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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님과 대법을 칭송하고 ‘파룬따파하오’ 경념하다

글/ 대륙대법제자

【밍후이왕 2010년 2월 18일】 나는 일찍이 사악에게 납치당해 노교소에 갔었고, 수많은 굽은 길을 걸었으며, 자신이 가정, 혼인 문제에서 구세력에게 틈 탈 기회를 주지 않았는가에 대해 줄곧 사고하였다. 최근에 자신의 정에 대한 태도가 자신이 여기는 것처럼 그렇게 담담하게 내려놓지는 못했으며, 아주 깊이 숨어있는 정에 이끌리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남편은 이혼하는 것으로 나를 수련하지 못하게 여러 차례 협박하였고 부친은 혈육의 정을 끊겠다는 것으로 여러 차례 협박을 해왔다. 당시 나는 자신의 태도가 아주 확고하다고 여기면서 나는 어쨌든 수련할 것이므로 남편이든 부친이든 나를 가로막지 말라고 하였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게 되었다. 왜 나는 두 사람이 정으로써 나를 협박하고 대법과 혈육의 정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게 하는 일에 봉착하게 되었는가?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대법제자는 나의 제자이며 누구도 관리할 자격이 없다.”(《각지 설법6》〈아태지역 수련생회의 설법〉), “사람은 이 법을 고험할 자격이 없고, 神도 자격이 없으며, 누가 움직인다면 곧 누구의 죄다.”(《도항》〈북미 대호구 법회 설법〉)。내가 이해한 바로는, 구세력은 속인을 조종하여 나를 가로막으려 하지만 이는 사부님께서 승인하지 않는 것인데 그것들이 감히 이렇게 하고 감히 손을 뻗쳐 대법제자를 관리하려 하는 것은 나의 집착이 그들을 종용하여 그것들이 나를 관리하도록 바란 것이 아닌가? 안으로 찾는 것을 통하여 나는 혼인에 대한 자신의 관념은 변이된 관념으로서 사(私)를 기점으로 한 것이었으므로 가족에 대한 진정한 선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대기원 회의에서의 설법》을 배운 후, 이 두 사람의 혈육에 대한 진상이 줄곧 성공하지 못한 원인은 내가 그들을 사당에 미혹된 기타 세인들처럼 대하지 못하고, 그들에 대한 선념이 보통 세인에 비해 약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이 일반 세인들과 크게 다른 점이라면 그들이 내 가정의 한 부분이라는 데에 있다, 그렇다면 분명 나를 교란하는 정에 대한 관념을 홀시한 것이며, 분명 내가 가정을 감정의 산물로 여기고 그것을 법을 위해 온 일종의 사회문화적 전통으로 보지 못했으며, 그것을 신전문화의 일부분으로 보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나는 줄곧 가정이란, 두 사람이 감정이 있게 된 후 건립되는 것으로서 부부쌍방의 애정에 의거하고, 혈연· 혈육의 정에 의거하여 유지되는 것이라고 여겨왔다. 지금 나는 이것이 착오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첫째, 속인은 누구를 좋아하고 누구를 좋아하지 않으며, 그가 나를 좋게 대하면 나는 곧 그를 좋아하고 그가 나를 나쁘게 대하면 나는 곧 그를 싫어한다. 수련 후 나는 집사람(가족)이 나에게 불쾌함을 조성해 주면 내가 그들에게 빚을 진 것이라고 여기고 속으로 내가 수련을 잘한 다음 업력을 갚으면 그들은 나를 좋게 대해줄 것이라고 줄곧 여겨왔는데 실은 기점이 여전히 ‘사’였고, 그들이 나에 대해 좋은가 나쁜가를 나의 인생의 목적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한 점에서 말한다면 나는 여전히 속인이었고, 수련이 나의 감정적 수요를 만족시켜줄 것을 바랐던 것이다. 아주 깊이 숨어 있는 이 마음은 자신이 잘하는 것을 통해 집사람들이 나를 칭찬하고 남이 나를 칭찬하기를 바랐으며, 집사람과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불만이 있을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구세력은 내가 집착하는 정을 이용하였고, 이 정으로 하여금 내가 잘했는가 못했는가를 가늠하는 표준으로 되게 하였다. 그리하여 집사람은 자신의 표준으로 대법을 가늠하게 되었는데, 그의 이런 오만 방자함은 나의 마음이 조성한 것이었다.

둘째, 나는 집사람에게 자비심이 없었고 선이 없었는데, 원인이란 내가 정속에 빠져 자비심이 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친인에 대해 나타낸 나의 관심이란 변이된 가정관념에 기초한 ‘선’으로서 대법제자가 마땅히 닦아내야 할 진실한 선이 아니었다. 집사람은 놀랍게도 감히 가정과 나의 수련을 대립시켰는바, 내 수련의 기점이 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착오적인 가정관념에 서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나는 가정의 형식이란 인류사회 존재형식의 일부분이란 것을 깨달았다, 서양 기독교 문화에서 결혼은 교회당에 가서 주에게 맹세를 해야 하며, 중화전통문화에서 결혼은 천지에 참배해야 하는데 바로 하늘과 땅에 알려주어 하늘의 허락을 얻는 것이다. 가정의 존재란 우선은 신의 은전(恩典)으로서 신의 은사(恩赐) 와 가르침이 있어야만 부부 쌍방은 가정 내부에서 어떻게 서로 다른 구성원을 대하고, 어떻게 가정생활을 조직할 것인가를 비로소 알게 된다. 우리 대법제자의 가정은 건립초기에 무슨 의식을 치렀던지, 그때에 법을 얻었던지 상관없이 실은 우리의 생명과 마찬가지로 모두 법을 위해 온 것이며, 모두 사부님의 홍대한 자비 때문에 비로소 다행스럽게 세상에 살아있을 수 있게 된 것이며, 당초에는 몰랐고, 인식하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마땅히 우리의 가정의 존재는 사부님 동의를 거쳐야 하며, 사부님께서 은혜를 하사하신 것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나는 사부님 설법 중에서 깨닫게 되었는데 가정 구성원간의 관계는 신이 정한 것이며, 남편, 아내, 부친, 모친, 형제, 자매, 자식 등등의 관계는 사람의 정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아니며, 단지 속인은 정 속에 잠겨 이렇게 인식하기를 좋아할 따름이다.

나는 대법제자로서 집사람에게 진상을 알려주는 것은 나의 책임이다. 집사람이 나를 좋게 대하거나 나쁘게 대하는 것은 내가 진상 알리는 목적이 아니다. 하지만 집사람이 부, 모, 자녀 어떤 관계에 있든 간에 그들과 나의 일체 관계는 우선 대법과 사부님의 끝없는 은혜에서 온 것이며, 집사람은 수련하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나는 반드시 이 한 점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나는 자신에게 알려주었다, 집사람이 자신의 신분(가족관계)을 이용하여 대법에 대해 제멋대로 지껄이게 해서는 안 되며, 그들에게는 이럴 자격이 없다. 예를 든다면, 부모님들은 나에 대해 많은 요구를 제출할 수 있고, 남편은 나에게 일을 시킬 수 있지만 이런 것은 모두 그들의 신분적 범주 안에 속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신분으로 법을 가늠할 어떠한 자격도 없다. 이렇게 하면 그들은 우주 중에 존재할 자격도 없이 훼멸될 것이며, 그들의 가정에서의 신분과 자격도 언급할 나위가 더욱 없게 된다.

나는 깨달았다, 자신은 어떻게 가정과 혼인 관계를 봐야 할 것인가, 뿌리로부터 정에 대한 욕망을 버려야 한다. 사회는 비록 번잡하기는 하지만 세상의 일체는 모두 법을 위해 온 것이며, 역시 대법과 사부님 은사로 존재하는 것이다. 사회생활 중의 어떠한 사람이든 , 그가 빈민이든 대통령이든 어느 직업, 어느 계층에서 왔든지 꼭 대법의 은사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신분과 직업을 이용해서도 대법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마음대로 지껄일 어떠한 자격도 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 자신의 신분과 이 항목에서의 그들의 자격을 훼멸해 버리며 ,자신의 미래를 훼멸하게 될 것이다.

나는 깨달았다. 집사람과 세인에 대한 진정한 선이란 바로 자신에게 필요하고 속인이 인정하는 욕망을 끊어버리는 것이며, 이런 욕망을 버려야만 비로소 진정한 자비로 세인을 대할 수 있다. 속인이 나를 좋다고 말하거나, 나를 나쁘다고 말해도 실은 나에게 어떠한 영향도 조성하지 못하며, 속인의 칭찬을 대법제자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속인은 반드시 ‘파룬따파 하우’라고 말해야 하는바, 이는 그에 대해 말한다면 유일한 태도이다. 그는 대법제자란 이 칭호에 대해 마땅히 존경해야 한다. 왜냐하면 대법제자는 그에게 구원될 희망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대법과 대법제자에 대한 사람의 태도는 오직 그 자신과만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대법제자로서 이런 것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 이런 것은 단지 내 앞에 놓인 영상에 불과하여 나더러 보게 하고, 나더러 안에서 찾게 하며, 자신의 집착을 보아내게 할 뿐이다. 내가 본 일체는 모두 자신의 사람마음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나는 원래 ‘파룬따파 하우’ 이 말을 줄곧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알게 되었다. 이는 대법과 사부님의 나에 대한 은사이다. 나는 본디 말할 자격이 없다, 내 관념 중의 ‘좋다’ ‘나쁘다’의 정의는 모두 후천적으로 형성된 것으로서 줄곧 기나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중 무수한 변이 관념이 층층으로 쌓여 형성된 ‘좋다’ ‘나쁘다’의 정의였다. 본디 나는 어떠한 말로도 대법을 지적할만한 자격이 없는데 사존께서 자비로우셔 나에게 ‘파룬따파 하우’를 염하도록 베풀어 주신 것이며, 내가 사존님과 대법을 칭송하도록 허락하신 것으로서 이는 형용할 수 없는 은사이며, 이는 사부님께서 나에게 하사하신 비할 바 없이 순결한 참신한 언어이다. 내가 이 한 점을 깨닫기 전에 ‘좋다’라는 것을 기나긴 세월 중 나에게 형성된 ’좋다‘의 관념으로 여겨 깨닫고 관찰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 세상에서 보면 그것은 사람의 정에서 온 것이고, 우주 역사에서 보면 비록 내가 역사상 이 한 관념이 산생되는 시초의 정경을 보지는 못했어도 나는 도리어 이 한 관념이 야기한 죄악을 보았는데, 그것은 우리의 공간에 나타난 오만 방자하기 비할 바 없는 공산사당으로서 그것은 신의 은사를 거절하고 생명을 가장 가장 비참한 경지에 처하게 하였다. 후천관념의 ‘좋다’와 ‘나쁘다’는 낡은 우주의 그 최후의 패괴한 물질로서 그것은 뿌리가 없는데 나는 도리어 그것을 자신 생명의 뿌리로 여겼다. 그것이 바로 나의 길고 긴 생명의 최초 최초의 집착이었고, 그래서 내 수련 중의 최대의 집착으로 되었다.

사존님과 대법은 나의 칭송이 절대 필요하지 않으며, 사존과 대법은 무엇이던 결핍하지 않다. 하지만 나는 오로지 은사를 받고 성심으로 ‘파룬따파 하우’를 염해야만 신우주중의 생명으로 될 자격이 있는 것이다. 나는 사부님과 대법을 칭송하는 외, 은혜에 감사드리는 외, 나에게는 다른 언어가 있을 수 없다. 사존님과 대법을 칭송하는 것은 한 생명으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태도이다.

만약 공산사령이 변이된 관념으로 세인을 독해하지 않았더라면 세인은 꼭 대법을 인식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정에 대한 집착 때문에 공산사령 요소의 악행을 종용하였다. 그러므로 정념으로 공산사령을 제거하고 세인에게 진상을 똑바로 알려주는 것은 대법제자로서의 나의 책임이다. 간격에 대한 나의 인식은, 변이 관념의 조성으로 인하여 나는 자신의 일체가 어디에서 왔는가를 보아내지 못하고, 정에 대한 자신의 집착을 자신의 생명의 본원(本原)으로 보고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구세력은 이 한 점을 이용하여 나의 인간세상에서의 육신을 노교소에 감금하였는데, 구실이란 이 한 부분 생명은 그것들에게 속한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건대, 간격이란 나의 생생세세의 관념 때문에 조성된 것이고, 내가 이런 관념을 집착하였기 때문에 그것들은 나를 관리할 권리가 있다고 여긴 것이다. 내가 발정념으로 사당에게 납치되어 노교소, 감옥, 비밀 병원에 갇혀 박해 받는 동수. 그리고 사당에게 시달림을 받고 있는 다른 동수들을 구출할 때면 자신의 정념이 강하지 못하여 간격을 돌파할 수 없다고 느꼈다. 지금 나는 알게 되었고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은 정에 대한 나의 집착으로 하여 조성된 것이다.

지금부터, 나의 모든 신체에 구세력이 존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또한 구세력이 다시 와서 동수의 신체를 격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집착을 버리고 사악에게 몸 숨길 곳을 주지 않으면 사악은 깨끗이 소멸될 것이다.

이상은 개인의 조그마한 깨달음으로서 부족한 곳은 동수께서 지적해줄 것을 삼가 바란다.

문장발표 : 2010년 2월 18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minghui.org/mh/articles/2010/2/18/21840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