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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생이 다시 대법 수련으로 돌아오다

글/ 중국 대법제자 닝닝(寧寧)

[밍후이왕] 저는 1992년에 출생한 ‘주링허우(九零後: 90년대생)’입니다. 어머니는 97년에 법을 얻었고 저는 그때 다섯 살이었습니다. 이는 저에게 있어서 엄청난 행운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법을 얻은 후 매일 수련생 집으로 법공부를 하러 가셨는데, 저는 어머니의 ‘작은 꽁무니’가 되어 어디든 따라다녔으며 떨어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와 수련생들이 법을 읽으면 저는 한쪽에 조용히 앉아 들었습니다.

나중에 수련생들은 저에게도 책을 줬습니다. 저는 비록 글자를 몰랐지만 그들이 책장을 넘기면 저도 따라 넘겼습니다. 할머니 수련생이 어머니께 연공을 가르치면 저도 옆에서 배웠는데, 비록 대법 책은 몇 페이지 제대로 읽지 못했지만 연공 동작은 또렷이 기억했습니다. 어머니가 외우시는 ‘홍음(洪吟)’을 저도 일부 외울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단체 연공을 하러 읍내에 갈 때 저는 따라가겠다고 울며불며 난리를 쳤고,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저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지금도 똑똑히 기억나는데 그때 저는 맨 앞줄에 배치됐고 그날 처음 제2장 공법 파룬좡파(法輪樁法)를 완벽히 연마했습니다.

어릴 때 저는 법공부에 매우 적극적이었습니다. 비록 세상 물정은 모르지만 항상 ‘진선인(真·善·忍)’을 기억했습니다. 취학 전 아동반에 갓 입학했을 때 친구들이 저를 괴롭힐 때면 늘 더없이 소중한 이 세 글자를 떠올리며 ‘나는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는 학교 도처에서 친구들에게 우리 엄마는 파룬궁을 수련하는데 정말 좋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리하여 선생님마저 제가 파룬궁을 연마하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고 1999년 ‘7.20’ 탄압이 시작됐습니다. 저는 줄곧 대법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어머니는 ‘톈안먼(天安門) 분신자살 조작사건’의 진상을 알게 되자 가장 먼저 저에게 알려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람들이 왜 사부님과 대법을 그렇게 헐뜯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담임 선생님과 학교 주임 선생님이 연마하지 말라며 저를 찾았고 다시 연마하면 퇴학시키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그때 저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후회됩니다. 그 후부터 저는 학교에서 항상 괴롭힘을 당했지만 자신은 대법을 수련하고 있으며, ‘진선인’을 해내겠다는 것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2002년에 이르러 어머니는 대법을 실증하러 베이징에 가셨습니다. 톈안먼에 세 번 가셨는데 다섯 번 불법 구류 당하셨고, 세 번이나 세뇌반에 끌려가셨으며, 두 번 불법 노동교양을 당하셨는데 사악에게 박해당해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하셨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사악의 박해는 우리 가정과 저에게 큰 상처를 줬습니다. 그때 저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는데 학교 선생님과 학우들은 사당의 거짓말에 매일매일 세뇌돼 수련하는 사람들을 아니꼽게 봤으며, 수련하는 좋은 사람들을 모두 TV에서 날조해 선전한 그런 사람들로 여겼습니다. 학우들의 괴롭힘부터 시작해 나중에 담임 선생님의 욕설과 아무런 이유 없는 처벌까지, 학습성적이 우수했지만 저는 매일매일 서 있는 벌을 받아야 했을 뿐만 아니라 가장 눈에 띄는 위치에 서 있어야 했습니다. 심지어 학우들이 묻곤 했습니다. “넌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자꾸 벌을 받는 거니?”

워낙 제가 노는 것을 탐한 데다 법공부가 적었고 게다가 어머니도 잡혀가고 집마저 수색을 당해 더 이상 저에게 법을 배우라고 재촉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본래 성격이 거칠었는데 사흘이 멀다고 경찰이 찾아와 협박해대는 바람에 더욱 격해지셨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속인으로 떨어졌고 ‘진선인’도 잊었습니다. 매일 아버지와의 다툼과 싸움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엄마를 찾아오지 않는 것이 원망스러웠고, 기분이 나쁘면 저에게 화풀이하고 부수며 욕을 퍼붓는 것이 원망스러웠으며, 숨이 간들간들한 어머니를 병원에 치료하러 보내지 않고 집에서 죽기를 기다리게 하는 것을 증오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중고교는 물론 대학교 때도 가장 문제 있는 반항아가 됐고 제 ‘반항기’는 정말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길었습니다.

사실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는 ‘병보석’ 명의로 집에 돌아오셨습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업혀 집에 돌아왔을 때 집은 우리 두 사람의 싸움에 거의 부서질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마음속으로 대법이 좋다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대법 사부님이 어머니를 귀문관(鬼門關)에서 한번 또 한 번 구해주시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저는 사부님과 대법의 엄청난 억울함 알고 있고 아버지가 쉽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매일 두려움 속에서 지내셨습니다. 어머니가 잡혀갈까 봐 두려웠고 어머니가 잡혀가면 또 괴롭힘과 박해를 당할까 봐 두려워하셨습니다. 그리고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해야 했고 집 안팎으로 신경 써야 하셨으니 사실 압력이 상당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밖에서는 그래도 평온하지만 집 문에 들어서기만 하면 괜히 짜증을 내고 싶었고 게다가 대부분 아무 이유가 없었습니다. 나중에야 저는 이것은 마성의 교란이며 이 마성이 근본적으로 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중에 저는 일하게 됐고 어머니는 늘 저에게 법공부를 하라고 타이르셨습니다. 제가 법공부를 하게 하려고 어머니는 온갖 방법을 다 생각하셨습니다. 저는 대법이 좋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또 계속 수련하고 싶었지만 이 마성은 매번 올라왔는데 저도 모르게 어머니에게 짜증을 냈습니다. 사실 마음속으로는 정말 법공부를 하고 싶었습니다. 때로는 며칠 배우다가 한동안 지난 후 게으른 마음이 올라오면 또다시 그만뒀습니다. 이는 모두 마성이며 저는 발정념으로 제거해버려야 했지만 그때는 법공부가 적었기에 깨닫지 못했습니다.

저는 의과대 학생이며 ICU에서 일합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을 보는 건 다반사이고 어떨 때는 환자의 몸이 썩기 시작해서야 가족들이 치료를 포기할 때도 있었습니다. 저는 시체 처리를 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밤늦게 혼자 시체를 처리해야 할 때도 있었는데 전혀 두렵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퇴근하고 집에 돌아간 후에는 꼭 악몽을 꾸었습니다. 나중에는 잠을 잘 때면 거의 매일 악몽을 꿨는데 낮이든 밤이든 꿈에서 온갖 귀신들이 다 저를 쫓아왔으며, 온갖 종류의 무서운 것들을 다 보게 되어 때로는 꿈에서 놀라 깨어납니다. 정신을 차렸다가 다시 자도 여전히 그 장면이며 끔찍한 것들을 보았습니다. 어떨 때는 집안의 인형, 저금통과 각종 동물이나 인형 장난감들이 뇌수를 흘리며 저를 찾아옵니다. 이 때문에 저는 어머니께 집에 있는 인형들을 모두 버리게 했습니다. 하지만 악몽은 끊이지 않았고 그 시기 저는 정말 침대만 보아도 무서웠지만 또 잠을 안 잘 수는 없었습니다.

나중에 저는 대법이 생각났습니다. 2017년 말, 저는 다시 새롭게 대법 수련에 들어왔습니다. 그날은 바로 성탄절이었습니다. 제 기억에서 제 청춘기는 그날처럼 즐거웠던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그야말로 진정한 기쁨이었습니다. 동시에 뒤이어 오는 것은 후회막급이었습니다. ‘나는 얼마나 소중한 15년을 낭비했는가?’ 저는 다시는 정법시기 대법제자가 될 자격이 없을까 봐 두려웠습니다. 사부님의 한 번 또 한 번의 점화에 너무 죄송했습니다.

그래도 대법제자로서 저는 앞으로 변함없이 착실히 수련을 견지하겠습니다. 현재 저는 이미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닦아버렸습니다. 대법제자로서 부딪힌 갈등은 모두 자신의 잘못이며 자신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늘 게으름을 피우며 연공하기 싫어하는데 이것은 나태한 마음입니다. 또한 쟁투심과 사람의 각종 정을 수련해 제거하고, 세 가지 일을 열심히 해 합격한 대법제자가 되어 정법노정에 따라가겠습니다.

개인의 체득으로 부당한 점이 있으면 수련생 여러분께서 바로잡아주시기 바랍니다.

 

원문발표: 2021년 3월 1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3/16/42137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