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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佛光) 속에 푹 빠지다─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시던 날들

 
글 / 대륙 대법제자

【명혜망 2004년 7월 5일】나는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꿈속에서 다음과 같은 한가지 정경을 보게 되었다. ‘내가 혼자 눈밭, 황무지에 서 있는데 사방은 황량하고 적막하여 사람 그림자도 없었다.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왔으며 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있다. 우리 집은 어디인가? 가족들은 어디에 있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나는 홀로 외로이 서 있었는데 너무나 약소(弱小)하고 의지할 곳도 없었으며 그렇게 미망(迷茫)에 빠져 있었다……’

나는 또한 다음과 같은 꿈도 여러 차례 꾸었다. 내가 사다리를 잡고 지붕에 올라가는데 매번 지붕에 올라가고 나면 사다리가 갑자기 내려 앉으며 꿈에서 깨어나곤 했다. 이럴 때면 한동안 가슴에 심한 통증을 느끼곤 했다.

어릴 적 만화 영화에서 보았던 신선들의 자재(自在)한 모습이 너무 부럽게 느껴져서 정말로 수련을 하고 싶었지만 어디에 가서 사부를 찾아야 할지 몰랐다.

1993년 8월 베이징에 살던 친척이 내게 《中國法輪功》책 한 권을 보내주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본래 기공에 대해서는 별로 흥미도 없었고 사실 잘 알지도 못했다. 당시 나는 ‘그것은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이 할 일이 없을 때 하는 신체 운동.’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나는 운동을 좋아하지도 않았으며, 한가지 취미가 있다면 바로 독서였다. 당시 책을 읽을 때 나는 즉각적으로 진동을 느꼈다. “야! 이 책은 정말로 올바르구나! 이것이야말로 내가 애써 찾고자 했던 것이다. 나는 당장 수련을 해야지!” 그때 나는 아랫배에서 “맥(脈)”이 급속하게 뛰는 감을 느꼈는데 “휙휙”하는 소리가 들렸으며, 앞이마 부위로 살이 모이면서 안으로 파고드는 감각도 느꼈다. 그러나 당시 내게는 한가지 관념이 있었다. 바로 사부님의 강의를 듣지 않으면 진정한 파룬궁 수련생이라고 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는 줄곧 사부님을 친히 뵙고, 사부님께서 우리 지역에 오시어 학습반을 여실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던 1994년, 시 기공협회에서 파룬궁 학습반을 연다는 광고를 냈고 나는 행여나 빠질세라 직접 가서 이름을 등록하기로 했다. 시 인체과학연구회는 각각 개별적으로 사무실을 꾸리고 있었으며 명목만 그럴듯했지 돈을 받는 것 외에는 다른 사업일꾼이라고는 없었다. 내가 등록하러 갔을 때 그들은 아주 바빠 보였고, 마침 내가 시간이 있었고 파룬궁에 대한 열정으로 몇몇 수련생들과 함께 주동적으로 그곳에 남아 그들을 도와주었다.

사부님께서 현지 라디오 방송국에서 생방송을 하실 거라는 말을 듣고 나는 기공협회 사람에게 간청하여 사부님을 뵐 때 데려가 달라고 했다. 기공협회 사람들은 아주 인색하여 나를 오토바이에 태워 보내 사부님을 방송국에서 영접하라고 했으며 승용차조차도 마련하지 않았다. 이에 같이 있던 한 수련생이 미니 버스를 한 대 빌려 사부님을 맞이하러 방송국으로 보냈다.

당시 날씨가 아주 쌀쌀했으며, 나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하고 병이 많아서, 추위를 아주 많이 탔다. 비록 두꺼운 털옷을 입고 외투를 걸쳤지만 손은 얼음처럼 싸늘했다. 미니 버스의 문이 열리면서 차 안에서 몇 분이 내렸지만 그곳에는 전등이 없어 캄캄했기에 나는 어느 분이 사부님인지 몰라 물었다. “이 선생님 어디에 계십니까?” 그러자 “여기 있습니다. 여기 있어요.”라고 대답하시면서 사부님께서는 경쾌한 걸음으로 내 앞으로 오시어 악수를 청하셨다. 사부님의 손은 크고 따뜻했으며 사부님 앞에서 나는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다.

실내로 들어서자 전등 아래에서 나는 사부님을 제대로 뵐 수 있었다. 크고 건장한 체격에 희고 불그스레하신 얼굴은 자비롭고 위엄이 있으셨다. 외모만 봐서는 불과 27~8세로 보일 정도였다. 사부님께서 라디오 진행자와 담화를 나누실 때, 나는 뒤에 서서 듣고 있었는데 내 몸에서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심한 냉기(冷氣)가 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런 후에 따뜻한 기운을 느꼈는데 아주 뜨겁지는 않았지만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이때에야 비로소 나는 약간 명백해졌다.

사부님께서 생방송을 하기 위해 이동하실 때 나는 사부님께 “이렇게 심한 냉기가 나오는데 혹시 사부님께서 제 병을 치료해주신 것이 아닙니까?”라고 여쭤보았다. 사부님께서는 “맞습니다. 병이란 본래 음성적인 것으로 사람의 말초신경은 아주 예민하기에 병을 몰아낼 적에 아주 싸늘한 감각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부님께서 생방송 중에 심장병 환자를 치료하실 때는 내 심장도 마치 다른 사람이 잡아 당기는 것 같았으며 싸늘한 것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때부터 나는 더 이상 심장병을 앓지 않게 되었다.

나중에 사부님께서는 설법 중에 병을 치료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 “당신이 말할 필요도 없이 내가 한번 보기만 해도 공(功)이 나가서 (병을) 몰아내는데 그러면 바로 당신에게 병 치료를 해줄 수 있다.”, “진정하게 수련하고자 하는 사람은 내가 당신의 신체를 정화시켜 줄 것이다.”,“구하려고 하지 않아야 스스로 얻을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대하여 나는 사부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전혀 의심치 않았다.

다음 날 오전 9시에 사부님께는 강당에서 보고회를 여셨는데 그날 수입은 모두 기공협회로 들어갔다.

이날 저녁 사부님께서는 다른 한 강당에서 정식으로 학습반을 여셨는데 그날은 교란이 상당히 심했다. 1층에선 사부님께서 설법을 하셨고, 이층은 댄스장으로 디스코 음악 소리, 큰소리로 떠드는 소리, 마작 하는 소리 등 각종 시끄러운 소리들이 하나로 합해져 사부님께서 설법하시고 수련생들이 설법을 듣는 데 엄중한 영향을 주었다.

강의 중간 휴식시간에는 한 젊은 농촌 부부가 한두 살 가량의 아이를 데려와서는 사부님께 병을 치료해 달라고 했다. 말로는 목에 땅콩이 걸렸다고 하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얼굴색이나 호흡에 별다른 이상이 없어 보였다. 사부님께서는 당신은 병치료를 하지 않으시니 병원에 가 보라고 권하셨다. 그러나 그 부부는 가지 않고 강단 아래에서 기다렸다. 사부님께서 설법을 끝내고 모두들 집으로 갈 무렵 그들은 또 무대위로 올라가 사부님께 아이를 봐달라며 성가시게 굴었다. 사부님께서 병을 보시지 않는다고 하자 그 남자는 사부님께 달려들어 주먹을 휘두르려 하였다. 이때 우리 몇몇 수련생들이 그 남자를 둘러싸고는 사부님을 안으로 모셨다. 그러나 그 남자는 도리어 우리의 권고를 듣지 않고 강당에서 펄쩍 펄쩍 뛰면서 큰소리로 사부님을 욕했는데, 이 장면은 늦게까지 가지 않고 있던 수련생들도 모두 보게 되었다.

나는 그 부부와 강당에 있던 수련생들을 위해 해석해 주었다. “그들이 선생님을 뵐 때 비록 선생님께서는 병치료를 하시지 않는다고 하셨고 손도 움직이지 않으셨지만, 그러나 이미 그 아이를 잘 돌봐 주셨습니다. 단지 그들이 오성이 너무 나빠서 이렇게 소란을 피운 것이지요.”(나는 줄곧 입구에서 표를 받고 있었기에 설법을 다 듣지 못했으며 이해한 것도 깊지 못했고 더구나 마(魔)가 교란하는 이런 것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했다. 더욱이 나는 이런 점에서 심각한 체험도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속으로 견디기 어려웠다. ‘그 부부가 그렇게 많은 수련생들 앞에서 사부님을 욕하고 직접 사부님의 형상에 손해를 끼쳤는데 나는 사부님을 위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다니.’ 동시에 나는 마음속으로 사부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들에게 병을 봐주셨으면서도 사부님께서는 왜 그들에게 알리지 않으셨을까?’ 이런 생각이 나오자 마자 곧 사부님께 불경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어쨌든 그날 나는 마음이 아주 무거웠다.

두 번째 강의부터는 장소를 바꾸어 진행했다. 나는 사부님께서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수련생들에게 해명해 주시고 사부님에 대한 수련생들의 오해를 풀어주시길 기다렸지만 사부님께서는 시종일관 일언반구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새로운 장소에서 설법을 하실 때에도 교란이 있어서 한 노부인이 갑자기 병이 생겨 혼미에 빠졌고 또 어떤 정신병자가 문 앞에서 시끄럽게 굴었으며 또한 기공협회 사람들은 입구에서 관음보살상을 팔기도 했다. 그래도 상대적으로 말하면 어제보다는 교란이 많이 줄어든 것이었다.

설법 도중 휴식 시간이면 나는 늘 사부님을 응시하곤 했다. 사부님께서는 조용히 그곳에 정좌하신 채, 말씀도 거의 하지 않으셨다. 그분의 얼굴은 자비롭고 상화하였으며 또한 일종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성함과 위엄이 서려 있었다. 사부님 앞에 서면 나는 항상 자신이 아주 작고 초라하게 느껴졌으며 또한 너무나 더럽고 불순하게 느껴졌다. 나는 사부님께 공경과 동시에 일종의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므로 이후 몇 년 동안 나는 내 자신이 사부님의 제자라는 말을 감히 하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사부님께서는 너무나 숭고하시고 나는 잘하지 못 하므로 사부님의 제자라는 호칭을 감히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내에서 사부님께서 말씀을 하지 않으실 때면, 모두들 조용했으며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아 침묵만이 흘렀다. 어떤 경우에는 예의상 내가 주동적으로 침묵을 깨고 사부님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눈 적도 있다. 내 기억으로는 두 번째 날에 내가 사부님께 질문 드렸던 내용은 (1) 정(情)을 중히 여기는 것은 어떠합니까? (2) 연공할 때 피곤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는 것이었는데 사부님께서는 내 질문에 대해 정면으로 답변하지 않으시고 단지 웃으시면서 “설법이 끝나면 곧 명백해질 겁니다.”라고만 하셨다.

당시 사부님께서는 한 수련생이 마련한 여관에서 머무셨는데, 그곳은 비교적 조용하고 환경도 좋은 편이었지만, 설법장소와는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수련생들에게 번거로움을 주지 않으시려고 당신께서 직접 장안로(長安路)에 있는 한 여관을 잡고자 하셨다. 이곳은 일층은 식당이고 이층은 여관이었는데 방이 아주 작았고, 또한 번잡한 도로변이라 주위 환경이 상당히 소란스러웠지만 그래도 설법장소와는 거리가 가까운 편이었다. 사부님께서는 이곳으로 숙소를 옮기고자 하셨지만 나중에 수련생들이 여러 차례 권고하자 마지못해 원래 거처에 머무르셨다.

학습반을 결속할 때 우리 시의 고관대작이 사부님께 식사를 같이 하자고 청하였으나 사부님께서는 완곡하게 사양하셨다. 사부님께서는 사람의 지위 고하(高下), 상하(上下), 귀천(貴賤), 빈부(貧富)의 차이를 보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빈곤한 수련생들에게 많은 관심을 보이셨다. 외지에서 온 수련생들의 부담을 줄여 주기 위하여 사부님께서는 매번 수련반을 여실 때마다 일요일에는 강의를 더 하셨다. 또한 우리 지역에서 설법이 끝나고 수련생들과 기념 촬영을 할 때 기공협회에서는 사진 한 장을 찍을 때마다 수련생들에게 10위안씩 받기로 했지만 사부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고 그들에게 합리적인 수준까지 가격을 내리도록 하신 후에야 사진 촬영에 동의하셨다.

학습반이 끝난 후에 사부님께선 부근에 있는 선사(禪寺), 큰 절, 천불동(千佛洞) 등에 가셨는데 나는 사부님을 모시고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애석할 뿐이었다.

94년 6월 초에 사부님께서 허난(河南)성 정저우(鄭州)시에서 학습반을 여신다는 말을 듣고 나는 휴가를 내어 설법을 들으러 갔다. 정저우 기공협회도 허울뿐이었으며 빌린 장소는 아주 협소하고 낡은 버려진 노천 체육관이었다. 입구에서 표를 받는 사람들도 정저우 관계자들 대신 베이징과 우한에서 온 사업 일꾼들이었다.

첫날 강의에 임할 때, 나는 마침 문 앞에서 연구회의 노수련생이 한 손에는 오이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빵을 든 채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내가 웃으면서 “정말 수고가 많으시네요!” 라고 말을 건네자 그는 “사부님께서도 라면만 드셨어요.”하며 웃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중에 한 노수련생이 내게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시던 초기에 있었던 일부 일들을 들려주었다. 사부님께서는 매번 공을 전하실 때 늘 기차 일반석(역주: 중국 기차의 일반석은 우리 나라 비둘기호나 통일호에 해당하는 가장 싼 표로 정해진 좌석번호가 없어서 승객이 많으면 서서 가야 한다.)을 이용하셨다. 어떤 경우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좌석이 없었고 이 경우 사부님께서는 신문지를 바닥에 깔고 누우신다고 하였다.……

강당에서 나는 사부님을 또 뵐 수 있었는데 여전히 늠름하신 모습이셨고 아주 자비롭고 위엄이 있으셨다.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누추하고 낡은 곳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설법을 하셨고 수련생들은 바닥에 앉아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제3장을 강의하실 때 갑자기 천지가 어두워지면서 모래와 돌이 날아다니고, 광풍(狂風)이 불었다. 광풍은 또한 폭우와 우박을 동반했으며 “탁탁” 소리를 내면서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 실내는 전기도 나가고 완전히 암흑으로 변했다. 광풍, 우박, 폭우가 낡은 창문을 깨뜨렸고 지붕에 있던 구멍으로 떨어져 내려왔다. 나는 마가 교란하고 있음을 알았으나 사부님께서 그것을 처리할 무슨 방법이 있으려니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뒤편에 있는 높은 무대 위에 조용히 가부좌하고 앉은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사부님을 보고 있었다. 장내에 있던 노수련생들도 이렇게 조용히 가부좌를 하고 있었다. 신수련생들은 자리에 앉지 못하고 분분히 일어나서 비를 피했다. 사부님께서는 주위를 보시더니 여러 사람들에게 한 가지 일화를 말씀하셨다. 석가모니가 당시에 법을 전할 때 한 차례 바람이 불어 등잔불이 모두 꺼졌으나 그의 제자는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으며 여전히 조용히 앉아서 석가모니의 설법을 들었다고 하셨다. 그러자 장내에 있던 수련생들은 즉각 안정을 되찾고 움직이지 않았다. 사부님께서는 설법을 중단하시고 잠시 조용히 있으신 후에 탁자 위에 올라가 가부좌를 하신 후 대수인(大手印)을 하셨다. 나는 눈도 돌리지 않고 사부님을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부님의 손 안에 두 개의 파룬이 돌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파룬이 천천히 돌면서 금광(金光)을 방사(放射)하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천목으로 정경을 본, 첫 번째 경험이었다.

사부님께서는 수인을 끝내신 후에 탁자에서 내려 오시어 탁자 위에 있던 생수병에 남아 있던 물을 다 들이키시고는 병을 펼치셨다. 마치 생수병을 이용하여 공중에서 떨어져 내려오는 어떤 물건을 받으시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어떤 것이 병 속으로 떨어져 들어갔고 사부님께서는 마개를 막아 그것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셨다. 앞 자리에 있던 수련생들의 말을 들어보니 그 병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고 나중에 사부님께서 그것을 한번 치자 조용해 졌다고 한다. 사부님께서는 웃으시면서 “마두(魔頭)가 왔으나 아무런 쓸모도 없고 단번에 처리하였다.”고 하셨다. 그러자 바람이 멎고 비가 그쳤으며 전기도 다시 들어오게 되었으며 태양도 다시 나타났다. 이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대략 30분 정도 걸렸다. 장내에 있던 모든 수련생들은 직접 이 신기한 장면을 목격하였으며 우뢰와 같은 박수를 쳤다. 둘째 날, 사부님께서는 다시 체육관에서 설법을 하셨고 그날 하루에만 단번에 매우 많은 수련생들이 새로 설법을 들으러 왔다.

사부님께서는 정저우 학습반을 결속하시자마자 곧 이어 지난(濟南)으로 설법하러 가셨다. 사부님께서는 당신께서 설법하실 시간이 곧 결속될 예정이며 지난 학습반을 끝마치신 후에 다롄(大連)에서 한번 더 여시고는 더 이상은 설법 하지 않으신다고 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듣고 우리 지역의 매우 많은 수련생들이 사부님의 설법을 듣지 않은 것이 생각나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에 나는 급하게 현지 수련생들과 친지들에게 전화 연락을 하였고 덕분에 지난 설법에는 우리 지역에서만 5~600명이 학습반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날 내가 설법이 끝나고 사부님을 뵈었을 때, 사부님께서는 몸에 낡았지만 깨끗한 옷을 입고 계셨으며 안색은 이전보다 검어지셨고 용모 또한 전에 스자좡(石家庄)에서 뵈었을 때에 비하면 훨씬 더 늙어보이셨으며 겉으로 보기에도 아주 피곤하고 우울해 보이셨다. 나중에 《2004년 부활절 뉴욕법회에서의 설법》을 보고 나서야 나는 당시 사부님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애초에 법을 전하는 이 일을 막 시작하였을 때, 나는 수련반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마주하고 하나의 문제를 생각하였다. 당시 그러한 사람들의 사상 중에는 정념이 매우 적었으며, 심지어 그 자신의 진정한 주념(主念)이 매우 적었다. 사람은 사회의 각종 의식의 영향을 받고, 후천적인 관념 속에서 양성된 세간의 각종 사물에 대한 고유의 생각, 그리고 일부 외래 요소가 사람에 대해 좌우지하는 것과 교란이 있었다. 내가 애초에 상대한 것은 바로 그러한 한 무리 중생들이었다. 그때 많은 수련생들이 대법이 좋다고 말한 것 역시 진심에서 나온 말이 아니며, 어떤 사람은 자기 신체의 거대한 변화에 대하여 감각적으로 역시 인정하는 듯 마는 듯 하였다. 이러한 중생들을 상대하였을 때 나는, 그들이 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상태 속에서 걸어 나올 수 있겠는가? 따라서 수련의 길에 또 그들 수련과 나의 정법 이 일에 대하여 교란하는 그러한 요소들이 존재하는데, 얼마나 어려운가! 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그 때 때때로 이 문제를 생각하였다.” 나는 이 글을 보고 나서 오늘에서야 진정으로 명백하게 당시 사부님께서 왜 우울해 하셨는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지난에서 사부님과 헤어진 이후 나는 지금까지 다시는 사부님을 뵐 수 없었다. 어떤 때에 나는 해외 수련생들이 부러운데, 그들은 자주 사부님을 뵐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할까! 그러나 나는 사부님께서 항상 내 곁에 계시며 나를 보호해주시고 가호해 주시며 비록 내가 굽은 길을 걷거나 곤두박질 칠 때조차도 사부님께선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음을 잘 알고 있다. “넘어졌다면 엎드려 있지 말고 빨리 일어나라!”(《2003년 정월대보름 미국 서부 법회에서의 설법)), “사실 나는 당신들 자신보다도 더욱 당신들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정진요지 2-최후의 집착을 제거하자))라는 사부님의 말씀이 때때로 내 귓가에 메아리 친다.

사부님께서는 내 손을 잡으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 서 계셨다. 나는 영원히 사부님의 홍대한 자비 속에서 생활하며 성결한 불광 속에 푹 빠져 있다……

문장완성 :2004년 7월 4일
문장발표 :2004년 7월 5일
문장갱신 :2004년 7월 5일 오후 3:19:03
문장분류 : 제자절차【弟子切磋】
원문위치 :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4/7/5/7868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