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궈이저우 수련생들 –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시던 당시를 회상(사진)

글/ 궈이저우 파룬궁수련생

[밍후이왕]1993년 5월 리훙쯔사부님께서는 궈이저우(貴州) 기공신문사의 초청으로 처음 궈이저우에 오셔서 1차례 기공보고회와 1기, 2기 학습반을 개최하셨다. 일부 기공애호가들은 보고회를 청취한 후 파룬따파(法輪大法)의 높고 깊은 법리에 탄복하였으며 이들은 이후 너도나도 주위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 그리하여 많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신청하여 사부님께서 궈이양(貴陽)에서 개최하신 제1회, 제2회 학습반에 참가하였다. 몸과 마음에서 이익을 얻은 수련생들은 직접 자신의 체험담을 빌어 파룬궁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알림으로써 더 많은 이들이 수혜자가 되기를 바랐다. 이후 모 회사에서는 한꺼번에 몇 대의 차량을 동시에 동원하여 사람들을 태우고 와서 학습반에 참가시켰다.

사회적으로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기에 같은 해 8월, 궈이저우성 기공협회는 사부님께 다시 궈이저우에 오셔서 제 3기 학습반을 개최하시도록 초청하였다. 1993년 기공보고회가 궈이양 노동자문화센터에서 열렸다. 제 1기 학습반은 궈이저우성 지질광산국 직공활동센터에서 개최되었고, 제 2기 학습반은 궈이양의학원 강당에서 제 3기 학습반은 궈이저우 성정부 강당과 난밍구(南明區) 청소년센터에서 개최되었다. 제1기 학습반은 2백여 명, 제 2기는 8백여 명, 제 3기에는 1,400여 명이 참석하였다.

1997년 9월 사부님께서는 3번째로 궈이저우에 방문하시어 궈이양 파자오옌(八角岩)호텔에서 일부 수련생들을 위해 수련 중에서 부딪친 문제에 대해 해답해주셨다. 이것은 현재까지 사부님께서 가장 마지막으로 궈이저우에 오셔서 설법하신 것이었다. 1999년 중공이 파룬궁 박해를 시작한 후 수련생들은 국내에서 더 이상 사부님을 만나 뵐 기회가 없었다. 우리 궈이저우 대법제자들은 사부님께서 친히 궈이저우에 왕림하시어 법을 전하시던 이 한 단락의 소중한 시간들을 더없이 그리워하고 있다. 파룬궁 전수반에 참가하여 직접 사부님을 만나 뵌 많은 수련생들은 매번 그 시각을 회억할 때마다 모두 격동되어 뜨거운 눈물을 흘리곤 한다.

'李洪志師父在中國法輪功貴州傳授班上講法傳功 中國,貴陽(1993年6月)'
사진설명: 리훙쯔 사부님께서 중국 궈이저우 파룬궁전수반에서 설법하시고 공을 전하시다. 중국, 궈이양(1993년 6월)

수련생 갑 – 파룬궁 학습반은 비용을 가장 적게 받았다

당시 전국각지에서 각종 기공학습반이 개최 되었는데 그 중 파룬궁은 비용을 가장 적게 받았다. 매 회 받는 학습반 비용은 약 45위안이었고 다시 학습반에 참가하는 노수련생에 대해서는 단 절반의 비용만 받았다. 리훙쯔사부님께서 학습반을 꾸리고 법을 전하시는 것은 돈을 벌기 위한 것이 아니라 중생을 구도하기 위함이었다. 사부님께서 궈이양에서 설법하실 때, 생활은 매우 간소하였는데 전날 저녁에 세탁한 옷을 이튿날 입으셨다. 사부님께서 처음 궈이양에 오셨을 때 당시 접대를 책임진 측은 다만 매일 10위안을 사부님께 식비로 드렸고 기타 수행인원에 대해서는 비용을 책임지지 않았다. 후에 사부님의 거절을 당했는데 사부님께서 친히 배치하시어 제자들과 함께 숙식하셨다. 매번 강의가 끝나 사부님께서 걸어서 여관으로 돌아가시는 도중에 늘 수련생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어떤 때는 수련생들이 사부님께 서명을 요청하거나 사부님과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할 것을 요청하거나 혹은 사소한 문제를 제기해도 그때마다 사부님께서는 모두 빙그레 웃으시며 흔쾌히 승낙하셨다.

한번은 사부님께서 궈이양에 오셔 파룬궁학습반을 개최하셨는데 수입을 주최측과 4:6으로 나누기로 협의가 되었다. 후에 주최측은 6이 적다고 꺼리면서 학습반비용을 대부분 다 가져갔다. 이렇게 되자 사부님은 숙식 조차 문제가 되었으며 베이징에 돌아가시는 기차표마저 살 돈이 없게 되었다. 이에 수련생들은 모두 불공평하다고 화가 났지만 사부님께서는 그냥 웃어넘기셨다. 제 3기 학습반은 처음 시작할 때는 궈이저우 성정부 강당을 임대했는데 후에 학습반강의를 들으러 오는 수련생이 갈수록 많아져서 강당 안과 밖은 모두 서있는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강당 측은 이런 광경을 보더니 임대료를 올려달라고 요구했다. 사부님께서는 선의적으로 설명해주시기를, 앞에서 학습반을 열 때 어떤 사람은 받는 비용이 적다고 수련생들의 입장료를 높일 것을 요구하였는데 내가 법을 전하는 취지는 사람을 구도하는 것이라는 것을 감안하여 수련생에게 어려움을 조성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현재 중도에서 입장료를 더 많이 받을 것을 요구하는 것은 수련생들에게 부담을 가중시키는 것이므로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라고 하셨다. 당시 강당측은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자 상식에 어긋나는 일을 많이 하면서 각종 핑계를 대어 강당에서 나갈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넓은 흉금으로 사람을 대하셨는데 그들과 전혀 시비를 논하지 않으시면서 단지 장소를 청소년활동센터로 옮긴 후 계속하여 강의를 하셨다.

1999년 이전, 파룬따파(法輪大法)는 중국대륙에서 민중들의 환영을 크게 받고 있었다. 전국각지의 기공신문사, 기공협회, 각지의 지방 정부는 잇달아 리훙쯔사부님을 초청하여 설법하시고 공을 전하시도록 하였다. 주최 측에서는 늘 영리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학습반에 참가하는 수련생들에 대해 입장료를 더 많이 받을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내가 법을 전함은 중생을 구도하기 위함이라고 재차 강조하시면서 수련생들의 경제적 부담을 증가시켜서는 안 되며 비용을 낮출 것을 요구하셨다. 이 때문에 언제나 주최 측과 의견충돌이 생겼다. 궈이저우와 궈이양에서 개최된 몇 차례 학습반에서 주최 측은 예상했던 수익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하여 고의적으로 사부님을 난처하게 만들고 사부님께 많은 번거로움을 주었다. 나중에 사부님께서는 도리어 돈을 덧붙여 일부 비용을 지불하셨는데 이는 사부님 및 수행원들의 생활에 어려움을 조성했고, 사부님께서는 장기적으로 인스턴트 라면을 드시면서 생활하셨다.

수련생 을 – 사부님께서는 어디서나 말과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셨다.

중년에 들어서면서 나의 신체에는 여러 가지 질병들이 생겼다. 기공이 능히 병을 고치고 몸을 건강하게 한다고 하기에 나는 1987년부터 시작하여 각종 기공을 배우고 수련했다. 그러다가 1993년에야 비로소 우주 중에서 가장 바른 공법-파룬궁을 접할 수 있었다. 93년 5월 파룬궁 창시인 리훙쯔대사께서 궈이저우성 기공협회의 요청에 의해 세상의 온갖 어려움을 다 겪으시며 궈이양에 오셔서 설법하시고 공을 전하셨다. 나와 남동생은 궈이저우 기공신문사에 책을 가지러 갔다가 사부님께서 궈이양에서 보고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 둘은 참가를 신청하여 궈이저우성에서 최초로 학습반 참가를 신청한 수련생이 되었다. 제 1기 학습반에는 2-3백 명이 참가했는데 당시 인상이 가장 깊었던 것은 바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연공인은 심성을 중히 여겨야 하고 덕을 중히 여겨야 하며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해도 대꾸하지 않음’을 실천 해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많은 종류의 기공을 접촉하면서 파룬궁은 내가 본 가운데 가장 바른 공법이었다.

사부님께서는 강의하실 때 원고가 없었고 언어는 매우 깔끔했으며 흐르는 물처럼 끊임없이 말씀하셨다. 대법의 진리는 강대한 감화력이 있어 단번에 수련생들의 마음을 크게 감동시켰다. 강의 중에서 사부님께서는 수련생들의 접수능력에 따라 수시로 상응한 전수방식을 바꾸고 취하시면서 통속적이고 알기 쉬운 언어로 박대 정심한 법리를 말씀하셨다. 93년 8월 15일 나는 또 사부님께서 궈이저우에서 개최하신 제 3기 파룬궁학습반에 참가하였고, 94년에는 칭따오(成都)에 가서 사부님께서 개최하시는 학습반에 참가하였다.

내 기억에는 사부님께서는 정직하시고 생활이 간소하며 호텔에 투숙하지 않으시고 부근의 작은 여관에 묵으셨다. 칭따오에서 학습반을 열 때, 사부님의 숙소는 학습반 개최장소와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으나 언제나 사부님께서는 강의장까지 걸어 다니시는 것을 보았다. 사부님은 격식을 따지고 허세를 부리는 기타 기공사들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사부님께서는 음식에 대해서도 흠잡지 않으셨고 국수든 쌀밥이든 뭘 만나면 뭘 드셨고, 늘 찐빵 두 개를 사서 걸으시면서 드셨는데 그것이 곧 한끼 식사였다. 사부님께서는 낭비하지 않으셨으며 간혹 수련생들과 함께 식사 하실 때, 어떤 수련생들은 사부님께서 수련생이 먹고 남긴 밥마저 버리지 않고 다 드시는 것을 보았다. 사부님께서는 식사가 끝나신 후 남은 고추 간장 국물마저도 다 남기지 않고 마셨다. 사부님께서는 언제나 아주 낡은 흰색 셔츠를 입고 계셨다. 셔츠는 항상 아주 깨끗했는데 사부님 전신에서 언제나 바른 기를 발산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사부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말로 전하고 몸으로 가르치셨으며, 언제나 겸손하고 친절하여 가까이 하기가 쉬웠고, 곳곳마다 모두 남을 위해 생각하셨다. 매번 수련생들이 사부님을 배웅해 드리려고 생각했지만 사부님께서는 모두 친절하고 상냥하게 “괜찮습니다, 돌아가세요.”라고 말씀하셨다. 몇 기 학습반에 참가한 후, 나의 마음속은 흥분과 희열, 격동으로 가득 찼는데 일종의 울고 싶으나 울 수 없는 그런 느낌이었다. 정말로 인류의 언어로서는 형용하기 어려운 느낌이다. 그것은 아득히 멀며, 깊고 깊은 기억에서부터 온 것 이었는데 일종의 생명의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오랜 이별 끝에 다시 만난 그런 느낌이었다. 사부님은 절대로 일반 기공사가 아니었는데 어렴풋한 가운데 나는 사부님께서 무엇을 하시러 오셨는지를 알았으며 또 언어로서는 표현 할 수 없었다. 이때부터 나는 결국 생명의 의의와 무엇이 반본귀진인가를 알게 되었다. 마음속에서 받은 진감으로부터 생명의 돛을 바로 잡고 명리에 대해 담담해졌다.

수련생 병 – 들것에 들려 학습반에 들어온 나는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수련생 병은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파룬궁을 수련하기 전, 저는 몇 십년간 병마에 시달려 온 환자였습니다. 매년 가을이 되면 솜모자, 솜옷, 솜바지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장기간 침대에 누워 있었고 온 가족의 특수보호대상이며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사부님께서 친히 궈이양에 오셔서 불법을 전하신다는 말을 듣고 저는 어떻게 해서든 막론하고 가서 들으려고 하였습니다. “아침에 도를 들었다면 저녁에 죽어도 원이 없다”고한 이말은 당시 죽음과 거리가 멀지 않았던 저의 유일한 염원이었습니다. 나는 가족에 의해 들려 사부님께서 공을 전하시는 장에 들어왔습니다. 사부님께서 수련생들에게 신체를 청리해 주실 때, 나는 즉시 커다란 기류의 음량한 기가 발밑으로부터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지면서 순식간에 온 몸이 따뜻해졌습니다. 청리가 끝난 후 사부님께서는 느슨히 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일어서서 앞으로 걸으라고 하셨습니다! 처음에 나의 가슴은 두근두근 거리며 쿵쿵 뛰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하시면서 “괜찮을 겁니다, 걸으세요!”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뜻밖에 움직임에 자연스럽게 걷기 시작했습니다. 온 회장에서 터져 나오는 격려의 박수소리를 듣는 저의 얼굴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당시 저의 천목까지 열렸는데 다른 공간의 매우 많은 신기한 풍경을 보았습니다. 이때부터 우리 온 가족 3대는 절대적으로 사부님을 믿고 법을 믿게 되었습니다. 풍운이 어떻게 변할지라도 악인이 어떻게 미칠 지경으로 탄압을 할지라도 모두 우리의 대법을 수련하는 굳건한 마음을 흔들리게 할 수 없었습니다.

수련생 정 – 차바퀴 한 개가 없어졌어도 무사히 도착

사부님께서 궈이저우에서 법을 전하시던 매 한기 학습반마다 모두 아주 많은 신기한 일들이 발생했다. 제 3기 학습반 기간 중 어느 날, 쭌이(遵義)에서 학습반에 참가하려는 사람들을 가득 태운 차가 사부님의 학습반 강의시간에 맞춰 달려오고 있었다. 시간이 촉박하고 길을 다그쳐야 했기에 운행도중 차바퀴 4개 중 한 개가 날아갔지만 어느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다. 학습반 현장에 도착해서 수련생들이 차에서 내린 후에야 어찌된 영문인지 차에 바퀴 세 개 만 달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차에 앉았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고 금방 모두 사부님께서 수련생을 보호해주셨다는 것을 알았다! 수련생들은 흥분과 사부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 사부님의 지극한 가호 하에 위험에서 평온하게 벗어난 일들이 파룬궁수련생들 가운데서 끊임없이 나타났다!

수련생 진 – 파룬궁은 우리의 운명을 완전히 개변시켰다.

93년 나는 운 좋게 사부님께서 궈이양에서 개최하신 제 3기 학습반과 94년 청두에서 열린 학습반에 참가했다. 궈이양 제 3기 학습반은 모두 10일이었는데 약 1,400여명의 사람들이 참가했다. 갓 학습반에 참가했을 때는 여러 사람들이 모두 앞자리에 있는 좌석을 다투어 차지하였는데 어떤 사람은 혼자서 다른 지인을 대신해 여러 개의 좌석을 맡아 차지해놓았다. 사부님의 설법을 경청함에 따라, 사부님께서 내용이 깊고 오묘하지만 간결하고 알기 쉽게 설명해주시는 박대정심한 우주의 진리는 수련생들의 마음을 신속히 열었다. 강의를 듣는 자로 하여금 마음속으로부터 강렬한 진감을 생기게 하였고 매 개인의 세계관마다 모두 거대한 변화가 발생하게 하였다. 수련생들은 차츰차츰 사람이 사는 도리를 알게 되었는바, 뒤의 며칠 강의에는 더 이상 앞 다투어 좌석을 차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가족 중에는 B형간염 환자가 있었는데 형제자매 5명중, 나는 넷째였다. 형과 누나 세 명은 모두 35세 이상을 살지 못했다. 나와 남동생도 이 병이 있었는데 동생 역시 병원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었다. 뜻밖에도 파룬궁이 우리의 운명을 철저히 개변시킬 줄을 몰랐다. 매 기 학습반에서 사부님께서는 모든 수련생들의 신체를 청리해주셨다. 학습반에서 사부님께서는 여러 사람들더러 일어서서 자신 혹은 친인의 몸에서 병이 가장 중한 곳을 생각하라고 하시면서 사부님께서 하나, 둘, 셋을 외치시면 사람들에게 발을 구르라고 하셨는데 병은 그렇게 빠져나갔다. 몇 차례 사부님의 학습반에 참가하면서 나 자신과 친인의 각종 질병을 생각하였는데 우리 일가족은 수차례 사부님께서 해주신 신체청리를 받았다.

학습반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한 쌍의 큰 손이 나의 간장 부위로부터 하나의 돌멩이 같은 물건을 꺼내는 느낌이 있었다. 이때부터 나의 B형간염은 사라졌으며 파룬궁을 수련한 후 과거 나의 몸에 있었던 각종 질병들이 모두 사라졌다. 나는 사부님께서 끊임없이 나에게 신체를 청리해주셨음을 알았다. 93년 학습반에 참가한 후부터 나는 진정으로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으로 되었다.

93년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는 약을 먹은 적이 없고 병원카드는 종래로 써본 적이 없으며 국가와 개인을 위해 커다란 의약비용을 절감하였다. 병원으로부터 이미 수차례 사형선고를 받았던 남동생도 기적과 같이 살아남았다. 의사는 그에게 “당신의 명은 정말 길기도 하네요, 다른 사람이라면 당신 같은 상황에 이미 벌써 죽은 지 꽤 되었을 텐데 당신은 도리어 여태껏 살아있다니 말입니다.”고 말했다.

파룬궁은 많은 수련자로 하여금 도덕이 승화되게 하고 신체가 건강해지게 하였는바 국가와 국민에 대해 백가지 좋은 점이 있어도 한 가지 나쁜 점도 없었다. 하지만 99년부터 중공은 파룬궁을 탄압하기 시작하였고 수련생을 박해하였다. 나도 불법 노동교양을 당하였고, 세뇌반에 불법 감금당하였다. 이 한차례 사악한 탄압 앞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도 나의 가족은 시종일관 모두 나를 지지하고 나를 보호했으며 대법서적과 자료를 보호했다. 그들은 용감히 나와 함께 이 한차례 역사상에서 전대미문의 가장 사악하고 가장 피비린 내나는 박해와 꿋꿋이 맞섰다.

수련생 사 – 두 차례 동방건강박람회에서 사부님의 기적을 목격하다

1992년과 1993년 베이징 ‘동방건강박람회’에서 나는 운 좋게 사부님께서 많은 각종 불치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신체를 청리해주시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였다. 사부님께서 내보내신 공은 아주 강했고 효과가 빨랐는데 얼마나 엄중한 병일지라도 막론하고,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앓고 있던 병일지를 막론하고, 의사조차도 다 속수무책인 병일지라도, 심지어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일지라도 모두 사부님의 손이 닿기만 하면 병이 곧 제거되었고,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많은 사람들이 장기간 치료해도 낫지 않던 질병들이 순식간에 형체를 감췄다. 사부님께 병 치료를 청하러 온 많은 사람들은 다수가 불치병과 중병환자였는데, 다년간 병원치료를 받아도 효과를 보지 못하고 병에 시달릴 대로 시달려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못한 어려운 날을 보내고 있었으며 그러다보니 환자와 가족 모두가 겪는 고통이 말로 헤아릴 수 없었다. 박람회 기간, 나는 사부님께 병 치료를 받으러 오는 많은 사람들이 모두가 들것에 들려오거나 휠체어에 앉아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온 것을 직접 보았다. 어떤 이는 사람에게 업혀서, 어떤 이는 부축을 받으면서 회장에 왔다. 하지만 사부님께서 손으로 몇 번 쓸어주시거나 발을 몇 번 구르시니 환자는 기적같이 나았다. 어떤 사람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땅에 내려 걸을 수 있었는데 자기 스스로 걸어서 회장을 나갔다. 한 할머니는 가족에 의해 들려 왔는데 사부님께서는 할머니에게 일어나라고 하신 후 그녀에게 손을 사부님의 손바닥에 놓으라고 하시고는 사부님께서 뒤로 물러서신 후 앞으로 걸으라고 하셨다. 할머니가 “나는 이미 8년이나 반신불수로 있었는데 어떻게 걸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하자, 사부님께서는 그냥 걸으라고 하셨다. 결과 할머니는 정말로 걷기 시작했다. 게다가 걸으면 걸을수록 빨라졌고 나중에는 온 회장을 두 바퀴나 뛰었다. 현장에 있던 사람은 그 누구나 할 것 없이 격동되지 않은 사람이 없었는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이 노년수련생도 당시 그 자리에서 울었다. 할머니를 배웅해 함께 온 가족들도 더없이 격동되어 모두가 사부님 앞에 꿇어 앉아 사부님을 산부처님이라고 불렀다.

93년 건강박람회 기간, 사부님께서는 또 파룬궁에 관한 학술보고를 하셨다. 원래 대회조직위는 두 차례의 보고회를 배치했는데 보고를 듣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바람에 두 차례로서는 도저히 여러 사람들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어 임시로 또 한 차례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3차례 보고회는 매 회 초만원을 이루었는데 심지어 회장안의 보행통로, 난간 위까지 모두 사람이 서고 앉고 하였다.

사람들은 사부님의 보고회를 듣고 나서 온 회장이 떠날 듯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쳤으며 박수소리는 오래 동안 그치지 않았다. 모두 이구동성으로 좋다고 말하였고, 모두 너무나 많은 이익을 얻었고 정말로 병을 치료하고 몸이 건강해졌는데 기적과 같은 효과가 있다고 했다. 당시 장기간 베이다이허(北戴河) 요양원에서 요양해오던 몸에 불치병을 앓고 있던 노간부가 사부님의 보고를 다 들은 후, 기쁘게 연단에 올라가서 외치고 뛰면서 “나의 병은 다 나았어요! 나의 병은 다 나았어요!”를 연속 몇 번이나 외쳤다. 그는 사부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신데 대해 감사의 뜻을 올렸다. 온 회장의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며 그를 위해 박수를 쳐주었고 저마다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본 기적으로부터 깊은 진감을 받았다.

사부님께서는 보고회의 입장료 수입을 ‘견의용위(見義勇為)기금회(역주-용감한 일을 하다가 상해를 입은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설립된 기금)’에 기증하셨다. 단지 이 한 건의 내가 직접 겪은 일만으로도 사부님께서는 고상한 인격과 박대한 흉금 및 무사하게 대가를 지불하시는 분이란 것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었는데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언어를 다 쓴 다해도 모두 형용해낼 수 없다. 장씨 깡패집단이 각종 모함과 요언날조, 비방의 수단을 쓴다 해도 모두 진실을 덮어 감추고 왜곡할 수는 없다. 오직 사람들이 진상을 알게 되기만 하면 거짓말은 곧 스스로 무너져버리게 된다! 이 역시 장씨 깡패집단이 왜 이렇듯 사람들이 진상을 아는 것을 두려워하는 가를 설명할 수 있는 대목이다.

각지 학습반에서 나타난 이와 같이 신기한 예는 한 두건에 그치지 않았고 그야말로 부지기수였다. 거의 대부분 파룬궁수련생마다 그 뒤에는 모두 하나의 신기하고 사람을 감동시키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 역시 파룬궁이 왜 몇 년이라는 이처럼 짧은 시간 안에 사람의 마음에 깊이 뿌리박고 중국과 세계에서 널리 전파되어 수련하는 사람의 수가 1억에 달하게 된 원인이기도 하다. 모든 심신에서 이득을 얻은 수련생 모두가 증인이다. 중공과 장씨 깡패집단이 어떻게 흑백을 전도하여 파룬궁을 모함할지라도 파룬궁의 광휘는 영원이 악독한 거짓에 의해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1992년 5월 13일부터 1994년 12월 21일까지 사부님께서는 각지 관방 기공과학연구회의 요청에 의해 중국각지에서 총 54기의 파룬궁전수반을 개최하셨는데, 매 기마다 기간은 약 10일간이었으며 수만 명의 사람들이 학습반에 참가하였다. 94년 12월 21일부터 28일까지 광저우(廣州)에서 제 5기 학습반을 개최하셨는데 이것은 사부님께서 중국대륙에서 개최하신 마지막 파룬궁전수반이었다. 이 한차례 학습반은 이전에 없던 성황을 이루었고 5, 6천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참가했다. 이 학습반을 마친 후 사부님께서는 홍콩에 가셨고 국내에서의 설법을 결속 짓고 국외에서의 설법과 공 전수를 시작하셨다.

문장 발표: 2010년 7월 25일

문장 분류: 수련마당문장 위치: http://big5.minghui.org/mh/articles/2010/7/25/227302.html
영문위치: http://www.clearwisdom.net/html/articles/2010/8/1/11898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