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허베이성 대법제자
[명혜망] 나는 1997년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를 수련하기 시작했고 올해 60세다. 평소 명혜망의 교류 문장을 자주 들으며, 자신의 수련과 법을 실증하고 사람을 구한 경험을 글로 써내는 수련생들이 매우 부러웠다. 나도 쓰고 싶었지만 정작 쓸 만한 내용이 없다고 생각했다. 최근 수련생들의 격려에 힘입어 마침내 내 수련 경험을 써서 사부님께 보고하기로 결심했다.
1. 사부님께서 나를 위험에서 구해주시다
1996년 둘째 아이가 태어났다. 출산 다음 날 밤 배추소를 넣은 큰 찐빵 3개를 먹었는데 당시에는 정말 맛있게 먹었다. 뜻밖에도 먹고 난 후 몸이 망가졌다. 매일 배가 잔뜩 부풀어 오르고 온몸이 괴로워 죽는 것만 못했다. 겨우 아이가 태어난 지 한 달이 지날 때까지 버텼고 남편이 나를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받게 했다. 중의학, 서양의학 등 온갖 치료법을 다 써봤지만 호전되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의사들도 모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산후풍은 난치병이라 치료할 수 없습니다.”
나는 정말 하루하루가 1년 같았고 밥도 넘기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했다. 아이가 4개월 됐을 때 강제로 피임 수술까지 받았다. 이로 인해 몸은 완전히 망가졌고 너무 고통스러워 그저 죽어서 해탈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어린 두 아이를 보니 또 너무나 미련이 남았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고통스러웠던 그때 집을 나섰다가 이웃 할아버지를 만났다. 할아버지는 나를 보자마자 물으셨다. “손자며느리, 몸이 안 좋은가? 이렇게 마르다니.” 나는 병에 걸려 치료해도 소용없었던 과정을 할아버지께 말씀드렸다.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걱정하지 마. 책 한 권 줄 테니 봐봐. 다 보고 나면 어떤 병이든 다 없어질 거야.”
나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할아버지가 주신 ‘전법륜(轉法輪)’을 보기 시작했다. 배운 게 많지 않아 모르는 글자가 많았다. ‘수련(修煉)’이라는 두 글자를 보자마자 마음에 큰 울림이 있었고 당시 바로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수련하겠다.’ 계속 내려가다 보니 ‘진선인(眞·善·忍)’이라는 세 글자가 보였고 나는 벅찬 마음으로 생각했다. ‘이게 바로 내가 찾던 거야. 정말 좋다!’
그 후 기적이 일어났다. 하루에 화장실을 10여 차례나 갔고 이후 부풀어 올랐던 배가 가라앉았으며 온몸의 병고가 다 사라져 걸음걸이가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배고픔이 느껴졌고 차갑고 딱딱한 것도 뭐든 감히 먹을 수 있었다. 사부님께서 내게 두 번째 생명을 주셨고 건강한 몸을 주시어 나를 반본귀진(返本歸眞, 선천적인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의 수련 길에 오르게 하셨다.
나는 또 이웃 할아버지 댁에서 열린 사부님 설법 비디오 시청 9일 학습반에 참가해 수련생들과 함께 사부님 설법 비디오를 보았다. 어린 아들을 안고 법공부를 하러 갔는데 사부님께서 하신 말씀 한마디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들이 잠들면 안고 집으로 돌아가 남편에게 맡긴 뒤 다시 할아버지 댁으로 뛰어가 계속 시청했다.
막 법을 얻은 나는 법광(法光)에 흠뻑 젖어 많은 신의 기적을 목격했고 그 2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2. 사존께서 나에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밝혀주시다
1999년 7월 중국공산당(중공)이 파룬따파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우리 마을에는 대법제자가 비교적 많았기에 시(市)와 현(縣)에서 중점적으로 박해받는 마을이 됐다. 진상을 모르는 마을 간부들이 파출소와 결탁해 대법제자를 감시하고 미행했다. 수시로 경찰차가 마을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언제든 대법제자 집에 난입해 불법 가택수색을 하고 대법서적을 뒤지며 대법제자를 위협하고 공갈했다. 악질 경찰도 몇 번이나 우리집에 들이닥쳐 아이들을 기겁하게 했고 수련하지 않는 남편도 몹시 겁먹게 했다.
하지만 수련생들의 법을 실증하려는 결심은 반석처럼 굳건했다. 우리는 자주 짝을 지어 나가 주변 십 리 밖 여러 마을에 진상 자료를 배포했다. 어느 날 밤 우리 수련생 몇 명은 20여 리 떨어진 마을에 집집마다 진상 자료를 배포하러 갔는데 길에서 경찰차 한 대가 남쪽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았다. 마을 서쪽까지 배포했을 때 갑자기 한 수련생이 큰 소리로 외쳤다. “빨리 도망쳐요!” 정신을 차려보니 경찰차가 이미 아주 가까운 곳까지 와 있었고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수련생 한 명이 납치됐다.
나는 마을 서쪽 밀밭으로 뛰어갔다. 집으로 가는 길을 몰라 그저 서쪽에 집이 있다는 것만 알고 서쪽으로 걸었다. 길 내내 밀밭 아니면 대추나무 숲이었고 키 작은 대추나무 가지가 바짓가랑이를 스치며 가시가 다리를 찔러 몹시 아팠다. 발밑에서 끊임없이 들고양이나 족제비가 튀어나왔지만 평소 겁 많던 나는 그때 전혀 두렵지 않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사부님이 계시고 법이 있는데 난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
걷다 보니 발밑에 솥뚜껑만 한 빛이 나타났다. 그 빛은 내 발밑에서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며 내 앞길을 비춰주었다. 나는 즉시 사부님께서 나를 집으로 이끌어주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 빛을 따라 걷고 또 걸어 어느 도랑가에 다다랐다. 도랑 안에 하얀 포대가 하나 있는 것을 보고 집에서 나올 때 봤던 장면임을 떠올렸고 곧 집에 도착한다는 것을 알았다.
집에 돌아오니 이미 한밤중이 지났다. 집 문에 들어서자 남편이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무 말도 없이 그저 그렇게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나는 그의 뜻을 알았다. 우리집의 평온을 위해 내가 수련을 포기하길 바라는 것이었다. 그의 압박감은 이해하지만 대법은 내 목숨보다 소중한데 어떻게 포기하겠는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남편은 한참을 꿇어앉아 있다가 나중에 스스로 일어났다. 그 후부터 그는 줄곧 내 수련을 지지했다.
3. 복잡한 가정에서 선량함을 유지하다
처녀 시절 친정에 있을 때 나는 귀하게 자란 딸이었다. 위로 오빠가 두 명 있었고 부모님과 오빠들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자랐다. 혼기가 찼을 때 조건 좋은 혼처가 몇 군데 있었지만 모두 얄궂게도 성사되지 않았다.
누군가 지금의 남편을 소개했을 때 부모님은 반대하셨다. 남편 집안이 너무 복잡했기 때문이다. 남들 말로는 이랬다. “이 집에 시집가면 상주 노릇 해야 할 사람만 5명이야(시부모님, 시아버지 형제 내외, 독신인 작은아버지).” 남편에게는 형이 세 명 있었는데 큰형만 결혼했고 둘째 형과 셋째 형은 독신이었으며 셋째 형은 지적 장애가 있었다.
하지만 인연이 닿아 막을 수 없었고 나는 결국 이 복잡한 가정으로 시집왔다. 시집온 후 우리는 따로 살았고 시부모님과 두 아주버니는 다른 쪽에서 지냈다. 수련 전에는 그저 어머니 당부대로 시부모님과 두 아주버니를 잘 대했다. 친정에서 돌아올 때마다 먼저 시부모님 댁에 들러 친정에서 가져온 맛있는 음식을 절반 남겨드렸다. 장에 갈 때도 시부모님께 절반을 드리고 우리집으로 왔다.
우리집은 워낙 가난해 고기도 아까워 잘 못 먹었다. 수련 후 나는 매번 고기 찐빵을 찔 때 두 종류로 나눴다. 고기가 많고 채소가 적은 찐빵은 시부모님과 아주버니들께 드리고 고기가 적고 채소가 많은 찐빵은 우리 식구가 먹었다. 10여 년 사이 시부모님과 둘째 아주버니가 잇달아 세상을 떠나셨다. 둘째 아주버니가 돌아가신 후 지능이 낮은 셋째 아주버니만 남게 되어 나는 셋째 아주버니가 외로울까 봐 우리 식구는 매일 세끼를 셋째 아주버니 댁에서 먹었다.
둘째 아주버니가 돌아가신 후 남긴 양 10여 마리를 남편이 팔려 했다. 우리가 키울 시간도 없고 셋째 아주버니는 돌볼 줄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셋째 아주버니는 한사코 고집을 부리며 자기가 키우겠다고 해 어쩔 수 없이 따랐다. 하지만 셋째 아주버니는 양을 돌보지 않았고 나 혼자 매일 밭에 가서 양풀을 베어와 마당에 쌓아두고 때가 되면 양에게 몇 줌씩 주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셋째 아주버니는 거의 주지 않아 풀은 썩고 양은 굶어 말라갔다.
며칠 뒤 남편이 양을 사갈 사람을 불렀다. 양을 팔게 되자 셋째 아주버니는 몹시 화를 내며 발작을 일으켜 양을 사러 온 사람을 쫓아가 때리려 했다. 양 장수가 날쌔서 맞지는 않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셋째 아주버니는 나에게 분풀이를 했고 내가 방심한 틈을 타 삽을 들고 내 머리를 내리쳤다. 다행히 아들이 재빨리 치명적인 공격을 막아주었다.
당시에는 화나고 억울했지만 나중에는 변함없이 셋째 아주버니를 선하게 대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요구했다. 셋째 아주버니는 치아가 안 좋아 아무리 더운 날에도 나는 하루 두 끼 묽은 죽을 쑤어 찐빵을 적셔 드시게 했다. 찬 면을 먹을 때는 셋째 아주버니 몫을 주걱으로 짧게 잘라 씹기 편하게 해드렸다. 그렇게 셋째 아주버니를 7년 더 모시다가 돌아가실 때까지 돌봐드렸다.
남편의 작은아버지도 독신이라 혼자 사셨기에 나는 자주 먹을 것을 가져다드렸다. 밀가루가 떨어진 걸 보면 한 포대씩 가져다드렸다. 가끔 작은아버지가 농사일로 바쁘실 때는 지저분한 옷을 우리집으로 가져와 빨고 말린 뒤 다시 갖다 드렸다. 작은아버지는 밖에서 내 칭찬을 많이 하셨고 마을에서 내 평판이 좋은 것은 대부분 작은아버지의 인정 덕분이었다.
남편의 큰형은 욱하는 성격 탓에 일찍 결혼했다가 이혼해 조카를 남겼다. 최근 몇 년간 조카네 식구들도 자주 우리집에 와서 밥을 먹었다. 나는 맛있는 걸 할 때마다 그 식구들을 불러 함께 먹었다. 조카도 성질이 안 좋아 밥을 먹으면서 입에 발린 말 한마디 안 했다. 한번은 우리집에서 국수를 먹는데 내가 잘 비벼 건넸더니 웬일인지 조카가 국수 그릇을 통째로 마당에 엎어버렸다. 남편이 화가 나서 조카를 꾸짖었다. 나는 화나지 않았고 조카를 전과 다름없이 대했다.
결혼한 지 30년이 넘었고 어르신 몇 분과 아주버니 세 분을 떠나보냈다. 이 수십 년간 억울할 때가 없진 않았지만 대법을 수련한 그날부터 ‘진선인’ 세 글자를 확신하고 진정으로 수련하는 제자가 되려 했다. 마을 사람들도 모두 내 인품을 인정했다.
4. 온갖 고난이 닥쳐도 정념을 확고히 하다
나중에 환경이 느슨해지자 나는 오히려 해이해졌고 서서히 수련에서 벗어나 몇 년을 보냈다. 그러다 어느 날 장터에서 정진하는 수련생 한 분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수련생은 내게 말했다. “우리는 함께 인간 세상에 왔으니 반드시 함께 돌아가야 해요.” 이 말은 내 마음을 깊이 울렸고 나는 큰 장터에 선 채 눈물을 펑펑 쏟았다.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나는 돌아갈 거야. 이번엔 다시는 포기하지 않겠어.’ 하지만 이후의 날들은 내게 그야말로 온갖 고난이 한꺼번에 닥쳐오는 것 같았다.
그때 아들은 이미 결혼해 어린 손자를 두었다. 며느리가 여러 인터넷 사이트에서 도박을 해 20여만 위안(약 4천만 원)을 잃었고 남편과 내가 대신 갚아주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 부부도 피땀 흘려 돈 벌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며느리 대신 10여만 위안을 갚아주었다. 뜻밖에도 이때 며느리가 아들과 이혼했고 어린 손자는 매일 울며 엄마를 찾았다. 어린아이를 보니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고 며느리에 대해 강한 원망심이 생겨 며느리 대신 빚 갚아준 영수증을 들고 찾아가 사람들 앞에서 무정하고 의리 없다고 호통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동안 남편이 두 번이나 큰 병으로 입원해 내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집에서 누워 쉬고 있는데 갑자기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딸은 대뜸 이렇게 물었다. “엄마, 어디야? 통화 괜찮아?” 나는 말투만 듣고도 큰일이 터졌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때 냉정을 되찾으며 무슨 일이 있어도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나는 딸에게 말했다. “무슨 일인지 말해봐.” 딸이 말했다. “남동생이 운전하다 사람을 쳐서 죽였어.” 남편과 나는 이리저리 돈을 긁어모으고 또 15만 위안을 빌려 유족에게 배상했다.
이 일들은 모두 중공 바이러스(우한 폐렴) 사태 기간에 일어났다. 그때 나는 막 수련으로 돌아온 참이라 이런 큰 타격은 확실히 사람 마음을 크게 시험했다. 하지만 그 시기에 내 수련 의지는 더욱 굳건해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더 이상 수련에서 타협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며느리에 대한 원망심을 내려놓았다. 어린 손자는 훌쩍 자라 나와 함께 법공부를 자주 했고 내가 세 가지 일을 하는 데 전혀 방해되지 않았다.
5. 진상을 알리고 사람을 구하는 것은 나의 사명
최근 몇 년간 사람을 구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시급한지 갈수록 절감했고 직접 대면해 진상을 알리는 것이 가장 직접적인 구원 방식임을 깨달았다. 이웃, 친구, 손자의 친구들, 상인들, 우연히 만난 인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내가 진상을 알리는 대상이다.
손자는 올해 9살인데 다양한 연령대의 친구들이 자주 우리집에 놀러 온다. 이 아이들 중 14~15세쯤 되어 손자 또래가 아닌 아이들도 있는데 나는 이 역시 사부님께서 진상을 들으라고 안배하신 거라 생각한다. 나는 아이들에게 파룬따파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아이들이 삼퇴(중국공산당의 3가지 조직 탈퇴)의 의미를 쉽게 이해하도록 이끌어주어 아이들은 줄줄이 삼퇴했다. 손자의 친구들은 무리가 계속 바뀌었는데 거의 다 진상을 알게 됐다.
가장 인상 깊었던 아이는 손자와 동갑인 이웃집 9살 조카딸인데 나를 넷째 큰어머니라 부르고 손자는 그 애를 작은고모라 부른다. 어느 날 조카딸이 집에 놀러 와서 내가 두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주자 무척 맛있게 먹었다. 조카딸도 소년선봉대에 가입해 있어서 나는 이 어린 생명이 대법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동시에 악을 멀리하길 바랐다.
나는 조카딸에게 말했다. “우리 예쁜 아가, 큰어머니가 네게 가장 행복하고 좋은 일 하나를 말해주고 싶구나. 큰어머니가 책을 한 권 봤는데 이 책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쳐주고 ‘진선인’ 세 글자에 따라 행동하라고 알려준단다.” 조카딸은 아주 진지하게 들었다. 나는 또 벽에 붙은 명혜망 연화(年畫)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 봐. 그림 속 아기가 얼마나 귀엽니. 너도 그림에 있는 아홉 글자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자주 외우면 이 아기처럼 똑똑하고 착해질 거야.”
나는 다시 조카딸을 타일렀다. “네가 가입한 소년선봉대는 미래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으니 탈퇴하렴. 그러면 네가 더 순수해질 거야.” 언제부터인지 조카딸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펑펑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린 손자가 물었다. “할머니, 작은고모 왜 울어요?” 내가 대답했다. “작은고모가 너무 벅차서 우는 거야.” 조카딸은 울면서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것이 생명의 진상을 깨달은 일면이 구원받은 기쁨의 눈물임을 알았다. 조카딸은 탈퇴에 동의했고 내 삼퇴 명단 종이에 직접 자기 이름을 적었다.
이 일은 내게 큰 깨우침을 주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기다리고 있다. 사부님께서 우리를 위해 연장해주신 시간을 반드시 잘 활용해 최대한 많은 사람을 구하겠다.
나는 예전의 해이했던 모습이 너무나 부끄럽고 사부님의 자비로운 제도에 면목이 없다. 앞으로는 정진하고 착실히 수련하며 사람을 많이 구해 사존께 조금이나마 위안을 드리고 싶다.
원문발표: 2026년 9월 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6/9/8/1399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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