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서적 |

좋고 나쁜 일을 분별하는 것이 좋고 나쁜 사람을 분별하는 것보다 더 중요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최근 이곳에 새로 온 수련생이 있습니다. 각종 일에 매우 적극적이고 컴퓨터 기술도 능숙하며, 협조인과 속인처럼 관계를 잘 맺어 곧 협조인의 좌우 팔로 여겨졌고 비교적 핵심적인 일에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심성 표현이 수련인과는 거리가 멀고 속인의 기풍이 강해, 사람들 앞에서는 허풍 떨며 과시하고 뒤에서는 사방에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또한 다른 수련생들 사이에서 험담과 잡담을 전해 객관적으로 수련생 간의 갈등을 만들고, 수련생의 사적인 정보를 캐묻는 데 열중하는 등, 많은 일이 법으로 헤아려 볼 때 수련인의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이전 경험과 결부해 두 가지 방면을 생각했고 이를 수련생과 교류합니다.

1. 중도를 취해야 바르게 걸을 수 있다

이런 일에 대처하는 데는 흔히 두 가지 오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나치게 긴장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나치게 방임하는 것입니다.

두 부류의 수련생이 각자 하나의 이치만 고집하면 쉽게 다투게 됩니다. 사실 사람은 자기 쪽의 이치에만 집착해 문제 전체를 보기 어렵습니다. 도시의 차선처럼, 각 차선 좌우에는 경계선이 있는데 운전은 두 선의 중간에서 하는 것이지, 어느 한쪽에 붙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련 중에 어느 한쪽을 지나치게 편파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모두 위험합니다. 사람이 한 선에만 집착하면 중도를 취할 수 없으며, 흔히 스스로 중도라고 생각하지만 속인의 눈에는 이미 매우 치우친 것입니다.

속인의 마음으로 논쟁하지 않는다면 앞의 두 가지 견해는 사실 서로 보완적입니다. 우리는 본래 특무에게도 수련할 기회를 남겨 둬야 하고, 또한 우리가 특무에게 파괴당하지 않도록 보장해야 합니다. 한편으로, 그 기회 역시 그 생명이 여러 생(世)의 고통을 겪으며 바꿔온 것입니다. 다른 한쪽으로, 만약 우리가 파괴된다면 그 특무의 기회 역시 없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어떻게 도달할지는 그 속에서 수련하는 데 있습니다.

어떤 다른 일들도 이와 유사합니다. 각자의 견해를 고집하는 쌍방은 모두 자신이 법에 근거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법에 대한 이해 방식에 문제가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고 속인의 마음으로 법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마치 운전할 때 옆선에 붙어 운전하는 것처럼, 이 사고방식 자체가 이미 치우친 것입니다. 법리는 중도를 취하라고 합니다. 수련하면서 늘 경계선을 붙잡고 걸을 뿐 당당정정하게 수련하지 않는다면, 이것 자체가 집착입니다.

2. 좋고 나쁜 일을 분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람에게만 집중하면 논쟁의 초점은 매번 이 사람이 도대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에 빠져, 결국 쟁론해도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변화하기 때문인데, 어떤 사람은 인심이 바르지 못해 나쁘게 변하고 어떤 사람은 방탕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좋게 변하는, 이런 일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래서 변화하는 것에서 불변의 결론을 얻으려 하는 것은 중국공산당의 ‘유일 성분론’처럼, 이 사고방식 자체가 진(眞)에 위배됩니다.

좋고 나쁜 일을 분별하는 것이 좋고 나쁜 사람을 분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구체적인 시점의 구체적인 사건에서는 좋고 나쁜 일이 매우 명확하며, 대처할 때 일에 대해서만 다루고 사람을 대하지 않으면 더 실행 가능성이 있고 부정적 영향도 적습니다.

좋고 나쁜 일을 분별하는 것을 잘 파악하면 나쁜 일을 더 광범위하게 막아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쁜 일이 모두 특무에게서 오는 것은 아니며, 어떤 일은 특무가 고의로 하는 것이고 어떤 일은 수련생이 무의식적으로 하는 것이며, 심지어 때로는 우리 자신의 과실로 초래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특무가 나쁜 짓을 하면 막아야 하지만,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나쁜 짓을 하는 것은 방임해도 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나쁜 일이라면 막아야 하며 그 나쁜 일이 어디에서 오든 상관없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좋은 일이 파괴되지 않게 하고 좋은 사람이 박해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출발점은 그 누구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일에 대해서만 다루고 사람을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을 이 각도에 두고, 사람을 겨냥하고 사람을 옹호하는 이 두 가지 옹졸한 생각에서 모두 벗어나야 이러한 일을 잘 처리할 수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이러한 상태는 부모와 약간 비슷합니다. 그런 장난꾸러기 아이가 집을 불태우지 않도록 지켜봐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비는 그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책임질 줄 안다는 것입니다. 이 이치를 아이는 모르더라도 부모가 모를 수 있겠습니까? 어떤 일은 속인 혹은 특무는 모르지만, 수련인은 압니다. 알면 잘 처리해야 합니다.

3. 몇 가지 구체적인 일

1) 협조인은 안전 방비 의식이 없어서는 안 된다

협조인은 자신으로부터만 출발해서는 안 되며, 마치 자신만 괜찮으면 다른 수련생 및 지역 정법 환경의 안전은 관리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 특무가 가장 좋아하는 허점이 있습니다. 어떤 협조인은 그 자신의 수련 문제로 인해 줄곧 현지 수련생과 고비를 넘고 있습니다. 갑자기 누군가 자신을 감싸주며 또 일 처리를 잘하는 사람을 만나면 유용하다고 느낍니다. 심지어 이미 이 사람에게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정보를 얻었더라도, 특무가 수련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편파적인 이유로 그대로 내버려 두고 일에 대해 방비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문을 열어 도적을 맞아들이는 행위는 결코 스스로 자화자찬하는 이른바 정념이 아니며, 오히려 사악의 박해를 부정하는 정념이 부족한 표현이고 게다가 여기에 이기심이 있습니다. 더 심하게 말하면, 정말 큰일이 난 경우 되돌아보면 자신이 인정에 속아 넘어가 파룬따파를 팔아넘긴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물론 당장은 그렇게 심각하지 않겠지만, 이 말의 뜻은 이 일을 중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당사자가 정말 수련생인 경우

안전이라는 이 일에 대해 만약 당사자가 정말 수련생이고, 제가 이곳의 안전이 이렇게 느슨하다는 것을 발견했다면 모두 능동적으로 일깨워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정말 특무로 바뀐다면 그것으로 끝장 아닙니까? 이곳의 안전 의식이 너무 희박한 것 아닙니까!

만약 앞에서 말한 이 사람이 정말 수련생으로서 단지 특무로 오해받은 것일 뿐이라면, 저는 수련에서 먼저 자신을 돌아보는 것 역시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정말로 수련을 잘한다면 다른 각도로 말해, 오해받으면 어떻습니까? 심성에서 수련인은 세간의 영욕을 담담하게 보는데 인간 세상의 이러한 작은 억울함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물며 우연한 일은 없습니다. 진정한 수련인은 비록 자기 혼자일지라도 마찬가지로 사명을 완성해야 합니다. 저는 진정한 대법제자가 아무도 지지해 주지 않으면 수련을 포기할 것이라 믿지 않으며, 그것은 단지 구실을 찾는 것일 뿐입니다. 세월이 흐르면 사람 마음을 알게 되니,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자신이 하면 됩니다.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단지 일에 대해 걱정하는 것이지, 사람을 겨냥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여덟 개의 머리를 가진 것이 아닌데, 누가 고의로 당신을 특별하게 주목하겠습니까? 자신이 바르게 걸어 오래되면 다른 사람들은 자연히 당신을 이해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설령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더라도 마찬가지로 바르게 걷고 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양심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금은 사람들 앞이든 뒤든 모두 진금이며 변색되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잘하고 가장 방종하기 쉬울 때, 마음을 지켜 양심에 부끄럽지 않으면 마찬가지로 경계를 높일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원만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실 정말 그 경지에 있는 수련생에게는, 저는 이것이 전혀 문제가 아니며 그것은 완전히 다른 경지의 견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세속을 벗어나 성인이 되기를 원한다면, 이러한 시련은 바로 자신의 경지를 크게 높일 수 있는 좋은 일입니다.

3) 흔히 볼 수 있는 빈틈 파고드는 현상에 대한 방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에 대한 방비를 환기하겠습니다. 분명하게 안전한 방법이 있는 상황에서, 항상 어떤 분위기를 조성하는 사람이 있으며, 심지어 ‘심령 치유 이야기’까지 잔뜩 만들어, 당신에게 방비를 내려놓도록 속이고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 방식으로 일하도록 속이며, 이것이야말로 정념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 대다수가 중공의 사기꾼입니다. 안전하게 일을 잘할 수 있는데 왜 하필 안전하지 않은 곳으로 가야 합니까? 이것은 오직 정념으로 고비를 돌파해야 할 때와는 다른 일이며, 그것은 조건도 없고 방법도 없을 때, 정념으로 돌파해야 하고 돌파해야만 합니다. 안전한 조건이 있는데도 굳이 안전하지 않으려는 것은, 자신이 길 한복판에 서서 자동차에 치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안전에 대한 파악은 그 자체가 한 가지 일을 잘하기 위한 척도 중 하나이며, 진정으로 당신이 잘되기를 바라는 수련생이라면 어떻게 눈앞의 일이 안전하게 잘 될 수 있는데 굳이 당신에게 안전하지 않은 쪽으로 가라고 알려주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4) 나쁜 일이 이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특무를 구원하는 것

나쁜 일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은 정말 특무에 대한 구원입니다. 만약 그가 그 나쁜 일을 이루었다면, 그것은 무의식중에 잘하지 못한 수련생의 성질과는 다릅니다. 그의 내심은 고의로 파괴하는 것이며, 그것은 천법을 범하고 큰 죄를 짓는 것과 같으며, 심각하게는 이 생명의 전부를 훼멸시키기에 충분한데 또 무엇을 수련하겠습니까? 한쪽은 이 생명이 훼멸되는 것을 피하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인정 때문에 그가 말썽을 부리고 자신을 훼멸시키는 것을 돕는 것인데,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이 진정한 자비입니까? 사실 인정, 사정 같은 것들은 집착이지 자비가 아닙니다.

특무에게 수련 기회를 주는 것은 그가 정말 수련생이 됐다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파룬따파를 알 기회가 생긴 것일 뿐이며, 만약 그의 내심이 변하지 않으면 법을 얻을 수 없습니다. 수련은 가장 엄숙한 것이며 아무것도 얻지 못하면 그 수련 역시 가짜가 됩니다. 그것은 그가 수련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정말 수련할 생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에게 만 년에 얻기 힘든 기회를 주었지만, 그 자신이 들어올 수 없다면 그것은 자신의 일입니다.

5) 환경의 원용은 특무가 구원받는 데 매우 중요

매번 이러한 일이 나타날 때, 주변 수련생이 처리하는 데 어떻게 바르게 걷고 원용하는지는 이 사람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그가 인연이 있어 이곳에 왔으니 비록 법을 얻고 싶어 하는지 아닌지는 사람 자신에게 달렸다고 하지만, 이 환경의 용련 작용은 사람의 양심을 깨우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 또한 우리가 사람을 구하는 사명입니다.

4. 안전에 대한 마음가짐 파악

안전이라는 이 일은, 저는 마음 상태가 일반 사회의 화재 예방과 약간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두려워하지도 않고 소홀히 하지도 않아야 하며, 방비책이 지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정념으로 제거해야 하는 것은 파괴와 박해이므로 방비하는 것이며, 풀어놓아야 하는 것은 생명에 대한 도량이며, 자신, 수련생, 사회, 파룬따파에 대한 책임을 드러내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자비입니다.

중공이 침투할 때, 아마 중국과 해외에서 이러한 현상이 모두 흔히 보이는 것 같아서 교류합니다. 일에 대해서만 다루고 사람을 대해서는 다루지 않습니다.

수련생의 지적을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원문발표: 2025년 10월 2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10/21/501650.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5/10/21/501650.html

ⓒ 2025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