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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룬궁이 그녀를 좋은 사람으로 변화시키다

글/ 헤이룽장 대법제자 이수(一粟)

[밍후이왕] 나는 재무학과를 전공한 후 졸업하여 제약회사에 입사했고, 내 전공에 따라 재무담당부서에서 근무했는데, 성격이 강직해서 사람을 쉽게 사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상사에게 아부할 줄도, 의례적인 선물조차도 보낼 줄 몰랐다. 그래서 그들은 나를 출산휴가 기간에 작업현장으로 내려 보내 공장근로자들과 함께 작업하게 했다.

1. 잃음

당시 내 마음은 극도의 불만으로 평형을 이룰 수가 없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왜냐하면 집은 경제적으로 형편도 좋지 않았고 누구 하나 도와줄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실망과 분노 심지어 원망하는 마음까지 가득 쌓여서 스스로 무너지기 직전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강보에 싸인 아이를 보고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저 눈물을 삼키며 참는 수밖에 없었으며, 현실을 받아들이고 가정을 지탱해가는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직장이 파산해서 직업을 잃고 실직한 상태였고, 어린 아이는 허약한 체질이라 잔병치레를 자주했으므로, 나의 생활은 모두 고통 속의 시달림뿐이었다.

원래는 시어머니가 우리 아이를 돌봐주면 남편이 품팔이라도 해서 살림에 보태기로 했었는데,시어머니가 아무런 이유나 설명도 없이 “아이를 봐줄 수 없다.”고 거절을 하는 바람에 난감한 상황을 맞게 되었다. 단지 1백여 위안(한화 약17,000여원)에 불과한 내 월급으로는 애를 돌보는데 드는 비용도 모자라는 실정이어서 시어머니의 거절은 무척 절망적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당시 시어머니는 시누이의 아이를 봐주고 있었으므로 우리 아이를 못 봐주겠다는 거절의 이유를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절박하고 막막한 심정이라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러면서 어떻게 산단 말인가!’ 하는 절망감으로 죽으려는 마음조차 생겼다. 나는 불면증으로 온 밤을 뜬 눈으로 새우면서 원망이 있는 대로 일어났다. 스스로 자신의 팔자가 사납다고 원망 했으며, 하느님은 불공평하다고 원망했고, 남편은 무능하며 시어머니는 나쁘다고 원망했다. 또 직장동료들은 소인배이고, 상사는 권력만 믿고 사람을 깔본다고 원망했다.

나는 작업현장에 내려와 일을 하게 된 후부터, 낡은 질그릇처럼 변해버렸고 결국 깨어져버리고 말았다. 더는 조신하지 않았고, 막말을 배우고, 욕설까지 했으며, 심지어 다른 사람들처럼 공장의 생산품인 약품을 집으로 훔쳐오기도 했다. 자신에게 필요하든지 필요하지 않든지 상관하지 않고 기회만 있으면 집으로 가져왔다. 또 무슨 이해관계가 있는 일이 생기면 동료들에게 더는 양보하지 않았으며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동료들과의 관계가 불안정하게 되었으므로, 누구도 감히 나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런 상황은 내가 바라는 인생이 아니었으므로 마음은 몹시 편치 못했으며 또 고민스러웠다. 나는 자신감을 잃었다. 있는 힘을 다해 발버둥 쳐봐도 출로가 보이지 않았고,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캄캄한 밤에 홀로 버려진 고아와도 같았다. 매일 산송장처럼 기계적으로 출퇴근을 할 뿐이었다.

2. 자신을 찾다

1998년 11월 아들은 이제 겨우 4세였는데, 며칠 동안 고열이 내리지 않고 심하게 앓았다.약을 먹이면 잠시 괜찮다가도 약기운이 떨어지면 다시 열이 올랐다. 남편은 일하러 외지로 갔기 때문에, 아침이면 내가 아들을 보육원에 맡기고 출근했다가 저녁에 퇴근해서 아들을 데리러 가는데, 아들이 고열로 혼미한 상태에 빠져있는 걸 보게 되면 가슴이 아프고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들의 약값을 내가 부담하지 않기 때문에 가장 좋다는 고급 약을 쓸 수 있는 점도 있지만, 아무리 좋다는 고급 약을 처방받아도 아들의 고열은 내리지 않았다. 이튿날 직장에서 동료에게 아들의 일을 말하자, 한 동료가 “당신의 아들은 아마 놀라서 열이 나는 것 같으니, 아무리 약을 먹여도 소용없을 것이다. 그러니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동료의 말을 듣고도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속수무책이었다. 그때 장 씨 성을 가진 동료가, 자기에게 책 한 권이 있는데, 도움이 될 것이니 가져가 읽어보라고 했다. 사실 이미 한 동료가 여러 번 나에게 그 책을 읽어 보라고 권했지만, 나는 모두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그 책을 권해준 동료를 조롱하고 야유를 한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아들이 열이 나는데도 무슨 방법이 없으므로 마지못해 책을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책이 바로 ‘전법륜(轉法輪)’이었다. 나는 밤에 아들을 재워놓고 책을 보기 시작했다. 보다가 잠이 들었는데, 비몽사몽간에 커다란 파룬이 도는 걸 보았다. 그 파룬이 서서히 공중에서 내려오더니 순식간에 내 아랫배로 들어갔다. 나는 놀라서 깨어났다. 오! 꿈이었구나?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니 아들은 열이 내렸고 정신이 맑고 또렷했으며, 밥도 잘 먹었다. 직장에 가서 동료에게 꿈 이야기를 하자, 동료가 하는 말이 “너의 근기가 정말 좋다.”고 했다. 나는 한마디로 반박했다. “무슨 근기고 아니고를 막론하고 나는 그런 걸 믿지 않아요.”

아들은 태어나서부터 체질이 약해서 감기에 잘 걸리거나 열이 나는 일은 늘 있었다. 그래서 겨울철만 되면 아들은 링거를 맞는 등 치료비만 해도 1천여 위안(한화 약17여만원)이 넘었다. 그 때 나의 월급은 겨우 200여 위안(한화 약35,000여원)이었다. 아들의 병이 나아서 나는 매우 기뻤다. 그래서 책은 그냥 보았는데, 낮에는 직장 일은 모두 정상이었지만, 저녁이면 보채는 아들을 달래야만 하는 그런 평범한 일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 몸에 이상이 왔다. 심한 두통과 감기몸살 증상이 온 것이다. 급히 많은 약을 챙겨 먹으면서 ‘아들은 어리고, 남편도 집에 없는데, 내 몸이 아프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약을 먹은 지 채 5분도 되지 않아서 심하게 토하기 시작했다. 토할 때는 오장육부가 다 뒤집혀 나오는 듯 했다. 한 바탕 토하고 나니 온 몸도 나른하고 두통도 사라졌다. 그런데 두통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이상할 정도로 머리가 맑았다. 그런 감각은 참으로 신기했는데 말로는 무어라고 묘사할 방법이 없었다. 반나절이 지나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전법륜(轉法輪)에 쓰여 있는 대로 모두 정말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자, 이곳저곳 불편했던 모든 것이 전부 사라졌다. 나를 그토록 오랫동안 괴롭혔던 편두통과 위장병도 사라진 것이다. 직장에 출근하자마자 나에게 전법륜(轉法輪)을 준 장 씨 수련생을 한 걸음에 찾아갔다. 내 설명을 들은 그녀는 기뻐하며 말했다. “사부님께서 당신을 책임지고 계세요,” 이번에 나는 그녀에게 반박하지 않았고, 듣기 싫은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재삼 당부하면서 “앞으로 무서운 일이나 위험한 일에 부닥치면 사부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잊지 말라”고 했다. 나는 기쁘게 대답했고, 그녀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격동되어 그녀에게 ‘전법륜(轉法輪)’ 책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하루가 지나 밤 몇 시인지도 알 수 없는 한 밤중에 갑자기 침실이 이상하게 새카맣게 변하면서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두려움으로 소름이 돋으면서 공포감을 느꼈다. 그때 알 수 없는 한 줄기 밝은 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는데 나의 공포심은 더욱 커졌다. 순간 공포심에 짓눌려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 때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필사적으로 외쳤다. “리훙쯔(李洪志)사부님, 저를 구해 주세요! 리훙쯔(李洪志)사부님 저를 구해 주세요!” 몇 번을 외쳤는지 알 수 없지만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공포심은 사라지고 없었다.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그때 한 덩어리 검은 물체가 아주 서서히 내 몸에서 빠져나가 바닥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서서히 문을 통해 공중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

3. 환골탈태

아침에 일어나니 지금까지 이처럼 가뿐함을 느낀 적이 없을 정도로 상쾌하고 가벼웠는데,그 심정을 뭐라고 표현할 길이 없다. 신체의 매 세포마다 모두 상쾌함이 스며드는 듯했으며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그 상쾌함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하늘을 보면 좋았고, 땅을 봐도 아름다웠으며, 기화요초(琪花瑤草―옥같이 고운 풀에 핀, 구슬같이 아름다운 꽃) 수목까지도 다 사랑스럽고, 보이는 사람마다 모두 마음에 들었다. 파룬궁(法輪功)을 연마하기 전과 후의 심신의 변화는 너무나 거대해서 나 스스로도 불가사의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다른 사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내 머릿속에는 그저 파룬궁(法輪功)뿐이고, 나에게는 사부님이 계시니 나는 의지할 곳이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목표가 있게 되었고 귀속할 곳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파룬궁(法輪功)사람이라는 생각뿐이니무슨 일을 어떻게 생각하든지 모두 기쁘기만 했다. 한 마디로, “나는 파룬궁(法輪功)을 연마한다.”였다.

나는 더 이상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게 됐다. 시어머니, 직장상사는 물론 동료와의 그런 알력과 갈등 같은 건 전생의 일처럼 망각되었다. 만약 파룬궁을 연마하지 않았다면 나는 영원히 해낼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나는 더는 회사의 제품인 약을 집으로 훔쳐가지 않았다. 한 번은 동료와 함께 과일을 사러 갔다. 막 돈을 치렀는데 무슨 영문인지 갑자기 과일 장수가 내가 산 과일을 길에다 아무렇게나 던지는 것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와 대판 싸웠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 없이 그가 던진 과일들을 주워 들고 왔다. 동료는 놀랍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파룬궁(法輪功)을 연마하더니 정말 다르구나!” 후에 동료들은 파룬궁(法輪功) 이야기가 나오기만 하면 모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녀들은, 파룬궁(法輪功)은 한 사람을 뼛속까지 개변시킨다고 생각하게 됐다. 한 동료는 남편이 경찰관인데 파룬궁(法輪功)박해에 참여한 적이 있었고 또 파룬궁(法輪功)을 모욕하는 말을 한다고 했다. 그럴 때면 그 동료는 남편을 향해 “당신이 어떻게 말하든지 내가 본 파룬궁(法輪功)은 모모모를 좋은 사람으로 변하게 한 것을 보았다.”라고 말했다.

사당(中共邪黨)이 대법을 박해하기 전 남편은 내가 파룬궁(法輪功)을 연마하는 것을 지지했다. 그는 내 몸이 건강해졌고, 아들도 병이 나았으며 더는 앓지 않고 건강한 것을 보고 자신도 파룬궁(法輪功)을 연마하겠다고 하면서, “집이 있는 지역으로 돌아와 일을 하게 되면 수련을 시작할 것이다.”라고 했는데, 박해가 시작된 것이다. 장쩌민의 기세에 겁을 먹은 우리 직장에서도 “파룬궁(法輪功)을 수련하지 않겠다”는 각서쓰기를 결연히 거부한 장 씨 수련생을 해고했다. 그러나 나는 작업현장에서 일하기 때문에 나를 관할하는 부서의 상사들은 내가 파룬궁(法輪功)을 연마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장 수련생이 회사를 떠나는 날 그의 소지품을 챙겨주고, 회사 문을 나서서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부터 나는 파룬궁수련생과의 연락이 끊어졌다. 나는 누구를 찾아가야할지,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지를 모를 뿐만 아니라, 감히 남에게 묻지도 못했다. 그저 집에서 혼자 책을 보았지만, 3일 고기잡이를 하고 그물을 말리는 식으로 책을 볼 뿐 정진할 줄 몰랐다. 그러나 직장에서 누가 파룬궁(法輪功)이 나쁘다거나, 사부님이 나쁘다고만 하면 그와 싸웠으며,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4. 두려워하던 남편이 진상 알리기에 나섰다

2001년 5월 갑자기 장 수련생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꿈에 내가 아래로 미끄러져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나는 수화기를 놓자마자 차를 타고 그녀를 찾아갔다. 그녀는 나에게 신경문과 일부 진상자료를 주었다. 나는 중공이 박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가족을 찾게 되었다. 나는 대량으로 진상자료를 배포하기 시작했다. 온몸에서 힘이 넘쳐났다. 세인들에게 “파룬궁(法輪功)은 억울함을 당하고 있다. 사부님께 결백을 찾아드려야 한다”고 알렸다. 저녁마다 아들이 잠들면 문을 잠그고 나가서 진상 활동을 했다.어떤 때는 아들을 데리고 나가서 함께 배포하기도 했다.

내가 진상활동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집으로 돌아왔으며. 더는 외지로 일을 하러 가지 않았다. 남편은 내가 밤이면 진상자료를 들고 나가는 것을 보고 얼굴이 하얘지고 놀라면서, 우리 집 주위에 붙어 있는 진상자료들이 모두 내가 붙인 것임을 알게 되어 더욱 두려워하면서 나의 진상활동을 극력 제지했다. 그래서 남편이 잠들면 밤중에 일어나 나가서 진상자료를 배포했는데, 어느 날 그가 밤중에 일어나 내가 집에 없는 것을 보고, 집에 보관 중이던 진상자료와 비디오 등을 모두를 불살라 버렸다. 내가 돌아와 보니 그 모양이라 그와 크게 다투었다. 그 때는 어떻게 수련하는 것인지 몰랐고, 또 안으로 찾을 줄도 몰랐으므로 남편과 속인처럼 다투며 원망했다. “남자가 담이 작다, 배은망덕하다, 좋고 나쁨도 구분할 줄 모른다”고 증오하고 원망했다. 그때부터 남편과의 싸움이 그치지 않았는데, 남편은 마귀부체가 붙은 듯이 광적으로 나를 때려 나의 온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그래도 성이 안 풀리면 책을 찢고 태웠는데, ‘전법륜(轉法輪)’을 절반이나 태워 버렸다. 그래도 사부님 사진이 있는 책의 앞부분은 감히 태우지 못했다. 그렇게 남편은 나를 때리며 온갖 행패를 부렸어도 나는 진상자료 배포를 중단하려고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수련생이 준 법상을 벽에 걸었는데, 그걸 본 남편은 노발대발하면서 나를 찍어죽이겠다며 밖으로 삽을 찾으러 나갔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냉정해졌다. ‘때려죽이겠으면 죽여라. 아무튼 나는 법을 얻었다.’ 침대로 가서 가부좌하고 앉았다. 아주 오랫동안 앉아 있어도 남편은 들어오지 않았다. 아직도 그가 밖에서 서성이고 있는 것으로 여겼다. 후에야 나는 사부님께서 나를 보호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느 날 ‘날마다 이렇게 싸우는 것도 옳지 않다’라는 생각이 들어, 남편과 긴 시간동안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와 아이의 연공 전후의 건강상의 변화를 회상시켰을 때, 남편도 “대법이 좋다”고 인정하면서, “다만 사악한 공산당이 사람을 잡는 것이 두렵다.”고 했다. 며칠에 한 번씩 선악에는 반드시 보응이 따른다는 이야기를 읽어주었으므로, 남편도 기분이 좋을 때는 ‘전법륜(轉法輪)’을 한 단락씩 읽기도 했고, 즐거운 마음이 들 때는 사부님 설법을 한 단락 듣기도 했다. 남편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악하지 않았다. 남편은 대법책을 찢고 태웠던 응보로 거의 2년 동안 손목에 통증이 왔는데,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도 병을 발견할 수 없었고, 약을 먹어도 낫지 않았다.

나는 후에 인터넷에 접속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고, 컴퓨터와 프린터기를 구입해서 혼자 진상자료를 복사하고, ‘9평’도 만들 줄 알게 됐다. 남편은 과거 인쇄업에 종사한 적이 있기 때문에 내가 ‘9평’을 제작할 때 열정적으로 많은 도움을 줬다. 남편의 손목통증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졌다. 남편은 또 여러 해 겨울 동안 추운 눈보라를 무릅쓰고 새벽 3시에 친척 집에 가서 표어 종이를 운반해왔다. 남편은 법 공부와 연공도 하지 않으면서 늘 자신을 “대법제자”라고 말한다. 나는 남편에게 “당신을 대법제자로 치지 않는다.”라고 하면 남편은 좋아하지 않는다.

문장발표 : 2016년 6월 13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6/13/32944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