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서적 |

꾸준히 법을 외우는 중에서 수련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다

글/ 미국 대법제자

[명혜망] 작년 9월, 우리 부서에서는 법 암기 팀을 결성했습니다. 그동안 대법에 대한 이해가 점점 깊어지고 심성이 승화되면서 제 몸과 마음에 환골탈태와 같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 과정을 기록하여 스스로 정리하는 동시에 사부님께 수련의 답안지를 제출하고자 합니다.

이전에 법을 외운 기초가 있었기에 처음에는 비교적 수월하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점차 사상업(思想業)이 머릿속에서 갈수록 강하게 반응하기 시작했고, 법을 기억하는 능력도 점점 떨어졌습니다. 심지어 ‘혹시 내가 모든 사람 중에서 법을 외우는 게 가장 힘든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습니다. 어떤 때는 『전법륜』의 짧은 한 단락조차 다른 수련생들은 몇 번 읽으면 외우는데, 저는 몇 시간, 심지어 하루나 며칠씩 걸리기도 했습니다. 늘 아래 구절을 외우면 위 구절을 잊거나, 때로는 해당 단락의 마지막 문장을 외운 직후에 그 단락 전체를 완전히 잊어버려 다시 외워야 했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울고 싶을 때가 많았습니다.

법을 외우는 것이 깊어지면서 저는 심성이 서서히 변하고 있음을 놀랍게 발견했습니다. 한 번은 팀의 진도를 따라가기 위해 거의 하루 종일 법을 외운 적이 있었습니다. 다음날 출근했을 때 오해로 인해 저와 한 동료가 같은 작업을 중복해서 하게 됐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억울하고 마음이 상했을 것이며 곧바로 제 입장을 표명하려 했을 텐데, 그날은 놀라울 정도로 평온했습니다. 쟁취하거나 논쟁할 아무런 생각도 없었고, 자신의 시간이나 노력이 헛됐다고 느끼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심지어 동료의 노력을 소중히 여기고 싶었고, 제가 한 일을 남기는 것보다 그 사람이 한 일을 남기는 게 더 중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 담담함과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마음은 저로 하여금 생전 처음으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상태를 깊이 체험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 안정되고 평온한 마음은 마치 예전의 제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법이 저를 변화시킨 것이며, 사부님께서 제 심성을 끌어올려 주신 결과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 날 밤 잠든 후에 저는 꿈을 꾸었습니다. 깊고 어두운 푸른빛 공간에 있었고, 오직 정중앙에만 하얀 빛 한 줄기가 있었습니다. 그 빛 속에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서 있었습니다. 한 명은 저였고, 다른 한 명은 연화좌에 서 있었는데 얼굴은 뚜렷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제 몸 안에서 검고 무거운 사람 형태의 윤곽이 떨어져 나왔습니다. 그 윤곽은 비어 있었고, 안에는 희미한 선들이 뒤엉켜 있었습니다.

그 윤곽이 쓰러지는 순간, 깊이 잠들어 있던 저는 순식간에 눈이 번쩍 떠졌습니다. 그리고 마치 그 사람 형상과 함께 제 오른쪽 다리도 넘어지는 듯한 생생한 감각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제 머릿속에는 사부님의 한 구절 법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사실 당신은 한번 부딪혀 당신이 아무 일도 없었다고 여기지 말라. 당신은 정말로 하나의 당신이 죽어버렸는데, 업력으로 구성된 당신이다. 그뿐만 아니라 신체에도 당신의 좋지 않은 업력으로 구성된 사상이 있고 마음이 있으며 사지가 있는데, 부딪혀 죽었다. 그러나 그는 전부 업력으로 구성된 것이다. 우리는 당신에게 이처럼 큰 좋은 일을 해주었으며 이처럼 큰 업력을 제거하여 그것으로 명(命)을 갚게 했는데, 이 일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곧바로 당신이 수련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이렇게 하였다. 당신들이 알게 되었을 때 당신들은 나에게 감격할 방법이 없다.”(미국법회 설법-뉴욕좌담회 설법)

그 순간 저는 충격을 받았고, 마음속에서 수많은 의문이 솟아올랐습니다. ‘나는 어릴 적부터 대법 속에서 자라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째서 내 몸 안에 이렇게 거대한 업력으로 형성된 내가 아직도 존재하고 있었던 걸까?’

비록 그 당시 이 경험의 진정한 의미를 분명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사부님께서 저에게 계속 정진하라고 격려해 주신 것이거나, 혹은 저에게 더욱 분명히 인식하게 하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수련은 결코 표면의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법의 기준에 따라 실제로 깊이 숨겨진 집착, 관념, 바르지 않은 생각과 업력을 철저히 없애야 합니다. 설령 그것들이 아무리 깊숙이 숨어 있거나 아무리 ‘합리적’으로 보여도 말입니다.

1. 관념을 발견하자 사부님께서 또 한 번 내 몸을 정화해 주시다

법을 외우는 양이 늘어남에 따라 저는 마음이 흔들릴 때 더 의식적으로 안으로 찾으려 노력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아침 법공부를 하는데 도무지 마음을 조용히 할 수 없었고, 머릿속에는 예전에 한 수련생과 겪었던 갈등이 격렬하게 떠올랐습니다. 당시 저는 수련생이 말하는 내용이 올바르지 않아 다른 사람을 오도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녀가 말할 때 자주 끊으며 수정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몇 차례 그렇게 고쳐준 뒤 오히려 다른 수련생에게 제지를 당했습니다.

저는 되도록 그 기억을 억누르며 ‘수련생이 틀렸다’는 관념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그 상황에서 뛰쳐나와 저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려 노력했습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안으로 찾아본 끝에, 우리가 함께했던 순간들을 떠올려 보니, 제게는 불합리하다고 생각되거나 잘못됐다고 보였던 많은 일들에 대해 그 수련생은 항상 다른 이들에게서 예상치 못한 반응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혹시 이것은 사부님께서 수련생의 표현을 통해 나 자신의 관념을 보게 하시려는 것이었을까?’

그날 밤, 바로 이 관념들을 발견한 직후 저는 매우 선명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저는 빨간색 옷 한 벌을 갖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부모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옷의 실 한 가닥 한 가닥마다 아주 교묘하게 숨겨진 흡혈충이 들어 있다. 그것들은 아무도 모르게 네 몸속으로 파고들었단다.” 저는 그 옷 위에 엎드려 아무리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그것들이 살아 있는 벌레라는 걸 전혀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때 부모님이 큰 알루미늄 대야 하나를 가져왔는데, 안에는 해독용 액체가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제가 손을 그 물에 담그는 순간, 온몸에 엄청난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무수히 많은 것들이 몸속에서 필사적으로 솟구쳐 나왔고, 전신에서 사지·오관·말초신경까지 퍼지는 격심한 통증이 밀려왔습니다. 마침내 몸이 정화됐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제 손에는 수많은 작은 구멍들이 생겨 있었고, 그 구멍 하나하나는 자수용 바늘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크기에 불과했지만 손바닥 전체를 뚫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대야 속에는 몸에서 빠져나온 흡혈충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사상업과 관념에 통제되지 않고 확고히 안으로 찾았기에, 사부님께서 또 한 번 다른 공간에서 제 몸을 정화해주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잠에서 깬 후 저는 사부님께 깊이 감사드리는 한편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줄곧 법공부하며 수련해 오지 않았던가? 내 사유는 당연히 법에서 형성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나 많은 좋지 않은 관념들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이후 끊임없이 법공부하며 제고하는 과정에서 저는 점차 깨닫게 됐습니다. 비록 저는 어려서부터 대법 속에서 자라왔지만, 수련에 대한 마음가짐이 느슨했고 엄격하게 대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사부님께서 “어쨌든 어떤 것이든 당신이 보았다면 바로 들어간 것이다”(각지 설법11-2010년 뉴욕법회설법)라는 법리를 충분히 중시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게으름과 고비를 넘을 때 마음이 받는 충격과 탈바꿈의 고통을 기피한 탓에, 기분이 안 좋거나 피곤할 때면 늘 스스로 인터넷에서 각종 콘텐츠를 찾아보며 그 안의 이야기나 인물의 감정에 몰입하고 감정이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현대인의 좋지 않은 행위나 관념들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였으며, 그것들이 저에게 세상 속 행복이나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구(舊) 우주는 이미 성주괴멸의 마지막 시기에 이르렀고,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이 이미 매우 나쁜 상태입니다. 특히 중국의 중생들은 모두 공산당 당문화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들이 무엇을 하든 필연코 그 안에는 당문화의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제 수련에 불필요한 난이도를 더한 것이 아닙니까?

이러한 것들을 인식하게 된 후, 저는 그동안 좋지 않다고 알고는 있었지만 반복적으로 좀처럼 내려놓지 못했던 TV드라마와 인터넷에 대한 집착을 철저히 끊어냈습니다. 그리고 온전히 저 자신을 법 속에 용해시키게 됐습니다. 또한 진정으로 이성적으로 대법을 인식하고, 항상 자신이 수련인임을 잊지 않으며, 스스로를 엄격하게 요구하려는 의식을 지니게 되면, 사실 집착심은 그렇게까지 버리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2. 근본 집착을 찾아내고 이성적으로 대법을 인식하다

끊임없이 꾸준히 법을 외운 끝에 마침내 저는 점점 더 빠르게 법을 외울 수 있게 됐습니다. ‘구하고자 하는 문제’ 부분의 한 단락을 외우던 중, 갑작스럽게 울컥하는 감정이 밀려왔습니다. 계속해서 암송하며 기억을 반복하는 그 순간, 갑자기 대법의 위대함에 감동해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법 속에서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수많은 법리를 보게 됐고, 현재 층차에서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는지 더욱 깊이 느끼게 됐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서 대법을 얻은 사람은 얼마나 큰 행운을 가진 존재인지 실감하며, 대법과 수련에 대한 인식도 더욱 깊어졌고, 수련의 신성함과 오묘함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러나 법을 암기하며 느꼈던 그 커다란 감동으로 인해 저도 모르게 마음속에 환희심이 생겨났고, 당시에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점심시간에 저는 밖으로 나가 기분 전환 삼아 즐기려는 마음으로 음료 한 잔을 사 마셨습니다. 그런데 마신 직후 갑자기 심한 어지러움이 몰려왔고,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죽음에 대한 극심한 공포가 저를 엄습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그냥 버텨야만 했습니다. 사부님께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에 대해 하신 설법을 찾아 읽기 시작했고, 한 줄 한 줄 배워 나가던 중 문득 자신의 근본적인 집착을 보게 됐습니다. ‘설마 나는 지금까지 대법을 나를 지켜주는 보호막처럼 여기고 있었던 걸까?’

원래 저는 매번 법공부하거나 교류문장을 읽을 때마다 ‘근본 집착’에 대한 내용을 접하면 ‘나는 과연 그런 근본 집착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다섯 살 때 부모님을 따라 법을 얻었고, 비록 박해가 시작된 이후 한동안 정진하지 못했던 시기도 있었지만 한 번도 수련을 포기한 적은 없었습니다. 미국에 온 이후로는 줄곧 세 가지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고, 중국에 있을 때보다 표현상으로도 훨씬 더 정진하는 모습을 보여왔습니다. 바로 이러한 ‘어렴풋한’ 상태 속에서 저는 무의식중에 ‘나는 이번 생에 수련하려고 태어난 사람이다’라고 자연스럽게 여겨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저는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아, 그래서였구나. 왜 내 몸에 이상이 생길 때마다 한동안 열심히 정진하다가 몸이 회복되면 어느 정도는 유지하다가도 점차 느슨해지고, 결국 세상 속의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추구하고 즐기려 했는지.’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결코 제가 속인의 삶을 살라고 저를 보호해주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후 저는 사부님의 경문 ‘원만을 향해 나아가자’를 반복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인생에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고통과 어려움을 깊이 체감하게 됐습니다. 마치 온몸이 두꺼운 안개에 휩싸인 듯 법도 보이지 않았고, 사부님의 존재도 느껴지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 질문에 대한 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간신히 버티며 사부님의 법상 앞에 가서 합장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부님, 저는 반드시 사부님을 따르겠습니다.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제 이성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저는 절대로 대법 수련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제자는 오늘 이 순간부터 저 자신을 완전히 사부님께 맡기겠습니다. 아무 조건 없이, 어떠한 보류도 없이 대법에 동화되겠습니다!” 바로 그날부터 저는 마치 다시 새롭게 수련을 시작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예전처럼 임무를 완수하듯이 억지로 자신을 다그쳐 법공부와 연공을 해야 한다고 밀어붙이던 상태가 아니라, 그 순간부터는 대법을 대하는 제 마음이 진정으로 간절해지고 법에 대한 갈망이 솟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법에서 법을 인식하는 것일까? 저는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사부님께서 사상 중에서 저에게 ‘경고하는 말’을 읽어보라는 점화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경문을 외워보기로 했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 계속해서 반복하여 외우는 과정 속에서 대법에 대한 인식과 이해, 그리고 사부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예전처럼 단순한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점차 이성적인 인식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마침내 저는 진정으로 이성적으로 깨달았습니다. 대법이란 무엇인지, 수련이란 무엇인지, 왜 수련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진정으로 수련할 수 있는지를. 저는 마침내 대법에 대해 진정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반석처럼 단단하고 어떤 것도 무너뜨리거나 흔들 수 없는 확고한 정념을 가지게 됐습니다!

3. ‘양보’에서 ‘타인을 위한 마음’으로의 심성 돌파

진정한 수련에 들어선 이후, 저는 가장 먼저 ‘타인을 위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전에 저는 욕실을 사용할 때 종종 룸메이트와 사소한 자리다툼이 있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제가 먼저 양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느 날 저는 룸메이트에게 먼저 말했습니다. “앞으로 욕실은 언제든 먼저 써도 돼.” 그 말을 꺼낸 순간, 사실 제 마음속에는 나름 뿌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번엔 마음가짐도 괜찮았고, 잘한 것 같아’라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 후 한번은 퇴근하고 돌아올 때 저는 실수로 정류장을 지나쳐버렸고, 늘 저보다 훨씬 늦게 들어오던 룸메이트가 그날은 단 1분 먼저 도착해 있었습니다. 그녀는 제가 들어오자마자 말했습니다. “오늘은 내가 먼저 왔으니까 나 먼저 씻어도 되지?” 저는 겉으로는 그러라고 말했지만, 마음 한편에는 작은 불쾌감이 피어올랐습니다. 그 순간 저는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타인을 위하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지금 기분이 언짢은 거지?’

조용히 마음을 들여다보니 그때 가졌던 그 ‘타인을 위한다는 마음’은 순수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비록 겉으로는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이런 기대가 숨어 있었습니다. ‘내가 변한 걸 상대방도 알아주고, 나에게도 잘 대해주면 좋겠다.’ 이것은 바로 이익을 바라는 마음이고 뭔가를 얻고자 하는 집착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이 제 기대대로 흘러가지 않자 저는 속으로 불쾌함과 실망감을 느꼈고, 그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사실 그것은 조건이 붙은 위선이었지, 진정으로 사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 경험을 통해 더 깊이 깨달았습니다. 진정한 ‘타인을 위함’이란 진심에서 우러나와야 하며, 어떠한 목적도 조건도 없어야 하고, 보답이나 반응을 바라지 않아야 하며, 시간이나 환경에 따라 변해서도 안 되고, 상대방의 단점을 보거나 상대가 나에게 어떤 태도를 보이든 그로 인해 바뀌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선’으로, ‘자아’를 내려놓고 완전히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마음속에 어떠한 계산이나 기대도 없이 한결같이 상대를 선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이 경험을 통해 저는 깊이 깨달았습니다. 수련은 결코 표면의 행동이나 형식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지금 이 상태면 꽤 괜찮다’는 식의 자기만족에 빠져 무심코 스치는 생각이나 사소한 일들을 소홀히 여겨서도 안 됩니다. 진정한 심성 승화가 필요합니다. 오직 뒤에 숨은 사심과 잡념을 제거하고, 진정으로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를 실천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점차 진정한 ‘진’과 ‘선’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4.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 ‘오만’의 뿌리를 도려내다

어느 날 수련생과 대화를 나누다가, 저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렇게 말해버렸습니다. “저는 집착심 같은 건 별로 없고, 다만 속세의 유혹을 잘 이겨내지 못하는 것뿐이에요.” 아마도 사부님께서 제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교만한 태도를 보인 걸 보시고는, 그날 밤 꿈을 통해 저에게 경고를 주신 것 같습니다. 꿈속에서 저는 어느 교실에 있었고, 한 남학생이 다가와 저에게 사귀지 않겠냐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속으로 그를 매우 무시하고 있었기에 아무런 망설임 없이 단칼에 거절해버렸습니다. 바로 그때 갑자기 아버지가 다급하게 교실로 달려왔고 화난 듯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너 과목 하나 계속 낙제하고 있잖아! 그렇게 계속 낙제하다간 졸업도 못 하게 돼! 아직도 이렇게 급해하지 않다니! 시간이 없어! 내가 실력 있고 뛰어난 사람을 찾아서 너한테 보충수업을 시켜야겠다. 이미 늦었어!” 그리고 아버지가 급히 데려온 사람이 놀랍게도 바로 방금 전에 제가 거절했던 그 남학생이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저는 처음엔 그저 단순하게 ‘내가 남녀 간의 정에 대한 집착을 아직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구나’라는 피상적인 의미로만 받아들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한 수련생과 마찰을 겪게 됐습니다. 저는 그녀의 진상 알리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 과도한 ‘중국식’ 열정이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저에게 되물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먼저 물어봤는데, 당신은 한마디도 안 할 건가요?” 그 순간 저는 말문이 막혔고 체면과 자기 자신을 증명하고자 하는 마음에 억지로 몇 마디를 내뱉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진심이 담기지 않은 말들이었고, 결국 그 수련생과는 깊은 간격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당시의 저는 오직 자신이 옳다는 것만 증명하려고 했고, 전혀 안으로 찾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다른 경험 많은 수련생에게 가서 하소연했습니다. 저는 그녀의 지지와 위로를 기대했지만, 돌아온 것은 예상 밖의 따끔한 지적이었습니다. “당신은 너무 오만하고 쟁투심이 강해요.” 그녀는 자신이 직장에서 어떻게 ‘무아(無我)’의 상태로 타인을 대하는지 사례를 나눠주었고, 저는 매우 부끄러워졌습니다. 저는 의아해했습니다. ‘왜 나는 그런 자비로운 마음을 수련해내지 못할까?’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여전히 자신에게 ‘오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다른 수련생이 해준 말이 떠올랐습니다. “어떤 사람의 물질은 매우 교활해서, 누군가가 그것을 지적하면 숨어버리고 위장할 수 있어요. 아무 보류 없이 자신을 해부하고, 먼저 그것의 존재를 인정해야만 진정으로 그것을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명혜망에 들어가 ‘오만’에 관한 모든 교류 문장을 찾아 하나하나 읽으며 스스로를 대조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그 깊숙이 숨어있던 ‘가짜 나’가 작용하고 있었음을 똑똑히 보게 됐습니다. 그것이 저로 하여금 수련생을 제멋대로 평가하고 판단하게 만들던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내면을 깊이 파고들며 돌아보는 과정에서, 예전에 수련생의 문제를 지적하려 했던 마음 자체가 정말 순수하게 상대방을 위한 생각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수련생 역시 이전에 같은 방식으로 제 문제를 지적한 적이 있었고, 당시 저는 비록 심성을 지켜내긴 했지만, 겉으로만 “앞으로 반드시 고치겠습니다”라고 말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만은 그런 경험을 빌미 삼아 그 사람에게도 똑같이 해도 된다는 식의 정당화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완전히 잊고 있었습니다. 대법제자는 누구나 각자 다른 수련의 길을 걷고 있으며, 모든 난관은 사부님께서 질서 있게 안배하신 것임을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너무나도 교만하게 마치 제가 누군가의 수련을 지도할 수 있는 양 착각했던 것입니다.

계속해서 안으로 깊이 파헤치다 보니, 저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스스로 ‘겸손하다’고 여겼던 그 마음은 사실, 제가 존경하거나 ‘잘하고 있다’, ‘수련이 깊다’고 생각하는 수련생들 앞에서만 나타나는 표현이었습니다. 반대로 제가 수련 상태가 ‘그저 그렇다’고 판단하는 수련생들에게는 마음속 깊은 편견과 냉담함으로 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알고 보니 이 ‘오만’은 단순히 수련을 방해하는 요소만이 아니라, 오히려 깊숙한 곳에 있는 ‘자아’를 지키려는 방어막이었고, 명리정(名·利·情)에 대한 집착과 질투심이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과거에 제가 그 ‘가짜 나’로 인해 상처를 주었던 모든 수련생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생각해보면, 만약 한 사람이 편견과 오만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가 어떻게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진정으로 진선인(眞·善·忍)에 동화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겸허히 대법에 비추어 자신을 수련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그런 사람에게서 중생에 대한 자비심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이 ‘오만’이라는 가짜 나를 진정으로 똑바로 인식하게 됐을 때, 제 수련 상태도 철저히 달라졌습니다. 매일 법공부할 때마다, 그룹이든 혼자이든, 시간이 부족해 단 한두 단락만 읽을 수 있을 때조차도, 법에서 수련을 지도하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었고, 대법이 끊임없이 펼쳐 보이는 부동(不動)한 층차의 내포에 감동하며 자주 눈물을 흘리게 됐습니다. 그때부터 안으로 찾는 것은 단순히 갈등이 생겼을 때만 하는 반응이 아니라, 저의 일상적인 자연 상태가 됐습니다. 저는 자신의 일사일념(一思一念)을 진지하게 수련하기 시작했습니다.

맺음말

비록 지금도 그런 집착들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했지만, 이제는 예전처럼 게을리하지 않을 거란 걸 저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이 기간의 수련 과정을 가끔 뒤돌아보면, 저는 제 수련의 길이 얼마나 질서 있게 안배되어 있었는지를 실감하게 됩니다. 마치 고리와 고리가 맞물리듯 모든 것이 정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갈등과 내면의 충격 속에서, 또 외부 환경의 동요와 자극 속에서, 그 일이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든 없든, 설령 마음이 아무리 괴롭더라도, 그 순간 제가 진정으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스스로를 수련인으로 여기며, 대법으로 자신을 지도할 수 있는가? 도망치지 않고, 숨기지 않고, 교활하게 회피하지 않고, 용기 있게 직면할 수 있는가? 모든 일의 표면에서 벗어나, 사람의 이치나 인정에 얽매이지 않고, 사(私) 속에서 자신에게 핑계를 찾거나 밖에서 구하지 않으며, 어떤 집착이나 사람의 마음도 남겨둬야 한다고 여기지 않고,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수련하며, 수련을 절대적으로 엄숙하게 대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법으로 모든 것을 가늠할 수 있을 때, 이것이야말로 제가 수련의 길에서 매 걸음을 올바르게 걸어갈 수 있는지의 관건입니다!

이상은 이 수련 과정에서 제가 체득한 얕은 인식일 뿐이며, 부족한 점이 있다면 수련생들께서 자비롭게 지적해주시길 바랍니다.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수련생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원문발표: 2025년 7월 1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7/12/497047.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5/7/12/49704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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