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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각각 대법제자의 본분을 지키자

글/ 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 근래 밍후이 교류문장에는, 아직도 많은 대법제자가 사람에서 걸어 나오지 못하고, 구도한 세인이 아직도 많이 부족하며, 우리가 마땅히 도달해야 할 표준과 상당한 거리가 있고 대법제자의 정체도 승화해 올라오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런 문제를 겨냥해 개인인식을 좀 말하여 수련생들과 교류하고자 한다.

자아의 마장(魔障)에 집착

사부님께서는 ‘전법륜(轉法輪)’ 중에서 우리들에게 ‘자심생마(自心生魔)’의 법리를 알려주셨다. “얼마나 높이 수련했든 이 문제가 나타나기만 하면 끝까지 떨어지며 철저히 망칠 것이다.”[1] 수련초기, 끝까지 떨어질까봐 자신에게 절대로 이 마음이 생겨서는 안 된다고 끊임없이 일깨워 주었다. 그러나 장기적인 수련노정에서 사실 자아에 집착하는 표현방식이 다양해 정도가 다르며, 어떤 것은 명확하고 어떤 것은 매우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 근본은 모두 자심생마의 범위이며, 구세력의 위사위아(爲私爲我)한 본성의 자연적인 표현에 속한다.

만일 사상 중 남보다 뛰어나다고 여기고, 스스로 옳다고 여기며, 자신의 감각이 좋다고 여긴다면, 더 발전하면 자신도 속이고 남도 기만하지만 자신은 알지 못한다. 수련의 시간이 길면 늘 자신도 모르게 노 제자와 신 수련생을 구분하고, 자신의 잘한 어떤 방면을 다른 사람이 칭찬하면 우쭐거린다. 간혹 말하는 중 자신이 과거에 어떠어떠했다고 집착하며, 심지어 사람마음 때문에 박해를 초래한다. 박해 중에 잘 하면 또 무의식중에 과시한다.

수련을 얼마동안 했고, 또 일부 관을 넘었고, 법에 대한 일부 인식이 있다고 느낀다. 사실 수련이 안 된 일면은 영원히 사람이 법을 인식하는 상태로서 법을 진정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아에 대한 집착은 매우 쉽게 일종 착각을 조성하며 늘 사상 중에서 반영되어 나온다. 당신의 이 인식이 높지 않고, 그의 그 인식은 괜찮고, 자신의 인식은 법에 있고, 당신들 이것은 모두 사람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것은 모두 자아에 집착하고 사람마음을 버리지 못한 사람마음의 표현이다.

또 어떤 수련생은 장기적으로 간고한 수련 중에서 정진의 의지가 소침해지고, 각종 사람마음의 집착에 좌우되어 옳지 않고 좋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스스로 자신을 속이며 회피한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문제를 지적하면, 당신이 말한 것처럼 그렇지 않고, 그 정도로 엄중하지 않으며, 심지어 ‘오직 법 공부를 하고 정진하고 일을 많이 하면 수련할 수 있다’는 가상을 연화한다. 자신이 한 일이 오히려 맞다고 여겨 내심 아주 편안해 하며 계속 소침해하며 사부님의 부탁을 잊었다. “도(道)와는 갈수록 멀어져 되돌아 수련하기란 더욱 어렵다.”[2] 심지어 자신도 일부 일을 했기에 그것을 자본으로 생각하고 휴식해도 되며 심지어 정법의 결속 등등을 기다리고 기대한다.

또 일종 돌출한 표현은 정법의 노정, 매 단계에서 발생하는 변화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 예를 들면 이전의 ‘9평’을 전하는 것, 지금의 ‘장쩌민 고소’다. 이해하지 못하는 근원은 늘 자아의 각도에서, 자신의 인식에 부합되는 협애한 입장으로 사부님의 배치를 헤아리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어떤 수련생은 장기적으로 그 상태에서 배회하며 하나의 마난에 빠져 뛰쳐나오지 못하는가, 무엇 때문에 매일 법 공부한다고 말하지만 새로운 내포를 보지 못하는가? 무엇 때문에 어떤 수련생은 늘 항목을 하면서 협조를 잘 하지 못하고 심지어 손실을 조성하는가? 자아(自我)에 집착하고 자아를 실증하는 근원은 바로 ‘사(私)’이며, 더 나아가면 각종 집착심이 파생된다. 수련인으로 말하면 바로 사람마음에 집착한 감수이며 마성을 자양하고 강렬한 자아 집착을 형성한 하나의 강대한 마장(魔障)이다.

사부님의 배치를 인식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수련생을 모두 제자로 여긴다”[1] 사부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나는 당신들을 제자로 삼고자 하나 당신들 자신이 제자가 되려 하지 않는데 어쩌겠는가?”[3] 제자는 사부님의 홍대한 은혜, 자비를 영원히 전부 이해하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한다. 사부님께서는 제자에 대해 차별 없이 대하신다. 그러면 자신에게 물어보자. 우리는 대법제자인가? 아마 이렇게 물으면 어떤 사람은 참지 못하고 왜 아닌가? 라고 할 것이다. 설법에서 우리는 사부님께서는 우리가 잠시 틀린 길을 걸어 곤두박질했다고 다른 눈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대법은 표준이 있다. 대법제자 역시 엄격한 심성요구가 있다. 우리 대법제자가 부동한 층차에서 마땅히 있어야 할 심성표준에 부합되지 않을 때는 사실 사람마음으로 대법을 대하고 사부님을 대한 것이다.

사부님께서 매 제자에게 하신 배치는 ‘전법륜(轉法輪)’ 중 “사부는 수련생에게 무엇을 주었는가?”[1]에서 명확히 알려 주셨다. 매 대법제자는 착실히 수련하는 중에 모두 자신의 느낌이 있다. 사실 어찌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느낀 그 한 점만 있겠는가. 사부님께서 제자에 대해 마음을 쓰고 하신 일체는 우주 천체로도 형용할 방법이 없다.

사부님의 배치에 대해 수련인의 이 한 층 각도에서 보면 최저한도로 수련인의 본분으로 해야 한다. 수련인의 본분은 무엇인가. 법을 스승으로 삼고[以法爲師], 일에 부닥치면 안으로 찾고, 자신의 좋지 않은 마음을 되도록 억제하고 자제하며, 끊임없이 이렇게 하는 것을 견지하는 것이다. 사실 수련하는 사람으로 놓고 말할 때, 착실히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이 한 점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수련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체현하겠는가? 우리의 진정한 개변과 승화는 모두 사부님께서 하신다. 이 일념을 시종일관 견정히 믿고 지키고 대법과 사부님에 대해 겸손한 심태를 유지하는 것은 우리가 수련할 수 있는 기초다.

정체승화의 문제

대법제자가 정법 수련에서 반영되어 나오는 구체적인 표현은 매우 복잡하다. 사부님의 설법에서 우리는, 사실 일체는 모두 사부님의 장악과 배치 하에 순서 있게 진행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타난 의혹, 몰이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은, 우리가 거기까지 수련되지 못해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인데,반신반의하다가 심지어 믿지 않는다.

사부님께서는 대법제자 개인 수련의 길에 세밀한 배치를 하셨을 뿐만 아니라, 정법 수련 중 대법제자 정체의 승화에 대해서도 많은 배치를 하셨다. 아래는 나의 현 단계 일부 인식이다.

단체 연공, 단체 법공부, 정법 수련 중의 단체 발정념은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남겨 놓으신 수련형식이다. 박해가 시작된 후 특히 중국대륙은, 또 새롭게 파괴당하는 것에서 시작해 점차적으로 회복하는 이 과정을 지나오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정체 제고하는 하나의 중요한 기제(机制)다. 우리가 밍후이왕의 보도에서 보면, 무릇 잘한 대법제자는 장기간 연공을 잘 견지한 것 역시 한 방면인데, 그것 역시 수련인의 본분이다. 특히 밍후이왕에서 단체연공을 제의한 후 장기적으로 새벽연공을 견지한 수련생은 최저한도로 이 하나의 문제에서 정체 중에 있다. 뿐만 아니라 잘 한 지역, 현지의 법공부 팀은 단체법공부, 단체 발정념 역시 착실하게 진행했다.

밍후이왕은 사부님의 또 하나의 배치이다. 밍후이왕의 작용과 밍후이왕에 접속하는 문제를 사부님께서는 여러 차례 설법에서, 수련생의 교류문장에서 늘 이 문제를 담론했다. 그러나 여전히 일부 부동한 인식과 방법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자료점이 ‘곳곳에 꽃이 피고’, 곳곳에 꽃이 핀 지역일수록 현지 정법형세가 비교적 좋고 정체 수련상태도 비교적 좋다. 극소수 밍후이왕에 접속하는 것을 반대하는 수련생도 지금 똑똑히 인식했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일부 문제, 예를 들면 밍후이왕에 접속하지 못하고, 밍후이왕에 접속하려고 생각하지 않거나, 능력이 있지만 늘 접속하지 않고, 늘 접속하지만 도리어 진지하게 접속하지 않아 ‘밍후이주간’을 보지 못하고, 전부 보지 못하는 등등은 도리어 정체 역량을 상쇄하고 약화시킨다. 개인적 이해로 사악의 사이트 봉쇄의 주요원인 중 하나는, 바로 상당수 대법제자가 밍후이왕에 접속하는 것을 중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법회, 밍후이왕의 교류문장과 밍후이의 인터넷 법회 역시 사부님의 배치이다. 모두 정체에 녹아들어 가는지 가지 않는지 하는 하나의 문제가 존재한다. 밍후이왕 교류문장은 우리가 정법 수련 중 부딪힌 각 방면의 문제를 많게 혹은 적게 말했다. 진지하게 즉시 대법에 대조해 참조하면 차이를 볼 수 있고 정법노정을 따라 잡을 수 있다. 그러나 관건은 우리 스스로 의식했는가? 모두 무엇을 하였고 또 장기간 견지해 잘 하였는가?

또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하기 위해 조직한 부동한 항목은 모두 단순한 하나의 작용이 아니다. 예를 들면 모 지역은 장쩌민을 고소하는 하나의 항목을 협조하기 위해 이전에 대오에서 떨어진 수련생을 찾아 법공부 팀을 조직했다. 개인이 법을 실증하는 길을 걸어 나와 정체협조도 하고 알려야 할 진상도 하고 구해야 할 사람도 구했다. 이것은 모두 사부님의 배치며 그 중에서 대법제자 개인과 정체 수련제고도 체현했다.

사실 이 몇 년 동안 진상을 알리는 항목의 협조 과정에서 수확도 있고, 많은 유감과 손실도 있는데, 객관적으로 부동한 지역은 부동한 수련 상태와 차이를 조성했는데, 국부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이것은 개변한다고 해서 즉시 개변되는 것이 아니며 부동한 시간, 부동한 단계에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배치한 기회로, 한 걸음 한 걸음 기초를 닦아 올라가야 한다. 우리가 잘 장악해 바르게 걷고 잘 해야 한다.

장쩌민을 고소하는 최종 인수, 장귀(江鬼)를 언제 심판하는가? 정법(正法)은 언제 결속되는가? 에 대해 말하자면 모두 제자가 마음을 쓸 일이 아니다. 번잡하고 복잡한 각종 상황에 직면해 약간의 사람마음을 움직여 인위적으로 무엇을 하려고 생각하는 것도 모두 위험하다. 대법제자가 심성과 본분을 지키고 잘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직면한 마구 뒤얽힌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전제로, 정법 수련에서 되도록 빨리 반드시 도달해야 한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전법륜(轉法輪)’

[2]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정진요지-퇴직하여 다시 연마(退休再煉)’

[3]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정진요지-환경(環境)

문장발표: 2015년 10월 8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10/8/31712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