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산둥성 대법제자
[명혜망] 저는 1996년 3월부터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그 전해인 1995년, 저는 갑상선암으로 보름 만에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습니다. 수술의 고통이 너무 커서 병원 생각만 해도 두려웠습니다. 유선과 자궁에도 혹이 있었지만 감히 검사받으러 가지 못했습니다. 일찍이 아버지는 암으로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유방암이 폐로 전이돼 고통스럽게 살고 계셨습니다. 저는 집안 맏이였고 동생들은 아직 결혼 전이었으며, 막내 남동생은 기술학교를 졸업하지도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 당시 제 아들은 겨우 다섯 살이었습니다. 친정집의 무거운 짐이 저에게 지워져 어머니를 보살펴야 했고, 두 남동생과 여동생 하나를 결혼시켜야 했지만 돈이 없었습니다. 제 몸까지 병들었으니 가족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저는 모든 희망이 사라진 듯했고 쓰러질 수도 없었으며,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아득한 가운데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겠고, 갈 때가 되면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이 짧은 인생을 헛되이 사는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에 기공이 보이기만 하면 연마했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를 연마해 봐도 모두 헛수고였고 기공이 도대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기공이 무엇인지를 간절히 알고 싶어 하던 중, 제가 다니던 공장 게시판에 기공 강좌 안내문이 붙었습니다. 그러나 4일 저녁 내내 강좌를 들으러 갈 시간을 낼 수 없었습니다. 저는 동료들에게 가서 듣고 와서 말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들은 이틀 동안 가서 듣더니 강좌 내용이 무엇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하겠다며 더는 가지 않았습니다.
5일째가 돼서야 겨우 시간을 냈습니다. 저는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 제5강부터 듣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앞의 4강은 듣지 못했지만 강의 내용이 마치 제가 찾던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정말 이렇게 운이 좋은 걸까요? 그때부터 깊은 기쁨에 겨워 온종일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매일 먹어야 했던 커다란 약봉지를 모두 버리고 온전히 자신을 사부님께 맡겼습니다.
한 달이 채 안 돼 선명한 꿈을 꾸었습니다. 어느 길 끝에 오래된 큰 나무가 있었고, 저는 어린 도동(道童)의 모습으로 총채를 든 노도사 곁에 서 있었습니다. 앞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긴 길이 있었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 양복을 입으신 사부님께서 길 한가운데 서서 팔짱을 끼고 자애로운 미소로 저희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사부님 곁에는 넓은 길을 가로지르는 아주 긴 의자가 있었는데, 그렇게 긴 의자는 평생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창세 초기에 제가 사부님을 따랐음을 깨달았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시기마다 다른 모습으로 제자들을 이끌어 오셨는데, 그것은 바로 오늘날의 정법(正法)을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의 서약입니다.
또 한 가지 신기한 일이 있었습니다. 파룬따파 강좌를 듣던 초기, 앞이마에 무엇인가 뚫고 들어오는 듯이 팽팽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또 한 번은 잠든 것도 아니고 깬 것도 아닌 상태에서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천목(天目) 부위가 터지듯 열렸습니다.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같은 원들이 겹겹이 확대되며 총 세 번 터졌습니다. 제가 일어나 앉았을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부님께서 저의 천목을 열어주셨지만 보게 하지는 않으셨음을 깨달았습니다. 사부님의 안배는 모두 최선의 것입니다.
파룬따파를 얻어 수련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부님께서 저의 업을 없애주셨습니다. 어느 날 밤, 마침 집에 혼자 있을 때 열이 나고 땀이 나며 온몸이 아파서 그 괴로움에 밤새 침대 위를 뒹굴었습니다. 날이 밝자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몸이 가볍고 정상으로 돌아와 자전거를 타고 출근했습니다. 그때부터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졌습니다.
중국공산당(중공)의 사악한 박해가 시작된 후, 남편은 직장에서 파룬궁수련생을 납치하는 일을 담당하게 됐습니다. 저는 집에서 남편에게 맞고 공장에서는 불법 구금돼 발붙일 곳이 없었습니다. 대법이 억울한 누명을 쓰자 저는 법에 따라 베이징으로 네 번 청원하러 갔고, 두 번 유랑생활을 했으며, 사악에 의해 세뇌반, 구류소, 구치소에 갇혔습니다. 구치소에 갇혔을 때 단식으로 항의하다가 음식물 강제 주입 과정에서 위험한 상황이 발생해 병원으로 실려 가 응급처치를 받은 적도 있습니다. 이때 남편은 이웃 경찰을 통해 이혼 서류를 보내왔습니다. 저는 보지도 않고 경찰에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잠시일 뿐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연공해서 병이 나았다’는 것도 범죄입니까? 이것이 도대체 무슨 도리입니까?! 저는 이혼하지 않을 겁니다. 저보다 남편과 아이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기다릴 수가 없다면 제가 미국에 유학 갔다고 생각하세요.” 이토록 큰 박해를 받았지만 사부님 생각하면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았습니다. 많은 업력을 사부님께서 제자 대신 감당해주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때는 2001년 8월 15일 밤이었습니다. 수련생과 함께 박해 반대 표어를 붙이고 진상 자료를 배포하다가 모함을 받아 노동수용소에 갇히게 됐습니다. 노동수용소에서 마음을 정화하고 생각해보았습니다. ‘대법 수련으로 한 사람이 공을 얻으면 온 가족이 혜택을 입는다고 하셨는데, 공장에서 집안까지 날 지지해 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으니 대체 문제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제가 너무 성과를 서둘러 극단으로 치달았던 것입니다. 오직 법이 바로잡힌 후에나 수련하겠다고 생각했으며, 법이 바로잡히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떻게 수련해야 할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전향(수련 포기)을 하게 됐고, 수련인으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러 나쁜 사람이 돼 일반인 속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니 집은 이미 예전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남편은 다른 여자와 동거한 지 거의 1년이 다 돼가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전자게임에 빠져 성적이 상위권에서 최하위권으로 떨어졌고, 학교에서는 불량 학생들에게 돈을 뜯기고 있었으며, 몸은 망가져 큰 가래를 뱉어내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이혼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저는 남편이 그 여자와의 문제를 스스로 처리하게끔 조금의 압박도 주지 않았고, 그가 춤을 추러 가고 싶어 하면 함께 가주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잘 처리한 후 예전 직장을 찾아 다시 출근했습니다.
집안이 겨우 안정됐지만 2년 동안 법공부를 하지 않으니 몸 상태가 엉망이 됐습니다. 밤마다 가위에 눌려 잠을 이룰 수 없었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가쁘며 기운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다시 돌아가 수련을 계속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오직 사부님만이 저와 제 가족을 구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2004년, 저는 다시 수련의 길로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즉시 구세력의 교란이 들이닥쳤습니다. 아들이 보충수업을 받기 싫다며 편지 한 장을 남기고 가출했습니다. 야간이었는데 이 넓은 도시에서 어디 가서 찾겠습니까? 저는 남편을 달랬습니다. “우선 쉬세요. 오늘은 찾지 말고 내일도 안 돌아오면 그때 찾으러 가요. 어쩌면 하룻밤 사이에 스스로 깨달아서 돌아올지도 몰라요.” 저는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간구했습니다. 날이 밝았지만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차를 몰게 하고 말했습니다. “내가 가라는 대로 가세요.” 느낌을 따라 이리저리 꺾어 가다 보니 어느 PC방이 보였고, 한눈에 아이의 자전거를 발견했습니다. 저는 두 손을 모아 합장하며 얼른 사부님께 감사드렸습니다. 불과 20분 만에 이토록 넓은 도시에서 아이를 찾다니 믿기지 않는 일이지요. 남편의 얼굴도 긴장이 풀렸습니다. PC방 안에서 아이를 놓치는 통에 아이가 다시 도망쳤습니다. PC방은 2층이었는데 저희가 내려왔을 때는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이미 사라진 뒤였습니다. 저희는 다시 차를 몰고 돌다가 어느 광장에 이르러 제가 내려서 보자고 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잔디밭에 앉아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를 발견했습니다. 아이는 당시 14살로 한창 사춘기였습니다.
다시 1999년 박해가 시작됐을 때를 생각해보면, 저는 아이를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어린아이의 마음이 얼마나 타들어 갔겠습니까. 우리 대법제자들은 마음속에 법이 있고 희망을 볼 수 있기에 몸은 고달파도 마음은 답답하지 않지만, 저들은 어떻겠습니까? 희망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으니 정말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일반인과 따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제 주변 사람이 기분이 좋지 않으면 즉시 자신을 안으로 찾고 그들을 즐겁게 할 방법을 찾았으며, 그들이 기뻐지면 그때 천천히 이치를 설명해 줬습니다.
집안이 한동안 평온하더니 남편 고질병이 도져 다시 여자를 만나러 다녔습니다. 아들이 말해주길, 제가 야간 근무를 하러 나가면 바로 누군가 집으로 들어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시부모님을 모셔다 놓고 말했습니다. “이혼하고 싶으시다면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아이도 이제 컸고 철이 들었으니 이렇게 엉망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 말을 마친 후 저는 출근했습니다.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은 그들의 몫이며 제가 더 관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사부님께서 안배하실 것이고, 진상은 다 알려주었으니 더 말해봐야 소용없었습니다. 남편은 모든 것을 부인하며 아이가 헛소리한다고 몰아세웠는데, 이는 이혼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예전처럼 세심하게 그들을 보살피며 오로지 타인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려 노력했습니다.
한고비를 지나 또 다른 고비가 닥쳤습니다. 남편이 아들을 데리고 항문 주위 농양 수술을 하러 병원에 갔습니다. 원래 30분이면 끝나는 간단한 수술이었는데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오후 3시 반에 수술실에 들어간 아이가 밤 1시가 넘어서야 나왔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발정념을 해 교란을 제거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더 이상 대법에 대해 나쁜 말을 하지 마세요. 응보가 닥친 거예요! 어서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라고 말하세요. 그래야 아이가 살아날 수 있어요!”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구할 수 있는 분이 누구든 좀 구해주시오, 에휴”라고 했습니다. 대법에 거부감이 사라진 것만으로도 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다음 날 아이를 부르니 눈을 떴습니다. 다른 사람이 부를 때는 반응이 없었습니다. 중환자실은 가족 면회가 허용되지 않아 복도에서 24시간 동안 아이 곁을 지켰습니다. 가끔 짐을 챙기러 집에 가면 남편이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집안 물건을 엉망으로 부숴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온화한 낯빛으로 그를 위로했습니다. “겁내지 마세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그러고는 집안을 깨끗이 정리했습니다. 저는 선(善)의 힘은 파괴하지 못할 것이 없으며 사부님께서는 전능하시다는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보름 후, 아이는 아무런 후유증 없이 건강하게 퇴원했습니다.
이 큰 난을 겪고 난 후 남편은 완전히 변했습니다. 대법이 정말 사람을 구한다는 것을 알게 됐고 점점 더 좋은 사람이 됐습니다. 저희 가족은 이제 4대가 한집에 모여 삽니다. 며느리는 공안국 간부인 삼촌의 영향을 받아 처음에는 무관심했지만, 지금은 아주 효성 지극한 며느리가 됐습니다. 저에게는 두 명의 활기찬 손자도 생겼습니다.
지금 우리 가족은 화목하고 즐겁습니다. 남편과 아이들은 집에 있는 동안 제가 제 일을 할 수 있도록 방해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만나면 저는 진상을 알립니다. 공안 경찰이 영상 채증 장비를 들고 저를 찍으러 온 적이 있었는데, 저는 그 기회에 이 모든 사실을 그들에게 알려줬습니다. 경찰은 그날 이후 다시는 오지 않았습니다.
이제 갈수록 길이 넓어지고 세상 사람들도 파룬따파가 좋다는 걸 점점 더 명확히 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대법제자들은 사부님을 도와 사람을 구하는 존재입니다. 그 외에 다른 바라는 것은 없습니다.
법에 부합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원문발표: 2026년 2월 2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6/2/26/49623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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