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잘 수련해 나를 신고했던 가족을 변화시키다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저는 1997년에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를 수련하기 시작했습니다. 2008년에 중공에 의해 불법적으로 7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후 저는 정법 노정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아래에서는 제가 가정에서 어떻게 대법을 실증하고 가족을 구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대법 속에서 자신을 바로잡다

억울한 옥살이를 마치고 먼저 고향에 가서 부모님을 뵈었습니다. 며칠 머문 후, 제가 재삼 캐묻자 수련하지 않는 넷째 언니가 그제야 당시 시아버지가 저를 제 직장에 신고했고, 직장에서 다시 공안국에 알려 제가 납치됐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제가 불법 구금되어 있는 동안 시어머니는 제가 나중에 아이의 진학이나 입대에 영향을 줄까 봐 두려워하며 제 언니 앞에서 남편에게 저와 이혼하라고 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나서 마음이 매우 무겁고 화도 많이 났습니다. 그 후 더 알게 된 것은, 한번은 제가 큰시누이에게 전화해 장소를 약속하고 옷을 가져다 달라고 했는데, 그녀가 시아버지에게 알려 제가 불법 체포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한동안 시부모와 시누이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고 그들에 대한 원망이 생겼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 수련생이 제때에 사부님의 모든 대법 서적과 《호주 수련생에 대한 설법》 동영상이 담긴 MP5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대량의 법공부를 통해 저는 이전에 일하는 것을 수련으로 여겼고 자신을 착실히 닦지 못했음을 알게 됐습니다. 제가 당한 몇 년간의 억울한 옥살이 박해의 주요 원인은 시아버지와 큰시누이 탓으로 돌릴 것이 아니었습니다. 중공 악당의 거짓 선전이 그들을 이성이 똑똑하지 못하고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앞으로는 대법의 표준에 따라 자신을 요구하고, 갈등을 만나면 자신을 닦고 자신의 잘못을 찾으며, 일할 때 먼저 남을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그들에 대한 원망이 없어졌습니다.

시아버지는 오랜 중공 악당 간부로 직장에서 어느 정도 명성이 있었고, 온 가족이 체제 내에서 일했습니다. 수련하지 않는 그들로서는 자기 아들이 집을 잃은 것을 보고, 자신들이 손자를 돌봐야 했으니 남들이 아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직장 지도부가 매일 남편을 독촉해 저를 찾아다니게 했고, 두 노인은 또 진상을 모른 채 중공이 날조한 이른바 ‘천안문 분신’ 날조극을 믿었습니다.

우리는 따로 살고 있었습니다. 제가 돌아온 후 시어머니는 매일 저를 불러 밥을 먹으러 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시어머니가 밥 먹으러 오라는 것이 아니라 와서 그들에게 밥을 해주길 바라는 것이고, 동시에 수련생들이 저를 찾아오는 것도 두려워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마침 이 몇 년간 그들에게 부족했던 효도를 보충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전화로 부를 때마다 기쁘게 응답했습니다. 저는 또 그분들을 위해 장을 봐서 제때에 입맛에 맞는 음식을 해드리고 청소도 했습니다.

자신을 잘 닦아 가족을 선하게 대하다

제가 막 감옥에서 돌아왔을 때 시아버지는 저와 계산을 하자고 하셨습니다. 제가 집을 떠날 때 2만여 위안의 예금밖에 없었고, 우리가 사는 큰 집은 시아버지 명의로 산 것인데 지금은 본인의 자산이 10여만 위안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시아버지의 뜻을 알았습니다. 만약 제가 다시 수련하면 우리를 이혼시키고, 이혼 후에는 제가 아무것도 갖지 못하게 하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집은 남편이 산 것이고 시아버지는 몇 만 위안만 보태셨을 뿐입니다.

몇 개월 후 저는 직장에 돌아가 임시직이 됐습니다. 제가 직장의 한 여직원에게 파룬궁 진상을 알리고 션윈 DVD를 선물했는데(당시 션윈 DVD의 중국 내 전파가 허용됐음), 며칠 후 이 일이 시아버지 귀에 들어갔습니다. 시아버지는 전화로 저와 아들, 남편을 불렀습니다. 시아버지는 입을 열자마자 “너 또 사람들한테 얘기하고 DVD도 나눠줬구나. 공안국이 알면 또 너를 집어넣을 거다”라고 하셨습니다. 듣고 나서 저는 온화하게 물었습니다. “아버지, 제가 나쁜 일을 했나요?” 시아버지가 “아니다”라고 하자 저는 “그럼 제가 동료에게 박해받은 일을 얘기하는 게 뭐가 안 된다는 거예요?”라고 했습니다.

시아버지는 제가 DVD를 나눠줬다고 하자 저는 “DVD는 공연인데, 모두 중화 전통문화 프로그램을 공연한 거예요. 장쩌민이 대법 사부님을 질투해서 이 박해를 일으킨 거고요”라고 했습니다. 시아버지가 제 말을 끊으며 “네 그 얘기는 하지 마라. 다들 여기 있으니 말해봐라, 이혼을 하든지 연공하지 않겠다는 보증서를 쓰든지”라고 하셨습니다. 말이 갈수록 거칠어졌습니다. 남편과 아들은 모두 시아버지를 두려워해 아무도 감히 소리를 내지 못했습니다. 저는 일시에 시아버지를 이해시키기 어려워 할 수 없이 “아버님 화내지 마세요, 다음에 다시 말씀드릴게요”라고 했습니다.

집에 돌아오자 남편은 저에게 노발대발하며 욕설을 퍼붓고 나서 문을 쾅 닫고 나갔습니다. 아들은 비록 저에 대해 불만이 있었지만 그래도 진상을 알고 있어서 단지 마음속 압력이 매우 컸을 뿐입니다.

이 일이 있고 며칠 안 돼 넷째 언니가 저를 보러 왔습니다. 그녀는 시아버지가 전화해서 와서 저를 타이르라고 했고, 만약 다시 연마하면 남편과 이혼시키겠다고 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듣고 나서 가슴에 돌덩이가 얹힌 것 같았습니다. 돌이켜보면 당초 직장 지도부가 수련하지 않겠다는 보증서를 쓰라고 강요했을 때, 저는 지도부에게 “파룬궁은 정법대도입니다. 저는 진선인(眞·善·忍)에 따라 자신을 요구하며 어디서나 사람들과 선하게 지냅니다. 직장에서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며, 업무에 성실하게 임하는 것을 모두가 똑똑히 보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지도부는 제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위에서 연마하지 말라고 하면 할 수 없다”며 사람을 파견해 저를 감시하고 세뇌반에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저는 직장에서 불법 해고됐습니다. 이제 거의 50세가 되는데 이혼하라니 정말 마음이 씁쓸했습니다.

저는 여전히 한결같이 시부모님께 장을 봐드리고, 밥을 해드리고, 청소를 해드렸습니다. 한동안 지난 후, 저는 순정한 마음으로 시아버지께 10페이지의 긴 편지를 썼습니다. 안에는 이전에 제가 400위안 때문에 시아버지와 다퉜던 일을 언급하며 과거에 두 어른께 불경했던 것을 용서해 달라고 했고, 대법을 수련한 후 직장과 가정에서의 변화를 얘기했으며, 중공 악당의 대법 박해와 파룬따파가 세계에 널리 전해진 상황을 얘기했고, 구이저우성 핑탕현의 ‘장자석(藏字石: 중국공산당이 멸망한다고 기록된 고대의 예언석)’을 얘기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부님의 ‘홍음3-세인에게 주노라’를 적었습니다.

저는 출근 시간을 이용해 가서 둘째 시누이 앞에서 시아버지께 편지를 드렸습니다. 며칠 후 시어머니가 시아버지가 편지를 다 읽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둘째 시누이가 저에게 “아버지가 편지를 다 읽고 ‘보아하니 네 올케는 진심으로 우리에게 잘해주는구나’라고 하셨어요”라고 했습니다.

시아버지는 몸이 좋지 않아 때로는 1년에 몇 번씩 입원하셨습니다. 한번 퇴원해서 집에 돌아온 후 저는 직접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 9자 진언을 외우면 병고를 줄일 수 있다고 알려드렸습니다. 시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시는 것을 보고 저는 기세를 타서 구이저우성 핑탕현 ‘장자석’의 “중국공산당망(中國共産黨亡)” 글자는 하늘의 뜻이니, 입당했던 당을 마음속에서 탈퇴하면 신께서 사람 마음을 보신다고 했습니다. 시아버지는 “좋아”라고 하셨습니다.

나중에 저는 일부러 DVD 기기를 사서 ‘장자석’ 동영상과 《9평 공산당》(공산당에 대한 9가지 평론)을 보여드렸습니다. 시아버지는 다 보셨지만, 중공 악당에 수년간 세뇌당해 반신반의하셨습니다. 하지만 제 수련에 대한 태도는 어느 정도 바뀌었습니다. 한번은 제가 밥을 다 해놓고 먹지 않자 시아버지가 방에 와서 보더니, 제가 가부좌하고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아무 말 없이 나가셨습니다.

나중에 아들이 결혼해 아이를 낳아 제가 며느리를 돌봐주러 갔습니다. 비록 매우 바빴지만 여전히 법공부, 법 암기, 법 필사할 시간이 있었고, 거의 매달 사부님의 각지설법을 한 번씩 봤습니다. 점차 저는 좋지 않은 사상을 어떻게 닦아 없애는지 알게 됐습니다. 7년 동안 저는 두 손자를 키우면서 후천적으로 형성된 많은 관념과 집착을 닦아 없앴습니다. 저는 시시각각 진선인의 표준에 따라 자신을 요구했고, 며느리도 법공부를 시작했으며 수련생들이 집에 와서 법공부하는 것을 환영했습니다.

나중에 두 손자가 학교에 다니게 되어 저는 이제 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외지에서 일하는데, 제가 지금 돌아가면 그들이 동의할까요? 제가 이 일로 망설이고 있을 때, 아들이 전화를 걸어와 며느리와 상의했는데 제가 돌아가서 잘 쉬고 더 이상 그들을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언제 갈지는 며느리에게 말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저는 기쁘게 아들 전화를 끊고 며느리와 며칠 후 제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제가 집에 돌아온 지 한 달도 안 돼 늘 건강하던 시어머니가 갑자기 뇌경색에 걸려 돌아가셨고, 시아버지는 큰 타격을 받으셨습니다. 시어머니 장례를 치른 후 저는 마음속으로 ‘새로운 수련 환경이 시작되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남편이 시아버지께 우리와 함께 지내자고 제안했는데 시아버지는 울면서 동의하지 않았고, 두 시누이가 설득해도 안 됐습니다. 저는 시아버지께 “왜 가지 않으세요? 제가 아버님을 봉양하지 않고 효도하지 않을까 봐 두려우세요? 저는 대법을 수련하는 사람이니 꼭 잘 모실게요. 가세요, 저쪽이 넓어서 모시기 편하고 모두 왔다갔다 하지 않아도 돼요”라고 했습니다. 시아버지가 동의하자 모두 안심했습니다.

시아버지는 여든이 넘어 파킨슨병에 걸리셨는데, 나이 든 사람이 이 병에 걸리면 손은 떨지 않지만 몸이 굳어지고 걸을 때 잔걸음을 걷게 되어 쉽게 넘어지며 생활을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시어머니도 막 돌아가셔서 형제 세 사람은 아버지가 외롭지 않도록 의논해서 남편은 낮에 출근하고 밤에 아버지를 모시기로 했습니다. 두 시누이는 은퇴가 가까워 모두 일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시누이는 가까이 살아서 남편이 출근하면 매일 왔습니다. 큰시누이는 우리와 멀리 떨어져 살아 매주 하루 와서 시아버지를 돌봤고, 토요일과 일요일은 우리가 직접 돌봤습니다. 비록 저를 배치하지 않았지만 저는 모두의 의식주가 다 제 몫임을 알았습니다.

우리 생활 규칙도 시아버지가 오면서 바뀌었는데, 매일 7시가 안 돼서 정시에 밥을 했습니다. 저는 시아버지께 다양하게 음식을 해드렸는데, 작은 꽃빵, 팥소 찐빵, 우유에 계란 등등을 해드렸습니다.

두 시누이를 선하게 대하다

시아버지가 이사 오신 후, 저는 자주 둘째 시누이 부부에게 밥 먹으라고 오라고 해서 시아버지를 모시게 했습니다. 몇 개월이 지난 후, 둘째 시누이는 아버지가 현재 환경에 적응한 것을 보고 우리집에서 거의 먹지 않았습니다. 저는 둘째 시누이가 밥하기를 싫어하고 대충 먹는데 반찬만 있으면 된다는 것을 알기에, 매번 반찬을 많이 볶아서 우리는 조금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그녀가 가져가게 했습니다. 매번 그녀는 기뻐하며 “또 수고를 덜었네요”라고 했습니다.

매일 시누이들이 오기 전에 저는 청소를 다 해놓고, 그들이 물 마시기를 좋아해서 미리 끓여놓았습니다. 사람이 많아서 커다란 집을 매일 청소해야 했는데, 다른 방을 닦지 않더라도 시아버지 방은 닦아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온통 각질이었습니다. 우리집은 방 4개에 거실 하나인 아파트인데, 저는 주방과 가장 가까운 방에 살았습니다. 어느 날 큰시누이가 와서 밥을 먹을 때 시아버지는 제가 식탁에 없는 것을 보고 큰시누이에게 조용히 “봐라, 또 그거 하러 갔다”라고 하셨습니다. 큰시누이가 “남 일에 상관하지 마세요, 신앙은 자유예요. 밥이나 드시고 앞으로 그런 일에 덜 상관하세요”라고 하자 시아버지는 더 이상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시아버지의 돈은 모두 둘째 시누이가 보관했습니다. 어느 날 모두 없을 때, 시아버지가 저에게 수십만 위안이 있는데 우리에게 좀 나눠주고 싶다고 하셨니다. 저는 “그럼 나누세요, 두 따님이 매일 와서 아버님을 돌보니 당연히 그들에게도 줘야죠”라고 했습니다. 저녁에 시아버지가 우리와 얼마를 줄지 상의할 때, 저는 무심코 “둘째는 자주 오니까 좀 더 주시고, 첫째는 매주 한 번 오니까 5천 위안만 주시면 될 것 같아요”라고 했습니다.

그날 큰시누이가 와서 돈을 받을 때 기분이 좋지 않은 표정을 보고서야 제가 잘못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제 사상을 되돌아봤습니다. 큰시누이가 매주 한 번 오면서도 우리와 똑같이 나누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당시 그녀가 저를 배신해 7년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한 것에 대해 마음속에 원한이 있어서, 5천 위안만 주자고 건의해 그녀에게 보복하려 했던 것입니다.

제 언행을 생각해보니 이미 ‘진선인’을 벗어났습니다. 저는 서둘러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도움을 청해 법 속에서 바로잡고 이런 좋지 않은 사상을 갖지 않길 바랐습니다. 그 이후로 때때로 시아버지가 일부러 저에게 돈을 더 주시려 해도 저는 남편에게 시아버지가 공평하게 나누시도록 하고 갈등을 일으키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후 시아버지가 다시 돈을 나눠주실 때는 모두가 기뻐했습니다.

옛말에 ‘맏며느리는 어머니와 같다’고 했습니다. 저는 맏며느리로서 시어머니 역할도 했습니다. 생활을 개선할 때마다 반찬을 많이 만들어 두 시누이에게 한 몫씩 집에 가져가게 했고, 남편이 사온 먹을 것과 생활용품이나 고향 사람들이 시아버지를 보러 와서 가져온 물건도 모두 두 시누이 몫이 있었으며, 집에 보관된 물건이라도 시누이가 좋아하면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둘째 시누이는 자주 저에게 “친구들과 얘기하면 모두 자기 올케가 좋지 않다고 해요. 밥도 안 해주고 시누이들이 집에 오는 것을 싫어하며 다툰대요. 저는 ‘우리 올케언니는 전혀 그렇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집에 오기를 바라고, 우리에게 밥하라고 하지도 않고 모두 다 차려진 것만 먹게 해줘’라고 했어요”라고 했습니다. 큰시누이도 저에게 “올케언니, 저는 여기 오는 게 정말 좋아요, 밥할 필요가 없으니까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대법을 수련하지 않았다면 나도 못했을 거야. 아마 남들보다 못했을지도 몰라”라고 하자 그들은 모두 “맞아요”라고 했습니다.

진상을 알려 환경이 바뀌다

저는 보통 볼일이 있으면 점심때 나갔는데, 가끔 늦게 돌아오면 시아버지가 이것저것 물으셨습니다. 저는 시아버지의 화제를 피하고 기회를 빌어 진상을 알렸습니다. 시아버지는 파룬궁을 믿지 않고 공산당도 좋지 않으며 장쩌민이 나라를 부패하게 다스린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자료를 나눠주러 나가지 말라고 경고하셨는데, 사람들이 신고할까 봐서였습니다. 시아버지가 매번 말을 마치면 제 마음은 평온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자신을 깊이 파보니 강렬한 두려움과 쟁투심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시아버지는 제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제가 나가려고 하면 잔소리를 하셨습니다.

한번은 제가 집에 막 들어서자 시아버지가 저를 부르셨는데, 방에 가보니 두 시누이가 모두 있었습니다. 시아버지가 “또 자료 나눠주러 갔지?”라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평정심을 갖고 “아버지, 저는 대법을 수련해서 진선인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려는 거예요, 떳떳하지 못한 일은 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문밖에도 못 나가게 하세요? 지금 저는 건강한 몸으로 가정을 위해 봉사하고 있어요. 수련한 지 거의 30년이 됐는데 약 한 알도 먹지 않았어요. 만약 제가 대법을 수련하지 않았다면 오늘처럼 건강할 수 있었을까요? 제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대법의 아름다움을 말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라고 했습니다. 두 시누이는 서둘러 시아버지를 대신해 해명하며 화제를 돌렸고 시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느 날 저녁 저는 수련생 집에 법공부를 하러 갔습니다. 돌아왔을 때 집 문이 안에서 잠겨 있었는데, 아무리 두드려도 남편이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평소 제 일에 무관심했는데 다른 사람이 뒤에서 저를 욕할 때만 저에게 얼굴을 찌푸렸습니다. 저는 머릿속 가득 불평하는 마음을 안고 수련생 집으로 갔는데, 수련생이 제가 제고해야 한다고 일깨워주어 저는 단번에 깨달았습니다.

법에 대조해보니 저는 또 자신을 닦지 못했습니다. 가족들이 저를 도와 제고하게 하는데, 저는 감사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원망했으니 정말 오성(悟性)이 부족했습니다. 저는 사부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저는 자신을 바로잡고, 이튿날 아침 일찍 수련생에게 20위안을 빌려 아파트 단지 정문 밖에서 마늘 한 단을 사서 돌아가 남편이 좋아하는 마늘절임을 만들었습니다.

집에 와서 열쇠로 문을 여니 문이 열렸습니다. 시아버지가 마침 식탁에서 밥을 드시고 계셨는데 저를 보자 서둘러 “너 돌아와서 밥도 안 하고 어젯밤 어디 갔었니? 둘째(시누이)가 너를 한참 찾았는데도 못 찾았다. 네가 어젯밤 문을 두드렸는데 우리는 모두 못 들었어, 걔(남편)가 술을 많이 마셨거든”이라고 했습니다. 남편은 제가 그릇을 치우는 것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출근했습니다. 잠시 후 둘째 시누이가 와서 웃으며 어디 갔었냐고 물으며, 제가 나간 후 시아버지가 전화해서 빨리 가서 저를 찾으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이 일을 겪은 후 시아버지는 다시는 제게 트집을 잡지 않았고, 저도 다시는 피하지 않았습니다. 때로 모두 없을 때면 저는 시아버지에게 “아버님, 제가 잠시 법을 읽을 테니 들으세요”라고 하면 시아버지는 “좋아”라고 하셨습니다.

날씨가 따뜻할 때 저는 휠체어로 시아버지를 밖에 모시고 나갔습니다. 아파트 단지의 아는 사람이나 직장 동료들이 모두 “아버님 얼굴이 붉으스름하고 밝으신 걸 보니 정말 잘 모시네요. 요즘 어느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휠체어에 태워 나오겠어요. 다른 사람들이 모두 당신들을 칭찬해요, 당신네 가족은 정말 좋다고요”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제가 대법을 수련하는 것을 알지만 모두 직접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도 웃으며 “형제자매들이 효성스러운데 아버님이 복이 있으신 거죠”라고 하면 이때 시아버지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웃으셨습니다.

시부모님의 친척이 매우 많았는데, 특히 시아버지가 이사 오신 후 자주 사람들이 방문했습니다. 누가 와도 저는 정성껏 대접했고, 갈 때는 후한 선물을 사서 답례했습니다. 시아버지는 눈으로 보시고 두 번이나 월급 카드를 저에게 주려 하셨지만 저는 받지 않았습니다. 사실 저는 임시직 퇴직이라 연금이 제한적이고, 평소 옷 한 벌을 몇 년 입어도 버리기 아까워합니다. 저는 그들이 파룬따파가 좋다는 것을 알, 대법제자는 모두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들이 진상을 알아서 인류 최후의 대도태에서 남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전에 저는 열심히 잘하려고 노력했지만, 남편에게 보여주어 그가 저를 긍정하게 하려는 것이었으니 이 마음은 순수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저는 끊임없이 법 속에서 자신을 바로잡아, 진실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집안의 모든 가족을 선하게 대했습니다. 남편은 비록 입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가 변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지금은 수련생이 저를 찾아오면 그도 정성껏 대접합니다. 시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전에 수련생이 저를 찾아오면 시아버지는 그 사람을 뚫어지게 보며 이것저것 물으셨습니다. 지금은 누가 와도 묻지 않고 오히려 정겹게 인사하십니다.

지금 두 시누이 가족은 어른이든 아이든 모두 삼퇴(중국공산당의 당·단·대 조직 탈퇴)를 했습니다. 제가 만날 수 있는 시부모 친척들은 대부분 진상을 알고 삼퇴했습니다. 지금 큰시누이는 저에게 《전법륜(轉法輪)》을 빌려달라고 해서 보고 있고, 올 때마다 시간이 있으면 사부님의 각지 설법을 봅니다. 또 자주 아버지를 독촉하며 “아버지, 올케언니가 읽는 법을 많이 들으세요, 몸에 좋아요”라고 합니다. 시아버지는 저에게 “나는 이 아홉 글자가 좋다고 생각해(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 그래서 외운다”고 하셨고, 더 이상 중공 악당을 믿지 않으십니다.

이 수련 과정을 적는 것은 자신을 일깨우기 위해서입니다. 처음처럼 수련하여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고 중생을 구하는 사명을 저버리지 않고 앞으로의 길을 잘 걷겠습니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제도에 감사드립니다!

 

원문발표: 2025년 9월 1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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