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미국 미주리주 대법제자
[명혜망] 저는 2년 전 미국에 온 미주리주의 대법제자입니다. 미국에 오기 전, 저는 많은 중국 수련생들처럼 ‘7·20’ 박해를 겪었고 감금과 노동교양을 당했으며, 아버지도 박해로 돌아가셨습니다. 인연이 닿아 가족과 함께 미국에 오게 됐습니다. 개인생활부터 진상을 알리는 방식까지 많은 것을 새로 배워야 했습니다. 여기서는 그동안의 수련 체득 일부를 간단히 나누고자 합니다. 부족한 부분은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1. 생사관을 내려놓고 대법 속에서 수련을 견지하다
수련인으로서 한 측면에서 보면, 사실 끊임없이 고비를 넘는 과정입니다. ‘7·20’ 박해 속에서 걸어 나와 계속 대법을 실증하고 진상을 알리는 모든 과정이 여러 고비를 돌파하는 과정이었으며, 그중에는 생사의 고비도 있었습니다. 아래는 제가 처음 생사의 고비를 맞닥뜨렸던 과정입니다.
아버지는 베이징에 청원을 가셨다가 감금돼 박해를 당하셨습니다. 돌아오신 지 2주도 안 돼 심각한 병업 상태가 나타났고, 결국 혼수상태에 빠지셨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병상 앞에서 엄숙한 문제를 생각했습니다. 대법은 대법제자를 보호할 수 있는데 왜 이런 문제가 생겼을까? 그동안 몇 년간의 수련을 돌이켜보면 대부분 아름다운 일이었습니다. 불치병이던 아버지도 병이 나으셨는데, 어째서 마지막에는 이렇게 됐을까? 결국 ‘이 법이 정말 맞는 것일까?’라는 의문까지 생겼습니다. 저는 자신에게 엄숙히 물었습니다. ‘나는 왜 수련하는가?’ 제 마음속에서 나온 대답은 ‘수련 원만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렇다면 원만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것은 자신의 세계 중생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하지만 만약 수련이 모두 거짓이고 진선인(眞·善·忍)의 법리가 거짓이라면, 인간의 생사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비록 나는 보지 못했지만, 신은 존재한다고 믿고, 사부님은 내 곁에 계신다.’ 이 생각이 일어나자 제 세계가 한 번 흔들린 듯했고, 마음속에 매우 신성한 상태가 느껴졌습니다. 말로는 형용하기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신심을 굳건히 한 후, 그 뒤의 고비를 넘는 데 탄탄한 기초가 마련됐습니다. 크든 작든 어떤 고비를 맞닥뜨려도, 비록 잘 넘지 못한 경우도 있었지만 든든한 버팀목이 있다는 것을 늘 느꼈습니다. 천안문 광장에 갔을 때, 그렇게 많은 경찰을 마주하니 인간의 겉모습에서는 약간 두려움이 있었지만, 무궁한 힘이 저를 지탱해 천안문 광장에서 다섯 번 크게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외치게 했습니다. 처음 네 번 외칠 때는 경찰들이 제 곁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찾았지만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다섯 번째 외쳤을 때 비로소 저를 발견했고, 제 머리를 거꾸로 잡아 시멘트 바닥에 내던졌습니다. 그러나 제 몸은 마치 마취를 맞은 듯 아무런 느낌이 없었습니다. 저는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사실 사부님께서 항상 곁에서 저를 보호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2. 안으로 찾으며 수련생들과 더 잘 협력하다
미국에 온 후 환경도 달라졌고 수련과 진상을 알리는 방식도 변했습니다. 생사의 고비 같은 문제는 거의 없었습니다. 오히려 수련생들과 협력하는 데 마음을 쓰고, 자기 집착을 내려놓는 문제들이 더 많았습니다.
미국에 온 첫해, 제가 있던 지역에서 처음으로 션윈 공연을 개최하게 됐습니다. 저는 이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그 지역에는 다른 대법제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션윈 홍보를 담당한 수련생이 저와 연락했고, 저는 션윈 전단을 배포하고 션윈 차량을 지키는 일을 맡게 됐습니다. 인솔한 수련생의 방식이 처음에는 너무 보수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좋아 보이는 주택가 입구에 ‘잡상인 출입 금지(No Soliciting)’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그걸 모르고 전단을 조금 배포한 뒤에야 알게 됐습니다. 책임자는 회수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미 배포한 건데 좋은 내용이고, 다음에 주의하면 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곧 ‘혹시 내가 회수하기 싫어 핑계를 대는 건 아닐까. 책임자의 방식이 보수적일지라도 분명 생각이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저는 제 행동을 바르게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책임자의 방식이 옳았습니다. 어떤 지역사회에서는 이런 일 때문에 극장에 전화해 ‘동의 없이 광고를 배포했다’고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이 2년 동안 수련생들과 접촉하면서, 처음에는 중국처럼 서로 굳게 신뢰하는 분위기가 별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수련생은 불평도 하고 원망도 했습니다. 또 일부 신수련생 같은 상태가 있었고 대법 일에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안으로 찾으니 사실 제 마음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늘 밖으로만 보며, 중국에서의 관념으로 해외 수련생들을 평가했던 것입니다.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정상일까요? 사실 그것은 인간적인 관념으로 수련생 간의 관계를 평가한 것이었고, 오히려 수련인답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제3자의 입장에서 제가 이런 말을 듣게 된 것은, 아마도 제게 수련해야 할 부분이 있어서였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적극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도 인간적인 관념일 뿐이며, 어쩌면 그들은 남몰래 대법 일을 많이 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일을 통해 저는 제 부족함과 아직 제거되지 않은 집착심을 보게 됐습니다.
3. 인간의 집착을 내려놓고 서양 수련생들과 협력해 주류 사회에 진상을 알리다
올해 7월 초, 서양 수련생이 저를 초청해 워싱턴 DC에서 진상 알리기 활동에 함께 참여하자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인간의 집착 때문에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럴듯한 이유도 많았습니다. 여름학기 수업도 있고, 생활도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며, 영어도 서툴러서 가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수련생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두 명만 간다고 했습니다. 제 마음이 움찔했습니다. 모두가 어려움이나 이유가 있어서 가지 못한다면, 수련은 자원인데 제가 안 간다고 해서 강요할 사람은 없지만, 이것이 정상일까요? 이것이 바로 집착심 아닌가요? 역시 좋지 않은 마음이었습니다. 제가 미국에 온 목적은 단순히 세속적인 생활을 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반드시 이 한 걸음을 내딛기로 결심했습니다.
제가 이 결심을 하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워싱턴 DC에 가기로 한 다음 날, 줄곧 연락이 닿지 않던 지역구 국회의원 보좌관이 답장을 보내 제가 그 지역구 주민인지 물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저는 유학생이고 이 지역에 2년 거주했습니다. 그러나 가족 모두가 중국에서 박해를 당했고, 아버지도 박해로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뜻밖에도 국회의원이 저를 직접 만나기로 동의했습니다. 저는 국회에서 이틀간 수련생들과 함께 여러 의원실을 다니며 보좌관들에게 진상을 알렸습니다. 제 예상과 달리 의원 본인을 직접 만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간혹 만나더라도 사진을 찍는 수준으로 대화는 거의 없었습니다. 대부분은 보좌관들에게 진상을 알렸습니다.
첫째 날 오후에 제가 있는 지역구 의원을 만나게 됐습니다. 저는 발정념을 보냈습니다. ‘나는 반드시 국회의원 본인을 만나야 한다. 겉으로는 우리가 인간 세상에서 도움을 구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와 그의 중생을 위해 자리를 마련해 주는 최선의 기회이다. 의원의 명백한 한 면이 반드시 진상을 들으러 올 것이다.’ 우리가 의원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의원은 투표 중이라 사무실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보좌관이 의원이 회의장 밖에서 저를 만나겠다고 했습니다. 보좌관이 직접 우리를 의원에게 데려갔습니다. 가는 도중 제 마음속에 다시 잡념이 일었습니다. ‘혹시 말할 내용을 잊으면 어떡하지? 잘 말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그러나 저는 다시 발정념을 보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구하러 왔다. 본래 지혜를 지니고 있다. (갑자기 감옥에서 함께 수감됐다가 박해로 사망한 대법제자가 떠올랐습니다.) 박해로 돌아가신 대법제자들도 저를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그들에게 대법제자가 박해로 세상을 떠난 진상을 알려야 합니다.’
이상하게도 의원에게 진상을 말할 때, 아버지와 다른 수련생들이 박해로 돌아간 일을 이야기하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참으로 비통한 감정이 솟구쳐 거의 눈물이 쏟아질 뻔했습니다. 이전에 자료를 쓰거나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는 이런 상태가 없었습니다. 그 순간 의원이 분명히 감동됐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제 박해 상황을 이야기한 뒤, 다른 수련생이 이어서 초국가적 탄압의 진상을 말했습니다. 이번 진상 알리기는 당연히 있어야 할 효과를 거뒀습니다.
이 일을 통해 저는 깨달았습니다. 결코 인간의 집착에 막혀 진상 알리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이틀간 진상을 알리는 과정에서 많은 수련생들과 교류했습니다. 어떤 수련생들은 매년 꾸준히 워싱턴 DC에 와서 진상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정말 훌륭했습니다. 그들과 비교해보니 저는 아직 차이가 많았습니다. 또 어떤 수련생들은 “보좌관만 만나고 의원은 대충 응대하며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습니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수련인으로서 우리는 세속 사람들의 부정적인 태도에 끌려가서는 안 됩니다. 중생들은 모두 선택하고 있으며, 우리가 그들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주류 사회를 향해 적극적으로 진상을 알려야 합니다. 어떤 수련생들은 조금 지쳐 보였습니다. 수련생 여러분, 힘내십시오. 우리가 매번 성심껏 진상을 전하는 것은 모두 효과가 있습니다. 진상에 명백해진 중생들은 마치 씨앗과도 같아서, 지금은 보이지 않더라도 어느 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도 있습니다. 대법을 지지하는 국회의원들 가운데 많은 이는 이전에 수련생들이 끊임없이 진상을 전한 결과로, 단번에 된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여러 차례의 진상 알리기 끝에야 결과가 있었습니다.
(2025년 미국 중부 지역 법회 원고)
원문발표: 2025년 9월 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9/9/499237.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5/9/9/49923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