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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실한 수련으로 ‘물질과 정신은 일성이다’를 깨닫다

글/ 미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최근 2~3주에 몸에서 갑자기 두 번이나 미열 현상이 나타나면서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어지러우며 두통이 생겼다. 게다가 허리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전신으로 통증이 퍼져 심지어는 밤에 잠잘 때마저 영향을 받았다.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좋지 않은 염두가 강렬하게 나를 자극했다. 우리 단체 법공부 팀에서 법공부할 때는 마치 담벼락이 있어서 법을 배울 수 없게 가로막고 있는 듯했다. 낮에 회사에서 일도 멈출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와 때를 같이 해 ‘지붕에 구멍이 나더니 연일 비가 내리듯’ 가정과 일, 경제에서 모두 일부 상황이 발생해 한동안 정말로 마음이 고달팠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정이었다.

어느 날 밤 12시 정념을 발하고 침대에 앉았는데 갑자기 무엇이 수련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머리가 텅 비었다. 남편이 방으로 들어오면서 내가 멍하니 있는 것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물었다. 나는 여실히 남편에게 말했고 깊은 밤이라 간단히 몇 마디 교류하고 잠들었다. 이튿날 아침 연공할 때 머릿속에 사부님의 법 구절이 떠올랐다. “사상경지가 조금이라도 제고되어 올라왔다면 자신의 나쁜 것들도 이미 조금 버린 것이다. 동시에 당신이 또 고생을 좀 겪고 고통을 좀 겪어 자신의 업력을 좀 없애버리면 당신은 조금 승화해 올라올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주의 특성이 당신을 제약하는 힘이 그다지 크지 않게 된다.”[1]

연공을 마치고 어째서 이 법 구절이 떠올랐는지 생각에 잠겼다. 내가 어떤 사상의 전변을 가져와야 할까? 몇 년 전 비록 여러 번 병업 고비를 넘겼어도 수련에 뿌리 깊은 사유가 존재하는데 바로 자신의 심성과 업력으로 마난이 생긴다고 여기는 점이다. 또 정법 수련에 대한 인식에서도 여전히 좀 모호했고 구세력과 정법의 관계에서도 인식이 그렇게 청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잇따라 발생한 일에서 나는 새로운 인식이 생겼다.

당시 나도 여러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곧 학생들에게 강의해야 했다. 강의를 마치고 남편이 앞에 다가와 말했다. “어제 수련이 무엇인지 생각했다는데 수련은 자아를 내려놓는 것으로 생각해요……” 그러면서 기타의 것도 말했다. 이 말은 내 머릿속에서 기억이 또렷하다. 그렇지, 나도 자아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만약 인식 못 했다면 어떻게 내려놓겠는가?

계속해 같은 일이 반복해 나타났다. 이튿날 점심 남편이 친구와 통화할 때 객실로 걸어가면서 남편이 친구에게 하는 말이 들렸다. (대체적인 뜻은) “그렇지, 언제나 자신을 그렇게 높이 놓아 내려오지 못하면서 귀 기울여 듣는 법을 모른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겠어요?” 이 말은 우레같이 들렸다. 비록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으나 정말로 사부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과 같았다. 나는 깨닫기 시작했으며 곧 발생한 일에서 개변이 있었다.

어느 날 인터넷 수업을 마치고 남편이 물었다. “방금 그 남학생(나의 학생)은 대만인이에요? 그 학생은 참 다정할 것 같아요, 말하는 방식이 다른 사람을 위해 아주 생각하고 있었어요.” 이에 나는 대수롭잖게 한마디 했다. “그래요, 내 생각에는 꽤 꾸물거리는 스타일이에요. (말을 맺고 끊는 맛이 없다)” 그 후 이 일을 돌이켜 생각해보니 남편과 생각에서 큰 차이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부동한 관념으로 상호 간에 다른 효과가 나타나게 한 것으로 이와 때를 같이해 이 학생의 어머니가 학교에 보낸 편지에 ‘내가 가르치는 방법에서 조정할 수 있으면 더욱 좋겠다’라고 언급했다. 어쨌든 제출한 요구가 타당한지를 막론하고 일체는 모두 우연한 것이 아니라고 여겨졌다. 비록 합리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고 또 다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나는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제때에 조정을 시도했다. 일부 과외 소재나 오락적인 내용을 수업에 도입했다.

그 후 나는 자신의 사상 내원을 파고들었다. 어떤 마음으로 이렇게 다른 생각 혹은 관념이 조성됐을까? 그리하여 나는 다음과 같은 것을 찾아냈다. 자주 조급해하는 사람 마음, 일할 때 효율을 추구하는 마음, 질투심, 타인이 자신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을 때 잠재의식 속에서 평형을 이루지 못하거나 그 사람을 업신여기는 마음,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마음, 타인을 위하는 마음이 부족한 등이다. 이러한 것을 의식한 후 나는 자신의 염두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으며 자신에게 여유를 주고 될수록 사상에서 바로잡으려 했다. 원망의 마음이나 조급해하는 정서 등을 지니지 않고 행위에서부터 조절하기 시작했으면 될수록 겸손하고 상냥하게 대하려 했다. 그러나 안으로 자신을 들여다볼수록 자신의 사유에 발견하기 어려운 문제가 존재하는 것을 발견했다. 상반되는 부정적인 사유, 소침한 사상, 현 상태에 안착하여 바꾸기 싫어하는 고집스러운 관념, 감수와 느낌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습관적인 사유 등이 존재했다.

더 파 내려가니 자신이 법으로 가늠하지 않기만 하면 일어나는 마음과 염두 거의 모두가 구 우주 생명의 사유방식인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말하지 않기 시작했고 어떻게 말하든지 모두 잘못됐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어떨 때 부득불 말해야 할 때면 될수록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도록 자신에게 요구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것 역시 그렇게 나쁘지 않으며, 그것은 단지 먼젓번 주기의 우주특성에 따라 행사할 뿐인데,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천마(天魔)다. 그러나 그것은 속인에 대해 어떤 위협이 없고, 그것은 전혀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그것은 단지 그것의 그 이치를 품고 일을 할 뿐이다.”[1] “노(老)ㆍ병(病)ㆍ사(死) 역시 일종의 마(魔)이지만, 이 역시 우주특성을 수호하기 위해 생긴 것이다.”[1] 이때 나는 사유로 구성된 나 역시 한층 공간임을 청성하게 의식할 수 있었고 아울러 같은 시간과 같은 지점에 존재하고 있었다.

구 우주의 특성을 개변하지 않으면 우리의 신체, 이 소우주에는 괴멸 시기로 향하는 상태가 나타날 수 있다. 사람은 난에서, 업력으로 조성된 ‘병업’ 고통 속에서, 압력 속에서, 각종 어려움 속에서, 모든 편안하지 않은 느낌 속에서, 정 속에서, 모순 속에서, 이기적인 데서, 속인 사회의 모든 경우에서 그 사유의 내원은 어디일까?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이는 동기와 목적은 무엇인가? 매우 적은 사람만이 이 복잡한 환경 속에서, 복잡한 느낌 속에서 청성하고 이지적으로 자신의 사유 내원이 어디인지를 똑똑히 분별할 수 있다. 사람 마음과 관념의 작용으로, 거기에 고층 구 우주 생명의 강요와 강화로 자신의 진아(真我)와 본성을 찾기 매우 어렵다. 이것이 아마 어째서 사람이 조류에 휩쓸리게 되는지 원인일 수 있다. 대법은 미혹을 타파할 수 있으나 대법제자의 사유가 법에 있지 않다면 바르지 않은 사상요소, 사람 마음, 관념이 곧 좋지 않은 생명을 불러온다. 심경에 따라 환경이 변하듯 이런 좋지 않은 요소로 우리 표면의 주체가 법과 격리가 발생한다. 바르지 않은 생명요소가 그사이에 갈수록 누적되고 두터워질수록 진아를 찾기 더욱 힘들고 법과 갈수록 멀어진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은 현실 생활 중에서 양성된 관념과 좋지 못한 그러한 것들을 단번에 깨끗하게 제거하기가 어려우며, 습관적인 것들은 여전히 습관을 고쳐야 한다. 사유의 방식은 이미 이렇게 되었는데, 그럼 사유의 방식에서도 그것을 찾아 바르게 해야만, 비로소 더는 문제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당신은, 제가 이미 깨끗하게 청리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 발정념을 해서, 이 마당은 모두 밝아졌다. 그러나 일어서자마자 머리엔 바로 속인의 사유이며, 생각한 문제와 한 일은 또 원점으로 돌아가서, 그것이 또 생겼다. 심지어 발정념을 할 때 당신의 사상 염두가 아직도 안정할 수 없어, 한편으로는 발정념을 해서 좋지 못한 것을 청리하고 소멸하며 또 한편으로는 생기고 있다. 수련이란, 바로 자신을 수련하는 것인데, 사실 바로 이러한 일이다.” [2]

잇따라 발생한 한 가지 일에서 나는 또 이러한 것을 인식해도 부족하며 고층차의 법을 인식할 수 있어야 걸어 나올 수 있음을 체득했다. 인식할 수 있으려면 우선 사람 마음을 바꾸려는 소원이 있어야 했다.

어느 날 저녁 식사 후 남편과 교류를 하다가 다시 무엇이 수련인지 라는 화제를 꺼내게 됐다. 내가 말했다. “수련은 바로 사람 속에서 사람 마음을 제거하는 과정이라 인식해요.” 남편은 직접 대답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수련은 원만하는 것이죠.” 그때 이 말을 들으면서 매우 자연스럽게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말씀드렸다. ‘저는 원만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이 있고 난 뒤 나눴던 말들이 우연하지 않음을 의식했다. 왜냐하면, 그 전에 나는 이런 것을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상을 바꾸고 심성을 제고해야 했다.

어느 날 법공부하면서 사부님의 이런 말씀을 보게 됐다. “인체과학 연구 중에서, 현재 과학자들은 사람의 대뇌가 내보내는 사유는 곧 물질이라고 인정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물질로 존재하는 것인데, 그것은 곧 사람의 정신 중의 것이 아닌가? 그것은 곧 일성(一性)이 아닌가?”[1] “왜 당신을 올라오지 못하게 하는가? 왜냐하면, 당신의 心性(씬씽)이 제고되어 올라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매 한 층차에는 모두 부동한 표준이 있다. 층차를 제고하려면 당신은 반드시 당신의 좋지 못한 사상을 버리고 당신의 더러운 것들을 쏟아내어 그 한 층차가 요구하는 표준에 동화(同化)해야 하는데, 이렇게 해야만 당신은 비로소 올라올 수 있다.”[1]

이렇게 다년간 나는 얼마나 이해했고 또 얼마나 믿고 있었던가? 오늘에야 자신이 더욱 믿고 있는 것은 자신의 느낌이었다는 것을 발견했으며 믿고 있는 것은 소위의 현실이었고 속인 중에 들어만 가면 모종 정도에서 법을 한쪽에 놓았다. 잠재의식 속에서 원만의 경지는 나에게 있어서 너무나 요원한 것이었고 종래로 참답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제야 나는 원만의 길은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비로소 고층차의 표준과 요구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사고하기 시작했다. 물론 대법 제자마다 법에서 깨닫는 것은 같지 않으나 자신이 이해한 최고표준으로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해낼 수 있다.

지금 나는 이해했다. 사실 수련인의 난과 고통의 크기는 낡은 배치와 박해를 타파할 수 있는지와 매우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며, 관건은 대법제자가 자신과 구 우주 생명의 관계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이다. 대법제자와 그들은 구도하고 구도되는 관계이지 박해와 박해당하는 것의 관계가 아니다. 이 관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 단번에 자신을 박해당하는 위치에 놓은 것으로 대법제자가 평소에 엄격히 자신의 사상을 잘 관리하지 못하면 각종 사람 마음의 관념이 장기적으로 존재하면서 좋지 않은 생명을 불러들여 자신이 법에서 이탈하게 한다. 이렇게 구세력이 배치한 길을 걷게 되며 이는 정진하지 않고 엄격하게 높은 표준으로 자신을 요구하지 않아서 불러들인 난이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진정한 수련은 우리가 말하는 그 心性(씬씽) 표준이 요구하는 것에 따라 진정하게 자신의 心性(씬씽)을 제고해야 하기 때문인데,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수련이다. 당신이 그런 동작만 연마(煉)하고 心性(씬씽)을 제고하지 않아 강대한 에너지로 일체를 가지(加持)할 수 없다면 수련이라고 할 수 없으며, 우리도 당신을 法輪大法(파룬따파)의 제자로 인정할 수 없다.”[1]

점차 이런 것을 똑똑히 인식한 후 환경과 신체에 변화가 발생했다. 문제가 갑자기 구름이 옅어지고 바람이 가라앉듯 지나갔으며 허리도 아프지 않았으며 미열 등 현상이 없어졌고 법공부도 마음에 들어오게 할 수 있었다. 이 글을 쓰게 된 그날 아침, 정공을 연마할 때 마지막 반 시간에서 갑자기 눈앞에 거대한 신체가 나타났고 결가부좌한 모습이었다. 나의 신체는 이 신체의 밑에 있었다. 비록 지금도 그 거대한 신체가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알 수 없으나 그 장엄하고 반석같이 견고한 신성감(神聖感)은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그런 후 다른 한 폭의 매우 아름다운 화면을 보았으며 높은 곳에서 굽어보니 아득히 짙은 푸른색이었고 고요하고 평온했으며 새의 지저귐과 꽃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따사로운 빛이 삼림 속 우거진 가지 사이를 뚫고 초록색 잔디밭에 떨어지면서 금빛의 빛줄기와 아득한 녹색이 지극히 적당하게 어우러졌다. 따스하고 상화로운…… 이때 나는 마치 다른 하나의 공간에 놓인 듯했고 가부좌 중인 것을 의식할 수 있었다. 마음이 오랫동안 없었던 평정(平靜)과 상화로움을 회복했다. 매우 아름다운 일종 체험이었다.

법공부할 때도 여태껏 체험한 적 없는 일종 상태가 나타났다. 어느 날 법공부할 때 책을 펼치니 한 뭉치의 흰색 빛이 읽게 되는 글줄에 따라다녔으며 법공부하는 내내 구절마다 마음에 들어왔고 법리가 끊임없이 나타났다……

여기까지 적으면서 사존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혔다! 사부님의 구도에 감사드린다! 제자가 단지 이 한 점을 깨달았을 뿐인데 대법이 펼쳐지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경지를 체험할 수 있게 해주셨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각 지역 설법 10―따지웬(大紀元)회의 설법’

 

원문발표: 2020년 9월 1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9/14/41177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