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정념으로 매 한걸음을 잘 걸어가자

【명혜망 2006년 1월31일】 나와 다른 한 수련생은 인터넷으로 명혜망에 문장을 보냈다. 당시 이미 점심시간이 가까와졌고 아침밥은 아직 먹지 않았었다. 바로 이때, 집에 있는 한 수련생이 전화를 걸어와 우리더러 자기집에 와서 점심을 먹으라는 것이었다. 자기가 맛있는 것을 준비했고 또 상의할 일도 있다는 것이다. 나도 마침 그 동수와 상의할 일이 있어서 잘됐다고 생각했다. 나는 인터넷에 있는 동수에게, “빨리 문장을 보내고 집에 갑시다. 맛있는 것을 준비했답니다.” 고 말했다. 인터넷에 글을 올리려고 준비하던 수련생은 듣자마자 즉시 허리를 폈다. 나는 동수도 마음속으로 아주 기뻐하는 것을 느꼈다. 누가 알았으랴, 얼마 지나지 않아 수련생은 괴로워하면서 아-하고 소리를 질렀다. 내가 즉시 무슨 일인가고 물었더니, 수련생은 봉쇄돌파 소프트웨어를 사용할 것을 잊어버리고 직접 명혜동수의 우편함으로 들어갔으며, 또 명혜망에 들어가 명혜문장을 다운로드했다고 하는 것이었다. 나의 마음은 무겁게 내려 앉았다. 우리는 실내전화선을 사용했기에, 어떤 한차례의 소홀함도 가능하게 모두 미봉할수 없는 손실을 초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즉시 금방전의 마음과 념이 바르지 않아서 이렇게 큰 누락이 생겼음을 깨달았다. 장기적으로 유리실소하였기에 생활상에서 아주 간단하였고 아무런 질서가 없었는데, 늘 한끼를 굶고 한끼를 배불리 먹는 식이어서 먹는데 대한 잠재욕망이 아직도 강렬하였던 것이다. 때마침 대법일을 동수의 집에 가서 상의하려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러나 나에게 아주 기쁜 마음을 일으킨 것은 그래도 수련생이 말한 그 ‘맛좋은 음식’ 이었다. 나는 환희심과 먹는 욕망에 대한 집착을 인식했다. 또 동수집에 가서 그런 ‘집의 분위기’를 향수하려는 생각도 있었다. 몇년동안 유리실소하면서 한번도 집에 돌아가지 않았고, 어떤 때는 집에 있는 동수집에 가면 마치 오래동안 느끼지 못하던 가정의 분위기를 잠간이라도 향수하는듯 하였다.

나는 자신이 맛있는 음식이 있다는 것을 들은 것때문에 이렇게 많은 집착심이 일어나고, 가능하게 대법일에 손실을 조성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나도 자신을 찾아 보았는데 사람은 비록 유리실소하였지만, 몇십년래 사람속에서 살면서 안일하고 편안하며 질서있는 생활에 대해 형성된 관념 및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동경’에 대해 아직도 일종의 잠재적인 미련이 남아있는 것을 보았다.

이때 수련생이 한마디 했다. 발정념하여 사악으로 하여금 발견하지 못하게 합시다. 나는 동수의 말에 부득이함과 자아안위를 발견했다. 동수와 나는 하나의 정체로서 누락이 생긴 것은 우리둘의 조합된 정체가 누락이 생긴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서 우리둘은 모두 그 속에 있으며, 모두 집착이 있음으로하여 초래된 것이었다. 만약 우리 하나의 입자가 순정하고 마당이 바르다면 사악은 빈틈을 타고 들어올 수 없는 것이다. 한 수련인으로서 자신의 문제를 찾는 것은 무조건적이다. 그러나 유관된 사람으로 조합하여 만들어진 정체의 승화도 사악의 박해와 파괴를 타파하는 관건이다. 사존께서는, 《2003년 애틀란타법회에서의 설법》에서 ‘사고 중에서 사람의 관념을 이용할 것인지 아니면 수련자의 정념을 이용할 것인지에 따라 해낸 일의 결과도 같지 않은 것이다.’ 고 말씀하셨다. 또 ‘마난(魔難) 앞에서 어떻게 하는가는 모두 자신이 깨달아야 한다. 매 차례 제고가 바로 자신이 증오(證悟)한 과위가 승화된 것이다.’(《길》)

나는 동수에게 나의 방금 전의 깨달음을 이야기했다. 나는 정념은 한마디 빈말과 구호가 아니며 어쩔수 없는 자아안위도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어떤 때 사람의 마음으로 이해한 ‘정념’에는, 기실 안일을 구하고, 시끄러움을 두려워하며, 자신을 찾으려 하지 않고, 수련인의 표준에 따라 자신을 요구할 수 없는 등등 많은 사람의 마음이 감추어져 있다. 수련생은 나의 인식을 듣고나서 아주 좋다고 느꼈다. 그는 수련생이 맛있는 음식을 준비했다는 것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게다가 아침밥을 먹지 않았기에 약간 배가 고파서 저도 모르게 먹는 욕망에 이끌렸다고 말했다.

우리는 각자 자기의 집착을 찾았고, 교류하는 과정에서 나는 그런 순정한 마당이 우리에게는 진짜로 한차례의 정화라는 것을 느꼈다. 최후에 수련생은 시름이 놓이지 않아서 인터넷선을 한동안 멈추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나는 필요없다고 생각했는데, 나의 인식은 만약 우리에게 정념이 있고 어떠한 구하는 마음도 없이 자신의 누락을 찾았다면 꼭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 마음을 덜면 악은 스스로 패하리라.’(《홍음2》, ‘슬퍼하지 마라’)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사부님의 말씀대로, 사악을 타파하는 앞에서 사람의 마음으로 대하거나 어쩔수 없다거나 혹은 대법의 신력(神力)을 구실로 삼아 자아안위를 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하게 한 수련인의 심태로 일앞에서 자신의 문제를 볼때, 우리는 바로 사부님이 말씀하신것처럼, ‘진정으로 잘할 수 있는 사람을 그것들은 정말로 또한 감히 건드리지 못한다. 낡은 세력의 배치를 부정하는 사람, 정념이 매우 충족한 사람을 그것들은 모두 건드리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이 기간에 어떻게 박해하든지 막론하고 만약 대법제자가 마음이 매우 바르며 정념이 매우 충족하고 능히 맑게 깨어있으며 냉정하게 이 일체를 인식할 수 있다면 아주 많은 손실을 면할 수 있게 된다.’(《2003년 애틀란타법회에서의 설법》) ‘만약 누가 할 수 있다면 나는 이 길 위에서 수련의 이 길 위에서 당신의 영원한 생명에서 모두 당신을 가로막을 것이 없다고 말하는데 정말 이러하다.’ (《법륜불법 싱가포르법회에서의 설법》)

수련의 길에서 매번 자신의 정오(正悟)가 수요되는 일에 봉착할 때면, 또 하나의 바른 믿음 — 사부님과 법에 대한 바른 믿음이 존재한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길, ‘우리가 가리키는 진정한 깨달음은 바로 우리가 연공과정 중에 사부가 이야기한 법(法)이자, 도가의 사부가 이야기한 도(道)인즉, 수련과정 중에서 자신이 마주친 마난(磨難)에서 자신을 수련인이라고 깨달을 수 있는가 없는가, 이해할 수 있는가 없는가,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없는가, 수련과정 중에서 이 법에 따라 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

나의 깨달음은 법리속에서 구체적으로 법을 실증하고, 사악을 타파하는 과정중에서 우리의 사부님에 대한 바른 믿음이 체현되어 나온다. 만약 사부님이 말씀하신대로 하면서도, 아직 마음에 의혹을 가지고 있고, 그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고, 정행할수 없으며 심지어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면서 다시 사람의 방식을 채용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처리한다면, 기실 또 일종의 법과 사부님에 대해 견정하게 믿지 못하는 심태다. 사부님께서는, 《2004년 시카고법회에서의 설법》에서 ‘그것들이 조성한 마난 속에 가서 수련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승인하지 않는 가운데서 자신의 길을 잘 걷는 것이며, 그것들 자체를 제거하는 마난의 표현마저도 승인하지 않는다.’ 라고 말씀하셨다.

아주 많은 때, 사람 속에서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동경과 기대때문에 하나의 관념과 고정된 모식이 형성되는데, 바로 아름다운 결말이 있는 ‘대단원’을 즐기는 것이다. 이런 사유에 대해 연역을 진행하면, 수련중에 와서 자신도 모르게 사부님의 설법에 대한 이해의 편이(偏移)를 섞어넣게 된다. 어떤 때는 동수의 교류문장 혹은 정법이야기를 보면서, 만약 결과가 없는 정법이야기를 보았다면, 내심 심처에서 왕왕 한가닥의 담담한 유감이 있게 된다. 뿌리를 파보면, 바로 아름다운 결과를 구하는 사람의 마음이 작용을 일으킨 것이다.

만약 이런 관념을 버리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부님과 법에 대한, 또 자신이 대법속에서 수련해낸 정념에 대한 견정한 믿음을 가로막을 것이다. 그냥 일종의 ‘눈으로 보아야 믿는다’는 관념 속에 빠져버린다.

정념으로 매 한걸음을 잘 걸어가자. 낡은 세력이 배치한 사악한 환경에 직면하여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것들을 승인하지 않는 가운데서 자신의 길을 잘 걷는 것이며, 그것들 자체를 제거하는 마난의 표현마저도 승인하지 않는다.’

문장완성 : 2006년 01월30일
문장발표 : 2006년 01월31일
문장갱신 : 2006년 01월31일 00:05:06
문장분류 : [수련마당]
문장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6/1/31/119839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