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혜망2008년3월20일]최근 나는 아내와 함께 기업을 찾아다니면서 신운예술단 공연을 홍보하러 다니면서 아내가 공연에 대해 이야기한 효과가 나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느꼈다. 자세히 관찰해봤더니 아내가 이야기할 때와 내가 이야기할 때의 가장 큰 차이점은, 아내가 이야기할 때에는 사람의 마음이 비교적 적다는 것이었다.
나의 경우 사람의 마음이 어디서 표현되었는가 하면, 나는 너무 상대방의 반응을 중시하거나 상대방의 안색을 살피는 것이었다. 상대방이 나에게 맞춰주는 것 같으면 나는 즉시 감사하다고 인사하곤 그 사람과 헤어졌다. 그러나 아내는 그렇지 않았다. 아내는 처음부터 끝까지 열정적으로 상대방에게 소개를 해주고 인내심을 가지고 성탄만회 팜플렛을 펼쳐가며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수련을 하기 전에 나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잘 살핀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보면 모두 후천적으로 양성된 좋지 않은 관념들이었는데 나는 그것을 보배로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잘 살핀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해치기 위해서는 아니지만 그것은 자신을 보호하려는 그 마음이며, 부딪치려하지 않고 난처한 처지가 되지 않으려는 마음이었다. 쉽게 말해 매우 이기적인 마음이었다.
오늘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표면상으로 보기에는 신운 공연을 홍보하고 있는 것 같고, 우리가 그들의 가게에 공연 포스터를 붙이기를 희망하는 것 같으며, 우리가 그들이 티켓을 사주길 희망하는 것 같지만 사실 우리는 사람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너무 상대방의 반응을 중시한다면, 낡은 세력이 조금만 교란하면 즉시 상대를 포기하고 자리를 떠나게 된다. 세상의 사람들은 모두 법을 위해 왔고 대법의 구도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현실 생활에서 그들이 대법제자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되겠는가? 어떤 사람은 아마 평생가도 한번 만날까 말까 할 것인데 우리가 신운공연을 홍보하면서 우리와 만나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유일한 기회에 우리들이 우리의 사람 마음 때문에, 자신의 체면을 고려하는 것 때문에 쉽게 상대방을 포기한다면 장래 우리는 얼마나 후회하고 마음속으로 얼마나 그 사람 때문에 괴로워할 것인가?
사람의 마음이 없이 이야기하거나 사람의 마음이 적다면 우리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우리의 열정을 느끼게 할 수 있고, 우리가 이야기해 준 신운공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아내가 이야기할 때면 상대방은 한 편으로는 들으면서 한 편으로는 웃는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나 나는 예절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미소를 지었기 때문에 상대방도 역시 같은 의미의 미소를 보여줄 뿐이었다. 신운공연을 소개할 때 사람의 마음이 적거나 전혀 없이 오로지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으로, 상대방이 구도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런 자비로 해야만 상대방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속인식의 예절은 전혀 상대방을 감동시킬 수 없으며 상대방도 우리를 일반적인 판매자로 여길 것이다.
나는 신운공연을 홍보할 때,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약 조건이 된다면 우리는 반드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해야 한다. 조건이라는 것은 상대방이 급히 길을 가거나 급히 밖에 나가려하는 상황이 아닐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전단지만 돌려서는 효과가 그리 좋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비롭게 가서 이야기할 때에는 ‘입에서 예리한 검 뿜어나오’고 상대방의 다른 공간의 좋지 않은 물질들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야기한 것을 그가 알아듣기만 하면 그는 즉시 급히 가서 표를 살 것인데, 다시 말해 그 사람은 구도를 받게 된다.
물론 우리는 극단으로 갈 수 없다. 상대방이 급한 일이 있거나 고객이 많아서 바쁘다면 우리는 억지로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예절을 지키면서 지혜롭게 진상을 알려야 한다.
진상을 이야기하면서 나는 또 다른 체험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어떤 동수들은 아마 내가 선천적으로 조용한 것을 좋아하며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거나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이에 대한 나의 이해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천만년의 윤회전세 중에서,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이러저러한 성격이 형성되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우리의 선천적인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늘 이 정법시기에 중공이 대법을 박해하고 있기에 우리에게는 진상을 똑똑히 알리는 동시에 대법을 널리 알릴 책임이 있다. 만약 자신의 성격을 이유로 하지 않는다면 그 성격도 우리가 돌파해야할 관이다. 왜냐하면 성격도 낡은 세력이 오래전에 배치한 것인데 우리 자신이 모르고 있을 뿐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떻게 가늠할 것인가? 만약 대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는데, 우리가 자신의 어떠한 성격이 장애가 된다면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고쳐야 한다. ‘강산을 고치기는 쉬워도 본성을 고치기는 어렵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속인을 두고 하는 말이다. 대법은 못하는 것이 없다. 대만에서 중국 대륙에 진상 전화를 하는 많은 동수들도 초기에는 모두 성격이 내향적이고 말을 잘 못했지만 모두 사람을 구한다는 일념으로 몇 년 동안 지속적으로 전화를 했는데, 갈수록 진상을 잘 알릴 수 있게 되었다.
개인의 체득이니 잘못된 점이 있으면 자비로 지적해 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8/3/20/17472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