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연공에 대한 약간의 깨달음

글/ 대만 대법제자

[명혜망] 어젯밤 한차례 보슬비가 내리더니 이른 아침에는 비가 그쳤습니다. 겨울로 접어든 이른 아침, 날은 아직 밝지 않았고 가로등 아래 지면은 여전히 축축했으며 공기 중에는 한기가 감돌았습니다. 제가 연공장에 도착했을 때 수련생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온 김에 마음을 편히 갖고 혼자서라도 연공하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자리에 앉아 플레이어를 켜고 연공 음악이 은은하게 울려 퍼짐에 따라, 저는 사부님의 구결(口訣)과 동작 구령을 집중해서 들었습니다. 점차 입정(入靜) 후의 오묘함을 느끼게 됐습니다. 계속 연공을 하다 보니 저 혼자 연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우주는 맑고 맑아 법광에 동화되네”(홍음-동화원만)라는 신성한 느낌이 솟아올랐습니다.

1. 나 혼자 연공하는 것일까?

오랫동안 저는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인체는 바로 소우주”(전법륜)라는 법에 대해 줄곧 깊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현대 물리학은 단지 물질의 미립자와 그것이 분열된 후의 성분을 연구할 뿐입니다. 측정 기기가 충분하지 않아 매 층 입자 및 입자와 입자 사이가 모두 하나하나의 광활하기 그지없는 공간이라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현대 의학 역시 인체 세포 조직으로부터 전체 생리 구조 시스템을 탐색하고 더 나아가 병리학을 검토하며 사람이 병에 걸리는 원인을 분석합니다. 사람의 사고는 완전히 과학이 인식할 수 있는 틀 안에 갇혀 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저희에게 우주·시공·인체의 미혹을 풀어주셨습니다. 알고 보니 우리의 이 작은 육신은 사실 하나의 소우주와 같아서 그 안에는 무수한 공간이 포함돼 있습니다. 표층의 분자·원자·전자·양성자에서 아래로 계속 연구해 쿼크·중성미자에 이르고, 계속 나아가면 현미경으로도 볼 수 없는 곳에 이르는데, 매 층 공간에는 헤아릴 수 없는 생명 무리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본원(本源), 물질의 본원과는 거리가 아직 멀고도 멀다.”(전법륜)

그렇다면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수련 과정 중에, 현실 생활 속에서 만나는 사람이나 자신과 대응하는 천체(天體) 중생뿐만 아니라, 신체 내부의 셀 수 없는 생명 무리도 역시 우리라는 주체에게 무한한 희망을 걸고 있는 중생들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다 합하면 그 수량이 얼마나 방대한지 사람의 두뇌로는 영원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연공할 때 몸을 움직이면, 신체 내부 무수 층차의 다른 공간에 있는 무량한 생명 무리도 주체(主體)와 함께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니 이때 어찌 저 혼자 이 공간장에서 연공하는 것이겠습니까?

2. 주의식(主意識)이 반드시 맑고 강해야 하며 중생을 위해 책임져야

그뿐만 아니라 사부님께서는 대법제자가 진상을 알려 중생을 구원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실 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들이 여기에서 말하면 당신들의 층층의 수련된 신체 역시 층층의 부동한 천체에서 말한다.”(각지 설법3-대뉴욕지역법회 설법)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우리가 법공부, 발정념, 진상 알리기 혹은 연공에 전념할 때 신체 소우주 속 각 층차, 각 공간의 무수한 생명체도 주체의 이끌림 하에 함께 이 일들을 하며, 함께 수련하고 함께 대법에 동화됩니다. 그들은 분명 주체의 정진이 가져다준 희망으로 인해 기뻐서 펄쩍 뛸 것입니다. 반면에 만약 우리가 자신을 엄격히 요구하지 못하고 안일심을 방임하며, 배우는 둥 마는 둥 수련하는 둥 마는 둥 한다면, 자신의 신체에 문제가 생길 뿐만 아니라 거대한 수량의 생명을 그르치게 하여 그들이 도태될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얼마나 조급하고 얼마나 낙담하겠습니까!

3. 부족함을 살피고 힘써 다시 정진하다

사부님께서는 이토록 소중한 성명쌍수(性命雙修) 공법을 내놓아 우리를 제도하시며, 제자들이 사부님을 도와 법을 바로잡고(助師正法) 중생을 구하는 사전(史前)의 서약을 실현하기를 기대하십니다. 사부님께서는 이 홍원(洪願)을 위해 온갖 심혈을 다 쏟으셨는데, 그 과정의 간고함은 신(神)들조차 경외감을 느낄 정도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공경하고 겸손하게 받아들이며, 천만년에도 만나기 어려운 이 호탕한 불은(佛恩)을 소중히 여겨야 하겠습니까? 병업(病業)이 나타나서야 비로소 빨리 죄업을 없애고 고통을 해결하려 하거나, 노화를 늦추기 위해 적극적으로 연공해서야 되겠습니까?

모든 기점은 법(法)을 가장 크게 여기는 데 두어야 합니다. 자신을 잘 닦아 사부님을 도와 사람을 구원하는 신성한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야말로 대법제자 수련의 관건이 있는 곳입니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지난날 때때로 ‘느낌에 의존해 연공’하거나 연공할 때 완전히 ‘신신합일(身神合一)’하지 못했던 상태에 대해 매우 부끄럽게 느껴지며, 정말로 사부님의 자비로운 은혜를 저버린 것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대법에 책임지고 중생에게 책임지기 위해 이 기회를 빌려 자신을 일깨우고자 합니다. 일이 아무리 바빠도 연공에 대해 태만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연공과 세 가지 일은 똑같이 반드시 착실하게 잘해야 합니다. 형식에 그치거나 대충 해치운다면 결국 헛수고만 하게 될 뿐입니다.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으니 앞으로 오직 분발하여 바짝 따라잡는 길밖에 없습니다.

우둔한 약간의 깨달음으로 층차에 한계가 있으니, 적절하지 못한 부분은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바로잡아주시기 바랍니다.

 

원문발표: 2025년 12월 2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12/20/503280.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5/12/20/50328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