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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모집선정】 사부님의 광주 전수반에 세 번 참가한 경험

글/ 광주 대법제자

【밍후이왕 2010년 5월 13일】사부님께서는 다섯 번 광주에서 설법하셨는데 광주시는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나는 사부님의 전수반에 세 번 참가하여 직접 사부님의 설법을 들었다. 사부님의 자비하신 용모, 간곡한 타이름을 영원히 마음속에 새기고 있다. 하늘을 뒤덮는 사악의 박해 속에서 대법에 대한 올바른 믿음은 동요한 적 없다.

광주 제 3기반에 참가

1994년 1월 6일, 광주시 노동조합총연합회홀에서 제3기 파룬궁 전수반을 개최하여 나는 참가했다. 나는 예전에 기공을 연마한 적이 있고, 여러 번 기공강좌를 들었지만, 기공강좌가 모두 거기서 거기라고 여겼다.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비교적 흐릿했고 기공사들도 확실히 몰랐기에, 나는 연마하고 싶지 않았고, 대신 기공무술을 연마했다.

사부님께서 제 3기 전수반을 개최하실 때, 언니와 친구들이 나에게 권했다. 한 노 수련생은 전수반에 참가하여 천목이 열려 파룬이 도는 것을 보았다고 격동되어 말했다. 연분이 있어서인지 나는 그들에게 “나는 이미 기공잡지에서 사부님의 사진과 소개를 보고 참가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전수반이 시작되던 첫 날, 자전거를 타고 시 노동조합총연합회홀에 갔는데 적지 않는 수련생들이 홀에 들어가고 있었다. 홀의 입구에서 북경연구회 동수들이 『파룬궁』서적과 사부님의 법상을 팔고 있었는데, 이때 사부님께서 걸어오셨다. 나는 처음으로 사부님을 뵈었는데, 매우 놀랍고 의아했다! 당시 나는 27세였지만 사부님은 나보다 더 젊어 보이시고, 아주 자상했다. 사부님의 공이 아주 높게 느껴졌고, 마음속으로 강렬한 감수가 있었는데, 사부님을 따르겠다는 것이었다.

사부님께서는 연단에 앉으시어 강의를 시작했다. 사부님의 나이가 마치 40여세 남짓한 것처럼 변했다. 사부님께서는 설법하실 때 강의 원고가 없었다. 수련의 가장 낮은 기공 층차의 얕은 데서부터 고층차의 법리까지 이야기 하셨으며, 수련은 바로 사람의 심성을 닦는 것이라고 명확히 말씀하셨다. 당시 나는 사부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아주 재미있었고, 편안했다.

설법을 들을 때 머리 위에 큰 풍차 같은 바퀴가 빠르게 돌았고, 윙윙 소리가 났다. 손으로 머리를 만져보았지만 바퀴를 만질 수 없었다. 이때 또 두 개의 선풍기가 머리위에서 발끝까지 돌았는데, 손바닥에서는 두 개의 선풍기가 돌았다. 아랫배에는 사발만한 것이 고르게 돌았는데 당시 파룬이라는 것을 몰랐다. 옆에 앉은 사람이 나에게 파룬을 보았냐고 물었다. 나는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녀는 나에게 사부님의 머리위에서 거대한 빛의 기둥을 보았고, 도처에서 파룬을 보았다고 했다.

첫 강의가 끝날 때, 나는 내가 모두 빈 느낌이었고, 세간의 집착, 정, 명, 이익, 심지어 강의가 끝나고 수련생들이 말하는 소리마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고 모든 공간에 마치 나 혼자 있는 것 같았으며, 일체가 나와 아주 멀어진 것 같았다. 나는 오래 동안 서 있었다. 그 때, 나는 ‘왜 인간 세상에 왔고,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고 있으며, 어둠속에서 무엇을 기다렸는가?’ 이러한 어릴 때부터 생각했던 많은 염두가 용솟음쳐 나오더니, 일순간 모두 없어졌다. 사상 속에 마치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것 같았고 일체가 모두 빈 것 같았다.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는데 여태껏 이렇게 가벼워 본 적이 없었다. 두 다리가 자동으로 앞으로 갔고, 마치 뒤에서 어떤 힘이 밀고 있는 것 같았다. 신체에는 강대한 에너지 기제가 대주천을 따라 움직였고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밤을 새서 일해도 파룬이 돌고 있는 느낌이었고,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으며, 이튿날 사부님의 설법을 들었다. 내내 전수반을 이렇게 참가했는데, 이 공이 너무나 신기하다고 느껴졌다.

설법이 끝난 후, 호기심이 있는 수련생이 무대 뒤로 사부님을 따라 갔다. 잠시 후 되돌아와서 내 옆에 있는 수련생에게 “이상하다. 나는 계속 사부님의 뒤를 따랐는데 무대 뒤에 들어서자 보이지 않았다. 정말 신기하다.”고 했다.

홀 정문을 나설 때 사부님께서 『파룬궁』책에 사인하고 계셨다. 많은 수련생들이 사부님을 에워싸고 있었고, 나도 책을 가지고 갔다. 이 때 한 수련생이 말하기를 “당신이 보라. 이 사람들은 정말 집착한다. 사부님을 에워싸고 사인받다니.” 나는 이 말을 듣고 ‘옳다! 이렇게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사인 받으려는 염두를 없앴다.

전수반에서 돌아와 직장에 출근할 때, 깡패가 몽둥이로 갑자기 나를 한 때 때렸다. 나는 얼굴에 웃음을 띠고, 맞받아치지 않았다. 사부님께서 ‘우리는 연공인(煉功人)으로서,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해도 대꾸하지 않으며, 높은 표준으로 자신에게 요구해야 한다(《전법륜》)’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사이의 모순은 모두 업력의 윤보라는 것을 알았다. 직장 동료들은 이것을 보고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예전에는 싸우면 주먹질 하더니 지금은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다니?

사부님의 제 3기 전수반에 참가하고 나는 수련을 알게 되었고, 최소한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해도 대꾸하지 않는 좋은 사람이 되려고 했다.

광주 제 4기 반에 참가

1994년 7월, 사부님께서 광주에서 제 4기 전수반을 개최하셨다. 사부님은 광주에 오셔서 화왠호텔에 숙박하셨다. 내가 한 수련생과 대법자료를 호텔로 운반했을 때는 이미 점심시간이 되어 모두들 식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북경연구회 사람들에게 사부님께서 식당에서 식사하시도록 하라고 말했다. 전화 통화를 했는데 사부님께서는 내려오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우리를 연구회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게 하라고 하셨다. 우리가 반찬을 담았을 때, 사부님께서 오셨다. 우리는 모두 기뻐서 어쩔 줄 몰랐고, 나는 사부님의 곁에 앉았다. 나는 밥 한 그릇을 사부님께 드렸다. 사부님께서는 인사를 나누신 후, 우리와 함께 식사하셨고, 먼저 식사하신 후 가셨다.

광주 제 4기 전수반은 군분구 홀에서 개최되었는데 천여 명이 참가했다. 나는 로비에서 『중국 파룬궁』등의 자료를 팔았다. 사부님의 이 번 설법은 감수가 아주 깊었다. 제 3기 전수반에서 사부님은 기공의 형식으로 설법하셨고, 많은 불교의 이야기를 하셨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시작부터 진정으로 높은 층차로 사람을 이끈다고 하셨고, 사람을 구도하려 왔다고 하셨으며, 체계적으로 설법하셨다.

제 4기 반은 10회의 강의로 끝났다. 수련생들이 아쉬워하면서 홀을 떠날 때, 협조인은 십여 명의 동수들을 무대 아래에 불렀다. 사부님은 무대 위에서 내려오셔서 광주 보도원이 정식으로 성립되었다고 선포하셨고 우리에게 보도사업을 잘하라고 격려하셨다.

저녁에 광주 동수들이 기차역 부근의 촨웨(川粤)식당에 사부님을 청해 식사한 후, 사부님이 연구회 사람들과 함께 기차에 오르기를 바랬다. 우리는 역에서 사부님의 옆에 서서 아주 행복했다. 무슨 말을 할지 생각조차 할 수 없이 그냥 희열감을 느꼈고, 기쁘기만 했다. 사부님은 기차에 오르신 후, 창문을 사이에 두고 선채로 우리에게 손을 흔드셨다.

광주 제 5기반에 참가

광주 제5기 전수반은 광동성 기공협회에서 주최했는데, 그들은 초청과 장소 임대를 맡았다. 당시 파룬궁의 발전이 아주 빨랐고 장기간 약을 복용하던 많은 사람들이 공을 배운 후 신체가 건강해지고, 사람마다 좋은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성 기공협회에서는 파룬궁 보도원을 그들에게 귀속시키려 했다.

사부님은 임시로 광주 제5기 전수반을 주최하셨다. 전국의 많은 수련생들이 광주로 향했고, 광주 보도원은 몇 개의 팀을 조직하여 표를 파는 사람들의 여러 가지 일을 거들었다. 기차역 부근의 초대소에는 수련생들로 초만원이었다. 사부님께서 광주에 오신 이튿날 초대소에서 협조인들을 접견하셨다. 이것은 대륙에서 마지막 전수반 이었기에, 표를 사지 못한 수련생들도 많이 왔다. 운동장에 5천 명이 넘게 가득 앉았고, 많은 수련생들이 밖에서 들어올 수 없었다. 어떻게 하는가? 협조인은 체육관 측과 협의하여 무술관을 빌렸고, 사부님의 설법을 생방송 하도록 했다.

1994년 12월 21일, 전수반이 시작되었다. 각지 보도원의 수련생들이 모범을 보여 귀중한 좌석을 전수반에 참가한 적이 없는 수련생에게 주었고, 자기들은 무술관에서 설법 생방송을 보았다. 사부님께서는 이 상황을 아시고, 특별히 밖에 나와서 수련생들을 만나셨다.

전수반에서 두 번째 줄의 네 명의 젊은이는 다른 공간의 부체가 조정하여 각양각종의 이상한 표정으로 울고, 부체에 의해 끌려 다니며 시달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교란할까봐 두려웠다. 사부님께서 들어오실 때 말씀드렸더니, 웃으시며 “이미 알고 있다” 고 하시면서 큰 걸음으로 무대를 향했다. 나는 안심할 수 없어서 연구회의 수련생들을 불렀다. 그들을 보자 그중 한 젊은이가 우리에게 손을 저었다. 후에 현지의 협조인이 이 일을 알고, 특별히 노 공안수련생을 그들 옆 좌석에 배치했다. 사부님께서 설법하신 세 번째 날 이 젊은이들의 부체가 청리되었고, 그들은 정상으로 회복되어 다른 수련생들처럼 조용히 앉아서 설법을 들었다. 이것은 사부님께서 수련생을 위해 부체를 청리해 주신 것을 내가 직접 목격한 것이다.

어느 날 오후, 현지의 책임을 맡은 수련생이 몇몇 협조인들을 데리고 사부님께서 숙박하시는 호천호텔에 가서 사부님께 아침 차를 대접했다. 이것은 광주사람들의 습관이다. 수련생들이 가보니, 사부님께서는 이미 라면을 준비했기에 내려오지 않겠다고 하시며 우리에게 올라오라고 하셨다.

사부님은 마지막 강의에서 물음에 답을 하신 후, 전국의 수련생들은 사부님께 아름다운 생화와 금색 깃발을 드렸는데 감동스러울 만큼 장관이었다. 박수소리는 우레와 같이 울렸고 사부님은 대수인을 하셨다. 수련생들을 떠나기 아쉬워 그 자리에 서서 떠나려 하지 않으셨다. 멀리 가시는 사부님의 뒷모습을 보고 수련생들은 눈앞이 흐릿해졌다.

사부님은 수련생들이 빼곡히 에워싼 곳을 벗어나 휴게실로 들어가셨다. 사부님은 높고 커보였고, 자비스러웠으며 사람들과 다른 모습이었다. 보초를 서던 무장경찰도 놀라워했고, 광주 군구의 고관들도 모두 배웅하면서 큰 인물일 것이라고 했다. 비행장 휴게실에서 탑승권을 가져온 수련생은 사부님을 보고 급히 달려가 사부님과 사진을 찍었는데, 사진기 후레쉬가 몇 분이나 번쩍였고, 결국 사부님께서 찍지 말라고 해서야 멎었다. 나와 다른 한 수련생은 사부님께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먼 곳에 서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 앞에 걸어오시더니 “수고 했습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사부님의 이 말씀을 듣고 나는 목이 메어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라 가만히 서서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었고, 그저 사부님께서 탑승하는 모습만 바라보았는데, 사부님께서는 머리를 돌려 우리를 향해 계속 손을 흔드셨다.

비바람 속에서 16년 간 나는 수련을 잘 모르고 즐겁기만 하던 데서, 부단한 법 공부를 통해 승화되어 이성으로 대법을 인식하고 점차 수련의 내포를 알게 되었다. 사부님께서 광주 전수반에서 설법하시던 나날을 생각하면 뜨거운 눈물이 눈에 가득하고, 사부님의 은혜를 표현할 수 없으며, 진귀한 기억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정진하는 것만이 사부님의 자비로운 구도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장발표: 2010년 5월 13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minghui.org/mh/articles/2010/5/13/22315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