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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하지 말고 이지적이어야 한다

글/ 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 금방 7월 23일 밍후이왕에 오른 동수의 문장 《이지와 두려운 마음의 구별》을 보고 깊은 감촉을 받았다. 자신은 절대로 수련생이 일컫는 “법리가 더 분명한 동수”가 아니라 자신의 층차에 서서 자신의 경력과 결합하여 이지와 두려운 마음에 대해 옅은 이해를 말해 보고자 할 따름이다.

내가 여기건대, 이지와 두려운 마음을 비겨보면 전자는 신의 경지이고 후자는 사람의 표현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 하셨다. “생사를 내려놓으면 바로 신이고 생사를 내려놓지 못하면 바로 인간이다. 물론 당신이 생사를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은 정말로 가서 죽으라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고 수련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을 제거하는 것이다.”(《오스트레일리아법회설법》)이지란 과시심, 사심과 각종 후천적 관념을 내려놓은 후 표현되어 나오는 지혜와 자비의 표현으로써, 능히 법에 서서 법을 실증할 수 있는 청성한 표현이다. “이런 청성(淸醒)은 지혜이며 일반인의 이른바 총명(聰明)과는 다르다.” 《정진요지》()그러나 두려운 마음은 사를 위한 표현이고, 사람마음과 정을 지닌 것으로써, 자신이 상해를 받을까 두려워하는 자아 보호 심리이다. 가령 두려운 마음을 덮어 감추기 위하여 이지를 말한다 해도 이런 이지는 다만 ‘속인식의 안전주의’ 와 일반인의 이른바 “총명”일 따름이다. 나 자신을 놓고 말하더라도 진상을 알리는 중에 자신이 정진할 때 표현되는 이지와 태만할 때에 표현되는 두려운 마음을 늘 볼 수 있는데 그건 완전히 다른 것이다.

나는 학생인데, 자신의 박사 과정생 친구에게 얼굴을 맞대고 진상을 알려 줄 때 두 가지 상태가 표현된다. 많은 때 자신의 법 공부가 보장되면 정념이 아주 족한데 도달할 수 있고, 확실히 자비한 상태를 표현해 낼 수 있다. 이런 때엔 정말로 중생이 모두 고생스러워 보이고, 세속에 묻혀 진상을 모르는 중생을 보면서 마음이 불타는 듯이 초조해진다. 사부님께서 인연 있는 사람을 내 앞에 데려다 줄 때 나는 그들을 자기 육친으로 여기고 모든 방법을 다하여 기회를 만들어 그들에게 진상을 알려준다. 이때의 기점은 완전히 사람을 구하기 위한 데 있고, 타인을 위한 것이므로 전혀 사람마음으로 자신의 안전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정념으로 사부님께 제자가 이렇게 바른 일을 하는데 구세력이 교란하지 못하게 제자를 가지해 달라고 청한다. 발하는 모든 염두는 모두 이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인데 이때를 이지적이라고 할 수 있고, 대법제자가 법을 실증한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이런 상태에서 진상을 알리면 흔히 효과는 모두 비교적 훌륭한 것이다.

어떤 때는 법 공부가 보장되지 못해 정념이 족하지 못한데 그러면 두려운 마음과 각종 관념이 생긴다. 표현되어 나오는 것은 중생을 만나면 늘 선택성 있게 가서 말한다. 자신과 관계 좋은 사람, 비교적 믿음직하다고 여겨지는 사람, 얼굴이 착해 보이는 사람, 사람이 성실하고 후더운 사람이면 가서 말해 준다. 그러나 자신이 그다지 잘 알지 못하는 사람, 얼굴이 악한 사람, 상대적으로 비교적 자사적이거나 자신의 상급인 사람, 선생님이면 말하기 싫어하고 그러면서 자신에게 이유와 구실을 찾는다. “반드시 이지적이어야 하고 안전에 주의해야 하며, 이 한 사람에게 말하다가 사악에게 박해당해 앞으로 더는 법 실증 일을 하지 못해서는 안 된다.” 이때는 스스로 이지적이라고 여기지만 기실은 두려운 마음이며, 사람의 자사적인 생각으로써 출발점은 완전히 사를 위한 것이고, 자비롭지 못한 것이다. 자신이 박해 당할까 두려워하지만 이 사람이 구원되지 못한다는데 대해서는 걱정도 하지 않는다. 정념이 부족하고 두려운 마음이 엄중한 때이면 상유심생이라 이 사람에겐 말해 줄 수 없고 저 사람은 구할 수 없으며, 심지어 초목이 다 병사로 보인다. 박해 앞에서 자아를 내려놓을 수 있고, 악경을 직면하여 태연하게 진상을 알리면서 어떤 하나의 중생이라도 모두 구도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일사일념마저 모두 남을 위하는 동수와 비겨볼 때, 자신은 그야말로 얼굴 둘 곳을 찾지 못할 지경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불(佛) ․ 신(神), 그는 중생을 위하여, 우주의 이익을 위하여 그의 생명을 포기할 수 있으며 무엇이든 모두 포기할 수 있으며 아울러 태연자약한 것이다. 그럼 만약 당신을 그 위치에 갖다 놓는다면 당신이 그 한 점에 도달할 수 있는가? 도달할 수 없다. 물론 내가 말한다면 그 불(佛) ․ 도(道)는 정말로 이런 일에 부딪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지가 있다. 반드시 진정하게 자신을 개변해야만 비로소 이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미국서부법회에서의 설법》)

정법시기 우주의 제일 칭호를 가진 대법제자는 마땅히 이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사부님의 대법제자로 될 자격이 있겠는가? 두려운 마음은 사람의 정이고, 사람으로부터 신으로 가는 고비이다. 오직 법 공부를 중시하고 발정념을 중시해야만 비로소 두려운 마음을 닦아 버릴 수 있고, 비로소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무사무아, 선타후아의 정각으로 될 수 있다.

문장발표 : 2010년 7월 26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minghui.org/mh/articles/2010/7/26/22750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