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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 중에 세인이 받아들이는 것은 자비이지 관념이 아니다

글 / 대륙 대법제자

[명혜망 2009년 8월 11일] 어제 저녁에 조카딸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나는 매우 촉동을 받아 북미 수련생이 정리해낸 교류 문장이 떠올랐다. 그제야 비로소 대륙 동수들이 진상 알리기를 아주 잘하지 못했고, 하지 못하고 있으며, 대부분 동수들이 나와 마찬가지로 관념을 품고 하면서도 자신의 관념이 일으킨 작용으로 야기된 것임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나의 감상을 써내고자 하니 이 문제 상에서 일정한 인식을 하고 그것을 돌파할 수 있기를 바란다.

조카딸은 “당신들 갑 수련생은 식탁에 앉을 때(식사) 한 속인에게 당신은 당, 단, 대에 들었습니까? 들었다면 퇴출해야 하며, 퇴출 해야만 생명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진실한 상황이 어떤지 모르며, 그녀 역시 남에게서 들은 말이다)라고 말했어요. 속인은 듣자마자 깜짝 놀랐지요. 갑 수련생이 정치를 하고, 사당을 미워한다고 여겼어요.” 막 들었을 때, 나는 마음속으로 저촉되었다. 비슷한 대화는 예전에도 있었고, 역시 속으로 저촉이 되었으며 반감이 있어 대화를 진행할 수 없었다.

어제 저녁에는 정서를 억지로 누르면서 냉정하게 그녀가 하는 말을 들었고, 서서히 자신에게 존재하는 수많은 문제를 인식하게 된 동시에 중생 구도에 대해 법리상에서 더욱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그녀는 대법은 좋은데 왜 대륙에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두려워하느냐고 말했다. 나는 여러 차례의 운동이 사람들을 무서워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사람을 무서워하게 만들었다면 기타 종교도 타격을 받을 텐데, 왜 아직도 믿는 사람이 있는가? ‘진선인’은 좋고 정말로 좋은 것인데, 세인은 왜 당신이 말하는 것을 이렇게도 두려워하느냐고 말하였다. 나에게 즉시 반영되어 오는 것이란, 우리가 잘하지 못하였다는 것이었다. 늘 사람과 싸우고 악당과 싸운다는 생각을 품고 있으니 잘 할 수 있겠는가?(내가 말한 것은 내심의 반영으로서 자연적으로 노출되었다) 세인은 우리를 속인으로 보지 않으며, 그가 보는 것은 한 수련인의 상태이다. 한 무리 수련인의 상태로부터 더 많은 한 무리 사람들의 상태에 이르기까지 나 한 사람에게 이러한 의식이 있다면 문제가 아니지만,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면 이는 큰 문제가 아닌가?

나의 조카딸은 또 “내가 제일 반감을 갖는 것은 당신들이 여기에서 일이 생기고 저기에서 일이 생겼다고 말하거나 혹은 이것도 가짜요, 저것도 가짜요 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정치를 하는 것 같다는 것이에요.”라고 말했다. 나는 내가 어떻게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말하였다. “이번에 사부님께서 설법에서 말씀하셨어. 우리가 사회, 사회동향에 관심을 갖는 것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이며 기점은 사람을 구하는 데 있다고.” 하지만 나는 예전에는 관념을 품고 하였는데, 지금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는 또 그녀에게 《성경계시록》의 대심판에 관한 일을 말해 주었고, 왜 짐승의 수기를 지워야만 생명을 보호할 수 있는가를 말해주었다. 그녀는 당신이 이렇게 말하니 나는 믿게 된다고 말하였다. 이는 또 하나의 문제를 설명하는바, 사람을 구하는 면에서 타인의 각도에서 타인이 받아들이는 능력을 고려해야만 그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갑 동수와 마찬가지로 사람을 구하려 하고 더 많은 사람을 구하려 하며, 사부님의 정법진행도 따라가려 한다. 하지만 관념을 품고서 할 수 있거나 잘 할 수 있겠는가? 절대로 잘하지 못할 것이다.

사회에서 우리는 한 무리 수련인인데, 만약 모두가 법의 요구대로 법의 표준대로 할 수 있다면, 속인이 보건대는 한 무리 좋은 사람이고 진정으로 좋은 사람일 것인데, 그들이 당신에게 접근하지 않고 친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자기 감수만 중시하고 개인 수련만 중시하면서 가족을 고려하지 않고 사회상의 사람을 고려하지 않는데, 바로 타인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남이 당신을 승인해 주겠는가? 그는 말할 것이다. “보라, 얼마나 자사(自私)적인가.” 한 동수의 교류 체득을 조카딸에게 들려주었다. 그가 집에서 가부좌 하고 앉아서 연공하고 발정념 하는데, 그의 아내가 교란하면서 이걸 해라 저걸 해라 시키는 것을 그는 듣지 않고 생각했다. ‘내가 하는 일은 가장 바른 일이므로 누구도 교란하는 것을 윤허하지 않는다.’ 한 동안이 지난 후에 그는 깨달았다. 이건 내가 너무 자사적이 아닌가? 왜 아내를 도와주지 못하는가? 그는 자신을 개변하였고, 아내가 부르기만 하면 즉시 가서 해주었는데, 가부좌 하고 결인한 상태라 해도 그는 조금도 시간을 끌지 않았다. 이렇게 한 동안 시간이 지나자 그의 아내는 원래 반대하던 데로부터 후에는 이해하고 지지하는 데로 발전하였다. 나의 조카딸이 말하였다. “거야 물론이죠. 그녀는 훌륭한 남편을 보아냈지요.” 여기에서도 하나의 문제를 설명해 준다. 수련생이 잘 하게 된 것은 그가 자기의 관념을 버렸기 때문에 선의 역량이 발휘된 것이다.

동수들이여, 우리도 최후일수록 더욱 자신을 잘 수련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말하기는 쉬워도 하기는 어렵다. 어렵다는 것은 자신의 사람마음, 자신의 관념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람마음, 관념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방면에서의 동수들의 교류문장이 아주 많으나 늘 자신을 건드리지 못하고 자신과는 관계없다고 여기며 보았으면 곧 본 것으로, 자신을 잘 수련하려 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일에 부딪히면 안을 향해 찾을 줄 모른다. 어떤 땐 동수와 교류 하면서도 자신에게 존재하는 문제를 의식하지 못하고, 당신은 이것을 말하고 그는 저것을 생각하면서 동수의 말을 조용한 마음으로 들어주지 않는데, 다시 말해서 자신의 문제를 생각하지 못한다. 나는 나의 신변에 이런 사람이 있고, 우리 지역에도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럼 확대해 말한다면, 한 지역, 한 시, 성, 심지어 전국에 다 있다고 한다면 이건 정체에 존재하는 문제가 아닌가?(아마 나의 상상일 수도 있어 꼭 그렇다고 할 수 없다) 세 가지 일을 잘 할 수 있는가? 사부님께서는 잃는 것이 바로 법을 얻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왜 그걸 버리지 못하는가! 우리가 버리는 것은 집착이고 사(私)이며, 얻는 것은 공덕이고 원만인데, 이 장부를 우리는 마땅히 따져봐야 할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자비심을 수련해 내어 사람을 구한다면, 하나에게 말하면 하나가 탈퇴하고 열에게 말하면 열이 탈퇴할 것인데, 재빨리 국면을 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모든 동수들께서 위사위아(為私為我)한 관념을 내려놓고 우리의 사전대원(史前大願)을 완수하여, 원만하여 사부님 따라 돌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search.minghui.org/mh/articles/2009/8/11/20632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