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저는 올해 34세이며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를 수련한 지 이미 10년이 됐습니다. 일생에 대법을 듣고 대법 수련 속으로 걸어 들어와 대법제자, 즉 우주에서 비할 바 없이 행운인 생명이 될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1. 청년 시절 법을 얻어 더는 방황하지 않고 ‘유리 심장’이 강해져
대법을 수련하기 전 제 마음속은 많은 방황으로 가득했습니다. 단순하고 순진했던 아이에서 청년으로 성장해 사회로 걸어 들어가면서 저는 일련의 내적 혼란과 고통스러운 발버둥을 겪었습니다. 당시 마음이 몹시 외로웠고 늘 제가 가야 할 길은 아주 올바른 길이며 제 인생을 의미로 가득 채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회 현실 속에서 저는 늘 찾지 못했고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대학 시절에는 지식을 잘 배우고 싶었지만 복잡한 인간관계와 감정, 환경의 변화에 지쳐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어 아무것도 배울 수 없었고 성적은 계속 떨어졌습니다. 직장 생활을 시작한 후 상사의 평가는 좋았고 저도 맡은 업무를 성실히 완수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공허했고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해 더욱 방황했습니다. 일과 생활 속에서 일을 잘못 처리할까 봐, 다른 사람에게 나쁜 인상을 줄까 봐 두려워하며 다른 사람의 시선 속에서 살았습니다. 늘 자신의 ‘명(名, 명예)’을 조심스럽게 지키느라 마음속 진정한 생각을 드러내지 못해 매일이 고달팠습니다. 몇 번인가 업무상 좌절을 겪었을 때 다른 사람들이 제 예상대로 협조해주지 않자 저는 갑자기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 회사 화장실로 달려가 몰래 울곤 했습니다. 마음이 몹시 여렸습니다.
직장 생활 2년이 채 안 됐을 때 타지에 사는 한 ‘네티즌’이 제게 대법 서적을 읽어보라고 권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교양 서적을 거의 읽지 않았고 평소 책을 읽어도 잘 몰입하지 못했으며 수련 같은 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었습니다. 머릿속에는 교과서에서 배운 그 ‘표준’과 무신론적 사고방식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대법 서적인 ‘전법륜(轉法輪)’을 처음 읽었을 때 깊이 매료됐습니다. 우리 생명과 우주의 진상을 알게 됐습니다. ‘알고 보니 사람은 모두 미혹 속에 있었구나, 알고 보니 다른 공간이 존재했구나!’ 대법은 제게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고 ‘수련(修煉)’이라는 단어가 제 마음속에 뿌리내렸습니다. 책 속에 나오는 일부 단어들은 당시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저는 마음속으로 파룬따파는 표준이 높고 사람을 높은 경지로 승화시킬 수 있는 고심(高深)한 대법이라고 어렴풋이 느꼈습니다. ‘나는 수련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할 일이다!’
법을 얻은 후 저는 인생에 희망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수련 전 저는 아무리 좋은 직장, 아무리 좋은 생활도 저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 같았고 마음은 늘 ‘텅 비어’ 조금도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법을 얻은 후 저는 생명의 의미가 반본귀진(返本歸眞, 진정한 자신의 본원으로 돌아감)해 우리의 선천적인 본성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알게 됐습니다. 저는 마침내 인생의 의미를 찾았습니다! 이 생각만 하면 마음이 한없이 충만해졌고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자신을 승화시켜 좋은 사람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최종에는 진선인(眞·善·忍)에 동화돼 원만 성취해야 함을 알게 됐습니다. 저는 이것이 가장 신성하고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에 비하면 생활 속의 사소한 번뇌들은 모두 미미하게 변해 그렇게 얻고 잃음에 연연하고 속을 끓일 가치가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수련 전 저는 자신이 매우 착하고 남을 해치지 않는 ‘괜찮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수련 후에야 저는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집착과 사심이 있는지 알게 됐습니다. 저는 비로소 제가 예전에 세상을 비난하고 증오하며 이 세상에 실망한 듯했지만 사실은 저 자신도 흐름에 따라 표류하고 심지어 파도를 부추기는 구성원 중 하나였음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대법 진선인의 표준과 얼마나 거리가 멀었는지요! 수련 속에서 자신을 돌아볼 때마다 매번 자신을 새로 알게 되는 것 같았습니다. 마침내 자신의 문제를 찾았을 때의 그 명료함, 자신이 어떻게 제고해야 하는지 알게 되는 그 깨달음은 오직 수련하는 사람만이 그 오묘함을 깊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
파룬따파를 수련한 후 저는 여러 해 동안 제가 살아온 이 신주(神州) 땅에 수천수만 명의 사람이 대법 속에서 수련하고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알고 보니 이들은 가장 선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우리 곁에서 중화 자손의 가장 전통적인 미덕을 실천하고 계승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이 친인척처럼 느껴졌고 우리의 가장 친애하는 동포라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저 자신은 TV 선전 속에서 중국공산당(중공)이 파룬궁에 씌운 누명과 모함에 세뇌당해 있었습니다. 대법 진상을 알고 난 후 저는 예전에 무지하고 천박했으며 시비를 분별하지 못했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습니다. 그 굳세고 용감한 수련생들은 몇 번이고 저를 감동시켰고 ‘진실’, ‘선함’, ‘인내’ 등 품성에 대한 저의 인식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그들의 대선(大善)·대인(大忍)의 마음, 자비로운 흉금은 가장 잔혹하고 불공정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여전히 선한 마음과 자비로 자신을 해치는 사람들을 대하고 그들에게 대법 진상을 알리며 세상 사람들이 거짓에 속지 않도록 애써 권했습니다. 심지어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그들은 마음속 진리와 신앙을 굳게 지켰고 사심 없이 남을 위하며 망설임 없이 나아갔습니다…. 저는 깊이 감동했습니다. 세상에 이토록 가슴 뛰고 장엄하며 눈물겨운 위업이 많았다니. 그에 비하면 저는 더 이상 저의 작은 성과에 우쭐해서도 안 되고 보잘것없는 작은 어려움에 불평하며 주저앉아서도 안 됐습니다. 저는 제가 예전에 얼마나 편협했는지 보았고 대법이 사람의 마음을 무한히 넓힐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제 마음은 갈수록 강해지고 확고해졌습니다.
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수많은 파룬궁수련생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국가, 인종, 배경에서 왔고 비록 서로 모르고 만난 적 없지만 우리는 같은 책을 읽고 같은 법을 수련하며 같은 사부님의 제자이고 같은 대법 속의 입자입니다. 그 느낌은 정말이지 너무나 신기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저는 비로소 진정한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 무엇인지 체감했고 마음은 더는 방황하거나 외롭지 않았습니다. 저는 지체 없이 대법의 아름다움과 진상을 제 가족과 친구들에게 알렸습니다.
2. 대법 수련해 부처님 은혜 입으니 가족도 수혜
수련 전 저는 몸에 큰 병은 없었지만 자질구레한 잔병이 많았습니다. 어릴 적 학교 다닐 때 자주 감기에 걸리고 기침을 했으며 목이 염증으로 쉬어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책가방에 몇 종류의 약을 가지고 다니며 쉬는 시간이면 하나씩 약을 먹었고 병가도 자주 냈습니다. 대학에 가서는 알레르기성 비염, 결막염, 인후염을 앓아 가을만 되면 알레르기가 발작해 몹시 고통스러웠습니다. 병원에 가서 각종 약을 처방받아 코에 뿌리고 눈에 발라야 겨우 좀 완화됐습니다. 대학교 3학년 때는 숨이 차는 일이 잦아 밥을 몇 숟가락 먹다 멈추고 심호흡을 한 뒤 다시 먹어야 했습니다. 병원에서 검사하니 경추 변형 때문이라고 해 한동안 한약을 먹고 증상이 완화됐습니다. 직장 생활을 시작한 후에는 유선 증식증이 발견돼 한밤중에 아파서 깨기도 했습니다.
수련 후 대법은 끊임없이 제 심신을 정화해주셨습니다. 지금까지 거의 10년 동안 저는 다시는 약을 먹거나 병원에 가거나 감기나 열이 난 적이 없습니다. 정말로 ‘병 없이 몸이 가벼움’을 체감했습니다. 체중도 줄고 몸매도 균형이 잡혔으며 온몸이 가볍고 편안해졌습니다. 강도 높은 일을 해도 하룻밤 자고 나면 회복됐고 장기간 이어져도 몸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습니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정신 상태가 좋지 않을 때도 법공부하고 연공하면 상태가 금방 좋아져 안팎으로 활력과 에너지가 넘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매일 기본적으로 머리만 대면 잠들었고 불면증으로 잠 못 이룬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도 몇 년 전 진상을 알고 대법 서적을 읽고 연공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이전에 류머티즘, 관상 동맥 심장병, 고혈압을 앓았고 심장 스텐트 시술도 받았습니다. 심장 수술 때문에 평생 약을 먹어야 했는데 양약을 오래 먹다 보니 위출혈이 생겼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약을 서서히 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법 서적을 읽으신 후 아버지는 다시는 약을 드시지 않았습니다. 스텐트 시술을 받은 지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병원에서 재검사해보면 심장 상태가 아주 좋습니다.
2019년 초 아버지는 갑자기 심각한 위출혈을 일으켜 한밤중에 집에서 피를 한 대야나 토하고 일시적인 쇼크 상태에 빠지셨습니다. 120 구급차로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가 위내시경실에서 검사하던 중 또다시 대량의 피를 토했고 혈압이 30까지 떨어져 긴급 수혈을 많이 했습니다. 위내시경 결과 위 안에 고름 같은 덩어리가 보여 당시 병원에서는 긴급 위 절제 수술을 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토혈 후 몸이 허약해 수술에 위험이 따를 것을 고려해 클립으로 임시 지혈 조치를 했지만 아직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하신 상태였습니다. 그 후 가족과 상의해 중재적 시술로 혈관을 막아 지혈하기로 했고 수술은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다음 날 우리가 타지에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이미 생명의 위험에서 벗어나 중환자실에서 경과를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며칠간의 회복을 거쳐 다시 위내시경과 조직 검사를 한 후 병원에서는 ‘위암’ 진단을 내리고 아버지께 위 절제 수술을 하려 했습니다. 수술 전날 밤 가족 서명을 받을 때 의사는 우리에게 ‘위 전체 절제술’이라고, 즉 우리가 생각했던 일부 절제가 아니라 위 전체와 담낭까지 모두 잘라내야 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본래 저와 남편은 줄곧 아버지가 정념을 강화해 수술하지 않도록 도왔지만 수많은 친지의 걱정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집착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사부님께 맡겼습니다.
위 전체 절제술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어머니도 망설이셨는데 아버지는 당시 스스로 수술을 받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결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다음 날 친지들은 본래 아버지의 수술을 병문안하러 왔다가 아버지가 퇴원해 귀가하는 것을 돕게 됐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에도 친척들은 여전히 안심하지 못해 우리는 아버지를 모시고 베이징(北京)으로 가 재검사를 받았습니다. 베이징의 외과 의사도 아버지의 위내시경 보고서를 보더니 반드시 수술해야 한다면서도 먼저 위내시경 재검사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위내시경 검사 전날 밤, 저는 임대한 숙소에서 잠시 연공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몸이 비교적 허약하셨지만 그래도 몇 가지 동작을 따라 하고 쉬는 시간에는 대법 서적도 잠시 읽으셨습니다. 세 번째 위내시경은 두 번째와 불과 일주일 간격이었는데, 결과가 나오자 사진상으로 상처가 아주 잘 아물었고 고름 덩어리도 없었으며 단지 궤양 표면만 하나 있었고 다른 곳은 모두 매끄러웠습니다. 조직 검사 보고서에는 ‘암세포가 보이지 않음’이라고 나왔습니다.
당시 남편이 검사 결과지와 표본을 들고 병리과 주임을 찾아가 직접 봐달라고 했습니다. 병리과 주임이 자세히 이리저리 보더니 “아무 문제 없네요!”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감격해 우셨고 친지들도 모두 “정말 운이 좋다. 정말 하늘이 도우셨다!”라며 감탄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 아버지는 금방 회복하셨습니다. 이 몇 년간 아버지를 본 사람들은 모두 아버지가 관리를 잘해 안색이 좋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이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살핌 덕분에 험난함을 헤쳐나와 안정을 찾을 수 있었음을 압니다. 저의 어머니는 수련하지 않지만 역시 병원에 거의 가지 않았고 평소 두통이나 감기도 거의 없으며 약을 먹거나 주사를 맞은 일은 더더욱 없습니다. 사부님께서는 “한 사람이 연공하면 온 식구가 혜택을 받는다”(오스트레일리아법회 설법)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깊이 믿습니다. 사부님의 은혜는 막대해 대법의 불은(佛恩) 속에 있으니 마음속 감사를 언어로 다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3. 착실히 수련하며 ‘사(私)’를 내려놓고 수련의 참뜻을 체득
대법 수련을 막 시작했을 때 저는 대법이 가져다준 심신의 변화를 느끼며 수련의 아름다움을 체감했고 하루하루를 충실하고 즐겁게 보냈습니다. 수련 표준이 높아짐에 따라 부딪히는 갈등도 커졌습니다. 저는 대법에 대한 감성적 인식에서 이성적 인식으로 승화하는 수련 과정을 겪었습니다.
수련 2년 후 저는 지금의 남편과 교제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성(省) 소재지 도시에서 자랐고 어릴 때부터 부모님과 친지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성적도 우수해 고등학교 졸업 후 순조롭게 베이징의 ‘명문대’에 입학했고 졸업 후 베이징에서 직장 생활을 했습니다. 남편의 배경은 저와 달랐습니다. 그는 어릴 때 시골에서 자랐고 현(縣) 소재지에서 학교를 다녔으며 부모님은 모두 배움이 짧으셨습니다. 인연이 닿아 남편과 알게 됐고 몇 년간의 교류를 통해 저는 그가 정직하고 생각이 있으며 재능 있는 사람이고 제가 평소 접하던 대다수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그와 교제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줄곧 말을 잘 듣는 아이였고 연애와 결혼에 대해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했으며 언행에 주의해 남학생과 교제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남편과 교제하기로 한 것은 제가 그와 부부가 되기를 원한다고 신중하게 판단했음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교제 과정에서야 우리는 관념과 성격상 많은 차이가 있음을 발견했고, 이는 우리 사이의 갈등으로 이어졌습니다. 남편과 교제하기 전 저는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과 직접적인 갈등을 겪은 적이 없었고 부모님과 감정싸움을 한 것 외에는 다른 사람들과 깍듯하게 지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제가 사람들에게 잘 대하고 다른 사람들도 저를 잘 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저의 교제 방식이 옳다고 여겼고 남편도 저의 방식에 맞추기를 기대했습니다. 남편의 말을 빌리자면 바로 ‘독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던 것입니다.
오랫동안 저는 이것이 제가 안으로 찾고 심성을 높여야 할 수련 요소임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제멋대로 하고 제 의견을 고수하며 제가 옳고 상대방이 제게 상처를 줬다고 단정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이것은 오랫동안 공산당 당문화 속에서 형성된 ‘남에게 강요하고 언제나 옳다’는 사고방식이었는데 저는 그것을 자각하지 못했습니다. 끊임없이 법공부를 하던 어느 날, 저는 문득 제가 틀렸다는 것을 발견했고 제 문제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알고 보니 저는 전혀 스스로 느끼던 것처럼 ‘양호’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가 단지 ‘체면’상의 것을 지키는 데 능숙했을 뿐이고 그것은 일종의 외재적인 형식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다른 의견이나 견해가 있을 때 감히 표현하지 못한 것은 다른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으며 받아들이지 않아 제 마음에 상처를 줄까 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갈등이 생기는 것이 두려워서 사람들에게 ‘깍듯하게’ 대했던 것입니다. 마음속에 억울함이 있어도 감히 표현하지 못하고 묵묵히 마음에 담아두었지만 진정으로 담담하게 여기거나 개의치 않은 것이 아니라 마음속은 여전히 매우 복잡했습니다. 여러 가지 걱정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저의 약한 면을 보이기 싫었던 것은 자신을 상처로부터 보호하려는 것이었고 ‘사(私)’를 지키려는 표현이었으며 ‘진실하지 못함’이었습니다. 부모님 외에 저는 모든 사람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는데 표면상으로는 ‘좋음’이었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보호하고 마음을 건드리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제 삶에 들어오면서 저는 처음으로 ‘낯선 사람’과 가까운 거리에서 지내게 됐고 따라서 제 마음속의 이런 문제들이 모두 드러났으며 모든 ‘위장’도, ‘가면’도 벗겨졌습니다.
그리하여 저도 ‘긴장한 채’ 지내던 것에서 서서히 자신을 열고 마음속 진정한 생각을 표현하며 다른 사람과 진솔하게 소통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높은 곳에 있고’, ‘자신을 보호하려는’ 자세를 내려놓고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배려했습니다. 저는 일종의 진실함과 편안함을 느꼈고 수련에서 ‘안으로 찾기’의 오묘함을 체감했습니다.
남편과 1년 넘게 교제하며 결혼을 이야기할 때쯤 그와 그의 부모님은 한 가지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제게 메시지를 보내 그들이 그를 고향에서 자리 잡게 하고 저와 함께 베이징에서 일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알려왔습니다. 만약 제가 그와 결혼하길 원한다면 그를 따라 그들의 현 소재지로 돌아가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저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나중에야 시어머니와 남편 사이에 ‘약속’이 있었음을 알게 됐습니다. 만약 졸업 후 타지에서 3년간 일하고도 돈을 벌어오지 못하면 고향으로 돌아오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막 졸업해 월급이 매우 적었고 한동안은 심지어 월급이 없었으며 저축도 거의 없었습니다. 시부모님이 보시기에 그것은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한동안 남편에 대한 정(情)을 내려놓기 어려웠고 우리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싶었으며 제가 수련을 착실하게 하지 못했으니 교제 과정에서 더 잘할 수 있길 바랐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갈등하다가 결국 친지들이 모두 반대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저는 10년 가까이 공부하고 일했던 베이징을 떠나 남편을 따라 그의 고향 현 소재지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시부모님 댁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그분들은 이미 8~9년을 산 집이었는데 집안에는 물건이 많이 쌓여 있었고 집안 인테리어도 좋지 않았습니다. 저층이라 빛도 잘 들지 않고 어두웠으며 벽도 검게 변했고 여러 곳의 벽지가 곰팡이가 슬어 떨어져 나갔습니다. 날씨가 습하면 벽지와 흰 회반죽이 우수수 떨어졌습니다. 집안의 등, 미닫이문, 옷장 문 등 많은 것들이 고장 나 매우 불편했습니다. 주방에는 오랫동안 쓰지 않는 그릇과 냄비가 가득 쌓여 있었고, 곳곳이 기름때로 번들거렸으며, 바퀴벌레가 자주 기어 다녔습니다. 시어머니는 성격이 털털한 분이라 집안 관리도 잘 못 하셨습니다. 제가 결혼할 때도 집안 청소를 거의 하지 않았고 단지 우리 침실만 꾸몄을 뿐이었습니다. 결혼식 당일에도 거실 베란다에는 빨래가 널려 있었습니다. 재작년에야 저는 요리하기 편리하도록 시부모님의 의견을 구하고 주방에 수년간 방치됐던 못 쓰는 주방기구들을 처리했습니다. 찬장을 비우고 밖에 있던 물건들을 넣어 주방 위생을 아주 깨끗하게 정리했습니다.
대도시의 외동딸로서 제 결혼 조건은 그에 비해 매우 열악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수련인임을 알았고 속인의 명리정(名, 利, 情)은 모두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고 없애야 할 집착임을 알았습니다. 저는 결혼을 수련 환경으로 삼고 원만하게 지내도록 노력했습니다. 남편의 친척 중 다수는 시골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말이 통하지 않고 제 성격도 내성적이었지만 저는 최대한 우호적인 태도를 표현하려 노력했습니다. 친척들도 제게 잘해주셨고 자주 음식을 많이 만들어 우리를 불러 먹게 했습니다. 남편의 할머니와 외할머니는 저를 볼 때마다 제 손을 잡고 당신의 좋은 것들을 꺼내 제게 먹이셨습니다. 남편의 외할머니가 몸이 편찮으실 때 저는 그분께 대법제자가 제작한 영상과 ‘사은송(師恩頌)’ 등 노래 영상을 보여드렸는데 아주 좋아하셨고 저를 보면 웃으셨습니다. 그분이 건강하실 때 저와 남편은 그분과 함께 들에 나가 죽순을 캤는데 이런 것들은 모두 제가 북방에서, 대도시에서 보지도 못하고 경험하지도 못한 것들이었습니다.
남편과 시부모님은 모두 일찍 나가 늦게 돌아왔습니다. 남편은 점심때 집에 돌아왔지만 시부모님은 집에 계신 시간이 거의 없었습니다. 평소에 장보고 요리하고 빨래하는 것은 모두 제가 했습니다. 때로는 저녁에 제가 방에서 일하고 있는데 시부모님이 돌아오자마자 끓인 물도 없고 청소도 안 했으며 널어놓은 빨래도 걷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또 자주 주방에 가서 제가 장을 봤는지 확인하셨고 늘 바깥 음식이 비위생적이니 밖에서 사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제 마음속 스트레스는 매우 컸습니다. 저는 아직 젊은데 자신만의 생활이 없고 총체적으로 이런저런 요구를 받으며 그들의 사투리를 배우고 요리도 할 줄 알아야 하며, 남편의 일을 지지해야 하면서도 제 감정은 배려받지 못한다고 느꼈습니다. 저는 제 가정, 학력, 직장과 생활 능력이 모두 남편보다 나은데 시어머니는 늘 제게 ‘닭에게 시집가면 닭을 따르고 개에게 시집가면 개를 따른다’고 훈계하시니 마음속이 정말 분했습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편안한 생활을 원하느냐, 아니면 고생하며 위로 수련하길 원하느냐?’ 이것은 정말로 영혼 깊은 곳을 건드리는 질문이었습니다. 제가 원하는 모든 것은 저의 욕망에서 비롯됐고 모두 ‘사(私)’이며 이익에 대한 추구이고 속인의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갈망임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바로 수련인이 닦아 없애야 할 것이고 수련인의 요구와 상반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저의 강렬한 질투심, 고생하기 싫어하는 마음, 안일을 추구하는 마음, 명리심 그리고 시부모님에 대한 원망심을 찾아냈습니다. 저는 ‘자아’를 내려놓기 위해 노력했고 저의 관념과 표준으로 다른 사람을 재단하지 않고 상대방의 각도에 서서 역지사지하며 시부모님의 수고와 어려움을 헤아리고 그분들을 좀 더 이해하려 하니 제가 억울할 것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저는 오직 마음이 깨끗해야 다른 사람에게 잘할 수 있고 그것이 진정한 선(善)임을 알았습니다. 표면상으로 아무리 많이 해도 모두 ‘정(情)’에서 나온 것이고 ‘정’은 이기적인 것이며 보답을 바라는 것이고 다른 사람도 자신에게 똑같이 잘해주길 바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원망심이 생깁니다. ‘정’ 외에도 명예욕이 있어 시부모님의 인정을 받고 자신이 좋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면서 동시에 요구에 미치지 못해 남들에게 안 좋은 말을 들을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진정한 선이나 이타심이 아니었습니다. 제 마음속은 줄곧 ‘나’를 생각했는데 어디에 자비가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저는 시부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게 됐고 마음도 훨씬 가벼워졌습니다.
재작년 겨울 시부모님은 시골집을 새로 단장하고 일부를 증축해 시골로 돌아가 사셨습니다. 저의 생활과 수련 환경은 더욱 여유로워졌고 저만의 시간과 공간이 더 많아졌습니다. 남편도 변화가 매우 컸습니다. 결혼 전 몇 년간 그는 집안일을 거의 하지 않았고 채소를 씻거나 써는 등 주방에 자발적으로 들어가는 일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집에 있기만 하면 주방에서 저를 도왔고 때로는 자발적으로 요리를 하며 평소 설거지나 청소도 아주 적극적으로 합니다. 낮에 그가 일 때문에 비교적 바쁜데도 저와 함께 집안일을 분담해주니 저는 매우 고맙습니다.
예전에 저는 ‘시댁’, ‘친정’이라는 개념이 별로 없었고 ‘멀리 시집온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더욱 몰랐으며 심지어 제가 ‘멀리 시집온 것’임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결혼하고 몇 년이 지나서야 저는 점차 깨닫게 됐습니다. 알고 보니 제가 직면해야 할 문제가 이렇게 많았습니다. 예전에 베이징에서 학교 다니고 일할 때를 돌아보면 집에서 불과 3시간 거리라 명절에 집에 가기도 편리했고 부모님이 저를 보러 오시는 것도 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남편을 따라 고향에 돌아온 후 친정과는 남쪽에서 북쪽까지 1,000여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습니다. 때로는 남편이 저와 함께 친정에 가지 못하면 저 혼자 비행기를 타고 오가야 했습니다. 친정에 가기 불편하다 보니 한 번 가면 오랫동안 머물렀습니다. 부모님을 떠나야 할 때면 마음속이 몹시 서운했습니다. 부모님 연세가 갈수록 많아지시는데 매번 저를 배웅하러 가시는 부모님을 볼 때마다 저의 먼 결혼이 부모님께 너무 많은 그리움과 서운함을 안겨드린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사부님과 대법은 끊임없이 저를 가지(加持)해주셨습니다. 이 몇 년간 집안일은 모두 순조로웠고 부모님의 신체, 정신, 생활 상태도 모두 아주 좋으셨으며 마음가짐도 점차 변하셨습니다. 저는 제 부모님이 예전보다 더 낙관적이고 너그러우며 선량해지셨다고 느꼈습니다. 저는 사부님께서 주신 것에 마음속으로 감사드렸고 서서히 안심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저는 부모님에 대한 정이 매우 무거운데 정 역시 ‘사(私)’입니다. 늘 자신의 부모님만 생각하는 것도 사리사욕입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을 똑똑히 보고 가족정을 내려놓으며 부모님을 중생으로 여기고 저 자신을 잘 수련해 그분들을 구하려 노력했습니다. 제가 법에서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을 때 사부님께서는 제게 환경의 변화를 보여주셨습니다. 사람마다 인생길은 모두 배치돼 있는 것이고 우리의 수련의 길은 더욱이 사부님께서 정성껏 배치하신, 우리를 제고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점차 저는 일종의 진정한 ‘담백함’을 체감했는데 그것은 일종의 내적 균형이자 평정심과 평화로움이었습니다.
4.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고 조용히 일해
제가 막 남편을 따라 고향에 돌아왔을 때 남편은 시골의 한 중학교에 가서 교편을 잡았습니다. 개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학교에 갑자기 한 교사가 전근을 가 자리가 비었습니다. 그리하여 교장 선생님은 저를 찾아와 학생들의 대리 수업을 맡아달라고 했는데 과목은 바로 제가 전공한 과목이었습니다. 저는 사부님께서 완전히 낯선 환경에 제가 할 일을 마련해주신 데 대해 감사드렸습니다.
저와 남편은 평소 학교에 머물다가 주말에 현 소재지로 돌아왔습니다. 시골 학교의 조건은 비교적 열악해 운동장은 온통 돌과 모래였고 잡초가 무성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처음 교실에서 낭랑한 책 읽는 소리를 들었을 때 마음은 순간 감동으로 가득 찼고 마치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교정의 느낌을 되찾은 듯했습니다. 그곳 학생들은 모두 활발하고 굳세며 활기가 넘쳤습니다. 그에 비해 저는 제가 어릴 때부터 귀하게 자라 예민하고 여렸으며 좌절을 견디지 못하는 성격적 결함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많은 학생이 ‘남겨진 아이들’이었고 집안 형편이 현 소재지 학교에 보낼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시골에서 기숙했습니다. 어떤 학생은 겨울에도 얇은 옷에 맨발로 슬리퍼를 신고 다녔지만 춥다고 느끼지 않았고 여전히 기운 넘치게 뛰어다녔습니다. 사계절 내내 찬물로 세수하고 양치질하며 빨래했고 식당의 거친 단체 급식을 먹었는데 영양가는 거의 없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도시에서 자란 저는 이런 사회 현실을 본 적이 없어 순간 80년대에 온 듯한 착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많은 아이가 부모의 사랑을 누리지 못하고 심지어 부모를 거의 만나지 못하거나 이런저런 가정 문제를 겪고 있으며 가정의 교육과 양육, 편안한 생활 조건이 없음을 보았습니다. 제가 처음 갔을 때 하루는 노천 복도에서 휴대폰을 꺼내 그 아이들의 사진을 찍어주려 했는데 그들은 마치 휴대폰을 본 적도, 사진을 찍어본 적도 없는 것처럼 흥분해 일제히 저에게 몰려와 앞다투어 ‘렌즈를 차지하려’ 했습니다. 시끌벅적했고 수업 종이 울려 교실에 앉아서도 제게 손을 흔들고 포즈를 취했습니다. 저는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단지 그들에게 사진을 찍어주었을 뿐인데 그렇게 기뻐할 수 있다니.’ 저는 찍은 사진 속의 웃는 얼굴 하나하나를 인터넷에 공유했습니다. 제 동창생들은 제게 제가 하는 일이 너무 의미 있다며 도움이 필요하면 꼭 알려달라는 댓글을 남겼습니다. 저는 감동했습니다.
수업 시간에 저는 학생들에게 ‘진실하고 선하며 너그러운’ 사람이 돼야 하고 자신의 ‘덕(德)’을 길러야 한다고 말하며 학생들의 선한 생각을 일깨우고 무신론은 틀렸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저는 만약 중공의 ‘진선인’ 신앙에 대한 박해가 없었다면 사회 도덕이 이 지경까지 하락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 아이들도 어쩌면 부모의 이혼, 유기, 심지어 감옥행 같은 비극을 겪지 않았을 것이며, 이익만 좇고 생존을 위해 돈벌이에만 급급해 아이의 교육과 성장은 돌보지 않는 부모도 없었을 것이고, 그들도 어쩌면 따뜻한 가정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너무나도 생생한 사회 현실이고 사회 밑바닥의 빙산의 일각이며 많은 것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중공은 줄곧 태평성대를 자랑하며 사회 갈등과 문제를 은폐해 많은 사람이 허위적인 ‘번화’ 속에 살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자신이 더 잘 살기 위해 애쓰면서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사회를 걱정하는 일은 거의 생각하지 않습니다.
2년 남짓한 시간 동안 저는 줄곧 정식 교사들의 ‘대리’ 역할을 했습니다. 어느 학기에 교사가 부족하면 제가 가서 수업했고 교사가 출산 휴가를 낼 때도 저를 불러 수업하게 했습니다. 출산 휴가가 끝나고 돌아오면 저는 또 ‘실업’자가 돼 고정된 일이 없었습니다. 대리 수업료는 매달 1천 위안(약 18만 원) 정도였는데 제가 베이징에서 받던 월급과는 차이가 컸습니다. 하지만 명리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으니 저는 여전히 많은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학교 바로 옆이 논밭이라 수업이 없을 때면 저는 남편과 함께 밭 사이를 걸으며 전원의 풍경을 보았습니다. 사계절 풍경이 달랐고 농작물과 동물도 달랐습니다. 주위에는 시골집이 많았는데 때로는 직접 만든 특산물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청했습니다. 어느 집 앞의 비파나무를 지날 때 제가 비파를 본 적이 없어 신기해하자 주인은 즉시 열정적으로 나무에 올라가 많이 따서 제게 주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하는 사투리를 제가 알아듣는 둥 마는 둥 했지만 저는 그들의 우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2019년 상반기 아버지의 건강 문제로 저는 친정에 머물며 부모님과 함께 지내느라 당시 맡았던 반의 수업을 계속하지 못했습니다. 그 기간 매주 주말이면 학생들이 부모님 휴대폰으로 제게 영상 통화를 걸거나 메시지를 보내 제가 아직 그들에게 수업하러 오는지, 다시 와서 수업해주길 바라는지 묻곤 했습니다. 사실 당시 저도 그 아이들이 몹시 그리웠고 그들에게 수업해주고 싶었지만 저 역시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때 이후 저는 다시는 학교에 수업하러 가지 못했고 남편도 3년을 채우고 현 소재지 학교로 전근했습니다.
한번은 우연히 인터넷으로 일할 기회를 발견했는데 비교적 적합하다고 느껴 인터넷 면접을 거쳐 순조롭게 입사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정식 일자리와 괜찮은 수입을 얻게 됐습니다. 그에 비해 현 소재지의 일자리는 일반적으로 시간을 많이 차지하고 월급도 적었으며 업무 내용도 제 전공과 맞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제가 배운 전공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고 근무 장소도 유연해 컴퓨터와 인터넷만 있으면 됐습니다. 이것은 제게 큰 편리를 가져다주어 평소 법공부, 연공할 시간이 많았고 심지어 친정에 가 부모님을 뵐 때도 일을 미루지 않았습니다.
대법은 제게 지혜를 열어주시어 업무 내용이 수월하게 느껴졌고 배우는 것도 빨랐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수련의 길을 모두 배치해놓으셨고 우리는 그저 자신을 수련하기만 하면 됐으며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사부님이 계시니 정말 좋습니다.
처음에 인터넷으로 일을 시작했을 때 매일 남편이 활기차게 학교로 출근하는 모습을 보면 제 마음도 근질거리고 자주 들썩였으며 저도 몹시 문밖을 나가 출근하고 학교에 가서 수업하며 학생들과 정답게 지내고 동료들과 이야기 나누고 싶었습니다. 저는 주말, 공휴일, 겨울방학과 여름방학의 업무량이 많았고 매달의 임무도 많아 자주 아침부터 저녁까지 컴퓨터 앞에 하루 종일 앉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일이 어렵게 얻은 것임을 알았고 이 수련의 기회를 소중히 여겨야 함을 알았기에 노력하며 견뎌냈습니다. 몇 년이 지나 저는 이미 집에서 일하는 것에 적응해 문밖을 나가고 싶은 강렬한 욕망이 없어졌습니다. 조급한 마음을 극복하고 조용히 제 일에 몰두할 수 있게 됐습니다. 매일 집에 있어도 답답하지 않았고 오히려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낄 뿐입니다.
저는 또한 운 좋게 한 대법 항목에 참여해 주로 문자 편집과 교정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문장을 편집하는 과정 역시 심성을 수련하는 과정입니다. 수련 전에도 저도 자주 글을 썼지만 수련 후 다시 글을 쓸 때는 이미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임을 깊이 체감했습니다. 모든 경험, 방법, 기교 등이 마치 적용되지 않고 통하지 않는 것 같아 마치 처음부터 배우는 것 같았습니다. 만약 이 기간의 수련 상태가 좋지 않으면 글을 써 내려가기 매우 어려웠습니다. 때로 제가 쓴 것이 다른 수련생의 것으로 대체되고 수련생의 글이 간결하고 깨끗하며 요점이 뚜렷하고 의미심장한 것을 볼 때 저는 비로소 저의 격차를 발견했습니다. 저는 어떤 표현이든 드러나는 것은 모두 자신의 수양이고 자신의 심성이며 일체가 모두 수련임을 깨달았습니다.
평소 저는 진상 지폐를 인쇄하고 사용하는 것을 견지해 더 많은 세상 사람이 진상을 알 기회를 갖도록 하고 있습니다. 중공의 진상 봉쇄는 세상 사람들을 모두 어둠 속에 가두어 시비와 선악도 분별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근년의 전염병, 재난은 더욱이 사람들을 공포에 가득 차게 했지만 그것이 사회 도덕의 하락과 중공의 파룬불법(法輪佛法)에 대한 박해로 초래된 것임을 알지 못합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소중한 세상 사람을 구원해 그들이 진상을 알도록 하고 중공의 수십 년 폭정의 피비린내 나는 빚에 순장되지 않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더 많은 세상 사람이 깨어나 중공의 본질을 똑똑히 보고 대법의 제도를 받으시길 진심으로 희망합니다.
사부님께 감사드리고 대법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말세의 어둠을 분별하고 그것을 버릴 수 있게 해주셨으며 나아가 마음속의 광명을 끊임없이 채울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원문발표: 2025년 10월 2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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