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받는 수련생 가족에게 관심을 기울이다

글/ 랴오닝성 대법제자

[명혜망] 20여 년 전 불법적으로 강제노동을 당하던 기간에, 나는 외부로 나가 노역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박해받아 다리와 발이 모두 부어올랐고 걸을 때도 벽을 짚어야만 했다. 나와 샤오팡(小芳, 가명)은 한 방에 따로 갇혔는데, 소대장은 내 몸이 회복되면 원래 분대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샤오팡은 가만히 있지 않고 자신을 감시하던 주변 바오자(包夾, 파룬궁수련생을 감시하는 일반 재소자)들에게 대놓고 물었다. “이 사람 박해받은 거 맞죠?” 우리는 단 반나절만 짧게 함께 있다가 뿔뿔이 흩어졌는데, 나를 감시하던 바오자가 불평하며 말했다. “샤오팡이 간신히 단식을 멈추고 밥을 먹기 시작했는데, 당신 때문에 이번에 또 단식을 시작했잖아.”

그토록 사악한 환경 속에서 비록 바오자들이 확고한 우리 수련생들을 시시각각 감시하며 말을 못 하게 했지만, 우리 서로의 마음은 하나로 통하고 이어져 있어 결코 깨뜨릴 수 없었다. 우리가 서로 눈빛을 한 번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더없이 큰 격려와 고무가 됐다.

1. 박해받는 수련생의 자녀에게 관심을 기울이다

몇 년이 흐른 어느 날, 시내에 나가 물건을 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그 시절의 샤오팡을 만났다. 그녀는 우리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작은 점포를 세내어 소품들을 팔고 있었는데, 생사의 고비를 함께 겪으며 걸어온 우리는 만나자마자 유난히 반가웠다. 하지만 그녀는 이곳에서 얼마 일하지 않고 우리집에서 아주 먼 곳으로 이사해 다른 장사를 시작했고, 그 후로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명혜망 소식에서 그녀의 이름을 보게 됐고 그녀가 또다시 불법 구금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즉시 이 일이 그녀의 가족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줄지 생각했다! 그녀는 이미 두 차례나 불법 강제노동을 당한 적이 있었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아주 어린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예전에 이쪽에서 장사할 때 막 유치원에 다녔으니 지금은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터였다.

나는 수련생 장(張) 언니와 상의해 아이를 보러 가기로 결정했고, 이 바람을 품자마자 다른 수련생에게서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 주소를 알게 됐다. 하교 시간에 맞춰 장 언니와 학교 교문 앞으로 갔는데, 학생들이 줄을 서서 한 반씩 나오는 모습을 보고는 그만 눈앞이 캄캄해졌다. 키나 덩치도 다 비슷비슷하고 똑같은 교복을 입고 있는 데다, 우리는 샤오팡의 아이가 몇 학년 몇 반인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학부모들이 앞으로 나가 하나씩 아이를 데려가는 통에 너무 혼란스러워 정말 절망스러웠다.

그때 장 언니가 한 아이를 쫓아갔고 나도 따라가서 물어보니 정말 그 아이가 맞았다. 잠시 후 샤오팡의 친척이 아이를 데리러 왔는데, 내가 보기에 아이의 옷이 좀 더러워 보여서 어딘가 남달라 보였다. 우리는 즉시 아이를 데리고 근처 매점으로 가서 간식을 잔뜩 사주었고, 샤오팡네 집 주소도 알게 됐다. 알고 보니 우리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고, 단지 그녀가 장사하던 곳만 집에서 아주 멀었을 뿐이었다. 두 번째로 교문 앞에 갔을 때는 샤오팡의 큰딸이 남동생을 데리러 왔다(당시 큰딸은 중등전문학교를 아직 졸업하지 못한 상태였는데, 나중에 다른 수련생 몇 분이 돕고 협조해 준 덕분에 무사히 학업을 마쳤다). 나를 본 큰딸은 차가운 표정으로 앞으로는 자신들을 보러 오지 말라고 했다. 나는 지금 아이들의 심정을 이해했기에 별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앞으로 자주 아이들을 보러 가야겠다는 일념을 굳혔다. 기억하기로 샤오팡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불법적으로 6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으로 보내졌던 것 같다.

사부님의 신묘한 안배 아래, 샤오팡이 불법 판결을 받은 후부터 내 친한 친구 하나가 자기 가게에 와서 장부 정리를 도와달라고 했다. 한 달에 300위안을 주기로 했고 시간은 내가 알아서 정하면 됐다. 이렇게 돼서 나는 매달 100위안을 내어 샤오팡네 집에 갈 수 있었다(몇 가지 제약 때문에 겨울방학과 여름방학에는 가지 않았다). 갈 때마다 아이가 좋아하는 먹을거리를 좀 샀는데, 어른이 좀 고생하는 건 괜찮아도 아이를 너무 서럽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점차 나와 샤오팡 가족의 관계는 갈수록 가까워졌다. 아직도 한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한번은 전화를 걸어 샤오팡의 큰딸에게 집에 있느냐고 물었더니 남동생과 가게에 있다며 곧 시내버스를 타고 돌아온다고 했다. 내가 미리 그들 집 건물 아래에 도착해 있었는데, 누나와 남동생이 저 멀리서부터 나를 향해 달려오던 그 장면이 내 마음속에 깊이 각인됐다. 그렇다, 그들은 모두 아직 아이들이었다! 샤오팡의 큰딸은 내 딸보다 겨우 2살 많았지만, 지금은 출근도 해야 하고 남동생 등하교도 챙겨야 하며, 빨래와 밥 짓기까지 하면서 집안을 깔끔하고 질서 정연하게 꾸려 나가고 있었다. 샤오팡의 남편은 더욱이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돌아오며 가게에서 물건을 팔았다. 나는 두 아이에게 우리 함께 엄마가 돌아오길 기다렸다가 식당에 가서 축하하자며 종종 위로해 주었다.

이 기간에 내 마음이 흔들린 적도 한 번 있었다. 어느 해 겨울밤이었는데, 날씨는 무척 춥고 바람도 거세게 불었다. 손에 먹을거리를 잔뜩 들고 걸어가면서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매달 갈 필요가 있을까? 맛있는 걸 사도 내 아이들에게는 아까워서 못 먹이고 몰래 숨겨두었다가 아이들 몰래 가져가야 하는데 말이다(당시 우리집도 넉넉지 않아서 남편 혼자 돈을 벌며 돈 관리를 했고, 내게 주는 생활비도 정해져 있어서 반드시 계산해 가며 써야 했기에 먹는 면에서 아이들에게도 아주 인색했다).’ 그렇게 걸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샤오팡네 집에 도착해 보니 어린 남동생 혼자만 집에 있었다. 누나는 출근해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아빠는 더 늦게야 돌아온다고 했다. 밥은 먹었느냐고 물으니 아직 못 먹었고 누나가 돌아와서 해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냉장실이 텅 비어 있었고, 나는 그 순간 내 생각에 정말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부끄러웠다.

이 기간에 나는 또 샤오팡의 큰딸에게 엄마를 자주 면회하러 가라고 줄곧 격려해 주었다. 내가 불법 강제노동을 당할 때 그 안에서 가족이 찾아오지 않는 수련생은 대개 박해를 아주 심하게 받아 미치거나 불구가 되거나 심지어 숨지는 경우도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경찰들에게 엄마를 박해하지 말고 건강한 몸으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집에서도 엄마가 돌아와 돈을 벌며 살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라고 일러주었다! 샤오팡의 큰딸도 그 말대로 했다.

샤오팡이 돌아왔을 때, 그녀는 그 안에서 환경을 아주 잘 개척해 법공부와 가부좌도 할 수 있었고 노동도 하지 않았으며 경찰들도 상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게다가 외워 온 수십 명의 삼퇴(중국공산당의 3가지 조직 탈퇴) 명단을 종이 한 장 가득 적어 인터넷을 할 줄 아는 수련생에게 전해 달라고 내게 건넸다. 일부 수련생이 박해받고 돌아온 뒤 가족들이 두려움 때문에 찾아온 수련생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점을 고려해, 나는 미리 두 아이에게 단단히 일러두었다. “너희 엄마가 돌아왔을 때 내게 문을 안 열어주면 안 된다! 그때 가서 엄마 생겼다고 나 모른 척하면 안 돼!”

이렇게 해서 샤오팡이 집으로 돌아온 후, 나는 그녀의 큰딸 앞에서 사부님 설법과 연공 음악이 담긴 MP3 및 수련생들의 교류 문장 등을 무사히 샤오팡에게 건네주었다. 샤오팡의 남편은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돌아오는 터라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지만, 가끔 일찍 돌아올 때 만나면 서로 아주 잘 지냈다.

샤오팡이 집으로 돌아오기 전, 나는 그녀의 큰딸에게 200위안을 주며 말했다. “적다고 생각하지 말고 며칠 뒤 엄마가 돌아오면 너희 네 식구가 아래층 작은 식당에 가서 밥이라도 먹으며 축하하렴! 나는 집안일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 없어서 함께하지 못해.”

이후 내가 샤오팡에게 사부님 설법을 전해주러 갔을 때, 그녀는 그 200위안을 슬며시 내게 돌려주며 자신은 이미 집에 돌아왔으니 수련생의 돈을 쓸 수 없다고 했다. 그때를 끝으로 우리는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그녀도 가게를 운영하느라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돌아와야 했고, 가게에서 다른 수련생들과 접촉할 수 있었기에 굳이 더 연락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2. 옥중에 있는 수련생의 어머니에게 관심을 기울이다

내가 규칙적으로 샤오팡네 집에 다닌 지 약 3~4년 뒤의 어느 날이었다. 단체 법공부를 하던 중 한 수련생이 볼일이 있어 왔다가 돌아가기 전에, 우리 지역에서 10여 년의 불법 판결을 받은 A 수련생의 노모가 지금 80세가 넘었는데 무척 외로워해 말벗이 돼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해 불법 재판이 열렸을 때 다른 수련생 몇 명이 정념이 부족해 책임을 이 A에게 떠넘겼고, 그로 인해 A가 불법적으로 무거운 판결을 받게 돼 가족들이 아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나는 이 손실을 최대한 만회해 보기로 결심했다. 설령 그 가족들의 마음이 냉담하게 돼 있다 할지라도 내 손으로 감싸 안아 녹일 수 있는 만큼은 녹여보리라 마음먹었다. 이런 목적을 품고 수련생의 안내를 받아 같은 법공부 팀의 장 언니와 함께 먹을거리를 잔뜩 사서 A의 집으로 찾아갔다.

처음 몇 번 갔을 때는 A의 아내와 큰형, 어머니 모두 아주 냉담하고 거부감도 심해서 좋지 않은 말을 많이 했다. 두 번 더 찾아간 뒤에야 어르신(A의 어머니)과의 관계가 많이 누그러졌고, 내가 급히 가려고 하면 어르신은 나를 붙잡으며 조금 더 있다 가라고 하셨다. 보통 아침과 점심에는 큰아들이 와서 밥을 해놓고는 가버리기 때문에 집에는 노인 혼자만 남아 있었다. 어르신은 귀가 좀 어두우셔서 두 아들이 어머니와 대화를 거의 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어르신은 무척 쓸쓸하고 외로워하셨다.

함께 지낸 시간이 길어지면서 내가 남아 있으면 어르신은 마음을 열고 젊은 시절 이야기부터 지금의 일, 그리고 집안의 사소한 일들까지 내게 일상적인 대화를 건네셨다. 그때마다 나는 조용히 귀를 기울였고 어르신은 무척 기뻐하셨으며, 점심 식사 시간이 다 돼서야 나는 자리를 떴다. 그 뒤로 또 한 번 갔을 때 어르신이 말씀하셨다. “그 먼 데서 왔는데, 지난번엔 날씨도 그렇게 추웠는데 점심도 안 먹고 갔잖아. 자네가 간 뒤에 내가 며칠 동안 마음이 얼마나 안 좋았는지 몰라. 왜 밥이라도 좀 먹고 가라고 붙잡지 못했을까?” 그때부터 내가 갈 때마다 점심때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어르신이 붙잡으시면 어르신과 함께 밥을 먹었다. 보통 큰아들이 아침밥을 지을 때 점심밥까지 같이 해놓기 때문에 우리는 데우기만 하면 됐고, 있는 반찬으로 한술 떴다. 밥을 다 먹은 뒤에도 어르신은 내 손을 잡고 가지 못하게 하셔서 조금 더 머물며 이야기를 더 나누고서야 갈 수 있었다. 점차 우리는 못 할 말이 없는 나이를 초월한 친구가 됐다.

한번은 어르신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네가 매번 이렇게 먹을 걸 많이 사 오는데, 내 아들(A)이 예전에 내게 말하길 수련생들의 돈이나 물건은 절대 받지 말라고 했거든. 내가 자네한테 뭐라도 좀 줘야지, 안 그러면 나중에 아들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어?”(대략적인 뜻만 기억나고 정확한 말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고는 방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시더니 약 한 병을 집어 들고 내게 이 약이 이러저러하게 좋으니 내 어머니께 드리라고 하셨다. 내 어머니와 이 어르신 모두 혈당이 높으셨는데, 나는 어르신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하는 수 없이 손에 받아 들고 왔다. 그 후로도 어르신은 내게 고구마를 두 번 주셨는데, 고구마 상자에서 이리저리 고르시며 이 고구마가 맛있다고 비닐봉지에 반 이상 담아 주시더니 내가 손에 받아 드는 것을 보고서야 안심하셨다. 어르신은 이것이 예의를 주고받는 일이고 A의 당부도 어기지 않는 것이라 여겨 마음에 흡족해하며 특별히 기뻐하셨다.

어르신 댁에 다니기 시작한 후로는 수중에 돈이 넉넉지 않아 샤오팡네 집에는 한 달 반에 한 번 가는 것으로 바꾸었고, 어르신 댁에는 1년에 4번 갔다. 어르신께 퇴직연금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 가족들이 얕보지 않도록 갈 때마다 사는 물건은 비교적 조금 고급스러운 것으로 골랐다.

어르신이 90세가 되던 해, 한번은 찾아뵙기 전에 어떻게 하면 어르신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오늘은 어르신을 모시고 바닷가에 가서 기분 전환을 시켜드려야겠다! 분명 기분이 좋아지실 거야.’ 만난 뒤에 우리는 마음이 딱 맞았고, 어르신은 우산을 지팡이 삼아 짚으시고 나는 어르신을 부축해 집 근처 바닷가로 갔다. 어르신은 들뜬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내가 여길 안 온 지가 정말 몇 년은 됐어.” 어르신은 가는 내내 이곳이 원래는 어떤 모습이었고 예전에 어떤 일이 있었으며 어디가 어떻게 변했는지 내게 이야기해 주셨다. 나는 휴대폰으로 어르신의 사진을 몇 장 찍어 그중 잘 나온 것으로 한 장 골랐고, 어르신이 잘 안 보이실까 봐 아주 크게 인화해서 다음번에 찾아뵐 때 가져다드렸다. 어르신은 기뻐하며 말씀하셨다. “내 마음을 어쩌면 그렇게 잘 알지?” 어르신은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셨고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 넘쳐흘렀다.

겉보기엔 아주 작은 행동 같았지만, 뜻밖에도 이것이 A의 아주 엄격한 두 형을 감동하게 할 줄은 몰랐다. 중공 악당이 연좌제를 실시하는 바람에 A의 사위가 중공 악당에 입당해 간부로 승진하려던 일이 무산됐고, A의 두 형은 어르신을 뵈러 오는 수련생들에게 그 화풀이를 했다. 한번은 어르신 댁에 갔더니 어르신이 내게 말씀하셨다. “자네 앞으로는 오지 말게. 우리 두 아들이 화가 나서 아무도 오지 못하게 했어.”

어느 날 길에서 인연 있는 사람을 찾아 진상을 알리다가 뜻밖에도 어르신이 말씀하시던 둘째 아들을 보게 됐고, 그도 나를 알아보았다. 내가 어르신의 건강 상태를 묻자 그는 아주 좋으시다고 답했다. 나는 그에게 어르신 말씀이 형제분이 아무도 오지 못하게 하셨다길래 나도 감히 가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가 물었다. “우리 어머니 사진 찍어준 그 분 맞죠?” 내가 “맞아요”라고 답하자 그가 말했다. “당신은 가도 됩니다.”

또 한번은 A의 큰형이 굳은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우리 어머니 사진 찍어준 그 여자분 맞습니까?” 내가 “맞아요”라고 하자 그가 말했다. “오시는 건 좋은데, 어머니한테 당신들 그 일(대법 진상을 가리킴)은 말하지 마십시오.” 점심 식사 시간이 돼 내가 가려고 하자 A의 큰형이 말했다. “여기서 식사하고 가십시오! 지난 몇 년간 우리와 함께 어머니를 돌봐줘서 감사합니다.”

마침내 어느 날, 나는 때가 무르익었다고 느껴 용기를 내어 진상 편지 한 통을 썼다. 어르신과 큰아들이 긴장하거나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정식 편지지를 쓰지 않고 내 아이가 학교 다닐 때 쓰다 남은 일기장 속지를 사용했다. 봉투도 쓰지 않고 아이가 학교 다닐 때 쓰던 색종이를 이용해, 수련생의 수정을 거친 편지를 작게 접어 감싼 뒤 어르신께 큰아들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노인은 눈빛에 두려움을 내비치며 글을 모르니 내게 물으셨다. “여기에 뭘 쓴 거여?” 내가 말했다. “두려워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 안에 큰아드님 칭찬을 썼거든요.” 실제로 나는 진상을 알리는 동시에 노인을 효성스럽게 모시는 그의 중화 전통 미덕을 칭찬했고, 아들이자 딸 노릇까지 하며 노인을 돌보는 일이 쉽지 않음을 이해한다고 적었다. 아울러 그해 법정에서 정념이 부족해 그 가족들에게 상처를 준 수련생들을 대신해 그에게 깊은 참회의 마음을 전했다.

다음번에 내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선물을 잔뜩 들고 어르신을 뵈러 갔을 때, 건물 아래층 돌의자에 앉아 계시던 어르신과 마주쳤다. 어르신은 긴장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또 이렇게 물건을 많이 사 왔구먼! 어서 물건 가지고 돌아가게. 곧 우리 큰아들이 올 텐데, 요 며칠 그 애가 또 화를 내면서 앞으로 누구한테도 물건을 받지 말고 아무도 오지 못하게 했어. 식구 중에 딸아이가 무슨 시험을 보는데 또 영향을 받은 모양이야.” 내가 어르신께 그 편지를 큰아들에게 전해주었느냐고 묻자 전해줬다고 하셨다. 큰아들이 그 편지를 다 읽고 화를 내더냐고 물으니 그렇지는 않았다고 하셨다. 어르신은 내게 말씀하셨다. “앞으로는 오지 말게. 천하가 태평해지면(박해가 멈추면) 그때 우리 다시 보세!” 어르신이 거듭 재촉하시는 바람에 나는 물건을 들고 자리를 떴고, A가 억울한 옥살이를 마치고 당당하게 걸어 나올 때까지 다시는 찾아가지 않았다.

A가 돌아온 후 주변의 친숙한 수련생 몇 명이 내게 A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전해주었다. 그 순간 문득 수년 전의 어느 날이 떠올랐다. 어르신이 방긋 웃으시며 종이 한 장과 펜 하나를 꺼내더니 내게 이름을 그 위에 적어달라고 하셨던 일이다. 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중공 악당의 박해 때문에 안전을 고려해 수련생들끼리도 서로 이름을 묻지 않는데 어르신이 무슨 뜻으로 이러시나 싶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어르신의 그 순수하고 선량한 눈빛을 보고는, 90세 노인이신데 알려드려도 무방하겠다 싶어 내 본명을 그 종이에 적어드렸다. 어르신이 말씀하셨다. “내가 글은 몰라도 자네가 쓴 이 세 글자는 알겠어. ○○○이라고 하는구먼.” 어르신이 내게 읽어주셨는데 정말 맞았다. 뜻밖에도 어르신은 그때 내 이름을 적어두었다가 A가 돌아오면 알려주려고 하셨던 것이다. 수련생을 통해 알게 된 바에 따르면, 그해 A의 큰형에게 썼던 그 편지가 실제로 큰형에게 아주 좋은 긍정적인 작용을 일으켰고, 큰형이 그 편지를 A에게도 건네주어 읽게 했는데 A 역시 그 편지에 매우 공감했다고 한다. 나는 A를 만나지 않았다. 원래부터 서로 일면식도 없던 사이라 만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며, 단지 수련생을 통해 출옥 후에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법공부를 많이 하면서 우선 조급하게 일부터 하려 하지 말라는 말을 그에게 전했을 뿐이다.

 

원문발표: 2026년 11월 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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