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저는 2003년에 진상 알리기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저는 사정이 있어 남편과 함께 둥베이(東北)를 떠나 이곳 딸의 집에 와서, 한 살배기 외손자를 돌보며 집안일을 도왔습니다. 현지 수련생을 찾을 수 없었고 수중에 아무 자료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집을 임대한다는 명목으로 진상을 알리기로 했습니다. 제가 사는 지역은 대부분이 단층집이고 줄지어 있었으며, 많은 집 대문에 방을 임대한다는 작은 광고지가 붙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정말 집을 임대하려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집을 구실로 진상을 알리면서 현지 수련생을 만나길 바랐고, 현지 민중이 대법 진상을 알기 바랐습니다. 저는 대법제자는 어디에 있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 법을 실증하고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 현지 정체(整體)에 녹아들다
2004년, 저는 현지의 한 노년 수련생 부부와 연락이 닿았습니다. 저는 법공부 팀이 생겼습니다. 비록 거리는 멀었지만 저는 무척 기뻤고, 이 모든 것이 사부님의 자비로운 안배임을 알았습니다. 매주 한 번씩 법공부 팀에 가서 대법 자료를 가져와 시장이 서는 날에 자료를 나눠주며 진상을 알렸습니다.
마침내 우리집 근처 아파트 단지의 법공부 팀을 찾았습니다. 5~6명이 있었는데 모두 60~70대 노년 수련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자료점이 없어 명혜주간조차 없었습니다. 한 노년 여성 수련생이 매주 시내의 한 수련생 집에 가서 주간 한 부를 가져오면 모두가 돌아가며 봤고, 주보도 10부 남짓뿐이었습니다. 저는 마음이 조급했습니다. 사람 구하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마치 전쟁에 무기가 없는 것 같았는데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저는 다시 그 먼 곳의 법공부 팀(편의상 ‘A팀’이라 부르겠습니다)으로 달려가 수련생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수련생은 제게 자료점을 세울 의향이 있는지 물었고, 저는 그러겠다고 답했습니다. 하지만 자금이 부족해 마음속으로 자신이 없었습니다. 당시 저는 월급이 500위안뿐이었고, 남편과 합쳐도 1,000여 위안이었습니다. 그런데 매달 딸의 집에 생활비로 800위안을 줘야 해서 남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딸의 집은 아파트를 사서 대출금을 갚아야 해 돈을 빌릴 곳도 없었습니다. 우리 법공부 팀 5~6명은 모두 노년 수련생이라 자녀가 부양하고 있어 수입이 없었습니다. 한 노년 여성 수련생은 매달 300위안의 최저 생활비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더욱 걱정이 됐습니다. A팀 수련생들은 열정적으로 도와줘 제게 중고 컴퓨터 한 대와 흑백 프린터 한 대를 마련해줬고, 제 자료점은 이렇게 세워졌습니다. 그때 저는 57세였고 퇴직 전 재무 업무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재무에 주판을 사용했고 컴퓨터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컴퓨터와 프린터에 대해 문외한이었지만 반드시 배워야 했습니다. 저는 프린터와 노트북을 들고 1시간씩 버스를 타고 A팀의 젊은 수련생들에게 가서 배우곤 했습니다.
자료가 생겨 사람을 구할 수 있게 되자 모두 매우 기뻐했습니다. 노년 수련생들은 10위안, 20위안, 30위안, 심지어 5위안씩 모아 소모품을 사고 기계를 수리했습니다. 컴퓨터가 너무 낡아 포트가 부족했습니다. A팀의 한 수련생이 제게 5천 위안을 빌려줬고, 저와 남편이 1천 위안을 보태 새 컴퓨터 한 대와 T50 컬러 프린터 한 대를 샀습니다. 이로써 정말 ‘새총이 대포로 바뀐’ 격이 됐습니다. 정교하고 아름다운 컬러 소책자, 주보, 권선 편지 등을 인쇄했습니다. 모두 적극적으로 사람을 구하러 다녔고, 큰 시장에 가서 자료를 배포하며 진상을 알려 중생을 구했습니다.
저는 한숨 돌렸지만, 제 주변의 법공부 팀들에도 자료점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 정말 애가 탔습니다. 저는 대법제자가 하나의 정체라고 생각했고, 수련생들을 도와 자료점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생각은 생각일 뿐 말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자료점을 세울 자금을 마련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월말이 임박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월급 카드에 월급이 들어왔을 거로 생각해 은행에 가서 확인해봤습니다. 월급 카드를 건네고 은행원의 응답을 기다렸습니다. “아주머니, 얼마 인출하시겠어요?” 제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가 다시 말했습니다. “카드에 5천 위안이 있어요.” 저는 다시 물었습니다. “얼마라고요?” “5천 위안이요.” 저는 정말 어리둥절했습니다. 월급은 매달 500위안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누구에게도 명확히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4천500위안 인출해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돈을 가지고 돌아와 남편에게 이 돈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물었습니다. 남편이 말했습니다. “빨리 사부님께 감사드리세요. 사부님께서 우리가 자료점을 세우는 데 돈이 부족한 것을 보시고 우리를 도와주시는 거예요.” 사실 저도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남편의 대답을 듣고 저와 남편은 약속이나 한 듯 사부님 법상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남편은 장엄하게 사부님께 향 3개를 올렸고, 우리 노부부는 눈물을 흘리며 사부님께 절하며 감사드렸습니다.
두 번째 자료점이 세워졌고, 모든 것이 새로웠습니다. 수련생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힘썼고 잇따라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자료점이 세워졌습니다. 한 송이 한 송이 작은 꽃들이 피어났습니다. 기본적으로 모든 팀에 자체 자료점이 생겼습니다.
물론 제가 가장 바빴습니다. 컴퓨터에 고장이 나거나 프린터에 문제가 생기면 기술 수련생에게 연락해 수리를 도와야 했습니다. 간단한 작은 문제는 제가 직접 처리해줬습니다. 매일 쉴 새 없이 바빴습니다. 나중에 모두 성숙해지면서 저도 비교적 마음을 놓게 됐습니다.
2. 큰 시장에 가서 대면해 진상을 알리다
2016년, A 수련생이 수련생들을 위해 도요타 승용차 한 대를 제공했습니다. 우리 4~5명의 수련생은 큰 시장에 가서 진상을 알리고 사람을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아침 6시에 발정념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집합 장소로 가면, A 수련생이 차로 우리를 100여 리 떨어진 큰 시장에 태워다 주며 진상을 알리고 사람을 구했습니다. 당시 조금 멀다고 느꼈지만, 가까운 곳의 큰 시장은 버스를 타는 수련생들이 가서 사람을 구하도록 양보하고, 우리는 좀 더 먼 곳의 큰 시장에 가서 사람을 구하기로 했습니다.
때로는 승용차였고 때로는 소형 승합차였습니다. 승용차는 5명만 탈 수 있었고, 승합차는 7명이 탈 수 있었습니다. 모든 조건을 충분히 이용해 시장에 가서 더 많은 사람을 구하는 것이 우리 모두가 유일하게 생각하고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소책자, 달력, 탁상달력, 벽걸이 달력을 배포했습니다. 매일 쉴 틈 없이 바빴지만 모두 매우 기쁘고 충실했습니다. 가는 길에는 발정념을 하고 ‘논어’(리훙쯔 사부님 저작)를 외웠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쉬지 않고 사람을 구한 체험과 발생한 문제에 대해 교류하고 토론했습니다. 오후에는 모두 집에서 법공부를 하고 저녁에는 연공을 했습니다. 자료는 수련생이 제공했습니다. 시시각각 정진 속에 있었고, 시시각각 사부님께서 바로 곁에서 제자들을 가지(加持)해주심을 느꼈습니다. 하루 평균 1인당 40~50명을 구했습니다.
더욱 신기하게 느껴진 것은 우리가 탄 차는 큰 시장에 갈 때마다 한 번도 고장 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제가 무심코 차를 타고 하늘을 올려다봤습니다. “아니, 우리 차가 하늘을 달리고 있네요!” 하늘을 나는 차 운전대의 작은 등까지도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제가 놀라서 외치자, 천목이 열린 80대 노년 수련생도 말했습니다. “맞아요, 저도 봤어요.” 모두 함께 환호했습니다. “사부님,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6년부터 2018년까지 우리는 매년 섣달 28일이나 29일까지 일하고 나서야 차량 운행을 마쳤습니다. 2019년부터는 더는 큰 시장에 가지 않고, 모두 각자 흩어져 진상을 알리고 사람을 구했습니다.
3. 경찰에게 진상을 알리다
2012년 저는 B 수련생 언니와 짝을 이뤄 진상을 알리고 사람을 구하러 다녔습니다. B는 두려운 마음이 없고 사람들을 열정적으로 대했으며 진상도 아주 잘 알렸습니다. 우리는 호흡이 잘 맞았고 사람을 구하는 효과도 아주 좋았습니다.
2012년 10월 어느 날, 우리 둘은 나간 지 1시간쯤 돼 사거리에서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막 서 있은 지 몇 분도 안 돼, B의 외침이 들렸습니다.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저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돌려보니, 경찰 두 명이 양쪽에서 B를 붙잡고 경찰차로 끌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키 큰 보조경찰이 이미 제 곁에 서서 말했습니다. “아주머니, 신고 전화를 받았습니다. 저희와 파출소에 한 번 가주시죠.” 저는 말했습니다. “우리가 사람 구하는 걸 방해하지 마세요. 당신에게 안 좋습니다!” 그는 제가 확고하고 위엄 있는 것을 보고 손을 대지 않고 경찰차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보세요, 저 아주머니는 이미 타셨어요. 아주머니도 협조해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경찰에게 진상을 알리는 것인데, 안 될 게 뭐람?’ 저는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사부님, 제자에게 가지를 베푸시어 진상을 알릴 기회를 안배해주십시오.’
제가 차에 타자, 운전하는 기사는 우두머리 같았는데 매우 거만했습니다. 곧 모 파출소에 도착했습니다. 차에서 내려 들어가 보니 접수실 안은 온통 경찰이었습니다. 저와 B는 서로를 힐끗 보며 눈빛을 교환했습니다. 우리는 두 개의 방으로 분리됐습니다. 저는 여전히 접수실에 있었고 B는 끌려갔습니다. 저는 경찰이 제 사진을 찍으려는 것을 발견하고 결코 협조하지 않았습니다. 경찰 4명이 제 팔을 붙잡았지만 사진을 찍지 못했습니다. 이때 밖에서 경찰 한 명이 들어오며 말했습니다. “됐어, 찍지 마. 감시 영상에서 한 장면 찍으면 되잖아.” 그리고는 제게 말했습니다. “아주머니, 가방 내려놔요. 검사해야겠습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당신들 이건 불법이에요. 나는 법을 어기지 않았어요.”
이때 접수실 밖에서 많은 일반 사람이 유리를 통해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큰 소리로 진상을 알렸습니다. “파룬궁은 어떤 법률 조항도 위반하지 않았으며, 중국에서 완전히 합법입니다. 당신들이 이렇게 사람을 잡아가고 강제로 가방을 빼앗으려 하다니, 당신들이 법을 어기고 있는 겁니다.” 그 경찰 우두머리는 여전히 가방 수색을 고집했고, 보조경찰 두 명이 제 가방을 빼앗아 안의 물건을 전부 꺼내 책상 위에 늘어놓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저는 책상 위의 소책자, 호신부(護身符), 진상 지폐 등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어느 것이 불법입니까? 이것들은 다 사람을 구하는 데 쓰는 겁니다. 당신들이 가져가서 한번 보는 것도 당신들에게 좋습니다.” 10여 명의 경찰은 조용했습니다. 한 경찰이 침묵을 깨고 물었습니다. “아주머니, 파룬궁이 질병을 없애고 몸을 건강하게 하는 데 기적적인 효과가 있다면서요? 저도 1999년 이전에 한동안 연공했었는데, 제 병은 낫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와르르 웃었습니다.
저는 침착하게 말했습니다. “연공은 체조가 아니라 일반 사람을 초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성을 중시해야만 병이 낫거나 공이 자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저희 사부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연공인은 우선 좋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믿으면 영험함이 나타납니다’. 조급해하지 마세요. 좋은 사람은 좋은 복을 받을 겁니다.”
다른 경찰이 제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왜 파룬궁을 연공하십니까?” 저는 말했습니다. “제 남편이 1995년에 간암 말기 진단을 받았습니다. 하얼빈 종양병원에서 말기 판정을 내리고 두 달밖에 못 산다고 했습니다. 의사는 집에서 요양하라고 권했는데, 치료할 가치가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헤이룽장성 다싱안링(大興安嶺) 지구의 모 구 신화서점(新華書店)에서 재무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돌아와서 서점에 있는 간병 치료에 관한 모든 책을 다 뒤져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한 동료가 제게 파룬궁 연공을 권하며 ‘전법륜(轉法輪)’ 한 권을 빌려줬습니다. 이것은 파룬궁의 중요한 서적입니다. 일주일간 보고 돌려줘야 했습니다. 당시 이 책은 매우 귀했습니다. 제 남편은 이틀 만에 책 전체를 다 읽고 이 공법을 연공하기로 했습니다. 책을 다 읽은 후 몸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밥을 먹어도 배가 아프지 않았고, 끊임없이 계속되던 미열도 사라지는 듯했고, 식은땀도 나지 않았습니다.”
“친척과 친구들 모두 기뻐하며 신기해했습니다. 현지에도 연공장이 있어 저와 남편은 함께 참여했습니다. 매일 연공장에 가서 사부님 설법 영상을 보고 5가지 공법을 배웠습니다. 이렇게 3개월을 지속하며 매일 ‘전법륜’을 보고 연공하며, 책의 요구대로 심성을 닦았습니다. 3개월 후, 제 남편은 건강을 회복해 ‘병 없이 몸이 가벼워졌습니다’. 이 일은 당시 현지의 작은 산골 도시를 떠들썩하게 했고, 곳곳에 이 좋은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파룬궁 수련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제 말이 끝나자 장내는 쥐 죽은 듯 조용했습니다.
저와 B는 오전 9시에 잡혀 들어갔습니다. 11시쯤, 파룬궁을 관리하는 경찰이 저를 2층의 한 방으로 불렀습니다. 심문실 같았는데 쇠의자 한 개가 있었고, 마주 보는 책상 위에는 컴퓨터 등이 있었습니다. 저는 쇠의자에 앉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제게 일반 의자를 가져다줬습니다. 경찰은 매우 정중하게 말했습니다. “아주머니, 이 의자에 앉으세요. 우리 이야기 좀 합시다. 제가 질문할 테니 대답하고 싶으면 하시고, 하기 싫으면 안 하셔도 됩니다.” 저는 당시 아무 진술도 하지 않았고, 이 경찰과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여경에게 진상을 알렸습니다. ‘천안문 분신자살’ 등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들은 매우 정중했고 매일 명혜망에 접속하는데 상부에서 허락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정말 그들이 기뻤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사람을 풀어달라고 요구하며 그것이 그들에게도 공덕무량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 남자 경찰은 상부에 보고해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했고 저는 감사를 표했습니다.
당일 오후 2시, 저와 B는 각각 가족이 와서 함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당시 그 남자 경찰이 우리집에 ‘가보겠다’고 했습니다. 제 사위가 말했습니다. “제 장모님은 외지에서 다니러 오셔서 딸의 집에 머무시는 거라 (대법 물건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 그는 20분 여유를 내고 사람을 데리러 와서 시간이 촉박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모 기관에서 일한다며, 무슨 일이든 도움이 필요하면 반드시 돕겠다고 했습니다. 경찰은 더는 우리집에 가보겠다고 고집하지 않았고 이 일은 그렇게 흐지부지됐습니다.
(뒷이야기지만, 제 사위는 2024년 초에 부과장으로 승진해 연간 경제 수입이 10여만 위안 많아졌습니다.) 전체 과정에서 제 마음은 매우 평온했습니다. 저는 줄곧 사부님께서 제 곁에 계신다고 느꼈기에 두려운 마음이 전혀 없었고, 마음속에는 오직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으며, 매우 순수하고 침착하며 확고했습니다. 나중에 B는 둥베이 고향으로 돌아갔고, 저는 혼자 나가서 진상을 알리고 사람을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10여 년간 저는 매일 밖에 나가 진상을 알리려 노력했습니다. 큰바람이 불거나 비나 눈이 많이 오는 날과 극히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매년 새해 정월 초이튿날부터 사람을 구하러 나가 섣달 스무아흐렛날이 돼서야 멈췄습니다. 어떤 사람이 제게 몇 명이나 구했냐고 묻기에 저는 모른다고 답했습니다. 사람은 사부님께서 구하시고 공덕은 제자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로서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현지의 많은 사람들이 저를 알아봅니다. 그들은 대법제자의 선량함, 인내, 겸손함의 고상한 품격에 감탄하며, 어떤 사람은 엄지를 치켜세우며 “정말 대단해요!”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제게 먼저 작은 티슈를 건네주기도 하는데 저는 모두 사양했습니다.
한번은 제가 외출할 때 우산을 챙기는 것을 잊었는데, 하늘이 잔뜩 흐렸습니다. 저는 ‘안 가져왔으면 그만이지. 다시 가지러 돌아갈 수 없어. 시간이 너무 지체돼’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정말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비가 그칠 것 같지 않아 저는 비를 맞으며 서둘러 돌아갔습니다. 뒤에서 누군가 따라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돌아보니 같은 아파트 단지의 한 할머니였습니다. 그녀는 우산을 들고 저를 위해 비바람을 막아주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등은 다 젖어 있었습니다. 저는 급히 그녀에게 감사하며, 가게 옆으로 들어가 잠시 비를 피하면서 그녀에게 빨리 가라고 재촉했습니다. 이 60대 부인은 외지 사람이었는데, 저는 일찍이 그녀에게 여러 차례 진상을 알렸고,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염하도록 가르쳐줬으며, 쌀과 밀가루를 좀 지원해주기도 했습니다. 할머니는 지금 몸이 완전히 좋아졌습니다. 저는 그녀의 감사한 마음을 느끼며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저의 깨달음은 이렇습니다. 사람을 구하다 막다른 지경에 부딪혔을 때, 사람들이 무감각하고 진상을 듣지 않는다고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자신의 자비심이 수련돼 나오지 않았거나 자비심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강대한 자비심이 나왔을 때 그들의 본성을 감동시킬 수 있다면, 그들 뒤에서 진상을 듣지 못하게 가로막는 사악은 자연히 해체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의 본성적인 일면도 이지적이고 명석해져 다시 진상을 알리면 중생도 받아들이게 되고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하는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법공부를 잘하고 자신을 잘 닦아야 비로소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음을 압니다.
원문발표: 2025년 10월 2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10/21/50023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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