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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년의 원한을 기록한 일기장을 태우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1998년 4월부터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하기 시작했고 올해 68세다. 수련하기 전 나의 몸은 병으로 가득했다. 또한, 승부욕이 강하고 원칙을 따지면서 사람을 용서할 줄 몰랐다. 수련한 후, 22년 동안 약 한 알도 먹지 않았다. 몸은 병이 없어 가볍고 편했으며 정신은 또렷했다. 또 젊어졌고 성격도 좋아지고 도량도 넓어졌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구도에 감사드리고 환골탈태하게 해준 대법에 감사드린다.

친정 식구 중에서 나의 용모가 제일 추했다. 아빠는 채소를 재배하는 농민이었다. 남편은 성격이 온화하고 남과 따지거나 싸우지도 않아 늘 다른 사람에게 잘 휘둘렸다. 시아버지는 성 정부의 간부였다. 우리는 결혼하고 2년 만에 집이 생겼다. 갓 태어난 딸은 몹시 허약했다. 딸을 돌보기 위해 나는 보건소에서 공장 양호실로 전근하였고, 또다시 화학 실험실(화학 실험실은 당직을 설 수 있음)로 전근했다. 그 당시 낮에는 아이를 데리고 있었고 저녁에는 출근했었다. 그리고 삼 일에 두 번씩 병원에 다녀야 했다. 일밖에 모르는 남편은 가정을 전혀 돌보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나는 생활에서 불만이 생겼고 생활 속 불만들을 “일기”에 쓰기 시작했다.

아이가 두 살 나던 해에 직장에서 회의가 있었는데 아이를 데리고 참가할 수 없었다. 나는 아이를 시어머니 집(그 당시 시어머니는 둘째 시동생의 아이를 돌봐주고 있었다)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회의 중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고 회의가 끝나기도 전에 급히 시댁으로 향했다. 문에 들어서는 순간 시어머니와 둘째 동서가 돌도 지나지 않은 뚱뚱한 손자를 안고 (발육이 좋지 않아 손 근육에 힘이 없음) 오른손, 왼손으로 번갈아 딸의 가슴을 때리고 있었고 딸은 입을 삐쭉거렸다. 뚱뚱한 손자가 웃자 더 힘주어 가격했다. 둘째 동서는 계속 “동생이 너랑 노는 거야.”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팍하고 딸의 뺨을 때렸고 딸은 방안 들어가 울었다. 애초에 내가 왜 이런 집으로 시집을 갔는지 후회됐다. 원래는 아이가 좋은 환경에서 자라게 하려고 모든 것을 참고 살았었다.

딸이 두 살 되던 그해 그믐날 밤에 당직(12시까지)을 서게 되었고 남편은 집에서 딸을 돌봤다. 새해를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자전거를 타고 나는 듯이 집으로 향했다. 45분 후에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니 딸이 까치발을 하고 찬장(안에 과자가 있음)의 유리문을 열려고 하고 있었다. 내가 팔로 막았지만 늦어버렸고 딸의 발에 유리문이 세게 떨어져 엄지발가락이 부러졌다. 그렇게 우리 가족 3명은 병원에서 그믐날 밤을 보냈다. 아이의 눈물은 내 마음으로 흘러내렸다.

초 3일 날은 시아버지의 생신이었다. 나는 남편의 체면을 위해 한쪽 다리에 깁스한 딸을 자전거에 태우고 시아버지 생신을 축하하러 갔다. 시아버지의 첫마디는 “다리를 다쳤는데 뭐하러 왔니?”였다. 그것은 철없는 며느리가 또 노인을 화나게 했다는 것이었다.

딸은 3살 때 팔을 심하게 다쳤고 5살 때는 이하선염에 걸렸고 이것이 곧 뇌막염(사람들은 뇌막염에 걸리면 멍청이 아니면 바보가 된다고 말했다)으로 이어졌다. 나는 기가 죽지 않으려고 억지로 참다가 심장병, 풍습병, 신경관능증, 피부병, 부인병, 비염, 후두염 등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렸다. 나는 또 창고 보관원으로 옮겨 달라고 신청했다. 그리고 아이에게 주입식으로 ‘조기교육’을 시켰다. 딸아이를 반드시 어엿한 성인으로 키워 그들에게 보여주려 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딸은 수학 경시대회(성, 시)에서 성에서 이등 상, 시에서 일등상 등 우수한 성적으로 성내 중점 중학교에 입학했고, 나에게 1만2천 위안(한화 약 2백만 원)의 비용을 절약해줬다. 그때 나의 일기장은 이미 세 권(16절지, 2cm 두께)이었다. 그 당시 딸의 몸은 이미 극도로 허약해져 있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딸은 학교 운동회에서 높이뛰기를 하다가 대퇴부가 심하게 골절되었다. 학교, 선생님, 학우나 학부모들의 관심을 피하려고 나는 남편과 상의해서 딸을 학교 부근의 병원에서 집으로 데려와 치료를 받게 했다. 마음이 따뜻한 선생님과 학우들은 여전히 시간을 내서 딸을 보러왔다. 그러나 시댁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막내며느리가 들어온 후에 며느리와 함께 지냈는데 늘 다투었다. 며느리는 툭하면 이혼한다고 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위로해주기 위해 작은 시누이의 이주자금을 주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작은 시누이를 우리 집(우리 집은 방 두 개가 각각 11㎡였다.)에서 지내도록 했다. 그 당시 나는 심장병이 아주 심했기에 친정에서 지내고 있었다. 남편에게서 그 말을 듣고 화가 치밀었다. 속으로 우리가 결혼해서부터 지금까지 연속 3일 좋은 날을 보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병이 있지 않으면 어려움이 있었다. 그들은 말썽을 일으키는 작은 시누이를 내게로 보냈다. 그 후부터 나는 다시는 시댁에 가지 않았다.

1998년 4월, 이웃 사람이 나에게 ‘전법륜’ 한 권을 빌려주었다. 좋은 사람이 되게 하고 좋은 사람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게 한다는 말에 끌렸다. 나는 좋은 사람이 되려 했다. 그러나 그 당시 오성이 아주 차(差)했기에 친정에 내려가서 중병에 걸린 부모님을 돌본다는 이유로 ‘전법륜’을 끝까지 읽지 못하고 4장 공법까지만 배우고 책을 돌려줬다. 부모님을 돌보다가 한가한 시간에 연공을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심장이 아프지 않았고 자전거를 타고 출근해도 힘들지 않았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았다. “하지만 당신은 온몸이 가벼움을 느끼고, 길을 걸어도 바람에 나는 듯할 것이다. 과거에는 몇 걸음만 걸어도 힘들었지만 현재는 아무리 멀리 걸어도 매우 가뿐함을 느끼고, 자전거를 타면 마치 누가 당신을 밀어주는 것 같으며, 계단을 오르면 얼마나 높이 올라도 힘들지 않은데, 보증코 이러하다.”[1] 그 책의 내용은 정말이었고 너무 좋았다. 나는 얼른 집으로 가서 이웃에게 ‘전법륜’을 어떻게 구매하는지 물었고 그날로 보서(寶書) ‘전법륜’을 샀다. 그 후부터 나는 시간이 나면 법 공부하고 연공을 했다. 딸도 법을 얻었고 대법이 지혜를 열어주어 딸은 쉽게 성 명문대학에 입학했다. 동시에 딸은 몸도 건강해져 그때부터 약을 한 알도 먹지 않았다. 따룬따파는 딸의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어느 날, 시아버지는 생색을 내기 위해(그의 사업이 성공했고, 가정이 행복하고 원만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모든 가족을 호화로운 수상공원으로 초대했다. 나에게도 가자고 했다. 딸은 나에게 “어떻게든 참아야 해요.”라고 말했다. 나는 내키지 않았으나 머리를 끄덕였다. 식당에 도착했을 때 시어머니는 도착하지 않았다. 나와 딸은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좀 지나자 둘째 동서와 작은 동서가 어머님을 에워싸고 식당으로 들어왔다. 딸은 나의 손을 잡아당기면서 다가갔다. 어머님 앞에 가서 “어머님”하고 불렀는데 어머님은 나를 확 밀치고 지나갔고 나는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딸은 나의 손을 꼭 잡고 몇 발짝 뒤로 물러섰다가 자리로 왔다.

처음 보는 친척들 앞에서 망신당할 줄은 몰랐다.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사부님께서는 “참음(忍)은 心性(씬씽)을 제고하는 관건이다. 화가 나 원망하고, 억울해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참는 것은 속인이 해를 입을까 염려하는 참음이다. 화를 내거나 원망함이 전혀 생기지 않으며 억울함을 느끼지 않는 것이야말로 수련자의 참음이다.”[2]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눈물을 멈추고 딸의 손을 잡고 화장실로 향했다. 딸은 나를 보면서 “엄마, 반드시 참아야 해요.”라고 말했다. 남편도 나와서 멍하니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괜찮아요.”라고 말했다.

그때 시어머니도 화장실로 왔고 나는 어머님을 도와 화장실 문을 열어드렸고 나올 때 또 부축해드렸으며 마음은 평온했다. 식사 후, 누군가 기념으로 단체 사진을 찍자고 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맨 마지막 줄에 섰다. 그런데 앞에 서 계시던 시어머니께서 갑자기 몸을 휘청하더니 넘어지려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순간 팔로 막았다. 시어머님은 넘어지지 않았다. 사진 촬영은 순조롭게 끝났다. 시어머니는 남편의 이름을 부르면서 남은 반찬들을 싸서 가지고 가라고 했다. 딸은 나를 쳐다보고 웃었다. 사부님께서는 “만약 당신이 정말로 해낼 수 있다면, 당신은 정말로 고난 속에 광명이 있음(柳暗花明又一村)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1]라고 말씀하셨다. 그 일이 있고 난 뒤에 나는 딸을 데리고 자주 시댁에 갔고 시어머니는 다시는 딸에게 멍청한 손녀라고 하지 않았다.

2002년 봄에 작은 집 세 채(삼일 안에 불법 건축물을 철거)를 철거해야 해서 시어머님은 걱정했다. 옆에 사는 시누이는 한 손에 장애가 있었고 다른 아들들과 며느리들은 시간이 없었다. 남편이 퇴근하고 가서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직장에서 총무로서 일이 매우 바빴다. 남편에게 내가 가겠다고 했다. 당시 나는 중공 교도소에서 박해를 받고 금방 돌아왔기에 몸을 회복하고 있었다. 남편은 동의했다. 시어머니는 내가 갈 거라고 생각을 못 했었는데 내가 가니 더없이 기뻐하셨다. 86세에 가까운 시아버지는 지팡이를 짚고 한 발씩 움직이면서 마트에 가서 나에게 과일을 사주셨다. 어머님(아버님과 동갑임)은 신경을 써서 나에게 점심밥을 지어주셨다. 시댁의 헛간은 허물기 쉽지 않았다. 1m 깊이의 석재 기초인데 벽돌과 기와로 끝까지 쌓여 있었다. 헛간 안에는 벽돌, 목재 등 건축자재들이 가득했다. 나는 온종일 시간을 이용해 헛간의 폐품들을 모두 치웠다. 다른 집들은 모두 남자들을 고용해서 해도 힘들어하는데 50세가 된 내가 혼자서 해냈다. 점심에 시부모님께서 낮잠을 주무시는 동안 나는 쉬지 않고 2년 동안이나 청소하지 않은 주방을 깨끗하게 청소했다. 작은 시누이는 멍해지더니 “언니, 언니는 나이가 들수록 젊어지네요.”라고 말했다. 그렇다, 내가 수련하는 파룬따파는 성명쌍수(性命雙修)공법이다. 사부님께서는 “성명쌍수란 바로 心性(씬씽)을 수련하는 동시에 또 명(命)을 닦는 것으로서, 다시 말하면 本體(번티)를 개변하는 것이다.”[1] “성명쌍수(性命雙修) 공법은 외관상으로 사람들에게 아주 젊다는 느낌을 주며, 보기에 이 사람은 실제 연령과 차이가 아주 크다.”[1]라고 말씀하셨다. 대법을 수련한 후부터 나는 몸에 병이 없고 피부가 부드러워졌다. 동료들은 모두 나에게 갈수록 젊어진다고 말했다. (직장의 동료들은 모두 내가 파룬궁(法輪功)을 수련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20년 동안 보지 못했던 동료는 “당신은 왜 늙지 않아요! 여전히 그대로예요.”라고 말했다.

저녁에 남편이 퇴근하고 온 후, 우리 둘은 장작과 나뭇가지들을 묶어서 자전거에 싣고 집으로 왔다(우리 집은 난방설비가 없음) 10시 반이 넘은 저녁이라 길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나는 앞에서 자전거를 타고 남편은 뒤에서 타고 있었다. 다리 입구에 도착했을 때 뒤에서 차가 왔고 빵빵 경적을 울렸다. 나는 얼른 한쪽으로 피했고 차는 지나갔다. 나는 갑자기 도로 갓길에 쓰러졌고 내가 일어날 겨를도 없이 언제 왔는지 뒤에서 자전거 한 대가 나를 세게 들이받았다. 그 자전거 핸들은 단번에 나의 옆구리를 받았는데 나는 숨을 쉴 수 없었고 고개도 돌릴 수 없었다. 그 사람은 당당하게 말했다. “굽은 길을 돌면서 방향 제시도 하지 않나요?” 나는 애써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말했다. “당신은 가보세요.” 그는 듣고서 재빨리 사라졌다. 남편이 오더니 나를 부축하면서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고 나는 집으로 가자고 했다. 남편은 자전거의 장작을 내려놓고 나를 부축해서 자전거에 앉힌 후 다리 중간까지 밀어주었다. 내리막길이라 나는 자전거를 탄 채로 집에 도착했고 내릴 때 남편이 부축해 주었다. 집에 돌아온 후에 엉덩이의 4분의 3이 자주색으로 멍이 들었고 옆구리는 진한 자주색으로 움푹 파여 들어간 것을 발견했다. 나는 남편에게 먼저 자라고 하고 다섯 가지 공법을 연마했다. 그러자 정상적으로 호흡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한 시간가량 자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절인 채소를 썰고 편육도 썰고 가서 찐빵도 사 왔다. (시어머니께서 점심을 하지 않게 하기 위함) 그런 음식은 시어머니께서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내가 자전거를 타고 시댁에 도착했을 때 시어머니는 아이처럼 손을 위로 올리고 뛰면서 이웃들에게 말했다. “우리 집 지원병이 왔어요!” 나는 자전거를 타고 시어머니 앞에까지 갔다. 시어머니는 “나는 네가 어제 너무 힘들어서 안 오는 줄 알았다. 오지 말라고 하려고 집에 전화했는데 받지 않더라, 그러나 또 네가 오기를 기대했다.”라고 말했다. 나는 기뻤다. 어머님은 진심이었다. 그날 일을 마무리하고 나서 어머님은 들어가서 쉬라고 재촉했다. 내가 방에 들어가서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님은 품 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서 나에게 주었다. 내가 보니 헛간의 폐품을 판 돈이었다. 내가 받지 않자(시어머니는 평소에 돈에 대해 아주 세심함) 우시면서 “너는 내 딸보다 더 좋다. 네가 바로 내 큰 딸이다. 내가 돈을 너에게 주지 않으면 누구에게 주겠니?”라고 말씀하셨다.

그 후에 시어머니는 늘 남편을 통해 맛있는 것을 나에게 먹으라고 보내왔다. 시어머니의 병이 위중할 때 나와 남편이 거의 다 돌봤다. 어느 날, 나는 집에 돌아와서 시어머니에게 드리려고 만두를 빚었다. 금방 다 빚자 남편은 나에게 바로 오라고 전화를 했다. 나는 얼른 만두 한 판을 담아서 시댁으로 갔다. 막 들어서자 시어머니는 침대에 누워서 나에게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라고 하셨다. 나는 놀랐다. (평소에 내가 진상 라디오를 듣게 할 때 시어머니는 다른 사람들이 들을까 봐 신속하게 피했기 때문임) “파룬따파가 내 며느리에게 멍청한 큰아들을 이렇게 잘 돌봐주게 했다. 파룬따파 하오!” 시어머니는 나에게 반지를 주셨고 나는 달갑게 받았다.

대법은 나와 시댁의 십여 년 동안의 원한을 화해시켜주었다. 나는 일기장을 깨끗이 태워버렸다.

주:
[1]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무엇이 참음인가(何爲忍)’

 

원문발표: 2020년 7월 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발표: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7/3/40747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