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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문 <<2005년 센프란시스코에서의 설법>>을 읽고

글/화중 대법제자

[명혜망 2005년 12월 10일] 사부님의 신경문 《2005년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설법》을 공부한 후 나는 아주 괴로웠다. 사부님께서는 중생을 구도하시기 위해 너무나 많고 많은 것을 감당하셨고 대법제자들의 수련의 제고를 위하여 너무나 많고 많은 것을 바치셨다.

1. 일체는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확고한 믿음의 정념에서 온다.

나는 닫혀서 수련하는 제자이다. 사부님께서 감당하시는 것을 표면으로는 보지 못하나 이번에는 감수할 수 있었다. 속인 공간 중에서 표현되는 조그마한 관, 혹은 난에 직면하여 제자들은 아무것도 감수할 수 없을 수 없지만 그러나 그 관 혹은 난의 실질적인 물질만은 사부님께서 감당하시게 되었다.

1억이 되는 대법제자의 매 한 사람의 수련의 길에는 얼마나 되는 관과 난이 있겠는가? 매 대법제자는 모두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살핌 속에 있다. 아직도 수련 중에 있는 자그마한 생명으로 놓고 말할 때 이 문제는 너무나 큰 것이어서 생각조차 하기 어렵다.
여러분은 알 것이다. 우리 모두는 미혹 속에서 수련하고 있다. 열려서 수련하든 닫혀서 수련하든지를 막론하고 모두가 미혹 속에서만이 수련할 수 있다. 그렇다면 수련의 이 길에는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 사부님에 대하여 대법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믿는가? 믿지 않는가 하는 고험이 있을 것이고 근본적으로 확고한가? 확고하지 않는가 하는 고험이 있을 것이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깨우침이란 글자가 관통되어 있다.

법공부를 통하여 우리는 오늘 정법수련을 하고 있는 역사시기에 우리 대법제자가 겪어온 이 일체는 고금중외에 없었던 일이란 것을 알았다. 수련의 길에는 어려움이 얼마나 많을 것이며 위험인들 얼마나 많겠는가? 그러나 우리에게는 사부님이 계신다.
사부님의 요구대로 할 수 있는 제자는 대법수련 가운데서 일체를 얻을 수 있다.
이것은 사부님의 자비로움인데 마난 중에서 걸어 나오지 못하여 사악의 박해로 사람의 생명을 잃었으나 그 진정한 생명은 원만의 정과를 얻었다.

이것은 사부님의 자비로움이시다. 우리가 지금 알 수 있는 것이든, 알지 못하는 것이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든, 이해할 수 없는 것이든지 막론하고 사부님께서는 이미 모두 실제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일체를 모두 주셨으며 또한 일체를 배치해 놓으셨다. 그러나 마난이 올 때면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사부님께서는 설법 가운데서 우리가 응당 어떻게 해야 하며 어떻게 해야 잘 할 수 있는가를 알려 주셨다. 동시에 사부님은 시시각각 묵묵히 제자들을 보살펴 주시며 제자들의 원만과 제고를 위하여 일체를 배치해 주시고는 일체를 감당하시고 계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능히 무조건적으로 사람의 관념을 내려놓을 수 있고 사부님의 말씀대로 할 수 있으며 또 잘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능히 무조건적으로 사람의 관념을 내려놓을 수 있고 사부님의 말씀대로 할 수 있으며 또 잘 할 수 있는가? 만일 당신이 나는 대법제자인데 어찌하여 이런 일을 만났는가? 이렇게 고통스럽고 저렇게 괴로운데 사부님은 왜 나를 상관하지 않는가 하고 말하면서 이해하지 못하고 감당하려 하지 않으며 고생을 두려워한다면 당연히 사부님의 말씀대로 할 수 없으면서도 사부님께서 마난을 해결해 줄 것만 기대하게 된다. 그러다가 시간이 길어지면 원망하는 정서가 생길 수도 있다. 어리석다! 위험하다! 사부님께서 보시고 얼마나 조급해 하시는지 당신은 아는가?

대법과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그런 사악한 요소들은 우리의 일사일념을 호시탐탐 노려보고 있다. 난 속에서 사부님께서 보호해 주실 것만 생각하고 자신이 어떻게 진정으로 정념을 확고히 하고 사부님과 대법을 확고히 믿으며 뿐만 아니라 실천 속에서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데 그것은 낡은 우주에서 사람을 제도하는 신을 십자가에 못 박혀 난을 겪게 하는 변이관념과 무슨 구별이 있는가? 사악한 그런 물건 짝들도 당신을 제고시킨다는 구실로 당신을 박해하고 그로부터 정법의 구멍을 거머쥐는 것이다.

만약 정말로 정념이 없다면 박해 중에서 떨어져 내려갈 수 있으며 도리어 반면에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럴경우 그 사악한 물건들은 정말로 대법을 박해할 수 있는 구실을 찾았다고 우쭐거린다. 보라 이런 수단으로 그에게 압력을 주어 그가 법공부도 연공도 하지 않고 반면으로 나아갔으니 이 고험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았는가? 라고 경문 《북미 대호구 법회에서의 설법》중에 사부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특히 그 시기에 나는 전혀 말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이야기를 한다면 시험(考核)으로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인정하지 않는다면 두 가지 문제를 가져올 수 있다. 즉 낡은 세력은 전력을 다하여 파괴할 것이며 이것은 사법(邪法)이라고 인정할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법을 바로잡는 이 일에 아주 큰 번거로움을 조성하게 되고 전반 우주에 아주 큰 혼란을 조성하게 될 것이므로, 이것은 안 되는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당시에 하늘땅을 뒤엎을 듯이 덮쳐든 사악은 굉장히 컸기 때문이다. 우리가 명혜사이트에 실린 사진을 본다면 지구가 마치 사탄얼굴과도 같은 형상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다만 지구의 업력의 표현 형상일 뿐이다. 왜냐하면 매 하나의 업력의 미립자 그것은 부동한 업력 형상이 있기 때문인데, 그럼 그것 역시 정체(整體)적인 형상이 있으며 그것이 바로 업력의 형상이다. 그러나 당시 그 사악은 이런 업력에 비해 몇 배 훨씬 능가한 것으로, 많은 층(層) 생명으로 말한다면 모두 극히 두려운 것이다. 단지 지구만 사악에 의하여 덮여진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처럼 큰 시련을 거치지 않는다면 마땅히 이렇게 큰 법으로 되지 말아야 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이렇듯 큰 난이 내려오면 사람이 감당하지 못하여 훼멸될 것임을 알고 있고 또한 대법 제자들이 아주 곤란한 이런 난 속에서 걸어나오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또 훼멸된다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가 하면 그것들은 심지어 나마저도 수련하는 사람으로 간주하였다. 그것들은 이렇듯 큰 법을 증오(證悟)하자면 곧 이렇듯 큰 시련이 있어야 한다고 인정했다. 여러분 생각해 보라. 말하기는 쉽지만 실질적으로는 극히 두려운 것이다. 당시 그 환경은 형용할 방법이 없으며 극히 악렬하였다. 하지만 우리 국내국외의 수련생들을 막론하고 당시에 모두 그런 감수가 있었고 또 모두 그 사악이 세상에서 표현되어 나온 그 사악한 정도를 보았다. 표면적으로 본다면 그것은 단지 일종 사람의 표현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런 사악한 요소, 그것이 사람을 통제하고 있었다. 이런 것이 시작할 때에 나는 극력 그것을 소각해 버렸다. 하지만 너무나도 방대했다. 당신이 그것을 아무리 빨리 소각하더라도 하나의 과정이 있기 때문에 9개월의 시간을 거쳐서야 비로소 그것을 소각해 버렸는데 이 역시 여태껏 있어본 적이 없었으며 굉장히 컸다. 당시에 이 사악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에 수련생들은 그것을 감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럼 그것을 감당하지 않는다면 시험 중에서 그들은 인정해 주지 않으므로 당신은 그것을 소각하기만 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므로 여전히 감당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만일 수련생들이 가서 감당한다면 걸어 나오기가 아주 어렵다는 것을 알고있다. 그러므로 나는 수련생들더러 다만 사람이 표현된 사악을 감당하게끔 하였고 이 실질적인 것을 내가 그것을 감당하였다. (박수) 여기에 당신들 사부가 어떻게 대단한가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며 이 뜻이 아니라 당신들에게 이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것이 소각된 후에 상황은 변하였다. 금년 3월부터 이 형세는 점차적으로 변화되었고 악한 사람은 그런 사악한 요소의 조종이 없으므로 말미암아 정신적 기둥이 없게 되었다. 지금 그들은 대법에 대한 검증은 이미 합격되었고 이런 일 또한 결속 중에 있으며 다만 일부분 사람이 아직 걸어 나오지 못했을 뿐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주정법시기인 오늘 낡은 세력이 억지로 가해준 이 거대한 난 속에서 사부님이 중생을 위하여 감당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로 놓고 보면 생각할래야 감히 생각할 수도 없거니와 생각해낼 수 조차 없다. 그것은 이 우주중의 생명으로서는 감당할 수도 없거니와 완전히 이해할 방법조차 없는 것이다.

사부님께서 김당하신 것 이 거대한 난 중에서 사악한 물질들이 사부님의 몸에 조성한 상해에 대하여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사부님께서는 경문《최후의 집착을 버리자》 에서 말씀하셨다. “제자들의 고통을 나는 모두 안다. 사실 나는 당신들 자신보다 당신들을 더 귀중히 여긴다.” 나는 이 말씀의 무게가 너무도 무겁다고 느낀다. 억만대법제자 중 그 어느 누가 관을 잘 넘기지 못하거나 길을 바르게 걷지 못하게 되면 모두 사부님께서 걱정하신다. 억만 대법제자 중 그 누가 사악의 박해 중에서 목숨을 잃었다면 사부님께서 가슴 아파하신다. 억만 대법제자 중 그 누가 난 중에서 떨어져 반면으로 나간다면 사부님께서 마음 상해하신다. 그러나 신경문 《2005년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설법》중 한 수련생이 사부님께 올린 쪽지에서 묻기를 “어떤 수련생은 몸과 마음을 다해 대법 일을 했는데 어떤 이는 생명의 위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건 아마도 그들이 개인 수련을 홀시했기 때문인 것 같고 어떤 이는 관을 잘 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 수련자이기 때문에 관마다 모두 잘 넘길 수는 없다고 봅니다. 무엇 때문에 대법은 그들은 보호해 줄 수 없습니까?” 이러한 질문은 나도 이 수련생이 질문하려는 생각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나의 감수는 이러하다. 내 마음이 아주 괴롭다.

나는 절대로 이 수련생을 질책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는 이런 자격이 없다. 나는 사부님께서도 제자 중의 누가 누구를 질책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이 자그마한 깨우침은 모두 사부님의 자비로운 점화에서 온 것이므로 써내어 동수들을 깨우쳐 줄뿐아니라 나 자신에게 경고하기 위해서이다. 어떻게 하면 대법 중에서 무사무아의 정각으로 수련되며 어떻게 하면 정법시기에 대법을 실증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면 당시의 대법제자가 마땅히 해야 할 세 가지 일을 더 잘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 모든 가운데서 자신과 대법에 대하여 중생에 대하여 책임질 수 있겠는가?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바른 믿음이 확고한가하는 것은 관건으로써 사부님을 확고히 믿고 대법을 확고히 믿을 수 있는 것은 무너뜨릴 수 없는 정념에서 온다.

2. 결심을 내리고 사람에서 걸어나오라!

신경문 《2005년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설법》중 사부님은 말씀하셨다. “여러분 알다시피 낡은 세력의 목적은 이러한 어릿광대[小丑]들더러 이번 박해를 일으켜 대법제자를 고험하게 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들은 대법제자는 아직 고험이 끝나지 않았다고 여기며, 아직도 끊임없이 걸어 나오지 못한 수련생들이 걸어 나와야 하고, 잘하지 못한 사람들은 아직도 그들더러 잘하게 해야 한다고 여기고 있다. 만일 세간 정법의 형세 노정을 지연한 것을 말한다면, 이런 수련생들은 정말로 형세의 노정을 지연시켰다. 이런 사람은 만일 그를 책임지지 않는다면 그는 곧 망가지게 되며 정말로 철저하게 끝장이다. 그러나 역사상 그들은 또 발원(發願)을 했는데 아울러 단지 일세(一世)로부터 한 생명을 볼 수는 없으며 역사상 전반적으로 한 생명을 보아야 하는 것으로, 어찌 책임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나는 알았다. 사부님께서는 걸어 나오지 못한 제자들을 위하여 더 많은 것을 감당하셨고 더 많은 것을 바치셨다. 나는 법에서 정진하지 못해서 괴로웠다. 사부님께서 잘 하라고 요구하신 것만큼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 때문에 괴롭다. 내가 2000년 12월에 베이징 텐안문에 법을 실증하러 갔을 때가 기억난다. 허다한 대법제자들이 끊임없이 베이징으로 법을 실증하러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안 다음 나는 그 일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명혜망에 발표된 “엄숙한 교훈”을 나는 연거푸 몇 번을 읽으면서 눈물이 샘솟듯 흘러내렸다. 나도 조만간에 베이징에 가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 때까지 주저하고 있었다. 나는 똑똑히 알고 싶었다. 무엇 때문에 베이징에 가서 법을 실증해야 하는지? 사실은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놓지 못해서였다. 제일 큰 사람 마음은 바로 두려움이었다. 당시 사악들은 대법제자들이 베이징에 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대법제자를 대량으로 납치했다. 한 수련생이 납치되어 세뇌반에 갈 뻔했던 경력을 또 다시 들었을 때 나는 결심을 했다. 나는 눈물을 닦으며 견정히 말했다. “사부님 저는 꼭 베이징에 가겠습니다.” 그날 오후 베이징으로 가는 길에 갓 오르자 내 몸에 종래로 없던 현상이 나타났다. 몸에 전기가 있었다. 사흘 만에 탠안문에 순조롭게 도착하여 ‘파룬다파는 정법이다.’라는 현수막을 펼쳐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당초에 똑똑히 알려고 했던 ‘무엇 때문에 베이징에 가야 하는가’는 구실로서 가지 않고 실천해보지 않으면 답안은 없는 것이다. 실제상 그것이 바로 대법제자가 응당해야 할 일이었던 것이다. 주저할 것이 무엇인가? 자기가 응당해야 할일을 했는데도 후회할 까봐 근심하는가!

그러므로 내가 생각하건데 사실 지금 우리가 사람에서 걸어 나오지 못하고,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대법제자가 응당 잘해야 할 세 가지 일을 잘하지 못한다면 이것도 모두 구실이 아닌가? 아직도 무엇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는가? 아직까지도 걸어 나오지 못한다면 정법의 형세발전을 뒤로 끌어 당기는 것이 아닌가? 엄중하게 말해서 이것은 사부님께 시끄러움을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닌가? 사부님은 자비로우셔서 제자 한 사람도 포기하려 하지 않으신다. 걸어 나오지 못한, 잘하지 못한 제자들에게 시간과 기회를 주시고 또다시 사부님은 감당하신다. 동수님 혹시 결심하는 것이 부족하시죠? 그러면 결심을 내리고 사부님의 요구대로 해보세요. 할 줄 모르면 어떻게 해야 잘 하는지 모르는 부분은 이 방면에서 잘 한 동수께 도움을 청하라, 대법 속에서의 수련은 할수록 더 잘할 수 없다. 결심을 내린 후에는 응당 그 무엇도 교란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 수련 중에서 대법제자의 ‘법공부 발정념 진상알리기’ 이 세 가지 일을 확고하게 잘해 나가야만 비로소 사부님의 자비로운 구도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 바싹 틀어쥐자.

이상은 개인이 체득한 것으로서 맞지 않은 곳은 자비로 가르쳐 주기 바란다.

문장완성:2005년 12월 7일
문장발표:2005년 12월 10일
문장갱신:2005년 12월 23일
원문위치: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5/12/10/11622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