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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점을 바로잡아 사람에서 벗어나 신이 되자

글/싼둥 대법제자 쩐슈

[명혜망 2009년 4월 22일] 소위 “민감한 날” 혹은 수련생이 사악에게 박해를 받게 되면 “바람을 피하라.” “안전에 주의하고 사악에게 틈을 주지 말라 (박해를 받지 말라).” 고 말하는 동수들이 있다. 어떻게 안전에 주의 하는가, 발 정념을 많이 하고 진상을 잠시 적게 하거나 하지 말며 시간을 기다려 아무렇지 않으면 점차 평상시 상태를 회복하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악당이 무엇이 있기만 하면 평상시 행동을 감추려는 이런 상태는 반복 되었다.

일단 우리가 사악에게 박해를 받게 되면 대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데 손해가 따르게 된다. 사부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안전에 주의하라고 재삼 당부 하셨다. 그러므로 많은 동수들은 “안전에 주의”하는 것을 의심할 바 없는 것으로 여기며 점차 이런 비 정상적인 상태에 마음이 적응되어 사악에게 ‘’박해를 당하지 않은 것”을 문제를 생각하는 출발점, 수련의 한계로 간주한다.

매번 여기까지 생각하면 적합하지 않다고 여기면서도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모르겠다. 대법실증에 손해를 피면하고 안전에 주의하라고 사부님께서도 재삼 당부하셨으니 이것도 틀린 것은 아니다. 하루는 내가 사부님의 설법 ”대법제자들은 어떠한 정황 하에서 모두 절대로 사악을 향하여 전향할 수 없다. 비록 박해를 폭로하기 위해서 일지라도 안 된다. 그 박해를 폭로하는 자체도 대법제자가 수련하는 최종 목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아직 완전히 속인마음을 제거하지 못한 기타 수련생들더러 모방하지 말게 해야 하며 더욱이 수련생의 내부 사이트에서는 수련생에게 퍼뜨려서는 안 된다。”(《사부님께서 해외전화회의 상에서의 설법》)을 학습하고 이 문제에 대해 좀 인식하게 됐다고 여겼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박해를 까발리는 게 대법 제자 수련의 최종 목적이 아니라면 박해를 받지 않은 것이 우리 수련의 최종 목적인가? 당연히 아니다!

대법을 실증하는 손실을 감소하기 위해 안전에 주의하는 것은 당연히 옳은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박해 받을까 두려워 안전에 주의하는 것은 기점이 자신이다. 안전의 전제하에서 대법을 실증하는 것은 사부님의 법을 빌어 집착을 덮어 감춘 것이고 이기적일 뿐만 아니라 대법을 이용한 것이다.

“나는 예수가 아니며, 나 또한 석가모니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천백만의 과감히 진리의 길을 걷고, 과감히 진리를 위하여 생사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과감히 중생을 구도하기 위하여 몸을 바치는 예수, 석가모니를 창조하여 냈다. (긴 시간의 박수) 당신들 매 대법제자(大法弟子)는 진정으로 자신을 인식하여야 하며, 자신의 길을 잘 걸어가야 한다. 당신들은 정말로 그렇게 위대하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반드시 이지적으로, 엄숙하게 당신들이 오늘날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잘해야 한다.”(《각지 설법2》〈2002년 워싱턴DC법회 설법 〉)사부님께서는 우리 정법시기 대법 제자에게 영예를 주었으며 대법을 수호하고 사악을 해체하며 중생을 구도하는 중임을 주셨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였는가? 자신의 안전에 마음을 쓰고 박해를 받는 공포에서 책임을 도피하여 개인의 안전 문제 앞에서 대법의 순결, 중생의 안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게 여겼다. 대법 각자의 경계가 없이 어찌 사악의 뿌리를 뽑고 박해를 해체하는 능력을 구비할 수 있겠는가?

정법은 최후의 최후에 이르러 매 번의 기회는 다시 올 수 없다. 우리들로 하여금 기점을 돌려 사람의 관념을 버리고 사악이 매번 “미칠” 때마다 자신을 제고하는 기회로 간주하자. 자신을 빨리 제고하여 대법이 요구하는 표준에 도달해 자신의 사명을 더욱 잘 완성하며 자신의 호칭에 부끄럽지 않고 사부님의 자비를 저버리지 말고 자신의 생명에 심한 유감을 남기지 말라.

개인의 인식이니 부족한 점을 동수들이 자비롭게 지적하기 바란다.

문장 발표: 2009년 4월 22일

문장 분류: 수련 마당문장 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09/4/22/199358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