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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축 5.13] 신선께서 길을 알려주시다

글/ 장쑤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파룬따파 속에서 수련한 지 26년이 되었다. 법을 얻을 때는 한창 젊은 시절이었는데 지금은 반백에 가깝다. 오늘 더없이 자랑스럽고 감사한 마음으로 나와 내 가족이 법을 얻어 수련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집안이 망하다

1992년 말, 은퇴를 앞둔 어머니가 갑자기 유방암에 걸리셨다. 의사는 즉시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수술은 순조롭지 못했고 중간에 수혈도 했다. 수술 며칠 후 겨드랑이에 오리알만한 큰 피멍울이 생겼다. 실밥을 제거한 후 기다란 수술 자리에서 핏물이 새어 나왔다. 의사는 길어야 2~3년 살 수 있다고 했다.

한 달 넘게 입원하고 정월 29일 날에 퇴원하셨다. 큰 수술을 하신 어머니는 매우 허약해지셔서 감기를 달고 사셨다. 수술한 쪽의 팔은 들지도 움직이지도 못해 옷을 벗고 눕고 일어날 때는 도움이 필요했다. 가장 두려운 것은 상처에서 계속 핏물이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실밥을 제거할 때 의사가 이 부분은 일찍 제거해서 그럴 수도 있는데 차츰 나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도 아물 기미가 없었다. 약을 바르면 딱지가 앉았지만, 딱지가 떨어지면 또 핏물이 흘렀다. 그래서 계속 병원에 가서 소독하고 약을 발랐다. 의사는 속수무책이었고, 우리는 절망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또 집과 병원을 오갔다.

어머니가 아픈 기간에 친척 친구들은 어머니의 회복을 위해 각종 방법을 생각했다. 어떤 이는 불경을 보내오고 어떤 이는 성경을 사서 보내고 어떤 이는 기공 학습반을 소개했다. 아버지는 재난을 피하는 방법을 알려줄 수 있는 고인(高人)을 찾아 수소문했고, 오빠는 치료 가능한 약이 있는지 곳곳에 의사를 찾아 물어봤다. 나는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기공사를 자주 집으로 모셔와서 어머니의 병을 치료하게 했다. 하여간 지푸라기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때는 매일 바빴다. 어머니는 아침에는 운동장에 가서 기공을 연마하시고(그 기공은 팔을 들지 않아도 된다.) 낮에는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 약을 바르고, 기공사가 집에 와서 병을 치료해 주었다. 그리고 짬을 내서 불교 책자도 보셨다. 저녁에는 기독교인이 와서 성경을 같이 읽었다. 아버지는 어느 ‘고인(高人)’의 지시를 받고 어머니 침실 벽에 귀신을 쫓는 그림을 붙이고 베게 밑에 액막이 칼과 노란 천 조각으로 만든 부적을 놓으셨다. 우리 가족은 온 힘을 다해 어머니의 생명을 붙들었다.

거의 1년이 다 되어가는데, 결국 기적은 오지 않았다. 그저 우리를 더 철저히 절망하게 할 뿐이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허약했고 수술 자리에서는 여전히 핏물이 흘렀다. 회복의 가망이 보이지 않자 어머니는 정신이 무너지셨다. 집안은 슬픈 분위기에 휩싸였고 우리는 묵묵히 죽음의 신을 기다렸다.

남동생은 어렸을 때 보는 사람마다 예뻐하는 아이였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 미술작품이 외국에 전시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동생은 말을 더듬거렸는데 식구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괴롭힘을 당했다. 한번은 수업 중에 말을 더듬자 선생님은 동생이 장난치는 줄 알고 호되게 때렸다. 말을 더듬는다고 선생님과 학생들은 동생을 놀리고 흉내 냈다. 동생은 겁이 많아 집에 돌아와서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지 못했다. 이런 일은 모두 나중에야 알았다.

열몇 살밖에 안 된 아이가 이런 상황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가족들은 남동생을 도울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오히려 남동생이 이상해지는 것을 보고 꾸짖기만 했다.

동생은 중학교를 졸업하고는 어머니의 회사에 출근했다. 동생은 일하는 중에 말더듬증 때문에 역시 자주 놀림을 당했다. 그는 남이 말하는 것을 보면 긴장하고, 긴장하면 할수록 말을 잘하지 못했다. 어떤 때는 입만 벌리고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도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만약 다음 날 누구를 찾아가 일을 봐야 한다면 전날부터 긴장하기 시작하는데, 그런 고통은 우리가 공감하기 어려웠다. 중간에 여러 교정반에서 교정도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우리도 그를 다독거렸지만, 동생은 내성적이며,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그의 고통을 체감하지 못해서 종종 서로 크게 싸웠다.

오랜 스트레스와 고민에 동생은 정신이 무너지고, 화가 나면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벽에 머리를 부딪쳤다. 그때 동생은 어린 나이에 이미 백발이 되었고 집에서는 성격이 괴이하고 급하고 화를 잘 내며 눈빛이 흐리멍덩하고, 근심과 고뇌로 온갖 고생을 다 겪은 노인 같아서 그의 인생에는 햇빛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밖에서 보는 동생은 불쌍하고 창피하고 우스꽝스러운 존재였다.

우리가 만약 이 상황을 바꿀 방법이 없다면 동생은 나중에 정신병자가 될 것 같았다. 남들과 접촉하고 대화하는 것은 동생에게 악몽이 됐고 그는 이미 사회적으로 생존능력이 없었다. 나중에 출근도 하기 싫어했다. 동생이 몹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도 집에서는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걱정 끝에 부모님은 동생을 포기하려 했다. 그때 우리는 동생을 절에 보내려 했다. 신앙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장래에 절에서 밥이나 얻어먹고 목숨이라도 부지하면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것보단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동생은 고통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찾으려 했다. 90년대에 기공 열풍이 불자 그는 기공 문파 중에서 자신을 구해줄 사부를 찾으려 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월급을 몽땅 기공 잡지와 기공 서적을 사는 데 썼다. 책에 소개된 기공사가 있으면 동생은 곧 찾아갔다. 그때는 생활 형편이 어려워 차를 타고 찐빵을 먹고 가장 싼 여관에서 묵을 수 있는 정도였다. 한번은 쓰촨(四川)의 장거리 버스에서 강도를 만나 돈을 다 뺏기고 산속을 떠돌다가 숲을 지키는 마음씨 고운 사람을 만나 먹을 것을 좀 얻었다.

자신을 구할 수 있는 사부를 찾기 위해 그는 고생을 많이 했지만, 번번이 희망을 안고 갔다가 실망만 하고 돌아왔다. 매번 돌아와서는 “또 가짜야!”하며 실의에 빠졌다. 1993년에 사부를 찾아 나섰다가 마지막에 돌아와 나에게 말했다. “국내에는 진짜 기공[眞功]이 없나 봐. 진짜 기공은 아마 티베트에 있을 거야.” 나는 생각했다. ‘티베트에 갈 거니? 만약 거기에도 없으면 어떡할래?’ 동생의 상황이 단번에 죽을 운명은 아니지만, 그는 아직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았고, 인생의 길이 시작도 하기 전에 끊어져 앞길이 캄캄한데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독서를 좋아하고 관찰하고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며, 특히 삶에 대해 특별한 고민이 있었다. 사람은 어디에서 왔고 죽으면 또 어디로 갈까? 사람이 태어나서 어른이 되고 아내를 얻어서 아이를 낳고 늙고 병들고 죽고, 한 세대 또 한 세대가 이렇게 태어나서 죽기를 반복하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때때로 닭 몇 마리가 풀밭에서 먹을 것을 찾아 헤매다가 벌레 한 마리를 발견하면 서로 먹으려고 달려간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람도 이렇지 않은가? 먹고살기 위해 서로 다투고, 고생하고 걱정하고, 마음이 슬퍼도 또 어쩔 수 없다.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가 피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인생이 멋지든 지긋지긋하든 결국 모두 고통 속에서 죽어간다. 인생은 그렇지 않은가? 누가 피할 수 있을까?

우리 집 사람들은 특히 가족을 매우 소중히 여긴다. 만약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우리 집의 정신적 지주는 무너졌을 것이다. 우리가 다 자라서 부모님의 부담이 줄었으니 좀 쉬실 수 있겠다 생각했는데, 기다려 온 것이 이런 결과일 줄 누가 알았을까? 어머니가 입원해 있는 동안 병원에서 사람들이 병이 났을 때의 여러 가지 참상을 보았다. 한 환자는 돈이 다 떨어지자 가족들이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데려가면서 통곡했다. 그 울음소리가 내 마음에 사무쳤다. 원래도 인생의 의미에 대해 혼란스러웠는데 어머니의 이번 병세로 삶의 무상함과 슬픔이 더 크게 느껴졌다.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해둔 게 있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면 불쌍한 동생은 더욱 가망이 없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 나와 동생은 각자 황산의 작은 절을 찾아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아야겠다.’ 계획을 세우자 모든 기대가 물거품처럼 사라졌고, 생이별의 그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신선께서 길을 알려주시니 당신 집은 걱정 없습니다”

1994년 봄, 동생은 허페이(合肥)에서 열린 파룬궁 학습반에 참가하고 돌아와서 말했다. “이 기공은 좋아.”

동생은 ‘전법륜’ 한 권을 가져왔다. 나도 책을 다 읽고 나서 이미 생기를 잃어버린 마음이 되살아났다. 내 일생의 미혹에 답을 찾았다. 사람이 사는 의미를 알게 됐고 생명이 온 길과 가야 할 길이 어디에 있는지, 사람은 왜 좋은 사람이 돼야 하고 나쁜 사람이 되면 안 되는지, 사람은 무엇 때문에 병에 걸리는지 알게 됐다. 마음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생사를 막론하고 평생에 이 사부님을 따라야겠다. 이 생각은 매우 평온했지만 나는 내 삶의 전부를 걸고 한 약속이었고 26년간 결코 흔들리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변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 시기 꿈에서 큰 부처님께서 동쪽 하늘에 나타나는 것을 보았고, 헤아릴 수 없는 선녀가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공중에서 나는 것을 보았는데 그 아름다움과 웅장함은 형용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또 한 일화가 있었다. 동생이 그림 한 폭을 그려 어머니의 한 친구에게 주었다. 그 친구의 조카는 당시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기공사(대법이 널리 전해진 후 이런 기공사들은 서서히 종적을 감췄음)의 수행 제자인데 샤오리(小李)라고 했다. 샤오리는 외지에서 삼촌네 집에 놀러 왔다가 이 그림을 보더니, 동생을 만나보겠다고 했다. 이전부터 우리는 샤오리에게 공능이 있다는 말을 들었기에 분명 그림에서 무언가를 보아냈을 것으로 생각했다. 샤오리는 동생을 만난 후 무슨 공을 연마하냐고 물었다. 동생은 이제 막 파룬궁을 배웠다고 했다. 잠시 후 샤오리가 말했다. “이 파룬궁 사부님은 내 사부님보다 공이 높다네. 우리는 그와 소통하고 싶은데 닿지가 않아. 자네는 반드시 파룬궁을 잘 연마하게.”

나중에 알았지만, 당시의 기공 열풍은 바로 대법을 위하여 길을 터준 것이었다.

1994년 6월 동생은 어머니를 모시고 지난(濟南)에 가서 파룬궁 사부님의 전수반에 참가했다. 어머니는 그때까지도 상처에서 핏물이 흘렀는데 1년 반이나 됐다. 자주 약과 붕대를 갈아야 했고 팔은 여전히 90도로 들지 못하셨다. 다른 사람에게 부딪히지 않게 옆에서 누군가가 부축해 드려야 했다. 우리는 어머니가 가시는 길에 지치지 않을까, 견딜 수 있을까 걱정했다.

학습반이 끝난 어느 날, 날이 어두워져 가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신이 나서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나는 멍해졌다. 약골 환자인 어머니의 얼굴은 놀랍게도 생기발랄하게 완전히 달라져있었다!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내 침대 머리맡에 있는 그림들을 모두 버려라!”

나는 두말하지 않고 방에 뛰어 들어가 벽에 붙인 귀신을 쫓는 그림, 베게 밑에 놓은 칼, 노란 천 조각 부적과 일부 난잡한 물건들을 몽땅 꺼내다가 찢고 버리고 했다. 그때는 날이 늦어서 뭐라 말할 겨를도 없이 밥을 지으러 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공기 속에 기쁨과 흥분, 희망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고, 불타서 적막한 숲이 여기저기서 싹이 트고 자라나 생기를 뿜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우리 가족은 절망, 무기력과 망연함을 끝내고 사부님의 무량한 자비 속에 몸을 담그고, 정신과 육체의 기사회생을 시작했다. 법을 얻은 기쁨은 우리 이전의 모든 고통을 지우기에 충분했고, 우리는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아프실 때 점을 보셨는데 한 점쟁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장래에 신선께서 길을 알려주시니 당신 집안은 좋아질 겁니다.” 당시에는 그 사람이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했는데 진짜로 신선께서 길을 알려주실 줄이야.

온 가족이 법광(法光) 속에 푹 빠지다

어머니와 남동생이 학습반에서 돌아온 후 우리 가족은 법공부하고 연공하기 시작했다. 매일의 이야깃거리는 파룬궁이었다. 어머니와 동생은 한 번 또 한 번, 한차례 또 한차례 학습반에서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을 행복해하며 회상했고, 나도 들어도 또 듣고 싶었다. 학습반에서 어머니의 상처에서 딱지가 떨어지자 즉시 아물었고 더는 핏물이 흐르지 않았다. 갈 때는 팔을 들지 못했는데 학습반에서 팔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고 정상적으로 다섯 가지 공법을 할 수 있었다. 동생은 학습반에서 계속 잠을 잤는데 사부님께서 그의 머릿속에 있는 병을 조정해주신 것이다. 어머니는 천목이 열려 사부님의 법신(法身)을 보았고 파룬이 수련생의 신체를 조정해 주는 것을 보았다. 감히 생각도 못 했던 좋은 일, 전설 속의 신기한 일들을 우리는 정말로 만났다!

어머니는 원래 목에 신경성 피부염이 있었는데 20년이 넘도록 낫지 않았다. 여름만 되면 심해지는데 가려워서 긁다가 상처가 나서 또 아프기도 하고, 반복하다 보니 면적이 점점 커지고 넓어지기도 해서 괴롭고 힘드셨을 것이다. 학습반에서 돌아온 후 이 피부염이 목에서 얼굴, 눈꺼풀, 사지, 마지막에 전신에 퍼져 거의 다 피부염으로 뒤덮였다. 여름이라 감출 수도 없고 피부가 보기가 너무 흉해 집 밖으로 나가실 수도 없었다. 어머니께서는 소업(消業)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한 달이 넘자 피부염이 서서히 가라앉았고 그 후 한 번도 재발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항상 건강하시다.

나중에 오빠와 동생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자 어머니는 손자, 손녀도 여럿 키워 주셨다. 이젠 더는 병원에 갈 필요가 없어졌고 약 한 알 먹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줄곧 건강하셨다. 암에 대해 글을 써서야 기억이 난 건데 평소에는 어머니가 이런 일을 경험하셨다는 걸 잊고 있었다.

남동생은 그 후부터 평정심을 되찾으며 정서도 안정됐다. 말더듬증도 차츰 나아져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사랑스러운 아들딸을 두었다. 올케는 남동생에게 말했다.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에요.” 동생의 장모는 우리 어머니에게 “쟤(올케) 여동생도 샤오젠(남동생)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라고 말한 적도 있다.

나는 대법 속에서 수련해낸 선량함과 아름다움을 내 학생들에게 전해줬다. 한때 데리고 있던 학생들이 진학할 때 학교에서 모두 반을 나누었는데, 개학하면서 학부모와 학생들은 내가 다른 새로운 학급을 맡은 걸 알고, 단체로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 학생들을 내 학급에 넣겠다고 했다. 학교는 두 반의 학생들을 전부 서로 조정해야 했다. 학부모가 단체로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 나를 머무르게 한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 학생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엄마, 엄마가 우리 선생님처럼 착하면 얼마나 좋아”라고 말했고, 또 어떤 학생은 어머니와 다툴 때 “나는 엄마의 자식 안 할래, 나를 우리 선생님에게 보내줘”라고 말하기도 했다.

대법을 수련하면서 지혜가 업무 중에서도 끊임없이 솟았다. 나는 학교의 대표 교사이고 해마다 전체 선생님에게 공개 수업과 시범 수업을 보여준다.

나와 남동생은 ‘진선인(眞·善·忍)’의 준칙을 실천한다. 가정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오빠 형님을 존경하고 동생을 사랑하며, 업무 중에서도 개인 득실을 따지지 않고 자신의 일터에서 소임을 다해 해마다 모범사원으로 선정됐다.

중공이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시작했을 때 우리 학교 지도자들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이건 문화대혁명과 같아. 얼마나 많은 인재를 손실하려나!”

아버지와 오빠는 비록 수련은 안 하지만 우리가 절망에서 새로 태어나기까지의 과정을 직접 보았기에 당연히 TV에 나오는 사당(邪黨: 공산당)의 헛소문과 모함을 믿지 않았고 우리의 수련을 지지했다. 1999년 후 중국공산당의 여러 차례 박해 중에서 용감하게 우리를 보호했고 박해를 저지했다.

“한 사람이 연공하면 온 식구가 혜택을 본다”[1]. 연공해 우리만 무궁한 혜택을 받은 것이 아니라 가족들도 대법에서 복을 받았다.

우리가 수련하면서부터 아버지의 건강이 좋아지고 있는데, 이전에 아버지는 일 년 내내 만성질환을 앓으셨다. 몇 년 전에 한번은 높이가 1m 정도 되는 의자 위에 또 작은 의자를 그 위에 하나를 더 놓고 발을 디뎌 주방 벽장에서 물건을 꺼내려 하셨다. 결국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꼿꼿이 뒤로 넘어지면서 뒤통수를 땅에 찧고 쓰러지셨다.

소리를 듣고 달려 나간 나는 놀라서 멍해졌다. 70~80대의 노인이 여름이라 셔츠만 입고 높은 데서 떨어져 뒤통수가 타일로 된 바닥에 부딪혔으니 보통은 죽지 않아도 중상을 입거나 기절했을 것이다. 나는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얼른 나를 당겨 일으켜야지!”라고 하셨다. 나는 감히 잡아당기지는 못하고 골절되지 않았는지 여쭈었다. 아버지께서 뼈는 다치지 않았다고 하셨다. 아버지를 부축해 침대로 모셨지만 여전히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나중에 검사해보니 아무 일도 없었다. 다만 발가락 피부가 살짝 벗겨졌을 뿐이다. 오빠가 말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죽었을지도 몰라!” 우리는 모두 사부님께서 아버지를 보호해주셨다는 것을 안다. 그 후로도 두세 번 심하게 넘어지셨는데 돌봐드리니 곧 좋아지셨다.

‘진선인(眞·善·忍)’을 수련함에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닦는 것이다. 갈등이 생겼을 때 우선 안으로 자신이 어디에서 잘못했는지 찾고 곳곳에서 다른 사람을 선하게 대하며 상대방의 각도에 서서 문제를 고려한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을 요구해야 할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대법의 법리로 자녀를 교육하고 지도해야 한다. 지금 사회적으로 나쁜 습관이 청소년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 집 아이들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할 수 있고 이런 나쁜 것들에 좀처럼 물들지 않는다. 아이들은 모두 성실하고 착하며 예의 바르고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남의 집 아이’이다.

26년 전 우리 집은 하마터면 망할 뻔했는데 지금은 3대가 됐다. 부모님은 이미 여든이 넘으셨고 건강하시며 장수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가족들은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며 양보하는 원만한 대가족을 이뤘다. 큰 조카딸은 종종 자랑스럽게 “우리 가족이 가장 행복해요!”라고 말한다. 이 모든 행복은 모두 대법이 준 것이다.

우리 가족은 사존께 절을 올립니다! 사존의 자비로운 제도에 감사드립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서: ‘오스트레일리아 법회 설법’

 

원문발표: 2020512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5/12/40508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