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저는 1998년 9월에 정식으로 대법(大法) 수련에 들어섰습니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와 인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제자는 사부님의 한없이 크신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여 년 동안 비록 사람마음(人心)이 많았고 갖가지 산전수전을 겪었지만, 사부님을 따라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제 의지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결국 제가 얻은 것은 몸과 마음이 정화된 후의 기쁨, 회귀의 길에 오른 행복, 그리고 생명의 경지가 향상된 후 느낀 아름다움과 숭고함이었습니다. 최근 법을 필사하면서 깨달은 작은 체험을 글로 적어 수련생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글쓰기와 마음 닦기
저는 글씨를 원래부터 매우 날려 쓰는 편이었습니다. 특히 마음이 조금만 급해지면 손이 빨라지고, 빨라지면 곧 엉망으로 휘갈기게 됩니다. 정말 용이 날고 봉황이 춤추는 듯해서 나중에 제가 봐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글씨 연습을 좀 해볼까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인내심이 부족해 매번 오래가지 못했고 효과도 크지 않았습니다. 예전에도 법을 베껴 쓴 적이 있었는데, 다 쓰고 나서 보면 저조차도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처음 몇 글자는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쓰다 보면 다시 이어 쓰고 비뚤어지고 결국은 휘갈겨 버렸습니다. 글자 크기도 일정하지 않고, 구조는 느슨하며, 밀도도 들쑥날쑥해서 전체적으로 보면 가로줄도 맞지 않고 세로줄도 가지런하지 않아 마치 엉망인 잡초밭 같았습니다. 이렇게 쓰는 것은 법에 대한 불경처럼 느껴져, 결국 다시는 베껴 쓰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었습니다.
작년부터 저는 수사포(水寫布, 물로 쓰는 서예 연습 매트)에 법을 베껴 쓰기 시작했습니다. 한 단락을 쓰면 그 단락을 외우는 식으로 하니, 졸음도 오지 않고 외우는 속도도 빠르고 기억에도 오래 남았습니다. 게다가 물기가 마르면 보기 흉한 글씨 자국도 남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1년 동안 꾸준히 해왔습니다.
어느 날 저는 수련생 집에 갔다가 그가 베껴 쓴 법을 보게 되었는데, 글씨가 단정하고 아름다우며, 짜임새가 있고, 가로세로가 반듯하여 전체가 매우 가지런했습니다. 정말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바로 제 글씨를 떠올리자 말할 것도 없이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비록 수사포에 법을 베껴 쓰면서 글씨를 반듯하게 쓰려고 신경 쓰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정식 방식이 아니라서 저는 종이에 베껴 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저의 엉망인 글씨를 생각하면 또다시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여러 번 반복했습니다. 어느 날 다시 이 문제를 떠올리던 중 한 가지 생각이 번쩍 떠올랐습니다. ‘글씨를 잘 쓰느냐 못 쓰느냐에 신경 쓰지 말고, 마음을 담아 쓰고, 순수한 마음으로 법을 베껴 쓰고 법공부를 하면 된다. 내가 법을 베껴 쓰는 목적은 법공부를 하기 위한 것이지, 내 글씨를 뽐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사부님께서 보시는 것도 내가 법공부를 하려는 그 마음이지, 내 글씨가 아니다.’ 제가 집착하고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자 사부님께서 일깨워 주신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전부터 대체 무엇이 저를 가로막고 있었을까요? 글씨를 쓸 때 마음이 급해지고 휘갈겨 쓰는 것은, 제 마음이 순수하지 않고 잡념이 많으며, 마음속에 경외심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이 글씨를 잘 쓰는 것을 보고 부러워한 것은 제게 명예욕, 허영심, 질투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늘 제 글씨가 남보다 못하다고 느낀 것은 열등감, 체면, 쟁투심과 비교심 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부님의 일깨우심에 감사드립니다. 이런 집착들을 찾아내자 마음이 탁 트이듯 밝아졌고, 더 이상 갈등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는 다시 펜을 들고 공책에 법을 베껴 쓰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홍음(洪吟) 6’을 베껴 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어떤 힘이 저를 억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더 이상 조급해하지 않으며 한 글자 한 글자씩 썼습니다. 글씨를 잘 쓰고 실수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너무 간절하다 보니 정신이 긴장되고 온몸에 힘이 들어가, 몇 글자 쓰지도 않았는데 손과 팔이 아파서 펴지지 않을 정도였고, 목과 양쪽 어깨도 시큰거리고 피로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매일 꾸준히 견지했고, 점차 몸이 이완되면서 습관이 형성되자 속도도 빨라졌지만 더 이상 휘갈기지는 않았습니다. 시력 문제로 인해 필획이 많은 글자는 여전히 습관적으로 이어 쓰곤 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필속이 빨라지자 글씨가 다시 조금 흐트러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곧바로 그것을 알아차리고 멈춰서 손을 가다듬은 후 다시 천천히 썼습니다. 지금은 베껴 쓸수록 점점 더 베껴 쓰는 것이 좋아졌고, 법을 베껴 쓰고 외우는 것이 제가 법공부를 하는 주요한 방식이 되었습니다.
법을 베껴 쓰는 과정에서 저는 깨달았습니다. 저를 억누르던 그 힘은 사부님께서 제게 주신 가지(加持)로, 마음가짐을 안정시키고 평온한 상태에서 법을 베껴 쓰고 법공부를 하며, 온몸과 마음이 대법 속에 융화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쉽게 초조해지던 마음이 점차 고요해지고, 쉽게 침체되던 상태도 변하기 시작했으며, 모든 바르지 못한 상태가 대법 속에서 천천히 바로잡혀 갔습니다. 그리고 대법의 법리가 끊임없이 제게 펼쳐져 보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저는 수련 중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에 지나치게 집착할 필요가 없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일을 할 때의 동기와 마음가짐임을 깨달았습니다. 즉 평온함, 순수함, 공경하는 마음, 그리고 집착도 추구도 없는, 사심이 없고 ‘나’라는 것이 없는(無私無我) 상태, 이것이야말로 우리 수련인이 가져야 할 상태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로부터 저는 또 교류 글을 쓰던 일을 떠올렸습니다. 처음 교류 글을 썼을 때는 단지 어떤 문제에 대해 저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해 보고 싶다는 단순한 마음뿐이었고, 발표될지 여부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는데 명혜망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집착심이 생겨서 글을 쓰면 곧바로 발표되기를 바랐고, 결국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자신의 심성 문제를 찾아보지 않고 그저 글을 잘 쓰지 못해서라고만 생각하며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것은 모두 명예욕이 작용한 것이었고, 그 마음은 매우 깊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다만 제가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을 뿐입니다.
또 과거의 저는 늘 스스로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여기며, 쓸 만한 것이 없고 글도 잘 쓰지 못한다고 생각해 당연히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것 역시 게으름과 체면을 중시하는 마음이 작용한 것이었습니다. 수련은 마음을 닦는 것이고, 글을 쓰는 것은 자신이 수련하는 과정에서 얻은 가장 진솔한 체험과 깨달음을 담담하고 진실한 언어로 적어 내는 것으로, 스스로의 수련을 정리하고 반성하는 작은 결산과도 같습니다. 또한 글을 쓰는 과정에서 법리에 대한 인식이 더 깊고 넓어지며, 자신의 집착을 더 철저히 인식하고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되고, 우리의 제고(提高)에도 더 유리합니다. 이것은 우리 수련자 개인에게는 자신의 수련 과정에서의 마음의 발자취를 기록하는 것이자,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참고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는 정법시기 대법제자로서 대법의 위덕을 실증해야 하며, 사부님의 자비로운 제도에 보답하고 감사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사부님께 감사드리며
최근 법을 베껴 쓰다가 ‘남미법회에 보내는 축사’ 부분에 이르렀는데, 사부님께서 “여러분 감사하다! 다시 한 번 당신들의 법회가 성공하기를 기원한다!”라고 말씀하신 구절을 보자 마음이 순간 크게 흔들렸습니다. 이어서 ‘유럽법회에 보내는 축사’의 마지막에서도 사부님은 “사부는 당신들의 좋은 소식을 듣겠다. 여러분 감사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밖의 몇몇 글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전에도 이러한 경문이나 각지 설법을 공부하면서 “여러분 감사하다”라는 말씀을 본 적은 있었지만, 저는 깊이 생각해 본 적 없이 그저 사부님께서 하신 인사말 정도로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야 이것이 인사말이 아니라 사부님께서 제자들에게 보내신 격려와 기대, 그리고 무한한 자비였음을 깨닫고 놀랐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제자를 위해, 중생을 위해, 온 우주를 위해 그렇게 많은 것을 하시며 자신의 모든 것을 쏟으셨습니다. 사부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으시는데 오히려 제자들에게 “감사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얼마나 넓은 흉금입니까! 제자로서야말로 사부님의 고심 어린 제도에 끝없이 감사해야 마땅한데, 어찌 사부님께서 제자를 향해 “감사하다”라고 말씀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는 어떤 수련생들이 아름다운 어휘로 사부님을 찬미하고 사부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을 보거나 들으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고, 그들이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아첨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명절에 사부님께 향을 올리고 과일을 공양하며 절을 올릴 때도 처음에는 어색하게 느껴졌고, ‘마음속으로 사부님과 법을 공경하기만 하면 되지 왜 굳이 이런 형식이 필요할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과거의 그런 생각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을 정도이며, 후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사부님, 죄송합니다. 제자의 무지와 어리석음, 오만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때 저는 또 사부님의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이렇게 좋은 공법을 우리는 오늘날 당신에게 내놓았고, 나는 이미 당신에게 받쳐 들어 주었으며, 당신의 집 문 앞까지 갖다 주었다.”(전법륜) ‘받쳐 들다(捧)’와 ‘갖다 주다(送)’, 이 두 단어에는 사부님께서 중생과 제자들에게 베푸시는 한량없는 자비, 간절한 기대, 말할 수 없는 소중함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사부님을 인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찬미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사람 또한 신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신을 노래하고 찬미하며, 가장 경건한 말과 행동으로 신에 대한 경앙(敬仰)을 표해야 합니다. 제자로서 우리는 더욱더 순수하고 공경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부님을 대하고,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제가 예전에는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사실 그것은 바로 당문화(黨文化) 속의 무신론 사상이 작용한 것이었습니다. 신을 공경하지 않는 그 오만함, 감사할 줄 모르는 무신론 사상 때문에 저는 사부님의 홍대한 자비를 절실히 인식하지 못했고, 사부님께서 우리를 위해 해주신 모든 것을 진정으로 소중히 여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수련 속에서도 게으름을 피우고 엄숙하지 못하며, 집착을 제거할 때에도 질질 끌면서 사부님의 고심 어린 제도를 헛되게 했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수련해 왔으면서도 오늘에야 비로소 이 점을 깨닫게 되다니 정말로 오성이 너무 낮았습니다. 반드시 이 부패물질(敗物)을 철저히 제거하고, 제가 만나는 사람과 일들에 대해 겸손한 마음으로 대해야 하며, 더욱이 사부님께는 순정하고 공경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어리석은 이 제자가 마침내 또 한 겹의 껍질을 벗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최근 법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저는 깊이 깨달았습니다. 수련에는 작은 일이 없으며, 수련에는 지름길도 없습니다. 크고 작은 모든 일에서 항상 법의 기준에 비추어 자신을 대조하고, 착실하게 자신을 수련해야 합니다. 법리를 명확히 깨닫고 수련의 길을 바르게 걸어야만 비로소 진정한 수련자가 될 수 있고, 진정으로 우주 대법과 동화될 수 있으며, 사부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현 단계 개인의 체험이니 수련생 여러분의 지적을 바랍니다.
원문발표: 2025년 12월 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12/7/501964.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5/12/7/501964.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