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째 이어지는 ‘가보’

— 야마시타 씨 대가족의 이야기

​[명혜망](도쿄 지국) 2026년 8월의 어느 날, 일본의 한 유명 관광지 인근에 행인이 붐볐다. 뙤약볕 아래 88세인 야마시타 시게하루(山下重治) 씨와 여러 세대에 걸친 자손들이 교차로에 서서 행인들에게 파룬궁수련생이 중국에서 겪고 있는 박해 상황을 소개하며 서명을 받았다.

그중 가장 어린아이는 올해 8살로, 앳되면서도 우렁찬 목소리로 서명하는 행인마다 진지하게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예의 바르게 90도로 인사했다.

아이들은 저마다 더위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땀을 비 오듯 흘렸다. 발걸음을 재촉하던 적잖은 행인들이 이 장면을 보고 발길을 돌려 정중하게 서명했다. 서명을 마친 후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정말 귀엽네, 힘내!”라고 칭찬하는 사람도 있었고, 외국인 관광객들은 더위를 식히라며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기도 했다. 이런 따뜻한 장면들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아이들을 데리고 거리에 나선 사람은 그들의 외증조할아버지인 올해 88세의 야마시타 씨다. 90세를 바라보는 그는 정정하고 허리가 꼿꼿했다. 노인의 자상하고 온화한 미소를 마주하고 많은 행인이 흔쾌히 펜을 건네받아 서명했다.

88세인 야마시타 씨가 자손들을 데리고 거리에서 파룬궁 박해 반대 서명을 받고 있다.(명혜망)

평소 야마시타 씨는 매주 자전거를 타고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를 소개하는 자료를 배포하러 나가며, 한 번 나가면 몇 시간씩 혹한과 폭염에도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다.

매주 자전거를 타고 파룬따파를 소개하는 자료를 배포하러 나가는 야마시타 씨는 수년간 이를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명혜망)

어린 시절 겪은 고난에도 원망은 남지 않아

야마시타 씨는 5살 때 부모를 따라 일본에서 중국으로 갔다. 2년 후 아버지가 패전으로 러시아로 보내지자, 어머니는 어린 그를 데리고 살아갈 길이 막막해 현지에서 한 중국인과 재혼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야마시타 씨는 새아버지가 일본인을 증오해 복수할 목적으로 어머니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어린 그는 그로 인해 온갖 고생을 다 했다. 중국 동북부의 겨울은 뼈를 에는 듯이 추운데, 발을 녹일 신발이 없어 소똥 속에 발을 넣어 온기를 찾아야 했다. 가정 형편 등 이유로 학교 교육을 받을 기회도 없었다. 남동생이 5살이 되던 해 마침내 일본에 있는 친척들이 모자 세 사람을 찾아냈다. 일가족은 일본으로 돌아갈지 말지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당시 야마시타 씨는 동생을 안고 어머니에게 “동생이 아직 이렇게 어린데 동생을 버릴 수는 없어요”라고 말했다. 이렇게 그는 어머니, 동생과 함께 남기로 선택했다. 동생은 훗날 형의 당시 선택을 늘 기억하며 평생 감사히 여겼다.

중일 수교 후 일본은 중국에 남겨진 일본인을 데려오기 시작했다. 야마시타 씨는 어머니, 동생, 그리고 새아버지와 함께 일본으로 돌아왔다. 귀국한 후 야마시타 씨는 어린 시절의 일로 새아버지에게 원한을 품지 않았고, 자신이 겪었던 고생을 자녀들에게도 그다지 말하지 않았다. 그는 앙금을 마음에 두지 않고 계속 새아버지를 부양하기로 했다.

이 일은 그의 인생에서 아주 깊은 기억이 됐다.

병마가 온 가족의 인생을 바꾸다

1997년 초, 당시 60세였던 야마시타 씨는 위장암 진단을 받고 살날이 2~3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다. 갑작스러운 비보에 온 가족은 절망에 빠졌다. 야마시타 씨 역시 매일 수심에 차서 밥을 넘기지 못했다.

온 가족이 속수무책일 때 멀리 살던 동생이 소식을 듣고 그에게 파룬따파를 소개했다. 알고 보니 동생도 전에 후두암을 앓아 병원에서 3개월밖에 못 산다는 진단을 받았었다. 동생은 우연히 서점에서 파룬궁 주요 서적인 ‘전법륜(轉法輪)’을 보게 됐고, 첫머리의 ‘논어(論語)’를 읽었을 때 마치 보물을 얻은 것 같아 책을 구매해 밤을 새워 아침까지 단숨에 읽었다. 이후 연공을 시작하자 몸이 편안해지고 목도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병원에 다시 가서 재검사를 받았을 때 암세포는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동생의 경험을 듣고 야마시타 씨도 따라 연공을 시작했다. 당시 이미 음식을 넘길 수 없었던 그는 연공을 며칠 한 후 밥을 먹을 수 있게 됐다. 이어서 그는 ‘전법륜’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새로운 어려움이 나타났다. 야마시타 씨는 학교에 다닌 적이 없어 글자를 몰랐던 것이다. 그는 이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바로 각 글자의 음을 그림으로 그려 글자 학습용 작은 종이 카드를 만드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편작(扁鵲)의 ‘편(扁)’ 자는 멜대를 그려서 기억을 도왔다. 그와 아내는 매일 한 글자씩 읽어 나갔다. 1년도 채 안 돼 그들은 332페이지에 달하는 ‘전법륜’을 다 읽었고, 나중에는 다른 파룬궁 저서도 읽을 수 있게 됐다. 야마시타 씨의 위장암도 얼마 지나지 않아 완치됐으며 그 후로 한 번도 재발하지 않았다. 온 가족이 대법의 신기함을 목격했다.

학교에 다닌 적이 없어 글자를 몰랐던 야마시타 씨가 집중해서 ‘전법륜’을 읽고 있다.(명혜망)

이런 경험을 한 후, 그의 친척, 사돈, 자녀, 손자들이 잇따라 수련을 시작했고, 야마시타 대가족은 전후로 40여 명이 수련에 들어섰다.

야마시타 씨의 자녀, 손주들이 자주 함께 법공부를 하고 있다.(명혜망)

4대가 함께 자라다

어느덧 29년이 지났고, 야마시타 씨는 여전히 정정하다. 스스로 일상생활을 온전히 돌보아 자손들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택 식당이 바쁠 때면 손발을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며 설거지, 만두 빚기, 칼 갈기 등을 돕는다.

어릴 때부터 파룬따파를 수련하기 시작한 증손자들도 이런 가정환경 속에서 자랐다. 아이들 여럿이 모여도 다투는 일이 거의 없고 늘 서로 배려하며 양보한다. 한번은 손님이 집에 와서 말을 잘 듣고 철든 아이들을 보고는 진심으로 “댁의 아이들이 이렇게 훌륭한 걸 보니 파룬궁이 틀림없이 좋은 게 맞네요!”라고 말했다.

야마시타 씨의 외증손자 두 명은 현재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최근 몇 년간 아버지의 발령으로 거의 매년 전학을 해야만 했다. 두 형제는 품행이 바르고 공부도 잘하며 파룬궁에서 배운 ‘진선인(眞·善·忍)’으로 처신했다. 어딜 가든 새로운 환경에 빠르게 적응했고 선생님과 친구들의 사랑을 받았다. 부모가 학교에서 누구와 가장 친하냐고 물으면 아이들의 대답은 “모두가 우리의 좋은 친구예요”였다.

매년 여름방학이면 각지에 흩어져 있던 증손자들이 고향 집으로 돌아와 온 가족이 함께 모여 법공부와 연공을 한다. 아이들은 ‘전법륜’을 읽을 때 온 정신을 집중하고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자발적으로 질문한다. 생활 속의 사소한 일에서도 아이들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아이들은 자발적으로 방학 숙제를 일찌감치 끝내고, 아침 식사 후에는 스스로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바닥을 닦으며 집안일을 분담한다. 이번 여름방학에 돌아왔을 때, 8살인 아이가 할아버지와 함께 현관문을 들어서며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먼저 이렇게 말했다. “할아버지 먼저 올라가세요. 제가 할아버지 신발을 신발장에 넣어드릴게요.”

말 한마디, 작은 행동 하나 등 사소한 부분에서 순수한 선의 가풍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노인부터 아이까지 함께 거리로 나서다

중국공산당(중공)이 파룬궁 박해를 일으킨 후, 야마시타 씨 일가는 오랜 기간 여가 시간을 활용해 대중에게 파룬궁수련생이 중국에서 겪고 있는 박해 상황을 소개하며 박해를 함께 종식할 것을 호소했다.

20여 년 전 야마시타 씨는 일본에서 열린 SOS 도보 행사에 참가해 일본 최남단에서 도쿄까지 줄곧 걸어갔는데, 발바닥에 핏물집이 잡히고 피부가 벗겨져도 그는 힘들다고 하지 않았다. 팔순이 넘은 노인이 된 지금도 그는 여전히 무거운 진상 자료를 짊어지고 거리를 누빈다. 등에 땀이 흥건히 배어도 피곤함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파룬궁 사부님께서 건강한 몸을 주셨으니, 저 자신을 잘 수련해야만 사부님의 자비로운 제도에 보답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야마시타 씨의 자녀, 손자들 역시 각자의 일과 생활 속에서 ‘진선인’ 원칙으로 자신을 단속하는 동시에, 여가 시간을 활용해 대중에게 파룬궁수련생이 중국에서 겪고 있는 박해 상황을 알린다. 올해 여름방학에는 15살인 외증손녀와 각각 10살, 8살인 두 명의 외증손자가 야마시타 씨를 따라 관광지에 와서 박해 반대 서명을 받았다.

불볕더위 속에서도 야마시타 씨는 2~3시간을 서 있었다. 큰 외증손자는 행인의 각기 다른 상황에 맞춰 일본어와 영어를 자유롭게 바꿔가며 예의 바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작은 외증손자는 서명판을 안정적으로 들고 한 손에는 자료를 준비해 두었다가 행인이 서명을 마치면 자료를 건네며 진심으로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돌아가셔서 꼭 한번 읽어봐 주세요.” 15살의 외증손녀는 동생들을 돌보면서 서명을 받았다. 남매 셋은 호흡이 잘 맞아 손발이 척척 맞았다.

뙤약볕 아래 아이들의 앳된 얼굴엔 땀이 가득했다. 하지만 돌아가는 길에 아이들은 유난히 즐거워 보였다. 남매 셋은 길을 가며 내내 웃고 떠들어 낮의 무더위는 이미 잊은 듯했다.

4대째 이어지는 ‘가보’

1997년부터 30년 가까이 지나오며 야마시타 씨 일가는 삶의 굴곡을 겪었고, 이 대가족의 변화도 지켜보았다. 오늘날 집안의 어르신은 여전히 정정하고 아이들 역시 이런 가정환경 속에서 자라고 있다.

이 대가족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아마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아니라 가족끼리 서로 관심을 가지고 양보하며 생활 속에서 진선인을 견지하는 태도일 것이다. 이런 소소한 모습들은 아이들의 일상 언행에도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어른들에게서 아이들에게 전해져 일상생활 속에서 계속 이어지는 이 선량함과 끈기는 야마시타 씨 일가가 다 함께 소중히 여기는 ‘가보’가 됐다.

 

​원문발표: 2026년 9월 1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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