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법회] 직장 환경에서 질투심을 수련해 없애다

글/ 중국 산둥(山東) 청년 대법제자

[명혜망] 저는 대법 가정에서 자란 청년 대법제자입니다. 어릴 때부터 대법이 좋다는 것은 알았지만, 자라면서 사회의 각종 유혹을 접하게 돼 점차 법에서 벗어났다가, 최근 몇 년간 몸에 이상이 나타난 후에야 다시 대법으로 돌아왔습니다.

작년에 우리 회사에 신입 사원이 들어왔는데, ‘00년생’ 여자아이였고 여기서는 그녀를 A라고 부르겠습니다. 우리 회사는 사람이 많지 않고 대부분 ‘90년생’이며 소수의 ‘00년생’이 있습니다.

그녀가 입사한 지 얼마 안 돼 저는 그녀의 한 가지 특징을 발견했습니다. 말에 과장이 아주 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먼저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 방식은 대뜸 칭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칭찬은 종종 엉뚱하고 근거가 없어서, 마치 칭찬하기 위해 칭찬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후 1년 동안 저는 처음에 A에 대해 은연중에 어떤 관념과 견해를 갖게 됐지만, 스스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이르러서야 이런 그녀를 무시하는 마음이 점차 커져 걷잡을 수 없게 됐습니다. 이 기간에 예전에는 감지하지 못했던 많은 사람마음이 끊임없이 드러났습니다. 이런 마음을 수련하는 과정도 좋았다 나빴다 하며 반복됐습니다.

이 원고를 정리하기 시작하기 전 한동안, 이런 마음은 이미 매우 심각한 정도까지 발전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써내어 철저히 폭로하고 관념을 바꾸기로 결심했습니다. 여기서 수련생과 교류하고 사부님께 보고드리는 것 또한 저 자신을 다시 한번 정리하는 것입니다.

1. 아부와 칭찬

그 무렵 마침 명혜라디오에서 ‘아부와 칭찬’에 관한 글을 집중적으로 듣게 됐습니다. 저는 그녀의 행동이 바로 칭찬 듣기 좋아하는 제 마음을 겨냥해 온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속인 중에서 업무 능력이 꽤 좋은 편이라 그 당시 업무적으로 자주 칭찬받았고, 이 마음을 없애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겸손한 척하며 사양했지만, 사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꽤 즐기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칭찬하고 나면 스스로 자신의 업무 내용을 다시 훑어보고 곱씹으며 그 속에 빠져 자만하고 만족해했습니다. 그 기간에는 정말 좀 우쭐해져서 자신이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마음을 없애는 것이 수박 겉핥기식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근본적으로 관념을 바꾸지 못하고 이 ‘명(名)’을 좋은 것으로 여겼으며, 이런 ‘명을 추구하며 즐기는 것’을 자신으로 착각했고, 동시에 자신의 능력을 진짜 자기 것으로 여겼기에 계속 뿌리 뽑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잘됐네. 넌 칭찬 듣는 거 좋아하지 않느냐? 여기 칭찬 잘하는 사람이 왔는데.’ 접시 하나를 들면 그릇이 품위 있다고 하고, 글씨를 쓰면 그림같이 예쁘다고 하며, 게다가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데 말이 아주 거창합니다. 인터넷 유행어를 섞어 쓰니 듣는 사람이 아주 난처하고, 다른 사람과 주파수가 잘 맞지 않는데도 아는 척하려 듭니다.

저는 난생처음 다른 사람의 칭찬에 이토록 불편함을 느꼈고, 그녀의 아부가 귀에 거슬렸습니다. 그 기간 저는 자신의 일사일념(一思一念), 일언일행(一言一行)을 매우 주의하며 A의 이런 말을 듣지 않으려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칭찬을 들을 때도 즉시 관찰했습니다. ‘환희심이나 명예를 추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나?’ 억제하려 노력하자 조금 효과가 있었습니다.

2. 그녀는 나의 ‘거울’

나중에 어떤 기회로 그녀와 단둘이 지내게 됐는데, 그녀에게 진상을 알리는 것 외에도 그녀의 과거 경험을 좀 알게 됐습니다. 그녀가 ‘칭찬을 좋아하는 것’은 어릴 때부터 인정받지 못해 한동안 열등감이 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관념 속에는 칭찬이 좋은 것이라고 박혀 있었고, 그래서 칭찬하려 했으며, 그녀는 이것이 남에게 잘해주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당시 저는 심성을 바르게 갖지 못하고 약간 거만한 태도로 그녀를 가르치려 했고, 쟁투심까지 더해져 그녀에게 ‘아부와 칭찬’의 해로움에 대해 말해줬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그녀를 설득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녀는 자기 관점을 피력했는데, 모두 현대 관념과 행위의 왜곡된 이치였습니다. 그 후 저는 때때로 머릿속으로 어떻게 해야 그녀를 설득해 다시는 그렇게 칭찬하지 못하게 할까 구상했습니다. 사실 그녀를 위하는 각도에서가 아니라, 제가 그녀의 그런 말을 듣기 싫고 반감이 들어서였으니 사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는 그녀가 거울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제가 체면과 비위를 맞추기 위해 마음에 없는 말로 남에게 아부하는 모습을 그녀가 비춰준다고 생각해 그 점을 유의했지만, 인식이 그리 깊지는 않았습니다.

어느 날 저는 갑자기 확 깨달았습니다. ‘그녀가 바로 나의 거울이다.’ 그녀가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보이는 아부나 친한 척하는 모든 행동은 바로 저의 투영이었습니다. 제 마음 깊은 곳에서 사실은 그녀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줄곧 그녀의 진정한 칭찬을 느끼지 못했고(일반인들이 말하는 그런 ‘영혼 없는 칭찬’이 아닌), 이 때문에 저는 은연중에 그녀 앞에서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 했습니다. 목적은 그녀가 진정으로 저의 우수함을 보고 제가 듣고 싶어 하는 그런 찬사를 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수련생 교류 문장에 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남에게 불만 있는 근원은 그 사람이 나에게 충분히 아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는 이 과정에서 이런 마음이 생겨난 줄도 몰랐는데, 사부님께서 일깨워주신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온몸이 뻥 뚫리는 듯했고, 머릿속에서 구상하던 말들과 들끓던 생각들을 내려놓았으며, 그 단계에서 이 일을 털어버렸습니다.

3. 알 수 없는 질투심

또 한 번 그녀와 단둘이 대화할 때(사실 그녀는 남에 대한 경계심이 심하지만 저에게는 비교적 마음을 여는데, 저는 이것이 그녀와 저의 인연, 혹은 대법과의 인연임을 압니다), 그녀는 제게 울면서 다른 사람이 자신을 불공평하게 대한다고 하소연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녀가 사람을 매우 진실하게 대하고, 자신을 매우 선량하다고 생각하며, 남에게 특별히 잘해주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처럼 선량한 사람이 드물다며, 그런데도 남들이 자신에게 잘해주지 않아 억울하다고 했습니다.

저는 당시 깜짝 놀랐습니다. 그녀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줄곧 그녀가 매우 가식적이고, 말하는 것이 모두 영합하고 비위를 맞추기 위한 것이며, 목적성이 강하고 진심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자기가 매우 진실하다고 말하니 그녀에 대한 제 견해가 좀 바뀌었습니다.

나중에 저는 사실 그녀가 자신에 대한 인식이 매우 약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예를 들어 그녀는 자신이 진실하다고 생각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녀는 적어도 진(眞)에 맞지는 않았습니다. 가령 제 면전에서는 무엇을 싫어한다고 표현해놓고, 다른 사람이 그 주제를 꺼내면 대화에 끼어들어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저와 다른 동료 포함) 아주 잘해준다고 말하지만, 칭찬하는 것 외에 저는 그녀가 말한 사람들에게 무엇을 잘해주는지 정말 볼 수 없었고, 오히려 저와 다른 동료들이 자주 일적으로 그녀를 도와줬습니다. 그녀는 자기 집을 아주 깨끗이 청소한다고 말하지만, 회사 자리는 지저분하고 어지러웠습니다. 그녀는 업무가 항상 바쁘다고 말하지만, 그녀의 직속 상사는 저에게 A가 매일 뭐 하느라 바쁜지 모르겠고 결국 해놓은 일은 하나도 없다고 괴로워하며 말했습니다.

한번은 그녀가 사무실에서 사람들과 잡담할 때, 누가 자기와 친구가 되는 건 그 사람의 복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또 충격을 받았고 그녀가 정말 뻔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제가 그녀를 계속 주시하는 이상한 굴레에 빠졌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끊임없이 그녀의 문제를 발견하고 그녀가 자신에 대해 인식하는 것과 대조하며, ‘너는 네가 말하는 것과 전혀 달라’라는 생각을 품고 내심 불공평해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질투심이라는 것을 의식했지만 왜 이것이 질투심인지, 제가 무엇을 질투하는지 몰랐습니다. 이 마음을 발견한 후 법리에서 깨닫지 못해 없애지 못했고 오히려 점점 더 많이 쌓였습니다. 저는 단지 견해가 있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나중에는 그녀의 실체를 ‘폭로’하고 싶어졌고, 많은 경우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말을 받아쳐서 부정한 다음, 심지어 비꼬고 깎아내리고 싶었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이 아주아주 악하다는 것을 의식했고 이때야 비로소 깜짝 놀랐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강렬한 마음이 생겼지!’ 이건 절대 작은 일이 아니니 이 질투심을 없앨 방법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저는 그녀의 장점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저는 그녀가 선량하다는 것을 압니다. 남들이 보기에 ‘아주 유치한’ 그녀의 어떤 생각은 사실 ‘단순한’ 것입니다. 그녀의 언어와 행동 표현은 생존을 위해 후천적으로 덧씌워진 것들입니다. 그녀가 말하는 ‘진실함’은, 비록 그녀가 확실히 진실하지는 않지만 성실함은 있었습니다. 그녀는 또 남을 절대 악의적으로 추측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건 아주 큰 장점이 아닙니까? 현재 사회의 대부분 사람은 이 점을 해내지 못합니다. 저라는 수련인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저도 현재 악의적으로 남을 추측하지 않는 것을 해내지 못하고, 때때로 사람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저의 질투와 비꼼은 진정한 악이고, 제가 문제이며, 제 포용력이 작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자신이 사람 속에서 형성한 관념으로 사람과 일을 가늠하지 말고, 우주 특성으로 무엇이 진정한 좋음이고 진정한 나쁨인지 가늠해야 한다.’ 집에 돌아가 어머니 수련생과도 교류했습니다. 어머니는 “A가 자기를 좋다고 하면 좋은 거야. A는 착한 아이야! 너도 그렇게 생각해야 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저는 그녀의 이런 장점들을 떠올리며 그녀가 착한 아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 상태는 또 좋았다 나빴다 반복했습니다. 때로는 그녀가 꽤 귀엽고 재미있다고 느끼다가도, 때로는 여전히 꼴보기 싫었습니다. 칠칠치 못하고, 물건을 아무 데나 두고, 잘 잃어버리는 것이 보기 싫었고, 여러 방면에서 교양이 없어 보이고, 먹는 것을 절제하지 않고 많이 차지하려는 것이 보기 싫었으며, 우리와 어울리지 않는 사고방식과 일 처리 방식, 우리 회사는 사회의 그런 직장 문화와 습관이 없는데 그녀는 말하기 전에 온갖 밑밥을 깔고 빙빙 돌려 말하는 것이 보기 싫었고, 아는 척하며 상사가 업무를 지시하면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알겠다고 하지만 사실 전혀 알아듣지 못한 것 등이 보기 싫었습니다.

제 눈에 또 A의 부족함만 보이자 저는 생각했습니다. ‘왜 남을 뚫어지게 보는가? 수련은 자기를 닦는 것인데, 그녀는 나에게 연기를 펼쳐 내 마음을 없애게 해주는 것이다! 나도 때때로 주의식(主意識)이 약해서 내가 뭘 하는지 모를 때가 있지 않은가? 내가 인간세상의 함양(涵養)을 너무 중시하는 게 아닌가? 나도 식탐이 있지 않은가? 때때로 처세술로 말하지 않는가? 나도 아는 척하고 자신을 과시하기 좋아하지 않는가?’ 확실히 이런 마음이 제게 다 있었고 그래서 저는 이런 마음을 겨냥해 제거했습니다.

한동안은 그녀의 표정과 행동거지가 생각나기만 해도 마음속에서 혐오감이 치밀어 올랐습니다. 저는 이것이 제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비록 이런 느낌과 정서적 반응이 제 머릿속에서 아주 리얼하고 격렬하게 나타나 저라고 느끼게 하려 했지만 저는 끊임없이 부정했습니다. ‘이건 내가 아니다, 너를 멸(滅)하겠다.’

다시 반복해서 생각했습니다. ‘다시 그녀의 모습을 떠올려도 혐오스러운가?’ 여전히 혐오스러우면 그건 여전히 제가 아니니 다시 멸했습니다!

이렇게 여러 번 반복하니 그런 느낌이 점차 사라졌습니다.

어떤 단계에서는 제가 좀 트인 것 같았고 그녀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다고 느꼈지만, 그녀의 상사가 저에게 그녀의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토로할 때면 마치 공감대를 찾은 듯 말문이 터져 그녀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어졌습니다. 이것으로 단번에 검증되지 않았습니까? 마음이 여기에 숨어 있었고, 이번에도 수구(修口)를 하지 못했습니다.

아무튼 이 단계는 또 반복됐고, 내심 어떤 것이 저를 부추겨 이 일을 담담하게 자신의 수련 제고로 여기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다 한번은 제가 좀 힘든 업무를 마치고 회사에 돌아왔을 때 몹시 피곤했는데, 회사에는 A와 다른 동료 한 명만 남고 나머지는 퇴근한 상태였습니다. 저는 당시 여러 가지 과일을 가져갔는데 회사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눠주고도 남을 양이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그 두 사람에게 두 개씩 나눠줬습니다.

A는 과일을 받고는 우물쭈물하며 말을 할 듯 말 듯 했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그녀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세 번을 반복하자 저는 좀 짜증이 나서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녀는 또 다른 거로 바꾸고 싶다고 했습니다. 저는 평소에 화를 잘 안 내지만 당시에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고, 그녀가 참 눈치 없다고 느꼈으며, 그녀의 언어와 표현 방식에도 반감이 들었습니다. 저는 화를 꾹 참고 그녀에게 직접 하나를 고르게 했습니다. 퇴근길에 저는 몹시 불쾌한 티를 냈고 그녀가 말해도 대꾸도 안 했는데, 저의 ‘저기압’ 때문에 다른 동료도 부담스러워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헤어진 후 저는 자책했습니다. ‘정말 그래선 안 되는데, 이건 수련인에게 있어야 할 모습이 아니야. 왜 통제가 안 됐지?’ 그때는 이것이 저를 수련시키는 것인 줄 생각도 못 하고 완전히 그녀의 행동에 이끌렸습니다. 저는 오는 내내 제가 왜 그렇게 그녀를 싫어하는지, 왜 그녀의 행동에 대해 그렇게 불만인지 생각했습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좀 이기적이거나 기타 좋지 않은 행동을 했다면 저는 이러지 않았을 것이고, 때로는 생각이 좀 들더라도 대부분 인식하고 내려놓았을 것입니다. ‘속인이니까, 별별 모습이 다 있지, 따질 필요 없어.’ 그래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제가 그녀에게 잘해준 모든 것을 그녀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그저 아주 의례적이고 과장되게 고맙다고 말할 뿐 제가 느끼기에 진심으로 감사해하는 것 같지 않아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꼈기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물질적 보답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진심 어린 피드백 한 마디는 듣고 싶었던 것 같았습니다. 이것은 불공평하게 느끼는 마음, 보답을 바라고 중시받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다른 중요한 한 가지 측면은, 바로 그녀가 스스로 자신을 아주 좋다고 여기는데 행동은 저렇기 때문에 제가 불만을 느낀 것이었습니다. 바로 질투심이었습니다. ‘네가 행동이 이렇게 별로인데도 자신을 그렇게 좋게 생각하는 걸 나는 받아들일 수 없어. 너는 네가 어떤지 좀 알아야 해.’ 내포된 말에는 또 이런 것이 있는 듯했습니다. ‘나는 행동이 이렇게 고상해도 나 자신을 좋다고 말하지 않는데, 너는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 자기가 좋다고 말할 수 있어?’ 이것은 바로 사부님 설법에 나오는, 남이 잘되면 그를 위해 기뻐해 주는 게 아니라 마음이 평형을 이루지 못한 것이 아닙니까.

게다가 원고를 정리할 때야 발견했는데, 이것은 바로 ‘하늘과 땅을 관리하고, 심지어 사람의 사상까지 관리하려 드는’ 그 사악한 당문화(黨文化)가 아닙니까? 어쩌면 이렇게 사악한 것이 아직도 있을까요? 예전에 저는 제게 질투심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보다 못한 사람이 저보다 좋은 결과를 얻으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거나, 학창 시절 저와 친한 친구가 저보다 인기가 많으면 질투심이 생긴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번의 이런 질투심은 아주 낯설었습니다.

어쩐지 제가 예전에 이 질투심의 근원을 추적하려 했지만 더 깊은 곳을 파낼 수 없었습니다. 즉, 남이 자기를 좋게 생각하는데 내가 왜 기분 나빠해야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았고, 이런 마음이 묘했습니다. 나중에 저는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없어. 왜냐하면 그건 바로 질투니까, 네가 어떻게 된 건지 명백히 생각할 필요가 없어! 너는 바로 지극히 음습하고 사악한 것이니 멸해야 할 것이야. 사부님께서는 공산사령(共産邪靈)은 우주 중의 정(正)과 부(負)의 생명 모두가 인정하지 않는 존재이며 변이된 것이라고 하셨어. 그래서 내가 그것이 어떻게 된 건지 명확히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야. 왜냐하면 너는 바로 변이된 것이니까. 멸(滅)!’

이때 저는 힘이 매우 커짐을 느꼈고, 한 층 한 층 이 부패물질[敗物]을 많이 멸했으며, 그런 혐오와 질투의 정서가 없어졌습니다.

이 기간에 또 한 가지 일이 발생했습니다. A가 한번은 카메라 부속품을 안 가져왔는데, 자신이 외근할 때 써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날 그녀는 갑자기 제게 자기 카메라를 보여주고 싶어 했는데,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저에게 보여줄 리 없었습니다. 우리 카메라는 비슷해서 별로 볼 게 없는데, 그날은 왠지 그녀가 꺼내서 보여주려 했습니다. 제가 보자마자 부품이 없는 것을 발견해 사용할 수 없게 되자, 마침 제가 가지고 있던 것을 빌려줬습니다. 그녀는 그제야 큰 문제를 피할 수 있었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사용할 때가 돼서야 안 가져온 걸 발견했을 것입니다.

저는 즉시 심상치 않은 일임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신(神)께서 그녀를 돕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매우 고마워하자 저는 말했습니다.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이건 하늘이 당신을 돕는 거예요.” 그녀는 전에도 제게 자신의 인생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귀인이 나타나 도와줬다고 말했고, 그녀가 몇 번 매우 불안하고 혼란스러울 때도 마침 저와 단둘이 있을 기회가 생겨 제가 법(法) 중의 이치로 그녀를 깨우쳐주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저는 사실 진작부터 신께서 그녀를 돕고 있다는 것을 의식했지만, 그녀는 이 개념에 대한 인식이 희박해 늘 사람이 자기를 도왔다고 여겼기에 인식을 강화해주기 위해 “하늘이 돕는 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

이번에 저는 더 깊이 깨달았습니다. 아마 사부님께서 제가 오랫동안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다시 일깨워주신 것 같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신도 도와주시는 사람인데 내가 사사건건 그녀를 못마땅해하고 사사건건 맞서는 건 신과 맞서겠다는 건가?! 아, 내가 무슨 짓을 하는 거지? 더는 깨닫지 못해선 안 돼!’ 그래서 제 마음속의 큰 응어리가 풀렸습니다.

그 무렵 마침 또 한 편의 수련생 문장을 보았는데, 대략 우리는 타인의 다름을 받아들이고 이 세계의 다채로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이었고, 저는 단번에 또 활짝 트였습니다.

언급할 만한 것은, 최근 한번은 제가 그녀에게 어려움이 있는 것을 보고 아무런 사심과 잡념 없이 진심으로 도움을 주었을 때, 처음으로 그녀의 진심 어린 감사를 느꼈습니다. 이때 제 마음은 평온했고 어떤 파동도 없었습니다. 일이 지난 후 그녀가 저에게 우호적이고 친근하게 대하려는 모습을 보고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정말 단순하고 귀여운 아가씨네.’ 그 순간 저는 수련 제고의 무한한 아름다움을 느꼈습니다.

4. 다시 ‘명예욕’을 제거하다

제가 A에 대해 가졌던 갖가지 불만을 다시 돌아볼 때, 질투심은 이 일 중의 깊은 층면의 표현이고, 얕은 층면에서 말하자면 그녀의 표면적인 행동이 저의 어떤 사람의 관념을 건드렸기에, 제 입맛에 맞지 않아 이렇게 마음이 움직인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여전히 ‘명예욕’이었습니다.

저는 사람 중에서 여전히 ‘함양’, ‘명성’을 아주 중시하는데, 그녀의 행동 표현에는 바로 이런 것이 아주 결핍됐다고 느꼈습니다. 제 관념상 그녀의 행동이 너무 격 떨어지고, 체면이 서지 않고, 사리분별을 못한다고 느껴서 눈에 거슬리고 아주 불편했던 것입니다. 방금 분석해낸 질투심 속에도 이런 명예욕이 숨어 있었는데, 모두 사람 중의 명성, 체면과 관련 있으며, 알고 보니 이 물건을 건드려서 그것이 꼴사납게 여긴 것이었습니다.

이 일 속에서 발견하기 전까지, 저는 제 공간장 안의 이런 ‘명예욕’에 대한 감지가 아주 모호했습니다. 저는 이 ‘명예욕’이 저를 따라다닌 지 오래됐다는 것을 압니다. 돌이켜보면 어릴 때부터 줄곧 이런 명예욕이 있었습니다. 과시하고, 체면을 중시하고, 사람들 속에서 좋은 명성, 좋은 평판을 얻으려 하고, 사람들 속에서 저의 품위, 개성, 인지(認知), 취향 등등을 널리 알리고 과시하는 것은 모두 그것과 관련 있었습니다. 그것은 많은 방면에서 드러났고, 많은 경우 말하는 중에 무의식적으로 이런 과시와 자기표현이 흘러나왔는데, 바로 사부님 법 중에서 말씀하신 “잠재의식 중에 곧 이런 과시심리가 있다”(전법륜)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도대체 어떤 물건이고 어떻게 존재하는지, 제가 그것을 정리할 때 아주 모호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장벽 같은 것을 만들어 제가 그것을 느끼지 못하게 하고 찾지 못하게 했습니다. 다른 마음을 제거할 때는 은연중에 느낌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질투심, 쟁투심은 각각 어떤 생명인지 비록 보이지는 않아도 그들의 존재 형식을 감지할 수 있었는데, ‘명(名)’이라는 이 물질은 제 공간장에 아주 큰 장벽을 만들어 거대하면서도 보이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이 일 속에서 이런 명을 추구하는 물질을 발견했을 때, 발정념으로 그것을 제거하니 점차 뚜렷해짐을 느꼈고, 마치 이 물건의 큰 한 층을 제거한 것 같았습니다. 또한 그 후 또 한 번 발정념을 할 때, 다시 그것의 존재를 감지할 수 없어 막막했을 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그것의 존재를 느끼는 것에 집착할 필요 없이 법리(法理)상에서 그것의 존재를 알았으니, 제가 확고하게 그것을 멸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확고한 일념 속에서 마침내 이 물질이 많이 제거됨을 느꼈습니다.

5. 정신적 편안함을 추구하는 근본 집착을 제거하다

수련 과정에서 저는 저의 근본 집착이 무엇인지 찾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철들 때부터 대법이 좋다는 것을 알았고, 이 생각은 기본적으로 마음에 뿌리내려 다른 생각이 있다고 느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결국 신체 문제로 다시 수련하게 됐지만, 저는 제가 ‘병 치료를 바라서’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대법을 대하는 마음이 그렇게 순수하지 않음을 은연중에 느꼈는데,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럼 나의 근본 집착은 도대체 무엇일까?’ 저는 이 문제를 오랫동안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한번은 하나의 집착심을 대할 때, 사후에 제가 그 집착을 내려놓은 원인을 회상해보니 이러했습니다. ‘이 집착은 내 상태를 나쁘게 만들 거야. 내가 만약 이 마음을 붙잡고 놓지 않으면 바로 졸음이 오거나 피곤하거나 혹은 기타 좋지 않은 상태를 일으켜 나를 아주 엉망으로 만들 테니, 더는 이것에 집착해서는 안 돼.’ 저는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알고 보니 오랫동안 많은 것을 내려놓지 못한 것은 마음속 깊이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고, 진정으로 그것을 좋지 않은 것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진수(眞修)자의 확고한 신념과 결심으로 ‘집착을 없애겠다’, ‘반본귀진(返本歸眞-진정한 자신의 본원으로 돌아감)하겠다’는 순정한 일념을 내보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번쩍 정신이 들었고 마침내 저의 근본 집착을 찾은 것 같았습니다. 과거를 회상해보면 확실히 어릴 때부터 소위 ‘상태’라는 것을 아주 중시했습니다. 저는 제 마음이 평형하고 편안한 상태에 있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는데, 안일함을 추구한 것이었습니다.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 세계의 안일함을 추구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교활하고 은폐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어릴 때부터 제게 구도(求道)의 마음이 있다고 여겼고, 사람 속에서 멀리 미혹됐어도 마음속에 일념이 있어 조만간 대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단지 지금은 이런 속인의 것을 내려놓지 못했을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줄곧 제 마음이 단순히 수련하고 싶은 생각이라고 여겼는데, 알고 보니 저는 수련을 통해 정신적인 편안한 상태를 추구하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이전에 수련생 문장에서 본, ‘진(眞)·선(善)·인(忍)을 일종의 안전한 생활 방식으로 여긴다’는 생각과 좀 유사했습니다. 그럼 저는 여전히 사람 속에서 맴돌고 있는 게 아닙니까? 여전히 인간세상의 것을 추구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이 모든 것을 깨달은 후 아주 냉정해졌고, 수련의 엄숙함을 더욱 느꼈으며, 사부님께서 한 걸음 한 걸음 저를 이끄시어 사람에서 걸어 나오게 하심을 선명히 느꼈습니다. 저는 내면 더 깊은 층의 것을 변화시키기 시작해야 함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저는 수련의 결심을 더욱 확고하고 순정하게 하며, 더욱 맑고 이성적인 마음으로 사부님과 대법을 대해야 합니다.

대법을 떠나 있던 시간에 저는 사회의 좋지 않은 것들을 대량으로 접했고, 갖가지 젊은이들의 계층 문화, 변이된 현대 관념과 행위의 것들로 대량의 사상업(思想業)을 쌓았습니다. 한 층 한 층 없애면 한 층 한 층 사상 배후의 더 깊은 변이되고 타락한 사상이 솟아나옵니다.

저는 자주 갑자기 놀라며 깨닫습니다. ‘내가 순정해지고 있구나!’ 왜냐하면 매번 이때마다 저의 현재 사상이 얼마 전 어느 단계의 사상과 이미 다름을 분명히 느꼈고, 잡념이 많이 줄었으며, 정말로 조금씩 정화되고 탈태하고 있음을 느끼고, 스스로도 불가사의하다고 느낍니다. 이 모든 것은 사부님께서 해주신 것이며, 사부님께서 제자에게 모든 것을 주셨고, 사부님과 대법이 제자를 단련시켜 제자가 초심을 되찾게 하신 것입니다.

사부님께서 제자에게 배치해주신 모든 수련 환경과 사람, 일을 언어로 다 감사드릴 수 없습니다. 제자는 그중에서 오성이 때로는 정말 너무나 안 좋아서, 이 하나의 관(關)을 일 년이나 반복해서 갈고 닦았습니다. 이후에는 더 잘해낼 수 있기를 바라며, 제가 진정으로 대법에 동화된 생명이 되어 제 생명의 층층이 법 중에서 바로잡히고, 순정하고 진수하는 제자의 자태로 세상에서 조사정법(助師正法)의 사명을 잘 완수하여,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회천(回天)의 길을 안정적으로 걸어가기를 바랍니다.

이상은 최근의 일부 수련 체험으로, 층차의 한계가 있으니 부족한 부분은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허스(合十)

(명혜망 제22회 중국법회 원고)

 

원문발표: 2025년 11월 2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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