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중경(重庆)대법제자
【명혜망 2007년 12월 10일】최근 ‘명혜주간’에 적지 않은 동수들이 안을 향해 찾는 문제를 이야기했는데 나는 매우 잘 말했다고 생각되며 자신에 대한 도움도 매우 큼을 느낀다. 그래서 나도 이 방면에 대한 자신의 인식과 생각을 말해보고자 한다.
금년에 중경에서는 비교적 규모가 큰 박해상황이 여러 차례 나타났다. 사악의 박해를 받은 동수들의 수도 많았고 범위도 넓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사악의 요소가 이미 대대적으로 감소된 오늘에 와서 우리 지역에서는 박해가 해체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 표현이 더욱 창궐한가?
비교적 두드러진 반영은 금년 초 중경 일부 지역에서 여러 차례 납치 사건이 발생한 후에 일부 동수들이 서로 질책하는 속으로 빠져 들어갔고 후에는 박해가 자주 나타났으며 아울러 만연되는 추세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현지에서 영향력이 큰 동수들 사이에 모순이 나타난 후 제때에 해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점점 더 심해졌다. 이 부분 동수들은 모두 많은 동수들의 마음속에 수련이 잘 되고 정념이 강하다고 여겨지던 동수들이다. 이 일에 참여하고 관련된 동수들도 아주 많기 때문에 어떤 동수들은 이쪽을 지지하고 어떤 동수들은 저쪽을 지지하면서 여러 동수들의 의견이 같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 동수들의 정체가 어떻게 법에서 정확히 대하고 인식하는가 하는 문제가 이미 시급해졌다.
“불광이 널리 비치니 예의가 원만하고도 밝으니”(『전법륜』) 우리 대법을 수련하는 사람들의 마당은 순정하고 자비로운 것이다. 왜냐하면 대법 수련자는 문제에 부딪치면 우선 자신을 찾아야 하는데 우리는 안을 향해 찾는 환경이다. 만약 우리의 이 마당에 문제가 나타난다면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하고 안을 향해 찾지 못한 것이다.
수련인 사이에는 모순이 없을 수 없으며 모순의 출현은 우리가 제고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이 말은 평상시 하자면 매우 쉽고 다른 사람을 보는 것도 간단하다. 그러나 모순이 자신의 몸에 나타났을 때 자신의 완고한 사람 마음과 관념을 건드려 놓았을 때 어떻게 대할 것인가? 당사자 동수들이 안을 향해 찾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다른 동수들도 이 과정 중에서 반드시 우선 자신을 보아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호주 수련생에 대한 설법』의 마지막에서 말씀하셨다. “사람을 내려놓으면 바로 신이다.” 자신의 후천적인 관념과 완고한 사람 마음은 자신의 길을 걷는 데에서 가장 큰 장애일 뿐만 아니라 역시 정법의 장애가 된다. 최근 나는 적지 않는 문제를 인식했다. 연초에 동수들 사이에 모순이 있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그 당시에는 충분히 중시하지 못했다. 간단하게 선입견을 중심으로 맹목적으로 한쪽 동수들이 옳고 다른 쪽 동수들이 협조하지 않는다고 인식했다. 이후 이 문제에 대해 그리 관심을 갖지 않았으며 또 물어 보지도 않았다. 사실 이것은 법에 대해, 동수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것으로 역시 자신의 수련중의 문제를 반영한다. 더욱이 그 ‘사(私)’인데, 자신이 무감각하고 무관심한 것 역시 당시 법공부, 수련상태가 좋지 않은 반영이다. 최근 모순을 일으킨 양쪽 동수들과 접촉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으면서 정체와 상대방의 각도에 서는 것을 배웠고 법에 서서 문제를 볼 때에만 자신의 편파적이고 비이성적인 면을 발견하게 되었다. 만약 당시 즉각 자신의 문제를 발견하고 양쪽 동수들과 소통하며 법에서 수련생을 도울 수 있었다면 문제를 해결함에 꼭 정면적인 작용이 있었을 것이다.
내 생각에 동수들 중에서 또 마땅히 주의해야 할 한 가지 문제는 만약 자신의 사람 마음과 관념으로 문제를 보고 문제를 해결한다면, 심지어 동수들 중에서 자신의 집착으로 평론. 의논, 소식을 전한다면 이는 마치 구세력이 정법 중에서 하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으키는 작용은 단지 교란과 저애일 뿐이다. 이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더욱 나쁘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수련생은 이 방면에서 매우 잘했다. 종래 나는 그가 다른 사람을 나무라는 것을 듣지 못했고 동수의 문제를 보면 늘 선의적으로 가서 도와주고 격려하여 두려운 마음이 심한 동수들이 걸어 나와 법을 실증하도록 이끌었다. 그는 또 다른 동수들이 그 앞에서 다른 수련생을 의논하고 탓하는 것을 종래로 듣지 않았다. 그가 듣지 않으니 동수들은 점차 그 앞에서 이렇게 하지 않았다.
‘안을 향해 찾음’은 무조건적인 것으로 에누리가 있을 수 없다. 때로는 토론하고 교류할 때 어떤 동수들은 처음에는 안을 향해 찾음을 말하지만 나중의 내용은 도리어 모두 다른 사람의 문제를 담론하는데 질책하는 어조까지 동반한다. 우리는 속인을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 심지어 우리를 잔혹하게 박해했던 악인도 미워하지 말아야 하는데 동수 앞에서는 왜 지나갈 수 없단 말인가? 동수에게 무슨 문제가 있든지 막론하고 이 과정 중에서 우리는 우선 먼저 자신을 보아야 하며 자신을 잘 고쳐야 하며 다른 사람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이 고쳐야만 비로소 편안하고 그렇지 않으면 편안치 못한데 마음속으로 지나가지 못한다. 그 어떤 이유든지 막론하고 아마 여전히 ‘수련생을 위하고, 정체를 위해 생각한다고’ 구실을 만들 텐데 모두 옳지 않다. 왜냐 하면 내려놓지 못하는 사람 마음이야말로 정법의 더욱 큰 장애이며 이것이야 말로 더욱 큰 손실이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는 하나의 수련인도 대오에서 떨어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우리로 하여금 선의적으로, 자비롭게 매 수련생을 대하라고 하셨다. 신은 사람의 마음을 본다. 우리의 염두가 모두 그처럼 순정하고 바를 때면 곧 기적이 나타날 것이다. 중경 동수들도 꼭 반석처럼 견고한 정체를 형성해 철저하게 사악의 박해를 해체하며 보다 많은 중생을 구도할 것이다.
문장발표 :2007년 12월 10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minghui.ca/mh/articles/2007/12/10/16808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