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서적 |

정법수련의 관점에서 문제를 봐야 한다

글/ 네이멍구(內蒙古) 대법제자

[명혜망] 우리는 모두 정법 노정이 최후의 최후에 이르렀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명혜망에 올라온 일부 글들을 보면, 개인수련과 정법수련의 법리를 명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그 차이를 분명히 알지 못합니다.

‘전법륜’은 우리의 수련을 지도하는 사부님의 주요 저작입니다. 대법은 무한한 내포가 있으므로 정법수련의 이치도 포함하고 있으나 1999년 7.20 이전에 우리는 개인수련의 내포만 깨달았습니다. 7.20 이후 대법제자의 수련, 즉 정법수련이 시작되자 사부님께서는 ‘도항(導航)’에 수록된 네 편의 설법과 ‘미국 플로리다법회 설법’, ‘북미 순회 설법’, ‘이성(理性)’, ‘더는 참을 수 없다’ 등의 경문을 통해 대법제자들이 정법수련에 들어설 수 있도록 이끌어주셨습니다.

저는 지난 20여 년 간의 사악한 박해 속에서, 처음부터 개인수련과 정법수련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1. 세 가지 인식을 통해 개인수련과 정법수련을 구분하다

1) 우선 저는 진상을 알리는 것이 ‘더는 참을 수 없다’라는 법리의 체현이며, 정법수련의 체현임을 인식했습니다. 개인수련이라면 진상을 알릴 필요가 없고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며 안으로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정법 노정이 추진됨에 따라, 사부님께서는 대법제자들에게 개인수련을 잘하는 외, 법공부, 발정념, 진상을 알리는 등 세 가지 일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대법제자들은 무엇을 하든 출발점은 오직 선(善)이며 악(惡)은 없습니다.

2) 우리는 교통사고를 당하더라도 사람을 구하기 위해 진상을 알리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정법수련에서는 ‘전법륜’에 나오는 수련생처럼 상대방을 원망하거나 갈취하지 않고 “괜찮아요. 당신들은 가보세요”라고 말하는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때는 정법수련이 시작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더 큰 자비심으로 그 사람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대법을 배우는 사람이라 돈을 뜯어내지 않을 겁니다.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꼭 기억하세요.” 그리고 삼퇴(중국공산당의 당·단·대 조직 탈퇴)도 권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일이 빚을 갚게 하기 위해 발생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외, 사람을 구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3) 돈과 물건에 대한 욕심을 반드시 없애야 합니다. 사부님께서는 7.20 이전에 “돈을 저금하지 않고 물건을 장만하지 않으며”(정진요지-북경 노수련생에게)라고 규정하셨습니다. 그러나 7.20 이후에는 대법제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곳이 없게 되자 수련생 매체와 다른 여러 항목을 만들어 사악을 폭로하고 중생을 구했습니다. 이런 항목들은 모두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부님께서는 돈 관리를 엄격하게 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야만 사부님과 수련생, 중생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며, 사악이 틈을 타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부동(不同)한 층차(層次)에는 부동한 층차의 법이 있다”(전법륜)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것은 정법수련에만 존재하는데, 예를 들어 ‘더는 참을 수 없다’라는 것은 역사상 없었던 것으로서, 오직 정법수련 중에서 올바르게 깨달아야 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방면은 정법수련의 법리에 대한 저의 초기의 인식입니다.

2. 명혜망 교류 글에 드러난 정법수련에 대한 인식 부족

명혜망에 이런 교류 글이 있었습니다. 교사직에 있는 한 대법제자가 교육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성(省)급 특급교사로 선정되었으나, 명예와 이익을 내려놓기 위해 그 명예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했고, 특급교사에게 주어지는 집도 받지 않았습니다. 교장이 아무리 만류해도 그녀는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는 ‘자연스럽게 흘러감에 따르라’라는 법리에 위배됩니다. 그녀가 명예를 얻고 집을 받은 것은 교육 발전에 기여했고 학교에 명예를 가져다 준 결과이므로 받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그것은 ‘구함이 없어야 스스로 얻는다(無求而自得).’(시드니법회 설법)라는 법리에도 부합됩니다.

그녀는 아마도 집을 양보한 ‘전법륜’의 사례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부님께서 중국에서 하신 설법 녹음에 따르면, 그 사람은 기문(奇門)공법의 장문인이었습니다. 당연히 그것은 개인수련에 해당하는 사례로 우리가 참조할 바가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을 잘 수련함과 동시에 더 중요한 것은 대법을 수호하고 대법을 실증해야 합니다.

특급교사라는 칭호를 받게 되면, 학교는 물론 해당 지역, 나아가 성(省) 전체 교육계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겠습니까. 사람들 사이에서 “이 특급교사는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이다. 수련하지 않는 사람보다 훨씬 낫다. 정말 대단하다”라는 인식이 퍼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큰 명예와 이익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대법을 실증할 절호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또한 그녀가 학교에 명예를 안겨주면 학교 지도부도 그녀를 보호해줬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특급교사 칭호를 거부한 탓에 새로 부임된 교장은 사악한 자들의 압박에 못 이겨 그녀를 급수실에 보내 허드렛일을 시켰습니다. 이 시련은 그녀가 이번 일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초래된 것입니다.

또 그녀가 명예와 집을 양보한 것은, 그것을 얻은 사람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얻어서는 안 될 것을 얻었기 때문에 덕을 잃고 업을 쌓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은 결국 그 사람을 해치는 일입니다. 얼핏 보면 명예와 이익을 내려놓아 수련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법을 실증할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다른 사람을 해치게 된 셈입니다. 사실 이는 강한 ‘이기심’입니다. 그녀는 결국 박해받아 수업도 못하고 대법도 실증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가족과 친구들도 이해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또 만약 그녀가 특급교사가 되어 급여가 인상되었다면 자료 제작에 더 많은 돈을 쓸 수 있었을 것이고 자금이 부족한 지역을 도와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명예와 이익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대법 자원을 내어준다면, 오히려 죄책감을 느껴야 하지 않겠습니까?

2) 이런 교류 글도 있었습니다. 한 수련생은 결혼한 후 시댁에서 살았는데, 이웃에 집 며느리와 사이좋게 지내면서 진상을 알려줬습니다. 그 집이 이사를 간 후에도 두 사람은 계속 왕래하며 자주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두 번은 고기를 사가도 그 집 며느리가 맛이 없다며 트집을 잡았습니다. 처음에 안으로 찾아보니 이익심 때문에 돈을 아끼려고 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두 번째 찾아갔을 때도 상대가 만족하지 않자, 이익심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고 반성했습니다. 이는 개인수련에서는 맞는 태도지만 안타깝게도 완전히 개인수련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대법제자의 돈도 대법 자원이므로 사부님께서는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우리가 속인 상태에 부합하기 위해 인간관계에 돈을 쓰는 경우도 있지만, 이처럼 빈번하게 친목을 위해 돈을 쓰는 것이 맞는 것이겠습니까? 이는 대법 자원 낭비일 뿐 아니라 시간 낭비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그 사람은 이미 진상을 알고 있습니다.

아직 구원 받지 못한 중생이 그렇게 많은데 왜 그 시간에 더 많은 사람을 구하지 않습니까? 대법 자원은 사부님께서 법을 실증하는 데 사용하라고 배치하신 것인데, 왜 그렇게 낭비합니까? 그녀는 심지어 잔치를 크게 열어 체면을 세우려고 하는 마음까지 있었습니다. 왜 정법수련의 각도에서 안으로 찾아보지 않습니까? 우리는 대법제자이므로 돈을 함부로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일사일념(一思一念)을 수련해야 하지 않습니까?

명혜망 교류 글을 보면, 어떤 수련생은 찐빵 하나에 수돗물을 병에 담아갖고 매일 사람을 구하러 나갑니다. 겨울에 물이 얼면 손으로 녹여서 조금씩 마십니다. 그렇게 해서 아낀 돈을 사람을 구하는 데 씁니다. 사부님께서 ‘배움을 견주고 수련을 견주나니’[홍음-착실한 수련(實修)]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수련에서 서로 비교해 보고 잘하는 수련생을 따라 배우는 것이 진정한 수련입니다! 물론 조건이 좋은 수련생은 유위적으로 이렇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3) 또 명혜망 교류 글을 보면 이렇게 말하는 수련생이 적지 않습니다. “나는 우주에서 나쁘게 변해 이곳으로 떨어져 내려왔다. 그러므로 다시 수련해 돌아가야 한다.” 맞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인간이 높은 층차에서 이기적으로 변해 사람 이 층차로 떨어졌다고 세 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정법수련에 들어선 후, 사부님께서는 ‘북미 순회 설법’에서 대법제자는 세 부류로 나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 이후 설법에서는 우리가 모두 서약을 했고 사명이 있으며, 오래 전에 이미 정법시기 대법제자로 정해졌고, 사부님께서 생생세세 우리를 지켜보며 돌봐주셨다고 하셨습니다.

개인수련이라면 수련하여 돌아가면 됩니다. 서약이니, 사명이니, 사부님을 도와 정법을 하는 것이니 하는 것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는 많은 수련생이 밖에 나와 진상을 알리지 않거나 정진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법수련의 각도에서 보면, 정법시기 대법제자의 목표는 개인의 원만이 아닙니다. 개인의 원만만 생각하고 대법 실증과 중생구도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매우 강력한 ‘이기심’입니다. 장기간 구세력에게 통제되어 밖에 나오지 못하고 병업 가상에 시달리고 있는 수련생이라면 이 문제를 잘 생각해 보고 이기심을 돌파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수련하여 돌아간다고 해도 원래의 천국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인간 세상에서 수련하는 과정에서 이미 더 나은 생명이 되었고, 새로운 우주의 표준에 부합하게 되었습니다. 대법제자가 수련하는 과정에서 어떤 세계는 층차가 높아지고, 어떤 세계는 층차가 낮아지지만 모두 새로운 우주 안에 있게 됩니다. 새로운 우주의 세계는 더 이상 멸(滅)이 존재하지 않고, 구(舊) 우주의 세계보다 훨씬 아름답습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당신들에게 사람의 인식을 전변하라는 것은, 당신들에게 사람이 대법(大法)을 인식하는 이런 상태를 고수하라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이지(理智)적이지 못하여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하라는 것도 아니며, 당신들에게 대법(大法)을 청성(淸醒)하게 인식하라는 것이다.”[정진요지-취중(取中)]

그렇다면 ‘사람이 대법을 인식하는 상태’라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저의 개인적인 깨달음으로는 우리가 막 입문해 대법을 얻었을 때의 인식입니다. 만약 지금도 그 상태라면 아주 낮은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인데, 그런 상태로 정법수련을 잘할 수 있겠습니까? 개인수련의 틀에서 벗어나야만 정법수련의 길을 바르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물론 대법은 원용하기 때문에 많은 법리는 개인수련과 정법수련을 모두 관통하고 있습니다.

3. 정법 노정의 마지막 길을 어떻게 잘 걸어야 하는가

정법수련이 시작된 이후, 사부님께서는 필요한 법을 이미 다 말씀해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깨닫고,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아래 제가 있는 층차에서 깨달은 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마지막으로 갈수록 신사신법(信師信法)해야 한다

우리는 명혜망에서 이런 소식을 자주 접합니다. 감옥에서 심하게 박해받다가 풀려난 수련생이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 말입니다. 저는 이런 소식을 볼 때마다 가슴이 매우 아픕니다. 법에서 보면 그들은 사람의 관념을 바꾸지 못했고, 사부님과 법을 완전히 믿지 못했으며, 개인수련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여전히 자신을 가족이 보살펴야 하는 환자로 생각했습니다.

사부님께서 이미 감옥에서 나오게 해주셨는데 왜 법공부를 더 열심히 하여 빨리 제고하지 않았습니까? 어떤 수련생은 아주 빨리 건강을 회복하는데, 사부님께서 대법제자들을 다르게 대하시겠습니까? 그것은 개인의 수련 문제가 아닙니까? 스스로 변화하려 하지 않고 제고하려 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방법이 없고, 사부님께서도 도와주실 수 없습니다.

2) ‘박해받고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많은 수련생이 사악한 자들이 집으로 찾아오는 일을 단순히 괴롭힘이나 박해로 여기고 있습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환경이든지 사악의 요구, 명령과 지시에 협조하지 말라. 여러분이 모두 이렇게 한다면 환경은 이렇지 않을 것이다.”(정진요지2-대법제자의 정념은 위력이 있다) 저는 이 법리에 따라 사악이 무엇을 시키든 절대 협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善)’을 수련해 내지 않고 기계적으로 이렇게 한다면 상대방이 봤을 때 ‘악(惡)’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사부님의 법을 표면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정법수련의 관점에서 보면, 집으로 찾아온 사람들도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이므로 자비로운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가 정말 당신이 자신을 생각해주고 있고, 자신을 구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면 더 이상 당신을 박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가 정말 돈 몇 푼 때문에 당신을 박해하려고 한다 해도, 당신의 선(善)이 그를 조종하는 사악한 물질을 해체하고 그의 선한 마음을 깨워준다면, 그는 박해를 멈출 것입니다. 법리적으로 보면 이때 당신은 ‘박해받는’ 층차를 벗어났습니다. 대법제자와 경찰의 관계를 ‘박해자와 피박해자’가 아니라, ‘구도자와 피구도자’로 보면 선으로 박해를 멈출 수 있습니다.

대법제자의 정법수련은 조사정법과 중생구도이지 경찰의 지휘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경찰을 선하게 대하는 것이야말로 “사악의 요구, 명령과 지시에 협조하지 말라”는 사부님 말씀의 더 깊은 내포가 아니겠습니까?

3) 깊이 숨겨진 ‘이기심’을 철저히 제거해야 한다

지금 많은 수련생이 모든 집착심의 뿌리가 바로 ‘이기심’임을 깨닫고 있습니다. 이는 낡은 우주가 부패하고 변이된 근본 원인입니다. 반면 새로운 우주는 무사무아(無私無我)의 상태입니다. ‘이기심’을 제거하지 못하면 새로운 우주에 진입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원래 낡은 우주의 생명이었고, 대법을 통해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이 ‘이기심’은 뿌리가 깊기 때문에 우리는 일사일념을 수련해야 하고, 좋지 않은 생각이 올라오면 바로 분별하고 제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부님께서는 사악한 자들과 구세력이 배치한 모든 것을 인정하지 않으시고, 우리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악은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고, 대법제자의 일사일념을 교란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항상 정념을 유지해 사악이 틈을 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많은 노인 수련생들은 원망심 때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마음은 ‘악’입니다. ‘악’을 붙잡고 있으면서 어떻게 ‘선’을 수련할 수 있겠습니까? 대각자의 가장 기본적인 본성을 갖추지 못했는데 정과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다시 말해, 모든 집착심의 뿌리는 모두 ‘이기심’입니다. 이 뿌리를 제거하지 않으면 새로운 우주에서 설 자리가 없습니다. 진정으로 무사무아에 도달하여 사심 없이 타인을 위해야만 나쁜 상태를 바꿀 수 있습니다.

자신의 세계와 자신의 중생을 위하는 것은 이타적인 것 같지만 이것도 더 크게 보면 ‘이기심’입니다. 대법제자는 더 큰 사명이 있고 각자 수련의 길도 서로 다르며,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지만 성취하고 실천해 나가야 할 부분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관념을 완전히 내려놓고 완전히 법에 동화되는 것이야말로 사부님께서 가장 바라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4) 사부님께서 내려주신 법보(法寶)인 ‘안으로 찾기’를 잘 활용하자

사부님께서는 ‘전법륜’과 설법에서 ‘안으로 찾기’를 계속 강조하셨습니다. 천목이 열린 한 수련생은 ‘안으로 찾기’가 정말 법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황금빛이었고 심장 부위에 있는데, 수련자가 안에서 찾기 시작하면 이 법보가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회전하며 각종 관념의 껍질을 깨부순다고 합니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이 법보를 주신 이상 우리는 그것을 잘 활용하고 습관으로 만들어 기제를 형성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수련에서 비약적인 발전이 있을 것입니다.

많은 수련생들은 자신은 예전부터 이랬다고 하면서 변명하거나, 처음 입문할 때의 법에 대한 인식을 고수하고 있는데, 이런 상태로는 제고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만 바꾸려고 하고 자신은 바뀌려 하지 않는 것은 구세력의 사고방식입니다. 냉철함을 유지하면서 봉폐되지 않고, 쉽게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모든 일을 법으로 가늠하는 것이야말로 성숙한 대법제자입니다. 안으로 찾을 줄 아느냐 모르느냐는 수련할 줄 아느냐 모르느냐를 결정합니다.

5) 우리는 완전히 자신을 보호할 능력이 있다

사실 사부님께서는 이미 대법제자들에게 모든 신통을 주셨습니다. 다만 일부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거나 인간의 관념에 가로막혀 있을 뿐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진짜’라는 관념이 있거나 스스로 수련이 부족하다고 여겨 사용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겁니다. 명혜망을 보면 지금도 중국에서 그렇게 많은 수련생이 극심한 박해를 받고 있는데, 볼 때마다 마음이 정말 아픕니다. 법으로 냉정하게 분석해 보면 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원인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1) ‘박해받고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 공능을 사용하여 자신을 보호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업력의 요소를 배제할 수 없습니다)

(3) 정해진 대법제자가 아닐 수 있습니다.

대법제자로서 최후일수록 더욱 신사신법(信師信法)해야 합니다. 사부님께서 공능을 사용하라고 하셨으면 사용해야 합니다. 사용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수련이 부족한 것이고 누락이 있는 것입니다. 신통을 사용하여 자신을 보호하는 것은 가족을 보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지역의 한 수련생은 열 번이나 박해를 받아 감옥에 10여 년 갇혀있었는데, 자녀를 제외한 가족들은 모두 이해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대법제자가 찾아가면 바로 신고하여 진상도 알리지 못했습니다. 풀려나고 1년이 안 되어 또 감금되기를 반복했기 때문에 가족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저 역시 10년 간 열 번이나 박해를 받았고, 이 때문에 이혼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과 남동생 부부는 모두 수련생입니다. 처음 두 번 납치될 때 저는 신통을 사용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악이 나를 보지 못하게 하자’는 의념을 가졌지만 마음이 평온하지 않아 모두 실패했습니다. 저는 잠겨 있는 상태로 수련하고 있어서 다른 공간을 보지 못하지만 최근 신통에 관한 많은 글을 읽으며 관념을 바꾸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수련생은 사악한 전시판이나 현수막을 제거할 때, 손발을 쓰지 않고 마음속으로 신께 도움을 구하기만 하면 거센 바람이 불어와 망가지거나 날아가 버립니다. 혹은 담당자가 다른 내용의 전시판이나 현수막으로 바꾸게 해달라고 빌면 며칠 후 정말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는 모두 신통을 사용한 실제 사례들입니다.

감시카메라 앞에서 ‘나는 진선인(眞·善·忍)으로 구성되었다’라고 생각하거나 ‘나는 미세한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자, 영상에서 모습이 사라지거나 그림자만 남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수련생들의 이런 경험은 저에게 큰 계발을 주고 자신감을 줬습니다. 사실 사부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즉 신사신법(信師信法)하는지, 관념을 바꿀 수 있는지를 보시는 겁니다. 우리가 직접 하지 못하더라도, 사부님의 법신께서 해주십니다. 사부님께서 우리 곁에 계신다는 것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성숙해져 스스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게 되면 사부님께서도 그만큼 걱정을 덜지 않겠습니까?

6) 사부님께 도움을 구할 줄 알아야 한다

아래 이야기할 문제 역시 다른 수련생들의 글을 통해 깨달은 것입니다. 갑작스러운 일이 발생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는 사부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역시 신사신법(信師信法)의 표현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사부님을 떠올리지 못했는데, 점차 제고되면서 사부님께 도움을 청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다른 감방에 갇힌 한 수련생이 ‘유다’(변절자)의 설득에 넘어가 사악의 편에 섰고, 자신이 대법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가 구제불능이 된 것을 보고 저는 걱정했습니다. ‘그가 삼퇴시킨 수감자가 100명이 넘는데, 그들을 어떻게 하지? 내가 직접 구하지는 않았지만, 필경 같은 감옥에서 함께 지냈던 인연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저는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빌었습니다. ‘부디 그들을 저의 세계로 배치해 주세요. 그들은 사악한 당에서 탈퇴한 이들입니다.’ 저는 당시 이런 일념을 가졌지만 옳은지 아닌지 알 수 없어 계속 걱정만 했습니다. 나중에 풀려난 후 명혜망에서 한 수련생이 쓴 글을 보았는데, 그는 천목으로 사부님께서 다른 세계 일부 중생을 자신의 세계로 배치해 주시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습니다. 정법이 최후의 중요한 시기에 이른 지금, 우리는 어려운 문제가 생기거나 해결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면 사부님을 떠올려야 합니다. 이는 홀시해서는 안 될 문제입니다.

마지막으로, 주제와 직접 관련은 없지만 매우 중요한 문제를 덧붙이고자 합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가 절반의 중생을 구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아시고, 가능한 한 많이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마다 구원받을 수 있다면 법을 바로잡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대법제자들도 ‘거센 파도가 모래를 이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사부님께서는 “사람마다 모두 진정으로 수련한다는 그것은 불가능하다”(전법륜)고 하셨습니다. 대법제자들이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두 원만하고, 세인도 모두 구원 받을 때까지 시간을 끈다면 정법은 끝나지 못할 것입니다.

법은 변하지 않으며 변하는 것은 대법제자들입니다. 대법제자들 중에는 수련 성취한 자도 있겠지만 실패하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매 한 대법제자는 시기마다 문제를 다르게 인식할 것인데, 이는 필연적인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교류 글을 쓸 때에는 가급적이면 ‘제가 이해하기로는’, ‘제가 있는 층차에서 보면’이라는 표현을 덧붙이고, ‘바로 이렇다’고 하면서 단정적으로 말하거나 정의를 내리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맺음말

정법수련의 법리는 너무 심오하여 제가 깨달은 것은 그야말로 보잘 것 없습니다. 우주 정법은 역사상 전례가 없으므로 참조할 것이 없습니다. 구세력은 우주 정법의 이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사부님께 말했습니다. “당신이 말한 것을 우리는 할 줄 모릅니다.” “성공을 기원합니다.” 우리는 세간에서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는 대법제자로서 지극한 영광을 누리는 동시에, 비할 바 없이 중대한 사명을 갖고 있으며, 험난한 신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주에서 무수한 눈이 대법제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마지막 신의 길을 바르게 걸어 사전(史前)에 했던 신성한 서약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부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중생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습니다.

이상은 저의 현 층차의 인식이라 편협한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자신을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법의 최후시기에 명혜망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수련생들과 함께 교류하고, 정법수련의 법리를 명확히 하여 함께 제고하고 승화되기를 바라는 바람에서 이 글을 썼습니다. 부족하거나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바로잡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역사 속에서 저를 정법시기 대법제자로 선택해 주시고, 이렇게 큰 영광을 내려주신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반드시 사부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사명을 훌륭히 완수하겠습니다.

 

원문발표: 2025년 6월 1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6/18/49620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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