저의 이 말을 듣자 다른 나이 든 경찰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큰 소리로 저를 꾸짖었습니다. “당신들 부부 아니야?” 저는 말했습니다. “부부지만 당신들 박해는 견뎌낼 수 없습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대장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녀를 치료하는 데 400위안이 들었어요. 내 돈과 수련생들 돈으로 낸 거니 당신이 그 돈을 내요.” 저는 말했습니다. “그것도 저는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병도 자기가 얻은 것이 아니고 올 때는 몸이 멀쩡했으니까요.” 그 대대장은 방 안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초조하고 불안해 보였습니다. 이윽고 그녀가 말했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죠. 보증서도 서명하지 않아도 되고 400위안도 받지 않겠어요. 여기서 사람이 당신을 따라갔다는 증명 서명만 하면 돼요. 하지만 이 서류철은 가져가서 당신들 현지 파출소에서 서명을 받은 다음 나에게 우편으로 부쳐줘야 해요. 반드시 우체국에서 부쳐야 하고 절대로 잃어버리면 안 돼요. 안 그러면 사법국에서 추궁할 때 아주 골치 아파져요.”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정도면 됐다. 시간이 길어지면 아내가 더는 견디지 못해 큰일 날 수 있다.’ 그래서 저는 그들의 요구에 동의했습니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한 표정으로 즉시 택시를 부르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당시 아내는 의식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기사와 저는 함께 그녀를 차에 태웠습니다. 역에 도착해 택시가 멀리 가는 것을 지켜본 뒤 제가 말했습니다. “깨어나, 이제 괜찮아.” 신기하게도 아내는 즉시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저는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저쪽에 화장실이 있으니 어서 가서 그 ‘귀신 가죽’을 갈아입어.” 그녀가 나올 때 입고 있던 것은 마싼자 노동수용소의 옷이었습니다. 그 후 우리는 달걀 몇 개를 사 먹고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도착한 뒤 제가 서류철을 열어 보니 병원에서 끊어준 진단서는 ‘간질성 히스테리’였습니다. 병원에 근무하는 친구가 말했습니다. “이 진단서는 당신이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발급받을 수 없어. 이런 병은 함부로 진단 내리는 게 아니거든.”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사부님께서 도와주신 것임을 매우 분명히 알았습니다. 나중에 아내와 교류하며 당시 어떤 생각을 했는지 물었습니다. 아내는 말했습니다. “그때 나는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청했어요. ‘사부님, 이곳은 제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닙니다. 저는 나가야 합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진상을 모르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데 제가 그들에게 진상을 알려줘야 합니다. 사부님, 저를 구해주세요’라고요.” 바로 아내가 이렇게 생각한 다음 날 그녀에게 병업 가상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우리는 감개무량했습니다. 아내가 당시 다른 사람을 위했던 그 일념이 법의 요구에 부합했기에 전능하고 법력이 무한하신 사부님께서 그녀를 고해에서 구해내신 것입니다. 제자의 사존에 대한 감사는 정말 말로 다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나중에 우리는 수련인의 기준으로 자신을 요구해 파출소에 가서 서명한 뒤 서류철과 400위안의 돈을 모두 돌려보냈습니다.

3. 어려움을 극복하며 진상을 알리다

당시 현지에는 아직 자료점이 없어 자료가 몹시 부족했습니다. 저는 갑자기 복사점을 운영하는 친구가 떠올라 그를 찾아가 대법 자료를 복사해 줄 수 있는지 상의했습니다. 그는 도와주겠다고 동의했지만 가격을 조금 비싸게 불렀습니다. 당시 대법 자료를 복사하는 것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고 정보대대(파룬궁 탄압 담당 공안기구) 경찰이 불규칙하게 복사점을 점검했으며 그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열어 파룬궁 관련 물건을 인쇄하지 말라고 경고했기 때문입니다. 중생들이 진상을 보고 진상을 명백히 알게 하기 위해 비록 그가 요구한 가격이 시장가보다 높았지만 저는 누군가 용감히 인쇄해 주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에서 대량으로 진상 자료를 복사해 수련생들에게 나눠주고 밤에 다시 구역을 나눠 배포하러 다녔습니다. 돈이 부족할 때는 다른 수련생들도 돈을 보태주었습니다.

나중에 외지에서 자료를 만드는 수련생과 연락이 닿았지만 우리 이곳과는 천 리 넘게 떨어져 있어 너무 멀었습니다. 아내는 자발적으로 외지에 가서 자료를 가져오는 중책을 맡았습니다. 아내는 자주 밥 먹을 겨를도 없이 아침 일찍 차를 탔고 6~7시간쯤 지나 그곳에 도착했습니다. 그곳 수련생들은 우리가 필요한 자료를 미리 준비해 두었다가 크고 작은 보따리를 그녀의 차에 실어주었습니다. 새벽 1~2시가 돼 역에 도착하면 제가 역으로 마중을 나갔습니다.

그때는 새 경문을 가지러 갈 때도 외지로 가야 했고 어떨 때는 한 달에 몇 차례씩 다녀와야 했습니다. 당시 우리는 모아둔 돈이 없었고 직장 월급이 제때 나오지 않으면 여비조차 없을 때도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수련생들이 아껴 먹고 아껴 쓰며 모아둔 자료 제작비에서 먼저 여비를 빌려 썼지만 돈이 들어오면 가장 먼저 그 돈부터 채워 넣었고 자료 제작비는 단 1푼도 가로챈 적이 없었습니다. 어떤 수련생들은 우리 대신 여비를 내주려고도 했지만 우리는 모두 거절했습니다. 이렇게 신성한 일을 하는데 차비는 반드시 스스로 내야 하며 금전 방면에서는 절대적으로 투명해야 했습니다.

4. 사존의 도움으로 기술을 배우다

진상 자료 사용량이 갈수록 늘어나면서 매번 천 리 밖까지 가서 자료를 가져오는 것도 불편했고, 동시에 외지 수련생들의 부담도 늘어났으며 안전상의 위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직접 자료점을 세우기로 결정했습니다.

정말 모든 일은 시작이 어렵다고 그때 저는 컴퓨터 지식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고 한 번도 만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외지에서 온 기술 수련생이 먼저 현지의 한 누님 수련생에게 여러 기술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 누님은 직장에 컴퓨터가 있어 약간의 기초가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님은 인터넷 접속, 다운로드, 자료 인쇄 등을 익혔습니다. 이렇게 우리 현지에도 자료점이 생겼습니다. 저는 소모품을 구매하고 위층 아래층으로 자료를 나르며 수련생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나중에 자료점 누님이 외지 수련생 집에 컴퓨터를 수리하러 갔다가 납치됐습니다. 그녀가 인터넷 카드까지 가져가 버렸기 때문에 저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외지 수련생과 연락해 우리 대신 컴퓨터와 인터넷 카드를 사달라고 부탁했고 또 저에게 인터넷 접속과 인쇄 기술을 가르쳐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현지 자료점 운영을 맡게 됐습니다.

잇달아 현지에도 많은 자료점이 세워져 ‘작은 꽃’들이 많이 피어났고 저는 또 기술을 가르치는 책임도 맡게 됐습니다. 저 역시 초보자였기에 해결할 수 없는 난관을 만나면 어쩔 수 없이 외지 수련생에게 폐를 끼쳤습니다. 나중에 저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수련인이고 사부님께서 관할하시는데 자꾸 다른 수련생들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 저는 사부님께 제게 지혜를 달라고 청했습니다. 서서히 어떤 작은 문제들은 제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때는 정말 바빴습니다. 어떨 때는 너무 바빠 밥 먹을 시간도 없었지만 아무리 바빠도 저는 늘 마음을 가라앉히고 법공부를 고수했습니다. 너무 바빠서 한두 단락만 읽더라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법을 배웠으며 딴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법공부를 한 뒤로는 겉으로 보기에 해결하기 힘들어 보이던 문제들도 갑자기 영감이 떠올랐고 그 생각대로 시도해보면 난제가 뜻밖에도 쉽게 풀렸습니다.

어느 날 제가 집에서 프린터를 고치고 있는데 딸이 그것을 보고 남동생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아빠한테 이런 솜씨가 있으니 넌 대학 안 가고 아빠한테 배우면 되겠다.” 아들도 매우 놀라워했습니다. “아빠, 이런 것도 고치실 줄 아세요?!” 저는 아이들에게 말했습니다. “이건 법 속에서 수련해 나온 지혜란다!” 그들은 저에게 엄지를 치켜세웠습니다.

5. 외진 산골에 감로를 뿌리다

경제적 조건이 여의치 않아 처음에는 차가 없었고 오토바이에 수련생을 태우고 시골에 가서 자료를 배포하거나 현수막을 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번은 저와 수련생이 시골에 현수막을 걸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폭설을 만났는데 헬멧이 눈으로 뒤덮여 길이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르막길을 오를 때 오토바이 시동까지 꺼졌고 수련생이 눈보라를 맞으며 장갑으로 점화 플러그를 닦아주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청했고 마침내 시동이 걸렸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는데 그 속도는 걷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습니다. 춥고 지치고 배고파 다리마저 뻣뻣하게 굳었지만 마음만은 따뜻했습니다.

우리가 있는 곳은 산간 지역의 현(縣)으로 면적이 매우 넓고 인구도 많습니다. 나이가 많은 수련생들은 현 소재지 안에서만 자료를 배포할 수 있었고 먼 곳은 갈 수 없었습니다. 제가 모는 오토바이도 수련생 두 명밖에 태울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우리는 상의했습니다. 6~7명이 탈 수 있는 승합차를 한 대 사면 시골 외진 산골까지 가서 진상 자료를 배포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한 수련생이 외지에서 돌아왔고 우리는 그와 승합차를 사는 문제를 교류했습니다. 그는 매우 지지하며 즉시 은행에서 1만 위안을 인출해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2000년대 초반의 일이니 1만 위안도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저와 다른 수련생이 또 돈을 조금 더 모아 중고 승합차를 한 대 샀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도 교통수단이 생겼습니다.

매번 우리는 미리 진상 자료 7~8백 부를 준비해 지퍼백에 넣은 뒤 외진 산간 지역으로 배포하러 갔습니다. 저는 운전을 맡았고 보통 수련생 6명을 태웠으며 많을 때는 7~8명을 태우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이 한 마을을 맡았고 저는 그들을 한 조씩 마을 어귀에 내려주었으며 배포가 끝난 뒤 다시 한 조씩 그들을 데리러 갔습니다. 우리는 미리 약속하기를 어떤 조든 배포가 끝나면 가장 가까운 큰길가로 돌아와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어떨 때는 착오도 생겼습니다. 한 수련생은 밤에 방향을 구분하지 못해 자주 반대 방향으로 가서 기다렸고 수련생들은 어쩔 수 없이 흩어져서 그를 찾아야 했습니다. 대개 집에 돌아오면 새벽 1~2시가 됐고 어떨 때는 더 늦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수련생들은 모두 원망 한마디 없이 조금도 고생스럽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몇 년이 지나는 동안 우리는 전 현의 각 마을을 거의 전부 돌며 배포했습니다.

6. 수련의 엄숙함을 체득하다

사람은 일 욕심이 일어나기 쉽습니다. 늘 자신에게 일하는 것은 수련이 아니라고 일깨웠지만 때로 일이 바빠지면 법공부가 줄어들었고 자신도 모르게 일하는 것을 첫 번째 자리에 두게 됐습니다. 예를 들어 저쪽 수련생의 프린터가 작동하지 않고 수련생이 사용하려고 기다리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어쩔 수 없이 차라리 법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먼저 수련생을 도와 프린터를 고쳐주곤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발정념을 매우 중시했고 발정념을 할 때 단 한 번도 손바닥이 쓰러진 적이 없었으며 연공도 비교적 고요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성격이 썩 좋지 않아 수련 전에는 불같은 성격이었습니다. 아내의 말을 빌리자면 ‘불만 붙이면 타오르는’ 성격이었습니다. 때로 노년 수련생이 제게 기술을 배울 때 여러 번 가르쳐도 기억하지 못하면 저는 참지 못하고 화를 냈고 목소리도 몇 배나 커졌습니다. 그 때문에 어떤 수련생들은 일이 있어도 저에게 직접 찾아오지 못하고 혼날까 봐 두려워 다른 수련생을 통해 말을 전하곤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수련생들에게 정말 미안하며 이 자리를 빌려 수련생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수련은 엄숙한 것입니다. 한번은 저와 아내 수련생이 외지에 CD 케이스를 가지러 갔습니다. 그때 션윈 CD는 중국에서 배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승합차에 CD 케이스를 가득 싣고 길을 나섰습니다. 한 사거리를 지날 때 길가에 도로관리 단속 차량이 서 있는 것을 보았지만 저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사거리를 막 지났을 때 아내가 백미러로 그들이 쫓아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제 차 열쇠와 운전면허증을 전부 압수하고 3천 위안의 벌금을 물리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들은 차에 실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며 손으로 만지기도 했습니다. 저는 아이들 장난감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부님의 가지하에 저는 지혜롭게 그들과 맞섰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많은 돈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아내는 택시를 타고 돌아가 수련생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마침내 수련생과 그들이 찾아낸 사람들이 모두 왔고 수련생이 5백 위안을 내주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일이 끝난 뒤 우리는 반성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가장 신성한 일인데 왜 문제가 생겼을까?’ 저는 자신이 일이 생기면 화를 잘 내고 조급한 마음과 원망심이 있으며 문제가 생기면 습관적으로 아내의 흠을 찾고 그녀가 엄숙하지 못하고 수련생들과 희희낙락한다고 탓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아내가 저보다 심성이 높았습니다. 그녀는 늘 문제가 생기면 안으로 찾았고 저를 원망한 적이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정말 심성에 공을 들여야겠습니다. 생각해보면 정말 부끄럽습니다. 수련한 지 그토록 오래됐는데도 화를 내는 결점을 줄곧 버리지 못했습니다. 오늘 이 화를 잘 내는 결점을 폭로하는 것은 바로 단호하게 그것을 원하지 않고 없애버리기 위함입니다.

7. 사존께서 위험과 난관을 넘도록 보호해주시다

어느 해 집에 수리를 할 때 돈을 절약하려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직접 했습니다. 어느 날 전기톱으로 문을 자르다가 실수로 왼쪽 손목을 10여 cm 길이로 크게 베었습니다. 힘줄도 끊어졌고 가장 깊은 곳은 뼈가 보였으며 살이 양쪽으로 뒤집혀 보기에도 무척 끔찍했지만 피 한 방울 나지 않았고 통증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집에는 저 혼자뿐이었습니다. 저는 사부님께서 제 곁에 계시며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께서 이처럼 큰 난을 저 대신 감당해주셨음을 알았습니다. 당시 손가락을 움직여보니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차를 몰아 아내를 찾아갔는데 그녀는 당시 친정어머니 댁에 있었습니다. 저는 가족들이 놀랄까 봐 다른 가족들에게는 알리지 않았습니다. 차에서 저는 아주 평온하게 아내에게 손을 좀 베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상처를 보고 깜짝 놀랐고 늘 침착하던 그녀가 당황하며 저에게 물었습니다. “병원에 가야겠죠?” 저는 말했습니다. “안 가, 당신이 가서 거즈 한 뭉치만 사서 감아줘.” 그녀는 그대로 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뒤 저는 하던 일을 계속했고 이를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저녁에 연공할 때 상처에서 노란 물이 배어 나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어제 바깥으로 뒤집혀 있던 살이 이미 아물어 있었습니다. 제 직업은 운전이 필요했는데 저는 평소처럼 출근했고 동료들은 아무도 제가 다친 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며칠 뒤 집에서 겨울용 석탄을 2톤 넘게 샀는데 전부 저 혼자 삽으로 한 삽 한 삽 석탄 창고로 퍼 넣었습니다. 그런데도 상처는 전혀 아프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서서히 전부 나았지만 아주 긴 흉터 하나가 남았습니다.

친척과 친구들이 나중에 이 일을 알게 됐고 그들은 모두 대법을 수련하는 사람은 과연 다르다며 감탄했습니다. 일반인이 병원에 갔다면 2만 위안이 없이는 해결하지 못했을 것이고 온갖 검사와 수술 봉합을 거치며 고생해야 했을 것이며, 어쩌면 후유증까지 남았을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 일을 통해 예전에 제가 대법을 배우는 것을 가장 반대했던 친척조차 사실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저는 수련의 길에서 비교적 기억에 깊이 남은 장면들을 드문드문 떠올려 보았습니다. 우리 함께 사존의 가르침을 굳게 명심하고 법 속에서 착실히 수련하며 미래 수련의 길을 안정적으로 잘 걸어갑시다!

 

원문발표: 2026년 9월 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6/9/1/513580.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6/9/1/51358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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