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저는 70년대생으로 1997년부터 대법 수련을 시작했고, 체제 내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수련 초기에는 선배 수련생들을 따라 여기저기 다니며 홍법하고 법공부를 했습니다. 그때 법공부로 탄탄한 기초를 다졌기에 1999년 ‘7·20’ 중공(중국공산당)의 탄압이 시작된 후에도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정념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습니다.
1. 박해 속에서 사부님께서 나를 지켜주시다
2000년, 저는 베이징에 가서 대법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하다가 중공에 의해 불법으로 3년 노동교양형을 받았습니다. 강제노동 기간 중 잔인한 강제 ‘전향’ 박해를 겪었습니다. 강제 전향이 있던 날 오후, 저는 복도로 끌려나와 벽을 향해 서 있었습니다. 복도 전체에는 경찰과 죄수들의 고함소리와 수련생들의 비명소리가 가득했습니다. 기절한 몇몇 수련생들은 옷이 벗겨진 채 복도 바닥에 끌려다녔습니다. 옷을 벗긴 것은 몸에 물을 뿌린 뒤 전기봉으로 고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경찰들은 마치 흥분제를 맞은 듯했고, 대대장은 소매를 걷어붙이며 복도에 있던 한 경찰에게 흥분해서 말했습니다. “몇 년 만에 이렇게 해보는 거지? 전향하지 않으면 무산계급 철권의 맛을 보여줄 거야.” 수련생들이 한 명씩 걸러지면서, 3~5분 만에 경찰이 수련생을 데리고 사무실에서 나와 미리 준비한 ‘삼서(三書, 3가지 수련 포기 각서)’를 들고 공개적으로 읽었습니다. 제 마음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수련생이 어떻게 사부님을 이렇게 대할 수 있을까?’ 대법을 배신한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기에 더욱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 순간 저는 제 수련 과정을 되돌아보았습니다. 수련 후 대법이 제게 보여준 기적적인 일들, 대법은 진실합니다. 목숨을 잃더라도 대법과 사부님을 배신할 수 없다고 마음먹자 제 마음도 평온해졌습니다.
그때 한 경찰이 다가와서 저를 감시하던 죄수에게 고함치며 제 손에 수갑을 채우되 끝까지 조이라고 지시하고는 가버렸습니다. 점점 시퍼렇게 변해가는 두 손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대법 수련을 위해 목숨도 버릴 수 있는데, 이 두 손이 뭐가 대수란 말인가?’ 그 경찰이 한 바퀴 돌더니 다시 제 앞에 와서 저를 감시하던 죄수에게 “빨리 수갑 좀 풀어줘, 손이 못 쓰게 되면 안 돼”라고 말했습니다. 잠시 후, 이 경찰이 커다란 전기봉을 들고 제 목에 갖다 댔고 전기봉이 파지직 소리를 냈습니다. 곧 피부가 타는 냄새가 났지만 저는 아프지 않았고 견딜 만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사부님의 법을 외웠습니다. “생사를 내려놓으면 바로 신이고 생사를 내려놓지 못하면 바로 인간이다.”(미국법회 설법-뉴욕법회 설법)
약 10여 분 후, 이 경찰이 큰소리로 전향할 것인지 물었고 저는 단호하게 “전향하지 않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제 말이 끝나자 그는 전기봉을 들고 그냥 가버렸습니다. 당시 저는 이 경찰이 왜 이런지 의아했습니다. ‘수갑까지 풀어주다니?’ 나중에 사부님의 경문을 배우고서야 깨달았습니다. 사부님께서 7·20 이전의 수련생들을 모두 제자리에 밀어 올려놓으셨고, 전기봉이 아프지 않았던 것은 사부님께서 저 대신 모든 것을 감당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중에 한 수련생이 말하길, 5~6명의 경찰이 전기봉으로 그의 머리를 고문했는데, 잠시 후 그가 ‘왜 안 아프지?’라고 생각하자마자 머리가 천둥 치듯 울려서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고 했습니다. 박해 속에서 정말 사람과 신은 일념의 차이였습니다. 그 후, 교양원 경찰은 전향하지 않은 우리 수련생들을 엄중관리반에 가두었고, 3년 후 저는 대법에 대한 정념으로 마굴을 벗어났습니다.
직장에 복귀해서 당시 파룬궁에 대한 국가 문서를 들고 상사를 찾아가 임금을 요구했는데, 뜻밖에도 상사는 상부에 보고한 후 정말로 3년치 임금의 70%를 보전해 주었습니다. 3년간 출근하지 않았으니 전액은 줄 수 없고 이 정도만 줄 수 있다면서, 추가로 1천 위안을 더 주며 보상금이라고 했습니다.
2. 박해를 부정하고 더는 유랑하지 않다
2008년 올림픽 개최 해의 어느 날, 우리 직장에 차량 몇 대가 왔습니다. 그 차들이 며칠 전 수련생을 잡아간 차인 것을 알아보고 느낌이 좋지 않아 담을 넘어 도망쳤습니다. 그들은 저를 찾지 못하자 제 아내를 잡아갔고, 성청(省廳) 중대 사건이며 외지 경찰이 처리하는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제가 와야 아내를 풀어줄 것이라고 위협했습니다. 외지 경찰이 처리하는 성청 중대 사건이 어떻게 제게 떨어진 걸까요? 당시 분위기는 매우 긴장되었고 압박감이 컸습니다. 경찰이 우리집 문 앞에서 며칠간 잠복했고, 어쩔 수 없이 저는 유랑하며 한 수련생 집으로 갔고 그 수련생이 저를 받아주었습니다.
수련생 집에서 대량으로 법공부하고 오랫동안 정념을 발했더니 제 정념이 강해졌음을 느꼈습니다. 현지 수련생들이 저를 위해 정념을 발해준 덕분에 저는 직장에 출근할 수 있었습니다.
유랑한 한 달여 동안, 저는 우리 직장 상사에게 편지를 써서 대법의 진상과 제가 교양원에서 받은 박해를 알렸습니다. 나중에 동료가 말하길, 상사가 간부회의에서 이 일을 특별히 언급하며 저를 박해하는 데 참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기간에 다른 수련생 집에서 두 살도 안 된 제 딸을 만났습니다. 수련생이 딸에게 저를 아는지 물었지만 딸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이 엄마는 박해받아 잡혀갔고, 아빠는 밖에서 숨어 지내는데, 아이의 여윈 몸을 보니 눈물이 눈가에 맴돌았고 그 마음속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서둘러 사부님의 법을 외웠습니다. “나는 이런 마음이 없다. 나는 속인의 정(情) 속에 있지 않으며 세간(世間) 명리에 대한 집착이 없다.”(시드니법회 설법)
직장에 돌아온 지 이틀도 안 되어, 점심 퇴근 시간에 경찰차 한 대가 직장 정문에 나타났습니다. 마음이 철렁 내려앉아 좀 불안했지만 직장에 옆문이 있어서 그쪽으로 집에 갔습니다. 가는 길에 마음이 너무 괴로웠습니다. ‘직장이 없었다면 훌쩍 도망갔을 텐데, 이제 막 직장에 복귀했는데 또 떠나면 사회적으로 얼마나 안 좋을까.’ 마음을 단단히 먹고 사부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사부님, 아무리 어려워도 다시는 유랑의 길을 가지 않겠습니다.’
마음에 걱정이 있으니 정념을 발해도 마음이 고요하지 않았지만, 오후에 억지로 출근했습니다. 며칠 후 오후 출근길에 직장 깃발 밑에 군 번호판을 단 승합차가 사람을 가득 태우고 서 있는 것을 보고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사무실로 돌아가지 않고 빈방을 찾아 그 안에서 법공부를 했는데, 30분도 안 되어 쿵쿵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리고 주임이 경찰 몇 명을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당시 당황하지 않고 ‘대법제자 박해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일념을 발하고 뒷문으로 나갔습니다. 창고를 찾아가서 한 시간 넘게 정념을 발하고 나가보니 차는 이미 떠났습니다. 다른 사무실에 가서 동료에게 그 경찰들이 왜 왔는지 물으니, 동료가 말하길 제가 없는 동안 직장에서 컴퓨터 두 대를 도둑맞았는데 도둑을 잡아서 현장 확인을 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괜히 놀란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저는 경찰을 마주했을 때 왜 마음이 불안정했는지 반성했습니다. 여전히 이 박해를 사람이 사람을 박해하는 것으로 여겼고, 정법의 각도에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법리를 깨달은 후 경찰을 마주해도 마음이 별로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제고된 후 사부님께서 제 좋지 않은 것들을 제거해주신 것을 알았습니다.
이번 박해는 무엇 때문에 일어났을까요? 고심 끝에 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박해가 일어나기 며칠 전 저는 마음속으로 흐뭇하게 ‘이렇게 큰 고비도 넘었는데 수련에서 못 넘을 고비가 있겠나?’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당시 오랫동안 끌어온 난 하나를 넘었을 때 무의식중에 과시심, 환희심 그리고 박해를 추구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구세력이 ‘너는 고비를 넘고 싶은 거지? 바로 주마’라고 여긴 것입니다.
2018년 어느 날 정오, 제가 집에 가서 쉬려는데 직장 정문에서 파출소 부소장이 6~7명의 경찰을 데리고 저를 막았습니다. 이전에 장쩌민을 고소할 때 이 부소장과 접촉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정중하게 국보에 일이 있으니 파출소에 가자고 했습니다. 두 경찰이 정문 초소로 가서 자동문을 닫아버려 제 오토바이는 정문 밖에 세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소장과 이야기하는 중에 한 젊은 경찰이 올라와서 제 오토바이 열쇠를 뽑아버렸고, 저는 그에게 큰 소리로 “내 차 열쇠를 왜 뽑아요? 누가 당신한테 권리를 줬죠? 다시 꽂아놔요!”라고 호통쳤습니다. 이 젊은 경찰은 얼굴을 붉히며 제 차 열쇠를 다시 꽂았습니다. 저는 부소장에게 “지금은 퇴근 시간이니 문을 열어서 동료들이 집에 가게 해주세요. 제 일은 그들과 무관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대문이 열린 후 그들은 제가 차를 타고 그들과 함께 가기를 고집했고, 저는 집에 가서 어머니께 밥을 갖다드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대신 갖다주겠다고 했지만 저는 직접 가겠다고 했습니다. 대문 앞에서 그들도 손을 쓰기 어려워 저를 따라오겠다고만 했습니다. 저는 오토바이에 올라타 액셀을 밟고 달렸고, 그들이 뒤따라왔지만 오토바이만 지날 수 있고 자동차는 지날 수 없는 작은 길로 들어가 그들을 따돌렸습니다. 나중에 그들이 또 몇 번 집과 직장에 찾아왔지만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 아래 모두 피할 수 있었습니다.
국보가 이번에 저를 찾은 것은 제가 기계를 수리하는 한 수련생을 찾았는데, 경찰이 그를 감시하다가 저까지 사진을 찍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그 기계 수리 수련생은 박해받아 구치소에 갇혔습니다. 그 수련생이 처분보류로 집에 돌아온 후 다른 수련생에게 말하길, 구금 기간에 경찰이 제 사진을 들고 저를 아는지 물었다고 했습니다. 국보는 아마 제가 큰 물고기라고 여긴 듯, 두 달 후 어느 날 아침 제가 막 집을 나서자마자 두 명의 경찰에게 붙잡혔고, 건물 밖에는 5~6명의 경찰이 제압용 창과 전기봉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저는 현지 파출소로 납치됐고 파출소 지도원이 저에게 지난번에 도망가서 국보한테 한바탕 원망을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심문도 없이 바로 10일 구류였습니다. 구류소 신체검사 때 저는 숨을 깊이 들이마셔 혈압을 200 넘게 올렸고, 구류소 의사는 경찰에게 저를 데리고 지정 병원에서 다시 측정하라고 했습니다. 제 혈압은 또 200이 넘었습니다. 구류소 소장은 파룬궁수련생이 온 것을 보고는 대법을 모독하는 말을 했고, 저는 그를 응시하며 정념을 발하고 사부님께 가지를 청했습니다. 처음으로 그렇게 강대한 정념을 발했고 당시 모든 것이 정지된 느낌이었습니다. 3~4분 후 소장은 보고서를 들고 저를 데려온 경찰에게 “이 혈압은 3~5일은 괜찮지만 10일은 안 되겠어. 문제가 생길까 봐 못 받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를 데려온 경찰은 전화 한 통화를 한 후 저를 집으로 데려다주었고 가는 길에 밥도 사주었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경찰이 집을 수색했고 직장 사무실도 수색했습니다. 파출소에 가서 따졌더니 파출소 경찰이 국보가 집을 수색했고 자신들은 참여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어느 국보가 사건을 처리했는지 물으니, 한 부소장이 이유를 알아본 후 한 국보 경찰의 전화번호와 이름을 알려주었습니다. 동료 휴대폰을 빌려 이 국보 경찰에게 전화했더니 그는 저와 원한도 없고 공무일 뿐이며, 컴퓨터는 사이버 경찰에서 검사해서 문제없으면 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대법 책은 누가 가져갔는지 물으니 사무실에 있었는데 누가 가져갔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그의 전화번호를 명혜망에 올렸는데, 다시 만났을 때 그가 저에게 “당신이 내 전화번호를 인터넷에 올려서 내 생활과 일에 얼마나 큰 압력을 받는지 압니까? 압니까? 압니까?”라고 했습니다. 저는 “다 당신을 위한 겁니다. 업을 좀 덜 짓게요!”라고 말했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저는 해외에서 진상 전화를 걸어주는 수련생들에게 정말 감사했습니다. 여러분의 노력이 중국 수련생들의 박해를 줄이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파출소에 컴퓨터를 찾으러 갔을 때 작은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제 전화번호는 공개되어 있어 평소 휴대하지 않는데, 어느 날 파출소에서 10여 통의 전화가 왔습니다. 무슨 일인지 전화하니 컴퓨터를 찾으러 오라고 매우 급하게 재촉했습니다. 한두 통이었다면 갔겠지만 10여 통이나 그렇게 급하게 재촉하니 마음이 좀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가서 찾아오라고 했고 아내가 컴퓨터를 가져와서 말하길, 담당 경찰이 급히 출장 가야 하는데 제가 늦게 오면 며칠 더 기다려야 해서 그랬다고 했습니다.
다음 날 상사가 직장에서 저를 보고는 깜짝 놀라며 “당신 그들한테 잡혀간 거 아니었어요? 괜찮아요?”라고 했습니다. 아마 그들이 제 사무실을 수색할 때 우리 상사에게 제 사건이 얼마나 큰지 모른다고 말해서 그런 표정을 지은 것 같습니다. 저는 웃으며 “저는 대법을 수련해 좋은 사람이 되는데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3. 수련상의 부족을 반성하며
2019년 전국 사업단위 파룬궁수련생 제로화 운동에서 제가 있는 성(省)은 매우 사악하게 적극 협조했습니다. 본 직장 상사와 상급 상사가 자주 저를 찾아와 이른바 ‘오서(五書, 5가지 수련 포기 각서)’를 쓰라고 요구했고, 쓰지 않으면 장래에 아이에게 어떤 영향이 있을지, 자신의 일에 어떤 영향이 있을지 등등을 말했습니다. 저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장래에 무엇을 성취할지 알기 때문입니다. 두 달 후 상사는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의 압력 하에 문서 한 장으로 바로 임금 지급을 중단시켰습니다. 동시에 직계 가족을 동원해 이치로 설득하고 정으로 감동시키려 했습니다. 구 정법위 서기와 시 정법위 처장이 감화교육 인원을 데리고 와서 위협과 회유를 했고, 한순간 먹구름이 덮친 듯했습니다. 친척들은 이익과 아이의 앞날을 중시했고, 상사들은 업무를 위해서였는데, 제가 전한 진상이 그들 앞에서는 그렇게 무력하게 보였지만 그래도 저는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임금이 약 11개월 정도 중단됐을 때, 공안국 부국장이 직접 팀을 이끌고 저를 파출소로 잡아갔고, 우리집 문에 진상 복(福)자가 있다는 이유로 형사구류를 시켰습니다. 당시는 코로나 기간이었는데, 구치소로 보내는 날 제가 약간 열이 나는 것처럼 보였고 혈압이 높아 구치소는 수용을 거부했습니다. 담당 경찰이 계속 전화를 걸었고 저는 그동안 계속 정념을 발했습니다. 최종적으로 한 국장과 한 대대장이 보증을 서는 상황에서 억지로 저를 들여보냈습니다.
저는 이번 박해가 제 수련에 큰 문제가 생겨 구세력이 빈틈을 탄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제 신체가 나타낸 상황으로는 구치소가 받지 않았을 것이고, 또 저를 잡은 그 부국장은 파출소에서 기어코 저를 감옥에 앉히겠다고 고함쳤습니다. 임금 지급을 중단했을 때 상급 각 부서에 가서 진상을 알렸어야 했습니다. 임금 지급 중단은 결국 불법이니까요. 임금 지급 중단 기간에 저는 조급해졌고, 말소리가 커졌으며, 쟁투심과 원망심이 매우 강해졌고, 아내(수련생)를 볼 때마다 못마땅해서 온종일 그녀에게 고함을 질렀습니다. 때로는 아내의 표현이 자신을 제고시키려는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을 바꾸려 하지 않았습니다. 직장에서 원래 법공부 시간인데도 그 시간에 투지주(鬪地主) 게임을 하고 장기를 두었습니다. 연공도 며칠 하다 며칠 쉬는 식이었고, 예전의 정진함이 없어졌으며, 마음속으로 박해가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습니다.
비록 한마디 진술도 하지 않았지만 저는 억울하게 1년 반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때가 코로나 기간이었는데, 제가 나왔을 때 직장 상사도 바뀌어 있었습니다. 직장에 가서 중단된 임금을 요구하니, 새 상사는 상급에서 저와 노동관계를 해제한 문서를 꺼내 보였습니다. 새 상사는 대법 진상을 모르지만 직장 사람들에게서 제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임금 요구에 협조적이었습니다. 인사국은 정법위의 조종 하에 곳곳에서 어렵게 만들었고, 심지어 제가 3년 노동교양 때 보전받은 임금까지 공제했지만, 여러 고비를 거쳐 결국 일부 임금을 돌려받았습니다. 악당이 파룬궁수련생을 경제적으로 차단하고, 육체적으로 파괴하며, 정신적으로 고문하는 것이 제 몸에서 충분히 체현되었습니다.
20여 년의 대법 수련 중 저는 대법에 대한 굳은 신념으로 비틀거리며 오늘까지 왔습니다. 때로는 정진하지 못했지만 대법에 대한 확고한 마음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습니다. 사부님 경문 ‘관건 시각에 사람 마음을 본다’를 배울 때 저는 깨어났고, 대법제자의 명호와 책임에 대해 새롭게 인식했습니다. 지금은 관건적인 시각입니다. 저는 자신을 엄격하게 요구하며, 수련 초기의 상태를 되찾겠습니다.
이상의 작은 심득 교류는 층차가 제한적입니다. 부족한 부분은 자비롭게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원문발표: 2025년 9월 2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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