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이 길을 안내하니 항로를 잃지 않다

글/ 랴오닝성 대법제자

[명혜망] 수련생 몇 분이 저희 집에 와서 저에게 수련 체험을 써보라고 격려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6학년 학력이라 글을 쓸 줄 모르고, 무엇을 써야 할지도 몰라 조금 망설였습니다. 조용히 20여 년간의 수련 과정을 되돌아보니 고난도 있었고 기쁨도 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위대하신 사부님의 자비로운 제도에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이에 저희 온 가족은 은사께 절하며 감사드립니다!

고난의 인생, 득법을 기다리다

저희 집은 본래 산둥(山東)이 본적입니다. 1960년 대약진(大躍進) 시대에 모든 마을 가구가 집단으로 농사를 지었고, 곡식이 익어도 수확하지 못하게 하고 모두 큰 식당에서 식사했습니다. 그때는 집에 곡식 한 톨도 없었고 아버지는 굶어 돌아가셨는데 장례를 치를 돈도 없어 셋째 숙부가 수수깡을 조금 줘서 아버지를 감싸 땅에 묻었습니다. 그때 저는 세 살이었고 어머니는 저희 남매들을 데리고 힘들게 사셨습니다. 먹을 곡식이 없어 나무껍질을 벗겨 먹었습니다. 저희 집 뒤쪽은 학교였는데, 여덟 살 때 선생님이 저를 찾아와 공부를 시켰습니다. 저는 학교를 다니면서도 산나물을 캤지만, 그것으로도 식량을 대지 못해 때로는 다섯째 이모에게 고구마 줄기를 얻어먹었습니다. 어머니는 전족을 하셔서 걷기 힘드셨고 힘든 일을 하실 수 없었습니다. 집에서는 자주 산나물에 고구마 말린 것을 섞어 먹었는데, 한 끼 먹고 다음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날들이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나중에 저희 누나가 동북(東北)으로 시집가서 저희는 누나를 따라 동북에 정착했습니다. 그때 저는 십 대였는데 학교를 2년 더 다녀 초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마침내 굶주림은 면하게 됐고 저는 스물다섯 살에 결혼했습니다. 아내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마을에서 아내에게 강제로 피임 시술을 했습니다. 농촌에서의 힘든 생활로 아내는 온갖 병에 걸려 한 달에 보름은 침대에 누워 지냈습니다. 저는 또 ‘출혈열’이라는 병에 걸려 온종일 열이 났고, 나중에 성도(省都)에 가서야 겨우 치료해 목숨을 건졌습니다.

1996년, 저는 형님 댁에 방문했는데 형님 부부가 변한 것을 봤습니다. 몸의 병이 낫고 마음가짐이 좋아진 것을 보고 형님 부부가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를 배운 것을 알았습니다. 형님 부부가 저에게도 배우라고 했지만 저는 그때 시간이 없다고 말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가을이 되자 아내의 병이 점점 더 심해져 온 가족이 걱정했습니다. 저는 형님 부부가 파룬궁을 수련하고 병이 나았다는 것을 떠올리고 큰아들에게 큰아버지 댁에 가서 연공을 배우고 돌아와 우리를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큰아들은 대법 책과 연공 테이프를 가져왔고, 그는 바로 득법했습니다. 하루 밤낮으로 《전법륜(轉法輪)》을 한 번 다 읽었고, 온 가족이 법공부와 연공을 시작했습니다. 아내가 오랫동안 치료받지 못했던 병이 연공을 하자마자 모두 나았으니 정말 신기했습니다. 온 가족이 기쁨 속에서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저희 가족이 파룬궁을 수련한 후의 변화를 보고,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퍼져 모두 저희 집에 와서 파룬궁을 배웠습니다. 심지어 어린아이들도 함께 놀면서 “남을 욕하면 덕(德)을 주는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마을의 많은 사람이 득법했고, 저희는 또 다른 마을에 가서 법을 널리 알리고 공법교육을 하거나 사부님의 설법 녹화 테이프를 틀어줬습니다. 그때 저희는 매일 법을 알리는 일로 바빴습니다. 길에서 수련생들은 사부님의 경문을 외우거나 설법의 한 단락을 외웠습니다. 대법은 저희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렸습니다. 1998년, 저희는 저희 현(縣)과 타 현, 저희 시(市)에서 열린 대규모 수련심득교류회에 모두 참석했는데 정말 인산인해였습니다. 모든 사람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와 득법 후의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매번 법회 후 저희는 모두 제고했고, 비학비수(比學比修-배움과 수련을 비김)하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풍운이 돌변하고 거대한 난이 닥치다

1999년, 장쩌민(江澤民)이라는 사악한 소인배는 파룬궁을 배우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을 질투해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탄압을 시작하려 했습니다. ‘4·25’ 그날, 저는 톈진(天津) 수련생들이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고 저도 베이징의 중난하이(中南海)에 갔습니다. 밤이 되자 문제가 해결됐고 수련생들은 모두 흩어졌습니다.

7월 20일, 중공 악당이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시작했습니다. 그날 현에서는 일부 파룬궁수련생을 납치했고, 저와 일부 수련생들은 현 정부 청사에 가서 파룬궁수련생들의 석방을 청원했습니다. 이미 많은 파룬궁수련생이 그곳에 가 있었습니다. 저녁에 마을 서기가 사람들을 데리고 와 저희를 강제로 집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 후 저희 집에 와서 연공 방석과 일부 물건을 가져갔지만, 숨겨둔 대법 책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진(鎭) 정부 인원들에게 진상을 설명했지만, 그들은 중독이 너무 깊어 두 번이나 저희 집에 와서 저를 납치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사부님의 보호 아래 정념으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저의 큰아들은 1996년부터 파룬궁을 수련한 후, 모든 면에서 진선인(眞·善·忍) 기준으로 자신을 단속했습니다. 그는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어디서 일하든 불평 없이 헌신적으로 일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가 친절하고 선량하며 똑똑하고 유능하다고 말했고, 모두가 인정하는 좋은 청년이었습니다. 큰아들은 스물네 살에 결혼했는데 며느리도 파룬궁을 배웠고, 두 사람은 성도에서 일하며 수련했습니다.

2001년, 아들과 며느리는 거짓말에 중독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진상을 알리다가 불행히도 경찰에게 납치됐고, 며느리는 임신 중이라 집으로 풀려났습니다. 아들은 구치소에 납치돼 고문과 고통을 겪었고, 이후 8년 징역형을 불법 선고받았습니다. 그는 네 곳의 감옥에서 잔혹한 박해를 겪었고, 장기간 수갑과 발목 족쇄를 채워졌으며, 구타, 큰 걸기(上大掛), 강제 음식물 주입, 고무 호스로 때리기, 바늘로 찌르기, 전기봉 충격 등 각종 잔혹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8년의 억울한 감옥 생활이 끝났을 때 며느리가 그를 마중하러 감옥에 갔습니다. 감옥 문지기 앞에서 만났을 때, 그녀는 예전에 잘생기고 멋있던 그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뼈만 앙상하고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으며, 머리는 희끗희끗했고 눈빛은 멍했습니다. 며느리조차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옆에 서 있던 어린 딸은 태어난 후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버지를 멍하니 바라봤습니다. 며느리는 아이의 작은 손을 잡고 다가가 “이 아이가 당신 딸이에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멍하니 눈앞의 딸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큰아들이 감옥에 들어갈 때 아이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입으로 “나 주사 맞았어, 나 주사 맞았어, 나 주사 맞으면 안 돼”라고 중얼거릴 뿐이었습니다. 며느리가 감옥경찰에게 “사람이 왜 이렇게 됐죠? 왜 이렇게 말랐죠?”라고 묻자, 감옥경찰은 찔려서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후 아들은 음식을 먹지 못했고, 온종일 기침을 멈추지 않았으며 가래를 뱉을 기력조차 없었습니다. 그의 몸에는 여러 곳에 전기봉 고문 흔적이 있었고 손발은 부어 있었으며 몸에는 여러 곳에 상처 자국이 있었습니다. 엉덩이 피부는 괴사돼 검붉은 보라색을 띠고 있었습니다. 병원에 응급 구조를 요청했지만 병원 측은 “이미 가망이 없습니다. 심장 기능이 쇠약해졌고 이런 몸 상태는 하루 이틀 만에 생긴 것이 아니며 이미 치료 시기를 놓쳤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아들은 서른 살이 겨우 넘은 나이에 이렇게 박해를 받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들의 비보를 듣고 저희 노부부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습니다. ‘중국공산당(중공)은 어찌 진선인을 따라 좋은 사람이 되려는 사람을 용납하지 못한단 말인가?’ 이렇게 젊은 청년이 희생되니 하늘도 눈물을 흘리는 듯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먼저 보내는 그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고통은 호소할 곳이 없었으며 억울함은 풀 곳이 없었습니다.

감옥 측은 외부의 비난과 압력 때문에 계속해서 저희 집을 괴롭혔습니다. 그때 저희는 정말 울 곳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모두 저희를 위해 억울함을 호소하며 서명했고 해명을 요구했습니다. 감옥 측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오히려 저희에게 압력을 가했습니다. 다행히 저와 아내는 대법을 수련했기에 수련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아들은 비록 육신을 잃었지만, 그의 천상의 영혼은 이미 신위(神位)에 있습니다. 끊임없이 법공부를 하면서 저와 아내는 곧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여러 번 위험에 처했지만 사부님 보호로 무사하다

대략 2005년경, 진(鎭) 정부와 파출소 인원들이 계속 저희 집을 괴롭혀 저는 외지로 일하러 나갔습니다. 한번은 밤에 걷다가 승용차에 치였습니다. 저는 의식을 잃었고 며칠 후에 병원에서 깨어났습니다. 차에 치였다는 것을 알았지만, 저는 대법을 수련하는 사람이니 분명 괜찮을 것이고 남에게 억지 부려 돈을 뜯어내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몸을 움직여보니 정말 괜찮아서 퇴원했습니다.

한번은 제가 삼륜차를 몰고 가다가 커브 길에서 순식간에 뒤집혔습니다. 그러더니 차는 네 바퀴가 아래로 향한 채 3미터가 넘는 깊은 도랑에 평온하고 안정적으로 떨어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쾅’ 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저는 어디 하나 다치지 않고 머리만 약간 긁혔을 뿐이었습니다. 삼륜차에는 대법 진상 자료가 실려 있었습니다. 사부님께서 저를 구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저는 삼륜차를 몰고 현(縣) 소재지에 채소를 사러 갔습니다. 날이 밝지 않아 안개가 자욱했고 저는 앞차의 불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맞은편에서 이미 차 한 대가 오고 있었고 저는 급히 피하려고 옆으로 핸들을 돌렸습니다. 그러자 바로 앞에서 또 다른 큰 트럭이 다가왔습니다. 더는 갈 길이 없었고 곧 충돌할 것 같았습니다. 이 일촉즉발의 순간, 저의 삼륜차 바퀴가 갑자기 똑바로 서더니 두 차의 틈새를 통과했고 차량 파손과 인명 사고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식은땀을 흘렸고 이 역시 사부님께서 저를 보호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어떤 겨울날, 저는 소가 끄는 수레를 끌고 산에 땔감을 주우러 갔는데 소가 갑자기 발광을 했습니다. 제 한쪽 발이 밧줄에 엉켰고 소는 저를 끌고 맹렬히 산 아래로 달렸습니다. 저는 있는 힘을 다해 두 발을 붙였는데, 만약 두 다리를 벌렸다면 그 관성으로 나무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을 것입니다. 소는 산 아래로 달려가더니 옥수수 더미를 보고 멈췄고, 제 다리를 묶었던 밧줄은 저절로 풀렸습니다. 그때 저는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았고 눈꺼풀이 긁혀 벗겨졌습니다. 저는 즉시 땅에 앉아 가부좌를 했습니다. 마침 둘째 아들이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어서 둘째 아들이 저를 병원으로 데려갔습니다. 의사는 제 몸을 천으로 감싸줬고 저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외에도 많은 신기한 일들이 있지만 일일이 다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사부님께서 저를 여러 번 보호해주셨기에 위험하고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에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제자는 사부님께 너무 많은 빚을 졌습니다. 오직 정진하고 착실히 수련해야만 사부님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저와 아내는 모두 70대입니다. 온갖 시련을 겪었지만 대법에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오늘까지 사부님을 따라왔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제가 또래보다 젊다고 말합니다. 지금 저는 몸이 튼튼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한 해의 수확으로 먹고 입는 것은 걱정 없고 매일 법공부와 연공을 거르지 않습니다. 저희 마을과 이웃 마을 사람들에게 모두 진상을 알려줬고 마을 주민 대다수는 파룬따파가 좋다는 것을 압니다. 저는 자주 명혜망에 실린 수련생들의 교류 글을 보는데 큰 깨달음을 얻습니다. 저는 끊임없이 안으로 찾아야 하며 아내와 함께 비학비수하며 파룬따파 수련의 길을 함께 걸어가고 있습니다.

 

원문발표: 2025년 12월 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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