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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환자’가 대법제자로 되어 사존의 보호에 감사드리다

글/ 해외 대법제자 위한(語涵)

[밍후이왕] 나는 올해 1월 미국에 온 청년 대법제자이며 중공(중국공산당)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던 때 순조롭게 미국에 올 수 있었다. 오는 길에 사존의 자비하신 보호와 가지가 있었는데 지혜를 열어 주시어 원래 영어 수준이 매우 낮았던 내가 체계적으로 아이엘츠(IELTS: 국제 공인 영어시험)를 공부한 지 1개월 만에 기적같이 시험에 합격했고 어렵지 않게 교육학 석사시험에도 합격했다.

법을 얻은 16년 시간을 돌이켜 보니 감회가 적지 않다. 아래에 자신의 수련 경험을 수련생과 나누며 정법 최후시각에 정념을 확고히 하고 사명을 저버리지 않으며 함께 우리의 사전서약을 실현할 수 있기를 바란다.

1. 여러 병원의 어린 환자

나는 네 살에 유치원에 다니면서부터 말 그대로 약탕관으로 변했다. 매월 거르지 않고 링거를 맞았으며 한 번 맞으면 10여 일이나 계속됐다. 페니실린을 맞는데 빈번하게 바늘을 찔러대기에 손의 혈관이 굵고 단단하게 변했다. 의사와 간호사가 바늘을 찌를 때면 여러 번 반복해야만 성공할 수 있었다. 알 수 없는 기침과 발열은 베테랑 의사도 곤혹스럽게 했는데 병의 원인을 찾지 못하겠다고 했다.

지금도 기침할 때의 고통을 역력히 기억하고 있는데 기침하면 먹은 음식을 다 토해야 했기에 낮에도 밥을 잘 먹지 못했다. 밤에 누우면 더 심해졌고 기침할 때의 그 소리는 폐의 밑뿌리까지 뽑아내는 것 같았다. 소리 내어 울지 못해 흐느껴 울면 기침은 더욱 심해졌다. 내 병을 낫게 하려고 집에서는 요리할 때도 소금을 넣지 못했고 다른 조미료도 아주 적게 넣어야 했다. 장기간 염분을 섭취하지 않자 신체의 솜털이 하얗게 변했지만, 기침을 완화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춘하추동 할 것 없이 바람이 불기만 하면 기침했는데 이웃도 모두 알게 됐다. 나는 평소에 외출이라곤 할 수 없었는데 문밖을 나가는 것은 주사를 맞아야 할 때뿐이었다.

2. 이전의 어린 환자가 무시험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하다

외할머니는 1996년 법을 얻은 대법제자이며 1999년 장쩌민 집단의 파룬궁 박해 이후 여러 번 베이징에 청원 갔다가 불법 수감당했다.

2004년 부모님은 이혼했고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외할머니 집으로 왔다. 같은 해 8월 외할머니는 산둥(山東)성 쯔보(淄博)시 왕춘(王村) 노동수용소에서 2년간 박해당한 후 집으로 돌아오셨다. 어머니는 외할머니 신체가 야위긴 했어도 정정하신 것을 봤는데 2년의 옥고도 외할머니를 무너지게 할 수 없었다.

대법의 초상함(超常)을 보시고 어머니는 외할머니를 따라 수련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는 항상 두 분에게 다시 한번 연공하도록 했는데 지금까지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숙제할 때도 사부님 설법을 들으면서 하고 싶었으며 친절한 음성이 나를 꿰뚫는 것 같았다.

보름쯤 지나고부터 나도 자발적으로 할머니와 어머니를 따라 수련하기 시작했고 매일 다섯 가지 공법을 빼먹은 적이 없었다. 학교를 파하고 집에 오면 먼저 법공부를 1시간 한 다음 숙제했다. 그러나 숙제 진행을 지연시킨 적이 없었고 오히려 적은 노력으로 성과가 있었는데 시험 때마다 반에서 상위권이었다.

수련한 지 2주가 채 되지 않은 어느 날 아침 토하려고 했다. 외할머니가 대야를 갖다 주시자 바로 토했는데 누런 짙은 가래가 뿜어져 나왔다. 토한 후엔 가슴을 쓰다듬으니 아주 편안했다. 나는 사부님께서 신체를 정화해 주셨음을 알았는데 이전에 많은 약을 먹어 병업이 그때마다 내리 쌓였다.

어머니가 퇴근하시고 활발해진 내 모습과 대야의 구토물을 보시고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시며 수년간 낫지 않았던 나의 불치병을 돌봐주신 사존께 감사드렸다. 그 이후 나의 기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서랍에 가득했던 각종 약봉지는 전부 버렸다. 법을 얻은 이후 약 한 알 먹지 않았고 주사 한 대 맞지 않았다.

어렸을 때 외할머니는 나에 대해 수련에 대한 요구가 매우 엄격하셨다. 법을 읽을 때 한 글자도 틀리게 읽는 것을 용인하지 않으셨는데 외할머니는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매우 진귀한 대법이기에 작은 착오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법공부를 많이 하자 외할머니께서 각별하게 마음 쓰시는 것을 점차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것은 가장 소중한 대법이기에, 우리는 당연히 가장 순진한 심태로 대해야 하며, 법을 읽을 때 착오가 있는 것은 한눈을 팔고 주의력이 산만해진 데서 오는 것이다.

외할머니께서 엄격하게 요구하셨기에 여덟 살 때 나는 어른들과 종일 ‘전법륜(轉法輪)’을 읽을 수 있었다. 아홉 살 땐 어머니와 베이징 톈안먼(天安門)광장에 가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외치며 대법을 실증했다. 매년 여름방학 땐 어린이 법학습팀에 참가했으며 평상시 휴일에는 어머니, 외할머니와 함께 병원, 쇼핑센터, 아파트 등에 가서 진상 소책자를 배포했다. 내가 나이가 어리고 눈에 잘 띄지 않는 데다 믿을 만한 ‘어린이 연락원’이었기에 항상 아주머니, 아저씨 수련생들을 도우며 사람 구하는 자료를 전달했다. 나중엔 방학을 이용해 외할머니, 어머니와 진상 전화를 걸었다.

대법을 수련한 후 내 인생행로는 완전히 바뀌었다. 질병이 다 나았을 뿐 아니라 별로 눈에 띄지 않던 중간 정도의 성적이 우등생으로 변했다. 중학교에서 (고교) 진학시험을 보던 해엔 평일 학습 성적과 영예의 상을 종합해 시(市) 추천 학생명단에 들었으며 고등학교 시험을 면제받고 입학했다.

3. 수능시험과 대학원 시험에서 기적이 나타나다

예술 학생은 정식 대학시험 전에 먼저 예술 분야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당시 나는 어느 대도시에 있는 사범대학에 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불행히도 고사장에서 실수를 범했지만 6월 학교별 합격선이 발표된 후 기적처럼 합격선이 10점 가량 낮아졌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한 성(省)의 정원은 6명에서 13명으로 늘어났기에 전부 무시험으로 갈 수 있었으며 합격선이었다. 이런 확대모집 현상은 종래 있었던 적이 없었지만 2015년 그해에 나타났는데 바로 내가 대학에 가는 그해였다.

대학에 진학하자 이전부터 추구해왔던 예술의 길은 오히려 뇌물과 아첨이 가득했다. 강의할 때 선생님의 욕지거리와 저속한 언어가 진실한 감정이라 칭송되고, 남자 선생님은 수업 시간을 여학생에게 담배와 술을 하도록 가르치는 강당으로 변화시키면서, 지금은 여학생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일을 이해할 수 없고 일을 이해하지 못하면 어떻게 예술을 하겠느냐며 떠벌렸다. 그때마다 나는 오늘날 사회 도덕의 추락을 더욱 깊이 깨달았다. 수업 때 선생님이 학생을 타락으로 이끄는 것이야말로 요즘 세상의 가장 큰 비애이다.

어느 TV 방송국에 소속된 어린이 예술단 육성 조직에서 일할 때 모든 사람의 공동 목표는 타인의 이익을 침해하고 도덕을 짓밟는 기초 위에서 사익을 꾀하는 것으로 변모했다. 나는 관리자에게 현재 운영방식의 불합리에 대해 여러 번 얘기하며, 소위 덕이 있어야 부를 쌓을 수 있고 도덕적 토대 위에 서지 않으면 기업은 길게 발전할 수 없음을 지적했다. 하지만 모두 내가 별일 아닌 것으로 떠들어댄다고 여겼으며 자신의 고집스러운 도덕관은 한층 무기력한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대장은 조폭 두목으로 불렸다. 내가 사직하겠다고 하자 도리어 봉급을 1만여 위안(한화 약 167만 원) 공제했다. 그러나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내가 퇴직한 지 1개월 후 육성 조직 전체가 해체됐는데 거의 도시 전체를 커버하던 대규모 조직이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직원들은 권익 보호를 호소했지만 도리어 방송국 자체 무장 경찰에 의해 경찰차에 실리는 신세가 됐다.

이때 나는 고향으로 내려와 출국해 대학원 시험을 보려고 준비했다. 하지만 곤란한 문제가 있었는데 고2 때부터 예술 교과에 중점을 둔 데다 대학 4년은 영어 수업이 없었다. 6년 동안 거의 영어를 접해본 적이 없었지만 당장 아이엘츠 시험을 봐야 했다. 학습 태도를 바르게 하자 사부님의 가지 하에 영어 수준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전체 문장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던 데서 원어민 교사에게 막힘없이 대답할 수 있게 됐고, 듣기 시험에선 전화번호 하나만 대답할 수 있던 데서 녹음을 다 듣고 나면 대강의 뜻을 요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체 과정을 체계적으로 학습한 것은 겨우 1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이 기간 나는 낮에는 연공하고 오후엔 학원에 갔으며 밤에는 외할머니, 어머니와 법을 공부했다. 시험에 떨어질까 두려워하며 몇 번이나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수련을 포기하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시종일관 정념이 굳건했기에 나의 생명은 사부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앞으로도 사부님께서 배치해주신 수련의 길을 따르겠다는 굳은 마음이었다. 이렇게 사부님의 가지 하에 나는 단번에 아이엘츠 시험을 통과했다. 비자 발급받을 때 담당자는 합격통지서와 필수서류만 보고 순조롭게 통과시켜줬다.

인생에서 중대한 전환점인 대학시험과 대학원 시험을 사부님의 보호로 무사히 지나왔다. 사부님께선 우리에게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 공은 사부에게 달렸으므로 당신은 이런 소원만 있으면 된다.”[1]고 말씀하셨다. 자신의 기점을 바르게 놓고 굳건하게 신사신법할 때야만 비로소 사존의 ‘커다란 불은(佛恩浩蕩)’을 진정으로 감수하게 될 것이다.

4. 고향을 멀리 떠나 모녀의 정을 내려놓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와 함께 살았기 때문인지 나는 모든 것을 어머니께 의지하고 기댔던 것 같다. 미국에 들어온 이후 신선한 느낌은 점점 사라졌고 3월 중순 재택 명령이 시행되자 학교 기숙사 건물 전체에 나 혼자만 살게 됐다. 매일 텅 빈 복도와 적막한 분위기는 활달한 성격의 내 생활을 일순간 천양지차의 변화가 생기게 했고, 갑자기 찾아온 고독과 적막으로 어머니에 대한 정은 더욱더 깊어졌다. 심지어 법을 공부하고 연공하는 것마저 사상을 집중할 수 없었고 ‘어머니’라는 글자를 떠올리기만 하면 한없이 눈물이 나왔다. 정마(情魔)의 강렬한 교란임을 알았지만 벗어날 수 없었고 더욱이 집안이 또다시 사악의 괴롭힘을 당한 것을 알고 있었다.

배회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법을 많이 배우는 것이다. 그 당시 매일 3시간 ‘전법륜(轉法輪)’과 사부님의 각 지역 설법을 통독하며 법을 공부했다. 법을 읽을 때마다 한 글자 한 구절이 모두 사부님의 외침과 부르심이라는 걸 또렷이 느낄 수 있었고 자신이 불안해했던 것이 부끄러워졌다. 법을 많이 배우자 점차 그렇게 집 생각을 하지 않게 됐다.

이때 사부님께서 또 한 차례 도움을 주셨는데 각기 다른 몇몇 사업팀 수련생과 동시에 연락이 닿았다. 나는 청년제자 법학습팀에 참가하게 됐고 매일 법을 배운 이후 서로의 인식을 교류했는데 기분이 단번에 활기차게 변했다. 사업팀 수련생들은 고생스럽게 감당하면서도 한 마디 원망도 없었고 오히려 나를 자주 위로해줬다. 나는 수련생과 매우 큰 차이를 더욱 느꼈다.

모르는 새 나는 어머니에 대한 정을 담담하게 보게 됐으며 자주 편지를 써서 어머니와 법에서 교류했다. 내가 막 태어나려고 할 때 할머니께서 꿈을 꾸셨는데 우리 집에 시클라멘 꽃송이가 내려앉는 꿈이었다. 수련 이후 나는 우리 생명의 진정한 의의를 더욱 깊이 깨달았다. 생각이 여기에 미칠 때마다 ‘나와 어머니의 인연은 대법을 위해 온 것’이라는 정념을 더 확고하게 할 수 있었다.

사부님께서 명시하시기를 “육친정(親情)에 집착함은, 기필코 그로 인해 지치고 얽매이며 마에 사로잡히게 됨이라, 그 정사(情絲)를 잡아 쥐어 일생토록 방해받으니, 나이가 들면 후회해도 이미 늦은 것이다.”[2]라고 하셨다. 이곳을 읽을 때마다 따끔하게 경고하며 깨닫게 해주는 것 같았다. 무수한 대법제자가 수련을 견지하기 위해 목숨을 잃었는데 자신은 오히려 자유로운 환경에서도 우유부단하게 정에 빠져 배회하고 있었다.

만고의 기연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가 버릴 것이고, 우리는 법을 얻기 위해 일찍이 온갖 겁난을 다 겪었었다. 정법시기 최후 단계에서 우리 함께 떨쳐 일어나 용맹정진하며 우리의 사전서약을 완성하기를 희망한다.

개인의 수련 깨달음이니 부당한 곳은 자비롭게 바로잡아주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사부님 저작: ‘전법륜(轉法輪)’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수련자 금기’

 

원문발표: 2020년 12월 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0/12/1/41583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