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지린 대법제자 성개련(盛開蓮)
[명혜망]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를 수련하기 전, 저는 불교 신도였습니다. 몸이 좋지 않아서 많은 기공을 수련했지만, 예전 병이 낫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몇 가지 병이 더 생겼습니다. 나중에 간경화로 인해 복수가 차서 병원으로 이송됐습니다. 의사는 제가 늦게 왔다며 가족들에게 장례를 준비하라고 했지만, 저는 항상 누군가 저를 구할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1996년에 아는 사람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지금 파룬궁이라는 참 좋은 공법이 있는데 가서 수련할 수 있는지 알아봐요.” 제가 말했습니다. “저는 수련할 수 있어요.” 법을 얻어 수련한 후, 제 몸의 여러 가지 지병이 완치됐습니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 아래 저는 파룬따파 수련길을 평온하게 걸었고, 더욱더 성숙해지고 있습니다.
베이징에 가서 법을 실증하고, 시골의 선량한 경찰을 만나다
1999년 7월 20일, 중공 악당이 파룬따파를 미친 듯이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 연말, 저는 수련생과 함께 베이징에 가 천안문 광장에서 현수막을 펼치고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사부님의 결백을 회복시켜 주세요!”라고 외쳤습니다. 저는 악한 무리에게 맞고 쓰러져 강제로 경찰차에 태워져서 첸먼(前門) 파출소로 끌려갔습니다. 이름을 대지 않아서 저는 베이징 주변의 시골 파출소로 보내졌습니다.
시골 경찰들은 저를 모두 잘 대해주었습니다. 제가 가자마자 그들에게 진상을 이야기해 줬으며, 병을 없애고 건강을 회복한 일부터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저녁에 그들은 환영회라며 밥을 사 주었고, 저를 괴롭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저에게 주소를 묻자 저는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말하면 강제노동을 받거나 형을 선고받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베이징의 많은 경찰은 파룬궁이 좋다는 것을 알고, 파룬궁의 많은 신기한 일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쑹씨 성을 가진 경찰 한 명이 저의 진술조서를 쓰려고 하자 제가 말했습니다. “그럼 저의 진심을 쓰세요. 파룬따파는 정법입니다! 파룬따파하오! 저의 사부님 청렴결백을 회복시켜 주세요!” 그가 말했습니다. “제가 그 말에 한마디를 더 추가할게요. ‘저는 영원히 마음을 바꾸지 않겠습니다.’”
밤 9시 이후, 저는 빈방으로 보내졌고 두 명의 경찰이 저를 지켜봤습니다. 그들은 큰 전기 주전자로 물을 끓여 난방했고, 제가 주전자 옆의 큰 의자 위에 누워서 자게 했습니다. 키 큰 착한 경찰이 자신의 솜 외투를 저에게 덮어주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우리 지역에는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는 또 다른 뚱뚱한 경찰에게 말했습니다. “TV 보지 마세요. 아주머니는 먼 곳에서 오셨을 테니 쉬셔야 해요.” 뚱뚱한 경찰은 TV를 끄고 문밖에 앉아서 잠을 잤습니다.
다음 날 아침 5시에, 키 큰 경찰이 뚱뚱한 경찰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집에 가서 아이에게 문을 열어줘야 합니다.” 저는 그에게 외투를 돌려주며 고맙다고 인사했고 그는 떠났습니다. 저는 이곳이 제가 머무를 곳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조용히 나왔습니다. 그 뚱뚱한 경찰은 ‘쿨쿨’ 자고 있었습니다. 저는 밖의 대문이 잠겨 있지 않고 틈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사부님께서 저를 떠나게 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전날 밤의 밥값을 테이블 위에 두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저는 베이징의 거처로 돌아왔는데 수련생이 빌린 집이었습니다. 저는 청두(成都)의 한 교사 수련생, 다칭(大慶)의 한 의사 수련생과 함께 현수막을 만들었고, 천안문에서 법을 실증하는 수련생들에게 제공했습니다. 사부님의 가지(加持)로, 저는 베이징에서 진상 자료 한 보따리를 가지고 순조롭게 집으로 돌아왔고, 주변 1개 시와 2개 현의 수련생들에게 나눠 줬으며, 중생을 구하는 정법의 흐름에 투입됐습니다.
먼 곳에 가서 진상 자료를 가져오며 다시 한번 경찰을 만나다
우리 지역에는 진상 자료가 없어서 저는 외지에 가서 진상 자료를 가져오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처음에는 100km 떨어진 먼 곳에서 가져왔는데, 나중에 그 자료점이 파괴되어, 저는 30km 떨어진 다른 곳에서 다시 가져왔습니다. 몇 번 가져온 후에, 그 자료점이 또 파괴되어, 저는 250km나 떨어진 먼 곳에서 자료를 가져왔습니다. 매번 큰 보따리 하나와 작은 보따리 하나였습니다.
어느 해는 상황이 가장 엄중해서, 차에 타기 전 모두 가방을 열어 검사받아야 했습니다. 그때 저는 사부님께 부탁드렸고 제 머릿속에 ‘뒷문으로 타자’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큰 가방을 메고 작은 가방을 손에 들고 뒷문으로 갔습니다. 버스에 탄 후 저는 웃으며 운전 기사에게 물었습니다. “뒷문으로 탔는데 표를 살 수 있을까요?” 그가 말했습니다. “가능합니다.” 그 이후로 다시 자료를 가져올 때 저는 뒷문으로 승차했고, 보름에 한 번씩,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빠지지 않았으며, 사부님 새 경문이 발표되면 저는 바로 가져왔습니다.
2000년 음력 5월 6일 아침 일찍, 저는 진상 CD를 가져가려고 했습니다. 제가 아직 떠나기도 전에, 경찰이 우리집에 와서 불법적으로 가택수색했고, 온 집안을 뒤졌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습니다. 사부님의 가지 아래 우리집에 물건이 있었지만 그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저를 공안국으로 납치했습니다. 그때 네 명이 저를 불법 심문했습니다. 과장이 말했습니다. “누군가 당신이 베이징에 갔다고 하는데, 갔습니까?” 제가 말했습니다. “저는 정말 가고 싶지만 돈이 없습니다. 당신이 저에게 돈을 빌려준다면 저는 당장 갈 것입니다. 왜 이렇게 좋은 공법을 수련하지 못하게 합니까?!”
“파룬따파는 정법이며 진선인(眞·善·忍)을 수련합니다. 우리는 다 좋은 사람이 되고, 병을 없애고 건강을 회복합니다. 당신들은 아십니까? 저는 한때 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병을 앓았습니다. 가장 심각했던 것은 간경화 복수였고, 나중에 소업(消業) 하느라 간 혼수 상태까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몸이 노란 종이처럼 누렇고 안구까지 노랬습니다. 매일 혼수상태로 잠만 잤으며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습니다. 이번에 저는 총 40여 일 동안 집에 누워 있었지만 저는 마음속으로 사부님께서 저를 구하실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제 마음속에 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부님께서 제 몸을 정화해주셨고, 저는 소변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소변으로 나온 건 모두 쓸개즙 같은 것이었습니다. 며칠 동안 계속 배출한 후 제 몸의 부기가 빠지고, 황달이 없어지고, 정상인처럼 회복됐습니다. 만약 제가 당신 집의 맏누나인데, 위대하신 파룬궁 사부님께서 저를 치료해주셨다면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여전히 대법을 반대하시겠습니까?”
저는 또 그들에게 제가 좋은 사람 되고 원한을 해소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수련하기 전, 이웃이 우리집 뒤 창문 아래에 나무 한 그루를 심었습니다. 작은 나무가 자라서, 나뭇가지가 우리집 창문을 막아 열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나뭇가지를 좀 잘라 달라고 여러 번 말했지만, 그들은 자르지 않았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우리집에 오셨을 때, 낫으로 창문을 막고 있는 나뭇가지를 잘랐습니다. 이웃이 퇴근하고 돌아와서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비록 그땐 참았지만 이 원한은 항상 마음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제가 파룬궁 수련 후, 모든 것이 다 해소됐습니다. 이웃이 저를 괴롭히면서, 우리집 마당 3분의 1되는 곳에 창고를 짓고 안에 화장실을 만들겠다며 저에게 물었습니다. ‘동의하세요?’ 그때 저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가능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1m가 넘는 땅을 차지했고, 우리집의 네모반듯한 마당은 식칼 모양으로 변했습니다. 창고의 들보가 우리집 문과 정면으로 마주 보았으며, 비가 올 때 빗물이 모두 우리집 마당으로 흘러들어 왔지만 저는 개의치 않고 기꺼이 손해를 감수했습니다. 그 이후로, 두 집안의 원한이 해소됐는데 이것은 대법이 저를 변화시켰기 때문입니다.”
저는 또 경찰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식료품 시장에 가서 2위안어치 만두를 샀는데, 만두 파는 사람에게 50위안을 줬지만, 그는 저에게 98위안을 거슬러 줬는데, 50위안을 더 거슬러 줬습니다. 그때 저는 아는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어서, 보지도 않고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저는 다른 곳에 채소 사러 가서 돈을 지불할 때 50위안이 더 많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급히 돌아가 만두 파는 사람에게 돈을 돌려주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당신이 저에게 돈을 더 거슬러 주었는데, 채소 살 때 알았습니다.’ 그는 놀라워하며 말했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좋은 사람이 있습니까?!’ 제가 말했습니다. ‘저는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이고, 수련하는 것은 진선인이며, 진정으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저는 또 그들에게 제가 노인을 공경하는 일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시어머니는 병이 없을 때 돈을 두 딸, 손자, 외손자에게 나누어 주었고, 저에게는 한푼도 주지 않았습니다. 시어머니는 나중에 두 눈이 실명하셨고, 탈항으로 인해 대장이 30cm 이상 빠져나왔지만 아무도 그녀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저는 자발적으로 시어머니를 우리집에 모셔왔고, 진심으로 그녀에게 잘해 드렸습니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든 만들어 드렸고, 만두를 좋아하셔서, 저는 사흘이 멀다 하고 만두를 빚어 드렸습니다. 돼지 족발을 드시고 싶어 하셨는데 치아가 좋지 않으셔서 저는 칼로 잘게 썰어 숟가락으로 떠 드렸습니다. 매번 식사 때마다 먹여 드려야 했습니다. 시어머니는 대변을 보실 때 창자가 따라 흘러나왔고, 저는 매일 아랫도리를 씻어 드리며 창자를 깨끗이 씻은 후 다시 넣어 드려야 했습니다. 만약 제가 대법을 수련하지 않았다면 저는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위대한 사부님께서 저를 가르치시고 지도하셔서 한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공법을, 왜 수련하지 못하게 합니까?! 좋은 사람이 많으면 더 좋지 않습니까?!”
제가 아직 말을 마치기도 전에 국장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우선 앉아 계세요. 우리는 밥 먹으러 갑니다.”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그들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국장이 말했습니다. “집에 가세요.” 국장은 다른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음날 저는 여전히 진상 자료와 CD를 가지러 갔습니다.
자아를 닦아 없애고 자료 만드는 법을 배우다
2004년, 외지 수련생이 저에게 제안했습니다. “당신들 지역에서도 자료점을 하나 운영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저는 매우 어렵다고 느꼈습니다. 첫째, 저는 학력이 낮고 기술을 모르며, 컴퓨터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둘째, 사악의 교란과 박해를 받을까 두려웠습니다. 셋째, 현지에 자료점이 생기면, 제가 더 이상 외지로 자료를 가져가러 다닐 필요가 없게 되며,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걱정됐고 상실감을 느꼈습니다.
저의 이런 불합리한 사람 마음에 대해 사부님께서 때맞춰 제자에게 일깨워주셨습니다. 꿈속에서 사부님께서 저에게 이런 장면을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무대 위에 서서, 손에 흰색 주전자를 들고 있었고, 무대 아래의 아이들은 모두 5~6살 정도였으며, 각자 흰색 작은 사발을 들고 물을 마시려고 했습니다. 목마른 아이들 무리 앞에서 저는 한 주전자뿐인 물로 그들의 갈증을 해소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마시지 못한 아이들이 더 많았고 물은 다 떨어졌습니다. 저는 깨달았습니다. 사람을 구하기 위해 대량의 진상 자료가 필요하고 자료점이 곳곳에 꽃 피워야 한다는 것을요.
현지 자료점 건립을 준비하기 위해 저는 수련생들과 교류했습니다. 자신은 할 수 있지만 가정 형편이 좋지 않은 수련생, 가정환경은 좋지만 본인에게 두려움 있는 수련생, 많은 수련생을 찾아봤지만 모두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저는 관념이 있어서 늘 교육 수준이 높은 수련생을 찾으려고 했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나중에 한 젊은 수련생이 하고 싶어 했고, 외지 수련생의 도움으로 컴퓨터와 프린터를 샀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지역에서 첫 번째 ‘작은 꽃’이 피었습니다.
정법의 수요에 따라 저도 자료 제작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때 TV, 휴대폰 등도 다룰 줄 몰랐지만 외지 수련생이 저를 격려하며 인내심 있게 가르쳐 줬습니다. 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금씩 배웠고, 먼저 각 조작 단계를 펜으로 적고, 다시 반복해서 연습했습니다. 마침내 조금 알게 됐습니다. 사부님 가지 아래, 젊은 수련생의 도움으로, 저는 일하면서 배웠습니다. 마침내 저는 진상 자료 제작 업무를 잘할 수 있게 됐습니다.
진상 자료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심성을 수련하다
다른 곳에서 진상 자료를 만들지 못해 완성하지 못한 임무를 모두 제가 맡아서 했고, 스스로 우쭐대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역시 내가 잘하고 기계도 말을 잘 듣네.’ 그 결과 프린터에서 검은색이 인쇄되지 않고 컴퓨터 마우스도 작동이 잘 안 됐습니다. 저는 할 수 없이 잠시 작업을 멈춘 후 법공부 하고 안으로 찾았습니다. 저의 이러한 과시심과 환희심이 얼마나 좋지 않은지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장비가 다시 정상적으로 작동했습니다. 원래 이 모든 문제가 저 스스로 초래한 것이었습니다!
가끔 저는 바쁘면 아무거나 대충 먹었고 밥도 흔히 대충했습니다. 하루는, 아이가 밥 달라고 해서 제가 말했습니다. “잠깐 기다려, 이 일 다 하고 먹자.” 제가 말을 마치자마자 프린터가 멈췄습니다. 고장을 해결할 수 없어서 저는 급한 마음으로 발정념을 하고 사부님께 도움을 청했지만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멈추고 아이에게 밥을 해주었습니다. 밥 먹고 다시 일을 시작하니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깨달았습니다. 사부님께서 저에게 멈추고 밥을 하고 밥을 먹으라고 하신 것이며, 최대한 평상인 상태에 부합하여 수련해야 합니다.
또 한번은 법공부 하지 않고 급하게 일하려다가 프린터가 규칙적으로 “서둘러, 서둘러, 서둘러…”라고 소리 내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깨달았습니다. 사부님께서 저에게 시간을 내어 법공부를 더 많이 하고, 일에 집착하는 마음을 수련해 없애라고 상기시켜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2004년부터 지금까지 이미 20년이 넘었지만 우리 자료점은 여전히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자료점 일을 잘하는 것 외에도 수년 동안 저는 거리에 나가서 채소를 사든, 일을 처리하든, 잔치에 가든, 인연 있는 사람을 만나면 대면하여 진상을 이야기하고, 삼퇴(중국공산당의 3가지 조직 탈퇴)를 권했으며, 항상 각종 사람을 구하는 진상 자료를 갖고 다녔습니다.
하루는 제가 컴퓨터를 켜보니 컴퓨터 왼쪽에 용 한 마리가 나타났고, 일을 다 마치자 컴퓨터를 껐습니다. 두 번째 다시 컴퓨터를 켜보니 오른쪽에도 왼쪽과 똑같은 용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저는 이것이 사부님께서 제자를 격려해주시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사람 구하는 일이 급하다
밤에 저는 수련생과 함께 진상을 알리며 사람을 구하러 다녔고, 현 전체의 각 향, 진에 거의 다 갔으며, 여러 번 갔습니다. 하지만 멀리 떨어진 한 향진은 교통이 불편해서 중간에 차를 갈아타야 했고, 저는 세 번을 가서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마지막은 늦가을 초겨울이었는데, 저는 ‘9평 공산당(九評共産黨, 공산당에 대한 9가지 평론)’ 40권과 진상 큰 책자 20권을 메고 갔습니다.
한번은 제가 주거 지역에서 진상 자료를 나누어 주는데, 다섯 개 건물이 모두 문이 잠겨 있었습니다. 저는 사람을 구하러 왔다고 생각하고 사부님께 제자를 도와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자 제가 잡아당기니 문이 열렸고, 연속해서 여러 개의 방범문이 잡아당기자마자 열렸습니다. 그 후 제가 진상 자료를 나누어 주는 곳마다 방범문이 자주 잡아당기는 대로 열렸는데, 이것은 사부님께서 제자를 도와 사람을 구하신 것입니다!
몇 년 전 어느 날 밤, 저 혼자 ‘9평’ 40권과 일부 진상 자료를 메고 주변 시골에 가서 나누어 주었고, 일부는 구치소 관사에 나누어 주려고 남겨 뒀습니다. 가족 건물은 구치소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때는 밤 10시가 넘었고, 구치소 경비원 네 명이 마작하고 있었으며, 문밖에서 보초 서던 경비원도 끌려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사부님께 청했습니다. “그가 저를 보지 못하게 하시고, 그를 가도록 해 주세요.” 그는 정말로 즉시 방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마당 안으로 들어가 진상 자료를 잘 놓고 순조롭게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외조카 딸의 아이가 결혼해서 외지에서 22명이 왔는데, 헤이룽장과 난징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그들에게 삼퇴를 권하려고 생각했지만 외조카 딸은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 고위 간부들이었기에 별로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사부님께 저를 가지해 주시기를 빌며 외조카 딸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나를 네 이모라고 소개해주기만 해.”
외조카 딸이 저를 소개하자 그 22명은 모두 일어나서 매우 예의 바르게 저에게 술을 권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저는 파룬궁 수련하는 사람이라 술을 마실 수 없으니 물로 대신 건배하겠습니다. 우리가 만난 것은 다 인연입니다.” 저는 그때부터 그들에게 진상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였고, 토지 개혁, 3반·5반, 반우파, 문화대혁명부터 파룬궁 박해까지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제가 직접 겪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토지 개혁 때 저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제 할아버지는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여덟 살 때 아버지를 여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여덟 살부터 남의 집에서 소를 치는 일을 시작하셨고, 열 살 정도 때 친척을 따라 동북에 와서 그물 치는 도랑에서 일하고, 나무 뗏목을 띄웠습니다. 20여 살 때 돌아가서 우리 할머니와 결혼하셨습니다(어릴 때 정혼). 집이 가난하고 돈이 없어서 살림을 꾸릴 수 없어, 우리 할머니를 친정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두 번째로 할아버지는 다시 동북에 와서 나무 뗏목을 띄웠고, 한 번 떠나시면 9년이었습니다. 그때 우리 아버지는 이미 아홉 살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마침내 돈을 충분하게 벌어서 은화 한 통과 약간의 원보(元寶)를 갖고 돌아오셔서 땅을 사고, 새집을 지었고, 살림이 점차 나아졌습니다. 1947년 토지 개혁 때, 할아버지의 집과 땅은 모두 나누어졌고, ‘부농’으로 지정됐습니다. 할아버지는 비판 투쟁을 당했고 (공산당 사람들이) 집에 돌려보내지 않았습니다. 여섯 살인 제가 할아버지에게 드실 것을 갖다 드렸습니다.
저에게 셋째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셋째 할아버지는 국민당이었고, 대만으로 도피하셨습니다. 공산당은 셋째 할머니에게 늙고 가난한 농민과 결혼하도록 강요했지만 셋째 할머니는 따르지 않았습니다. 셋째 할머니 집에는 나이 든 시어머니와 어린 아들이 있었습니다. 셋째 할머니는 (공산당 사람들에게) 두 엄지손가락이 묶인 채 들보에 매달려 흔들렸지만 죽어도 따르지 않겠다고 맹세하셨습니다. 하지만 흔들리는 그 와중에 셋째 할머니의 바지가 벗겨져서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하셨습니다.(역주: 극심한 수치심을 줌으로써 사람의 의지를 꺾어 굴복시킴)
토지 개혁 때 돈 많은 사람이 많이 맞아 죽었습니다. 저에게 샤오파오(小跑)라는 별명 가진 친구가 있었습니다. 1947년 토지 개혁 때, 그의 어머니는 47세였고 그저 평범한 가정주부셨지만, 맞아서 기절한 후 해변으로 끌려가 모래 속에 묻혔습니다. 샤오파오의 어머니는 죽지 않고 정신을 차려 해변에서 기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녀의 다리는 부러졌고 문틈으로 기어 마당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며느리가 민병대에게 신고해서 결국 민병대는 다시 구덩이를 파고 그녀를 묻었습니다. 그래서 샤오파오는 여섯 살부터 엄마가 없었고, 학교에 다닐 때 선생님과 친구들이 모두 샤오파오를 가여워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온 가족이 집에서 쫓겨났고, 집도 주지 않고, 땅도 주지 않고, 양식도 빼앗겼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공산당은 피를 보지 않고도 사람을 죽인다.”
제가 말했습니다. “파룬궁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 되라고 가르치며, 우리는 진선인을 수련하여, 일을 당하면 남을 먼저 생각하고, 맞아도 반격하지 않고, 욕을 먹어도 맞받아치지 않습니다. 파룬따파는 전 세계 100여 개 국가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공산당은 가짜, 악, 투쟁[假·惡·鬪]이며, ‘천안문 분신 자작극’을 조작하여(분신한 인물과 사실을 다 이야기했습니다), 국민들이 파룬궁을 증오하게 하고, 파룬궁 수련생의 장기를 적출하여 이익을 취하는데, 중공은 너무나 사악합니다.”
이어서 저는 구이저우성 핑탕현의 장자석(藏字石)에 새겨진 큰 글자 ‘중국공산당망(中國共産黨亡)’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우리가 만난 것은 인연이니 여러분 모두 삼퇴하세요. 삼퇴하시면 평안을 지킬 수 있습니다. 실명, 가명, 별명 모두 가능하며, 신께서는 사람의 마음만 보십니다. 여러분 모두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 이 아홉 글자를 기억하시고, 진심으로 염하면 큰 재앙이 닥칠 때 생명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21명이 실명으로 삼퇴를 했고 그중 6명은 당원이었습니다. 제가 떠날 때, 그들은 모두 존경하는 눈빛으로 저를 문밖까지 배웅했습니다.
2001년, 어느 지역의 수련생이 진상 현수막을 많이 만들어서 저를 통해 외지로 전달됐습니다. 하지만 외지 수련생이 일이 생기자 저를 말해 버렸습니다. 현지 공안국이 우리 지역에 와서 저를 외지 공안국으로 납치했고 저는 구치소에 불법 감금됐습니다. 그들은 저에게 ‘보증서’를 쓰라고 했습니다. 정보과 과장이 말했습니다. “보증서를 쓰면 당신을 집으로 돌려보내 주겠습니다.” 저는 그에게 진상을 이야기했습니다.
제 남편이 와서 저에게 ‘보증서’를 쓰라고 하며 “쓰면 바로 차 몰고 당신을 집으로 데려가겠소”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제 생명은 사부님께서 주신 것이니 쓰지 않겠습니다.”
아들이 저에게 무릎을 꿇었고 남편도 울었습니다. 아들의 공장장이 말했습니다. “아주머니, 쓰세요. 쓰면 바로 집에 가고 그렇지 않으면 저도 무릎을 꿇겠습니다.”
저는 급히 말했습니다. “안 돼요, 안 돼요, 제가 돌아가서 생각 좀 해 보게 해 주세요.” 결국 저는 쓰지 않았습니다.
공장 동료가 말했습니다. “이 할머니는 너무 고집이 세서 구치소 밥을 먹을지언정 배반자가 되지는 않겠네.”
그들은 틈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보고 저를 보름 동안 감금하고 나서 풀어줬습니다. 석방되기 전에 또 저에게 서명을 하라고 했지만 제가 말했습니다. “됐습니다.” 그래서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증서’를 쓰지 않아서 어느 해 직장에서 월급을 주지 않으며 ‘다시는 수련하지 않겠다’는 ‘보증서’를 쓰면 월급을 주겠다고 했지만 저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 뒤 다시 직장에 오라고 해서 저는 그들에게 진상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은 저의 두 달치 월급을 지급 정지해서 제가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저를 위해 모아뒀겠지요. 제 월급을 왜 주지 않습니까? 모아뒀겠죠?” 두 달 후 직장에서 저에게 전화해서 월급을 지급했습니다.
맺음말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부님 찾은 지 몇몇 해인가 하루아침 친히 뵈옵게 되었구나 법 얻어 되돌아 수련하나니 원만 이루어 사부님 따라 돌아가리라”[홍음-연귀성과(緣歸聖果)].
저는 사부님을 매우 그리워하며 사부님께서 하루빨리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제자는 사부님의 자비로운 제도에 감사드립니다! 제자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제자가 위험에 처했을 때, 사부님께서 모두 제자를 도와 위험을 벗어나게 해주셨습니다. 제자 가족 모두도 건강하고 모든 일이 순조롭습니다.
정법의 마지막 시간에, 저는 처음처럼 수련할 것이며 각종 집착과 사람 마음을 수련해 없애고, 사람을 구하는 일을 잘할 것입니다. 수련의 길이 얼마나 더 남았든 저는 끝까지 사부님을 굳게 믿고 대법을 굳게 믿으며, 사전(史前)의 서약을 이행하고 사부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제도에 감사드립니다!
(명혜망 제22회 중국법회 원고)
원문발표: 2025년 11월 2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11/23/502483.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5/11/23/502483.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