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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나의 정진하는 걸음을 막았는가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돌이켜보면 내가 법을 얻은 것은 바로 ‘진선인(眞·善·忍)’ 이 세 글자에 깊이 감동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비록 10여 살 밖에 안 되었지만 인간세상의 허위, 성실하지 못하고 옥신각신하며 사람을 빈부귀천 등등으로 나누는 이런 것들을 매우 싫어했고 마음속에는 일종 동경이 있었다. 나는 ‘진선인(眞·善·忍)’ 이 세 글자를 들었을 때 마치 해독제를 찾은 것 같았고 마음이 탁 트였다.

그러나 여러 해 지난 후에야 나는 그 일념에 대법을 수련했는데 안일한 마음, 색욕, 질투심을 오랫동안 닦지 못한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회상하니 몇 년 전에 제일 돌파하기 어려웠던 것이 두려운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역사회 성원과 경찰이 문을 두드릴까 봐 두려웠고 가족이 나를 이해하지 못할까 봐 두려웠으며 전체적으로 이것이 두렵고 저것이 두려웠다. 그때 결혼을 갓 하고 아이가 있었기에 세 가지 일을 잘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음은 견정했고 늘 자신이 사부님의 정법노정을 따라잡지 못할까 봐 두려워했다. 비록 법리를 얼마 알지 못했지만, 대법에 대해서는 매우 견정했다. 당시 나는 매일 나가서 진상을 알리는 수련생을 흠모하고 탄복했다. 매번 ‘밍후이 주간’에서 수련생이 농촌에 가 진상자료를 배포하고 진상을 알리며 ‘삼퇴’를 권고했다는 문장을 보면 나는 어머니에게 “우리도 이런 기회가 있어 그들처럼 법을 실증했으면 좋겠어요.”라고 했다.

아마 이런 염원이 있어서인지 2015년 사부님께서는 늘 농촌에 가 진상을 알리는 현지 수련생을 알도록 우리에게 배치해 놓으셨다. 어머니도 참여했고 농촌에 가서 진상을 알리는 것을 시작했다. 매번 그들이 여러 해 동안 법을 실증한 일을 말하면 나는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랐다. 나는 속인 생활 중에서 많은 소중한 시간을 낭비했다. 수련생들은 이 길에서 감동적인 이야기가 너무 많다. 그때 나는 자신이 낭비한 시간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깊이 알았다.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다그쳐 반드시 세 가지 일을 잘하고 사부님의 정법노정을 따라잡겠다.

다행히 나는 줄곧 법공부를 매우 중시했다. 비록 진상을 알리는 것이 많이 뒤떨어졌지만, 법리는 비교적 똑똑하다. 그 때문에 매우 빨리 법을 실증하는 길을 걷게 되었다. 그때 매일 시간에 빈틈이 없었다. 나는 반나절 출근하는데 아이가 둘이 있었다. 작은아이는 어린이집에 갓 들어갔기에 등하교시켜야 하고 큰아이는 초등학교에 다니기에 숙제하는 것을 지도해 주어야 한다. 남편은 도와주지 못한다. 그때 나는 사부님께서 배치한 길을 걷고 반드시 세 가지 일을 하고 어떤 어려움도 내가 법을 실증하는 길을 막을 수 없다는 일념이 있었다. 비록 매일 매우 바빠 휴식할 시간이 거의 없지만 법에 용해되니 매우 충실하고 유쾌했다.

지금 매일 세 가지 일을 하는 것은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다. 간혹 안일심 때문에 생각한다. 속인의 상태에 부합되게 이틀간 휴식하면서 아이를 데리고 며칠 동안 실컷 놀까? 그러나 나는 즉시 내가 늦게 걸어 나왔고 급히 뛰어도 사부님의 정법노정을 따라잡을지 미지수인데 어찌 쉴 수 있겠는가! 라고 생각했다.

비록 자신이 느슨해지는 것을 단속할 수 있지만 갓 걸어 나왔을 때처럼 정진하지 못하고 거의 억지로 하는 것을 느꼈다. 최근 나는 자신을 깊이 파 보고 찾아보았다. 무엇 때문에 나는 환경이 긴장할수록, 어려움이 가중될 때는 견정한 마음, 정진하려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데 매번 환경이 여유가 있을 때 정진하려는 그 열의가 없는지 명백히 알게 되었다. 사실 처음에 대법에 들어올 때의 근본적인 집착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근본적인 집착은 무엇인가? 바로 당시 대법을 수련하게 된 것은 ‘진선인(眞·善·忍)’이 내가 지향하는 정신 방면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고 동시에 자신에게 일종 편안하고 쾌적하고 아름다운 생활상태가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환경이 열악해질 때마다 자신이 불편하면 본능적으로 고통을 배척하고 주동적으로 법의 요구에 따라 해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쉬웠다. 그러나 환경이 편안하고 자신이 요구하는 아름다운 생활에 도달하면 목적을 달성하였기에 정진하려는 마음이 없어진다. 이것은 대법을 이용해 내가 지향하려는 아름다운 생활을 얻으려는 것이다! 얼마나 더럽고 무서운 사람 마음인가! 이런 더러운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신의 기준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이런 것을 찾은 후 나는 수시로 이 근본 집착과 관련 있는 일체 바르지 못한 염두를 경계하고 진아(真我)를 똑똑히 분간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연공인(煉功人)은 유심연공(有心煉功), 무심득공(無心得功)을 주장한다.”[1] 나는 자신에게 나의 생명은 바로 나의 당초 서약을 완수하기 위해 온 것이며 나의 생명의 가치는 바로 법을 증명하기 위해 온 것이지 결코 속인의 아름다운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경고했다.

근본적인 집착을 찾고 자신의 수련 목적이 명확해지니 좋지 않은 사상이 생존할 곳이 없어졌다. 안일, 색욕, 질투 등등 이런 사람 마음도 뿌리가 없어졌고 수련하는 것도 쉬워졌다.

여기까지 쓰자 나는 이번 우한 폐렴 전염병이 만연된 후 많은 사람, 일부 수련생을 포함해 갑작스러운 발생에 일시 어찌할 바를 모른다고 생각했다. 의외인 것은 법을 일찍 얻고 줄곧 진상을 알리는 것을 매우 잘한 몇몇 수련생이 이번에 걸어 나오지 않고 집에 있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기에 우리가 사람을 구하는 발걸음을 막는가? 전염병 발생인가? 아니다. 가족인가? 그것도 아니다. 만약 우리의 마음이 견정불이하다면, 마치 당시 베이징에 가서 법을 실증한 것과 같다면, 당시 환경이 매우 열악할 때 견정하게 진상을 알리는 길을 걸은 것과 같다면 무엇도 가로막지 못한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우리가 정진하는 걸음을 가로막는가? 나는 사람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사부님께서는 “수련이란 극히 간고(艱苦)하고 매우 엄숙한 것으로서, 당신이 조금이라도 주의하지 않으면 떨어질 수 있으며 하루아침에 망치게 되므로, 마음이 반드시 똑발라야 한다.”[1] 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느슨한 환경에서 안일한 마음을 너무 크게 자양해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아닌가, 아니면 다른 바르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일까? 올해 션윈 중에 ‘성연(聖緣)’과 ‘속세의 인연’ 이 두 프로그램은 나에게 매우 깊은 감명을 주었다. 나는 이것은 사부님께서 모든 대법제자에게 이번 전염병에서 어떻게 잘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비로운 점오라고 인식한다. 사람이 신을 향해 나아가려면 반드시 인간세상의 모든 명리정(名利情)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사부님과 대법에 대해 반석과 같이 견고하여 파괴할 수 없는 바른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번 전염병 발생은 프로그램 중의 그 도인 사부를 따라 함께 벼랑으로 뛰어내린 시험과 같다. 우리는 절대로 안일한 마음에 미혹되어서는 안 된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의 정진하는 발걸음을 가로막는가? 우리는 마땅히 깊이 파 봐야 되지 않겠는가? 사람 마음이 가져온 현실 중의 가상에 미혹되지 말고 장계취계(將計就計)로 사람 마음을 파내고 그것을 수련하고 단호히 사부님께서 하라고 하신 세 가지 일을 잘하자.

아래에 사부님의 ‘2019년 뉴욕법회 설법’ 중의 한 단락 법으로 수련생들과 서로 격려하고자 한다.

“물론 내가 최후시기를 말하는데, 사실 여러분도 보았듯이, 천상(天象)의 변화와 이 세상의 변화는 같은 것이다. 예를 들어 말하면 대법제자에 대한 이 사악(邪惡)의 박해는, 이미 막다른 시각에 이르렀고, 사악은 이미 자신도 지키기 어려운데, 단지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그 기계(機器)가 아직도 돌아가고 있음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내가 방금 말했듯이, 최후에 이르러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더욱 잘해야 하는바, 왜냐하면 최후에 이를수록 더욱 관건(關鍵)이기 때문이다. 애당초 그렇게 간고(艱難)한 환경, 그렇게 사악한 환경을 당신들은 모두 걸어지나왔는데, 최후에 더욱 잘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박해 당초, 전 세계 매체가 도처에서 모두 중공 매체의 유언비어를 날조하는 문장을 전재(轉載)하고 있었고, 전 세계 사람들은 모두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분별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런 어려운 정황 하에서, 국제사회의 대법제자는 진상을 알려 전 세계인의 인식을 바꾸고, 걸어지나왔다. 최후에 당신들 자신이 해 온 이 일체를 소중히 여겨야 하며, 자신을 느슨히 해서는 안 되는데, 절대로 자신을 느슨히 해서는 안 된다.”[2]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轉法輪)’
[2] 리훙쯔 사부님 경문: ‘2019년 뉴욕법회 설법’

 

원문발표: 2020227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2/27/40174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