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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과 두려운 마음

글/ 북경 대법제자

[명혜망 2009년 8월 8일] 안전과 두려운 마음은 많은 동수들이 모두 토론하고 있는 아주 오랜 화제이다. 나는 자신의 견해를 말해 보고자 한다.

1. 안전에 주의하는 것은 두려운 마음이 있다는 것과는 같지 않다

우리 모두 알고 있다시피, 고대의 병사가 전장에 나갈 때면 모두 갑옷을 입고 창을 드는데 그들이 이렇게 완전무장을 하는 것을 그들에게 두려운 마음이 있는 까닭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들이 전쟁터에 나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용감하다는 것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으며, 보호를 충족히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 훈련에 소질이 있으며 경솔한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한다. 그러므로 안전에 주의 한다는 것과 두려운 마음이 없다는 것은 결코 충돌되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한 사람이 냉정하고 지혜로우며, 용감하고 꾀가 있음을 증명한다.

2 . 안전에 주의한다는 것은 구세력의 배치를 승인한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어떤 때 우리에게는 잘못된 영역이 있어, 여기도 조심해야 하고, 저기도 주의해야겠다고 느끼는데 이는 관념 속에서 여기, 저기에 문제가 있다고 승인하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비로서 조심하려는 것인가? 구세력의 박해를 승인하는 것이 아닌가? 더는 근거 없이 자신에게 본래 없는 번거로움을 만들어 주지 말아야 한다. 원래 나에게도 이런 곤혹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은 이렇지 않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만약 공산사당이 없고 그 대 마두가 없었다면 구세력은 이렇게 큰 박해를 전혀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이 인간세상에 그런 장을 쳐 놓았고, 그런 세력을 형성하였기 때문에 비로서 박해가 형성된 것이다. 다른 공간에서, 우리가 구세력을 부정하는 것이란 바로 사상 중에서 근본적으로 그것을 승인하지 않고, 발정념으로 그것을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속인이란 이 층 공간에서 우리가 구세력을 부정하는 방법이 바로 안전에 주의하는 것이며, 구세력에게 속인 공간의 어떠한 배치에도 틈탈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속인의 방법으로 구세력이 인간에 쳐 놓은 박해 기제를 촉동하지 않고, 악인에게 나쁜 짓을 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인데 바로 구세력을 부정하고 세인을 구도하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안전에 주의하는 것이란 바로 정념 정행하는 것이며, 바로 인류 이 공간에서도 구세력을 철저히 부정하는 것이며, 바로 “여기, 저기”에서도 구세력이 나타날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며, 바로 층층층층 공간에서 인류 공간에 이르기까지 모두 구세력을 철저히 부정하는 것이다.

3. 두려워 하는 마음의 표현은 안전에 주의하는 것인가?

우리의 관념중에 한 사람이 두려워 한다면 아마 그한테는 초목마다 적군처럼 보일 것이고, 길을 걸어도 극도로 조심할 것이고, 눈길은 사방을 두리번 거릴 것인데, 그래서 어떤 수련생은 늘 안전주의와 이러한 행위를 동등하게 본다. 그럼 우선 한 개 관념을 정정해야 할 것이다. 안전에 주의한다는 것은 인류 공간에서 당당하게 구세력을 부정하는 표현으로서 정정당당한 행위이며, 초목마다 적군으로 보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다음으로 두려운 마음을 지닌 안전주의라 하더라도 수정할 것은 역시 두려운 마음 자체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밥을 먹을 때 목이 멘다 하여 밥을 먹는 것이 틀렸다고 할 수 있는가? 버려야 할 것은 착오적인 밥 먹는 습관이지 밥 먹는 자체는 아닌 것이다.

사실, 두려운 마음의 표현 행위는 다양하다. 그는 아마 초목마다 적군으로 보는 표현일 수 있어 사람에게 그가 특별히 안전에 주의한다는 느낌을 줄 것이다. 또는 두려운 마음을 덮어 감출 수 있는데, 표현되는 것은 안전에 특별히 주의하지 않는 것으로 표현되며, 더구나 다른 사람의 안전은 특별히 주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덮어 감춘 두려운 마음은 여전히 두려운 마음인 것이다! 덮어 감추었다 하여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두려운 마음과 안전에 주의한다는 것은 두 가지 일로서 양자는 결코 필연적이 아니고 모순되지 않는다.

4. 두려운 마음은 우리가 닦아 버려야 할 마음이다

만약 우리가 자신에게 두려운 마음이 있다는 것을 발견 하였다면 닦아 버리면 되는 것이다. 다음 번에 또 발견 했다면 또 닦아 버리면 되는 것이다. 우리 수련의 매 한 층차마다에 각종 집착심이 아마 모두 반복적으로 나타날 것인데 그것을 닦아 버리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자신이 안전에 주의하는 것을 두려운 마음을 가진 것이라고 비웃는다 해서 극단으로 갈 수는 없는 것이다. 비웃는 자체야말로 문제가 있는 것이다. 비웃음을 받지 않기 위하여 안전에 주의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도 쉽게 이끌리는 것이 아닌가? 아울러 두려운 마음을 지닌 안전주의는 두려운 마음을 지니고 안전에 주의하지 않는 것 보다는 더 나을 것이다! 적어도 전자는 제 자신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하물며, 우리의 동수들은 하늘땅을 뒤덮을 듯한 사악한 가운데서 용감하게 세인을 구도하는 자체가 바로 대의대용 (大义大勇) 한 표현인 것이다. 그러므로 두려운 마음은 단지 우리가 닦아 버려야 할 마음일 뿐이다. 동수로서 다른 사람의 집착을 발견 했으면 마땅히 안을 향해 찾아보고, 따라서 선의적으로 지적해 주어야지 다른 사람의 집착을 공격할 약점으로 삼는 것이야 말로 비로소 진정으로 수치스러운 것이다.

5. “안전에 주의하지 않는 것”이 바로 사악이 기뻐하는 일을 하는 것이고, 수련생을 팔아먹는 것이다

어느 수련생이 말하였다. “나는 안전에 주의하지 않지만 나에게는 두려운 마음이 없다.” 우선, 안전에 주의한다는 것과 두려운 마음이 없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로써 누구도 누구를 증명할 수 없다. 이 문제는 앞에서 이미 논술하였다. 안전에 주의하려 하지 않는 그런 심태가 자아를 실증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닌지를 보아야 하며, 당연한 것을 정념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하물며, 한 동수에게 연관된 것은 아마 더 많은 동수의 안전일 것이다. 가령 당신 한 사람 때문에 모든 사람의 안전이 노출되고 위협을 받게 된다면 그건 사악이 제일 기뻐하는 것이 아닌가? 당신이 이렇게 사악을 도와주는데 사악이 어찌 당신을 안전하지 않게 하겠는가? 하지만 당신이 정말로 두려워 하지 않은 것 때문에 구세력에게 이용 당하고, 그로하여 대법이 손해를 받고 수련생이 박해를 받는다면, 중생은 구도를 잃게 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 일체는 어쩌면 피면할 수 있었을 것인데 안전에 주의하지 않는 것은 정체에 대해 말한다면 자체가 바로 하나의 커다란 누락인 것이다!

또 어떤 수련생은 말한다. 당신에게 두려운 마음이 없다 해도 당신은 다른 사람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런 말도 틀린다고 본다. 다른 사람에게는 마치 모두 두려운 마음이 있고 유독 그만이 두려운 마음이 없는 것 같다. 매개인의 길은 모두 부동하고, 생명의 특점도 모두 부동하며, 구세력의 배치와 박해도 부동하다. 똑같은 정황에서 이 사람의 몸에서 만났던 일을 저 사람의 몸에서는 만날 수 없다. 동문제자로서, 수련생을 도와 법 실증의 길을 온당하고 잘 걸어 가도록 도와주어 될수록 가능한 한 구세력에게 박해 당하지 않게 하는 것은 응당한 것이 아닌가? 구세력을 부정하는 표현이 아닌가?

반대로 말한다면, 그래 두려운 마음이 없다 하여 안전에 주의하지 않고, 구세력을 부정하지 않아도 된단 말인가? 그래 두려운 마음이 없다 하여 수련생을 노출시키고, 동수의 안전을 위협해도 된단 말인가? 이것이 전력을 다해 사악을 도와주는 것이 아닌가? 그 사악은 아직도 무슨 특무를 수요하겠는가? 수련생이 당신과 손잡고 법을 실증하는 일을 하는 것은 당신에 대한 믿음인데 당신이 어찌 저버린단 말인가? 어찌 “두려운 마음이 없다”는 한 마디로 가볍게 회피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안전에 주의한다는 것은 구세력을 부정하고 정념정행하는 표현이고, 정체를 위해 고려하는 표현이며, 대법제자가 성숙한 표현이다. 진정 두려운 마음이 없는 동수라 해도 반드시 안전에 주의해야 한다. 안전에 주의하지 않는 행위 자체가 사실은 수련생을 팔아먹는 것과 같은 것이다.

6. 안전주의는 중생의 안위에 관계되므로 천천히 해서는 안 된다

어떤 수련생은 안전주의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것 같지만 늘 한때는 잘하다 한 때는 잘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착오는 한꺼번에 범하는 것이 아니며, 그는 다른 착오와는 달라, 잘못했으면 다음 번에 고치고, 다시 범하면 다시 고치는 것이다. 이를테면, 어느 동수의 핸드폰이 폭로되었는데도 그는 이 핸드폰으로 폭로되지 않은 동수의 개인 핸드폰에 전화를 걸었다. 이건 사악에게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 당신이 그에게 이래서는 안 된다고 알려 준다. 그래서 한 동안은 괜찮으나, 지나가면 또 계속하여 전화를 건다. 나는 수련생이 고의적이 아니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렇게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구세력에게 통제 당해서는 안된다! 이 착오는 한 번에 다 범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수련생은 전화에서 무슨 말이나 다 한다. 대륙의 지금과 같은 박해 형세하에서 이렇게 하면 어떻게 합작할 수 있겠는가? 만약 핍박에 의해 그와 연락을 하지 않으면 그는 또 상대방에게 두려운 마음이 있다고 한다. 우스개 소리 한 마디 하자. 가령 누가 하루에 한 사람을 죽이고서 그도 고치려고 노력하면서 천천히 하겠다고 한다. 나는 지금 이미 한 달에 한 사람을 죽이는데 앞으로는 더 잘 할 것이다. 가령 누가 그더러 사람을 죽이지 못하게 한다면 그는 상대방에게 두려운 마음이 있다고 한다. 이러는 것은 생억지와 그릇된 주장이 아닌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국인데 한 번에 다 범할 수는 없는 것으로서 어찌 천천히 한단 말인가?

7. 수련생이 안전에 주의하지 않으면 어찌 해야 하는가?

우리가 안전주의 이 일을 아주 중하게 강조함으로 하여 어떤 동수에게 안전에 주의하지 않는 행위가 나타날 때, 우리의 첫 번째 반응이 아마도 조급하고, 분개하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당황해 할 것이다. 사실 이것이 바로 수련생을 이용하여 박해하는 이유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미래의 소우주의 주이다! 우리는 중생을 보호해야 하고 중생을 위해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하는데 일에 부딪히면 먼저 줏대부터 없고 정념이 없으니 그럼 중생은 어찌해야 하는가! 한 신이라면 이럴 수 있겠는가? 속인 중의 한 장군마저도 위험이 닥쳤을 때 당황하지 말아야 대장이라 부를 수 있다. 장군이 먼저 당황하면 병사들은 진작 도망가고 말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그 어떤 정황에 부딪혔더라도 모두 당황해 하지 말고 모두 정념으로 문제를 사고해야 할 것이다.

우선 우리는 당연히 동수의 안전 부주의 행위를 승인하지 말아야 하는 바, 이는 구세력에게 조종 이용당한 것이고, 절대로 동수의 본의가 아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발정념하여 수련생을 조종하는 구세력을 제거해야 하며, 수련생이 청성해 지면 우리는 다시 선의적으로 그와 교류 토론 해야 한다. 만약 수련생이 일시에 돌아서지 않으면 잠시 그더러 천천히 법공부를 더 많이 하여 그가 돌아서면 다시 합작해야 한다.

8. 안전에 주의하는 목적이 법 실증을 더 잘 하기 위한 것이므로, 단지 안전에 주의하기 위해 안전에 주의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전장에서 병사가 입은 갑옷이 적을 더 많이 소멸하기 위해서인데 가령 갑옷이 그들을 전혀 행동할 수 없게 하는바, 칼과 총알이 들어오지 못한다 치더라도 적은 소멸할 수 없다면 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또 하필 전장에 나갈 필요가 있는가? 가령 과분하게 안전에 주의하느라 법 실증에 영향준다면 그건 옳지 않다. 사람의 지혜는 제한이 있으나 우리의 지혜는 사부님과 대법의 점화에서 온다. 그러므로 안전주의에 집착하여 구세력에게 이용당하여 법 실증 하는 일에 지장 받지 말아야 한다. 그 외, 안전 주의는 전사가 갑옷을 입는것과 같은 것으로서 누구도 전사가 갑옷을 입었다 하여 절대적으로 안전한 것이 아니고, 그는 또 용맹과 사기, 정심한 무예와 민첩한 두뇌가 수요된다. 그러므로 정념이 없는 안전주의는 갑옷을 입은 전사처럼, 두근거리며 전장에 나갈 것이고, 아무리 봐도 죄다 안전하지 못하다고 여긴다. 안전에 주의하는 기점이란 마땅히 정념에서 와야 하고, 마땅히 정념의 일부분으로서 목적은 법 실증을 더 잘 하기 위해서이다.

생각한 것이란 바로 이런 것으로서, 주요하게는 노 동수중에 극단으로 가고, 이렇지 않으면 저렇게 하면서, 안전주의와 두려운 마음을 대립시켜 당신이 그더러 안전에 주의하게 하는데 (더욱이는 동수의 안전에 주의) 그는 자기에게 두려운 마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마치 이는 한쌍의 반대어와도 같다. 사실 안전에 주의하는 것과 두려운 마음이 없다는 것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마찬가지로 모두 정념의 표현이고 마찬가지로 모두 부동한 층차에서 구세력을 부정하는 표현이며, 마찬가지로 모두 대법제자가 성숙한 표현이다. 자신의 안전과 동수의 안전에 주의하는 것이 바로 대법제자가 중생의 안위를 책임지는 표현이다. 가령 동수마다 모두 두려운 마음이 없고, 또 안전에 주의한다면 그건 하나의 세찬 기세를 막아 낼 수 없고, 물 한 방울 새지 않는 정체가 아닌가? 그것이야 말로 비로소 사악이 제일 두려워 하는 일일 것이다.

문장발표 : 2009년 8월8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search.minghui.org/mh/articles/2009/8/8/20602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