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부상에 대한 반성
글/ 캐나다 서양인 대법제자
[명혜망] 제 수련은 한동안 계속 갈등과 정체 상태에 있었습니다. 현재의 정법 노정을 따라가지 못하고 이곳에 갇힌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최근에 한 차례 사고를 당해 저는 근본 집착을 버리지 못한 엄숙한 문제를 마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제 생각을 조금 나누고자 합니다.
작년 가을, 정확히 말하면 ‘9.11’이었던 그날, 저는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다가 길이 울퉁불퉁한 곳에서 넘어졌습니다. 그때 저는 곧바로 일어나 길가에 서 있던 몇몇 행인들에게 괜찮다는 손짓을 하고는 황급히 자리를 떠났습니다.
넘어질 때 모든 충격은 제 오른손에 집중됐습니다. 손을 보니 손가락이 제각각 방향으로 비뚤어져 있었습니다. 그 순간 손가락이 탈구된 것 같아 손가락을 제자리로 밀어 넣었지만, 다시 제자리에서 튕겨 나왔습니다. 저는 손가락을 곧게 펴서 가슴에 눌러 붙이고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계속 걸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계속 반복했습니다. ‘나는 괜찮아. 나는 대법제자야. 나는 괜찮아. 괜찮아. 사부님께서 계시기에 괜찮아.’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제가 예전에도 이런 부딪힘이나 넘어짐을 여러 번 겪어본 적이 있어서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집에 돌아온 뒤에는 얼음을 손에 대고, 남편과 함께 발정념을 했습니다. 그 후 저는 가부좌를 했는데, 그날따라 다리가 평소와 달리 심하게 아팠습니다(나중에 어쩌면 사부님께서 손에 있던 업력을 다리로 일부 옮겨주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법공부를 하고 발정념을 한 뒤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전혀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밤이 되자 제 손이 부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손가락은 커다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고, 반지는 손가락 살에 깊게 파묻혔습니다. 저는 ‘내일 아침에는 아파트 관리실에 가서 반지를 잘라야 할 텐데, 거기에 맞는 도구가 있을지 모르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새벽 1시가 되었을 때 손은 이미 검푸른색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멍든 것일 수도 있고, 반지가 혈액순환을 막았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근처 응급실로 가서 반지를 빼기로 했습니다.
의사는 무척 애를 써서 세 번이나 잘라낸 끝에 반지를 제거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데리고 가서 X선 촬영을 했습니다.
영상 사진이 나온 후 의사는 무척 엄숙한 표정으로 저를 보며 말했습니다. “지금 엄청 아프실 겁니다. 손가락 세 개가 모두 골절됐으니 지금 당장 수술을 받으셔야 합니다.”
“수술이요?!” 저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습니다.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저는 전혀 뼈가 부러진 느낌이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치과를 제외하고 지난 20년간 저는 의사를 찾아간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깁스하고 병원이 지정한 ‘환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번에 제가 넘어진 일을 반성해보니, 아마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원인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1) 허영심입니다. 저는 무겁고 굽이 높은 신발을 신으면 키가 더 커 보여서 좋았습니다. 그러면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왜 그러지? 무엇 때문에?’ 키가 조금 더 큰다고 중생을 구하는 데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어떤 이유를 붙여도 결국은 허영심과 자아가 작용한 것이었습니다.
2) 제가 넘어진 것은 늘 발을 질질 끌며 걷는 습관 때문이었습니다. 수련에서도 마찬가지로 늘 미적거리고 미루고, 돌파가 더디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긴박감이 부족했습니다.
3) 저는 집중력이 부족했습니다. 만약 집중했더라면 아무 이유 없이 넘어지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더 많은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저는 늘 법공부, 연공, 발정념을 할 때 잡념이 떠돌았습니다. 이는 오랫동안 돌파하지 못한 문제로, 제 수련에 대해 늘 안타깝고, 낙담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각지 설법14-2016년 뉴욕법회 설법’에서 발정념과 관련된 한 가지 질문에 답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의 사상 속의 좋지 못한 것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너무나 많다. 얼마나 많은 좋지 못한 생명이 사람 신체범위 내의 공간 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는가. 아주 많은 좋지 못한 것들이 모두 비집고 들어갈 수 있다! 인체 그것은 열려 있는 것으로 큰 배율의 현미경으로 확대하면 당신은 입자와 입자 사이의 그 틈이 마치 모래와 같이 간격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며, 더 확대하면 우주의 별과 별 사이의 그 거리와 같은데, 미시적이고 더욱 미시적인 물체는 모두 넘나들 수 있는 것으로, 그 한 층의 생명은 마음대로 넘나든다. 사실 도가에서는 사람의 인체가 하나의 소우주라고 말하는바, 당신이 당신 인체에 대해 발정념을 해서 그런 좋지 못한 것을 청리하는 것인데, 그것이 작은 일인가?”
그때 저는 이 법을 읽으며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나쁜 물질이 인체로 들어오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지 문득 깨달았습니다. 제가 소극적일 때, 특히 제 수련에 대해 소극적으로 생각할 때는 바로 저 자신에게 더 많은 소극적인 것이나 이와 비슷한 물질을 더하고 끌어들이고 있지 않습니까? 만약 발정념을 하는 중에 이렇다면 상황은 더욱 심각합니다. 이는 자신의 공간장을 정화하지 못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오염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루 뒤 저는 다시 캐나다로 돌아갔습니다. 캐나다에서는 의료보험이 있기 때문에 응급실에서 7시간을 보내고 나와서 새로운 깁스를 했습니다.
제가 몇 차례 깁스를 언급한 것은 그것들이 제가 감싸여 있고, 갇혀 있다는 생생한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 깁스를 갈아 끼울 때마다 저는 원하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같았지만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스스로에게 ‘뼈가 부러졌으니 이런 것도 당연하다’라며 마음을 달랬습니다.
수술은 제 수련 여정 중 고통스러운 경험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애롭고 선의로 가득 찬 치료사가 저를 돌보며 회복을 도와주는 것과는 별개로 수술은 마치 제 몸이 수리공장의 조립 공정에 던져진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수술 중 저는 깨어 있기도 하고, 잠시 의식을 잃기도 했습니다. 간호사는 저에게 항생제와 강력한 진통제를 처방해 주었는데, 그중에는 마약 계열 약물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수술 후 엄마가 저를 데리러 왔을 때 저는 그 처방 약을 엄마에게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밤이 되자 마취가 풀리면서 통증이 서서히, 그리고 극심하게 밀려왔습니다. 저는 발정념을 해보았고, 사부님께서 저를 지켜보고 계신다고 마음속으로 떠올려보았습니다. 그러나 새벽 3시가 되었을 무렵 저는 이미 고통에 완전히 잠식돼 버렸습니다. 결국 약장 위에 있던 진통제를 꺼내 복용하고 나서야 겨우 잠이 들었습니다.
처방 약을 받을 때 의사는 필요할 때만 먹는 것이 아니라, 2주 동안 몇 시간마다 일정량씩 복용해야 하며, 더 강한 약효가 필요할 때는 아편 계열 진통제를 복용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부러진 손을 바라보며 생각했습니다. ‘나는 대법제자다. 사부님께서 돌봐주고 계시지 않은가? 구세력의 안배는 내 손가락처럼 비틀어져 있지만,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길만이 곧은 길이다.’ 저는 더 이상 진통제를 먹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2주 후 저는 다시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았습니다. 의사가 제 깁스를 풀었을 때 눈앞에는 끔찍한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제 손은 사람의 손처럼 보이지 않았고 마치 부풀어 병이 든 노란빛과 초록빛이 뒤섞인 막대기 같았습니다. 관절 부위에는 거즈가 감겨 있었고, 그 위에는 붉은 혈흔과 요오드 자국이 묻어 있었습니다. 중지는 썩은 살과 엉겨 붙어 있었고 고정용으로 박아 놓은 핀 여섯 개가 관절 부위에서 약 반 인치 정도씩 삐죽 튀어나와 있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몇 초밖에 볼 수가 없었고, 그 뒤로는 검진 때 제 손을 더 이상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엑스레이를 찍을 때도, 대기할 때도 저는 제 괴물 같은 손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결국 담당 외과의가 제 행동을 보고는 제 손을 잡아 제 눈앞에 가져다 대며 말했습니다. “당신은 반드시 이 손을 똑바로 보셔야 합니다.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이 손과 소통해야 합니다. 당신의 일부로 받아들여야만 회복될 수 있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제 손은 제가 마주하기를 가장 두려워하던 집착의 실체였습니다. 바로 거기에 있는데도, 너무 흉하고 끔찍해서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마주하지 않고서 어떻게 회복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 이야기를 가족과 수련생들에게도 들려주었습니다. 그러자 가족과 수련생들이 모두 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손과 소통하고 있나요?” 저는 그것이 하나의 암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수련생의 관점에서 시련을 바라보고, 다른 공간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라는 뜻이라는 것을요. 하지만 저는 여전히 완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대체 손과 무슨 이야기를 나눠야 한단 말이지?’
저는 계속해서 이 의학적 시련에 부딪혔지만,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주위에서는 영양제를 먹어보라고도 하고, 재활치료나 침술, 한약 등을 권하기도 했습니다. 그 대부분은 제가 신뢰하는 오래된 수련생들이었습니다. 저도 조금 시도는 해보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그것들을 받아들인다면, 사부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결국 인간의 상태에 머물겠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제가 왜 그래야 한단 말입니까?
저는 ‘전법륜(轉法輪)’ 제6강에 있는 점을 치는 것과 관련된 법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한편으로는, 제 수련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는 명혜망 글에서 본 어떤 수련생들처럼 고문 속에서 사지가 부러져도 사부님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과 강한 의지력으로 몸을 회복시키는 그런 상태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다친 션윈(神韻) 배우들이 이런 모든 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균형을 잡았는지도 궁금했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깨달았습니다. 비록 아직 그 표준에는 멀었지만, 그래도 저는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지 그 반대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요. 결국 똑같은 말입니다. 저는 “위로 수련해 올라가든지” 아니면 “떨어지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셋째 길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상은 제가 이번 시련과 관련한 몇 가지 생각들입니다. 이 고난은 제가 수련에서 앞으로 나아가고, 안으로 찾아 집착을 발견하며, 초점을 인체 자체에 맞추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이 겉옷이 찢어졌다면 꿰매면 됩니다. 다만 왜 그것이 터졌는지, 제가 어떻게 제고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경문인 ‘관건 시각에 사람 마음을 본다’가 발표되었을 때, 한 구절이 저를 크게 흔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말후(末後)에 수련하지 않는 자, 가짜로 수련하는 자, 성심껏 수련하지 않는 자들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사부님께서 저를 두고 하신 말씀은 아닐까요? 저는 정말 마음을 다해 수련하며 자신을 제고하고 있는 걸까요? 혹시 저는 거짓으로 수련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저는 이제야말로 제 근본 집착을 직시하고 버려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두려움과 이기심이라는 근본 집착에 대하여
줄곧 저는 제 안에서 가장 깊은 집착이 바로 두려움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두려움은 사람을 기운 빠지게 하고 우울하게 만들며, 여러 방면에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저는 그것을 내려놓으려 애써보았지만, 이 단단한 얼음을 녹여내는 과정은 그리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최근에야 저는 그 이유 중 하나를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려움과 공포는 아직 가장 밑바닥에 닿아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보다 더 깊은 집착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기심이었습니다. 제가 두려움을 느낄 때는 제 관심이 오직 저 자신에게만 쏠려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보다는, 제가 어떤 느낌을 받는지, 다른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볼지, 제 명예가 어떻게 훼손될지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중생을 구할지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관건 시각에 사람 마음을 본다’에서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수련인의 표준에 따라야 하고, 법을 가장 중요시하며, 법으로 일체를 가늠해야 한다. 말후(末後)에 정법(正法)이 사람을 구하는 이 중대한 역사적 시각에, 나타나는 모든 문제를 더더욱 수련인의 심태로 대해야 하고, 법을 최우선으로 보아야 하며, 대법 항목을 잘 수호함으로써 그것이 사람을 구하는 작용을 잘 발휘하도록 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생각할 것이고 해야 할 것이다. 관건 시각에 어떤 사심(私心)이나 사념(私念)을 섞어 넣는 것은 모두 사악이 원하는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항목 내부에서 망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뭇 신들이 모두 보고 있고, 구세력도 보고 있으며, 홍마(紅魔)도 보고 있다.”
이 중요한 시각에 저는 무언가를 할 때 종종 제 사심과 사념이 제 생각 속으로 파고들게 허용해 왔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을 반드시 멈춰야 합니다.
또 다른 형태의 두려움은 제가 아주 강한 사회적 공포를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진상을 알리고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가 있을 때 더욱 그렇습니다. 저는 종종 핑계를 대고 가지 않으려 하거나, 현장에 가더라도 멍하니 서 있기만 할 때가 많습니다. 저는 늘 제 주변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둘러싸고 있어 저와 일반인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두려움이 갑자기 밀려와 황급히 도망쳐 숨은 적도 있습니다. 저도 이것이 전혀 이성적이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행동은 절대 적절하지 않습니다. 남의 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고 극복하기 쉽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그 일이 제게 닥치면 마치 태산이 얹힌 듯한 무게감이 느껴집니다.
이런 두려움과 이기심은 아주 깊이 숨어 있었습니다. 저는 사람들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나면 속으로 강한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대화 속에서 제가 실수했다고 여긴 부분을 끝없이 되짚어보았습니다. 사실 그 실수는 대화 전체의 5%에 불과할 수도 있는데, 저는 그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그 부분만이 제가 본 전부, 기억할 수 있는 전부, 그리고 유일하게 중요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면서 중생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은 완전히 잊고, 오로지 저 자신에게만 초점을 맞췄던 것입니다.
저는 거절당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무지해 보일까 봐 두렵습니다. 실패가 두렵고, 남과 비교해서 제가 뒤처질까 봐 두렵습니다. 항목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하지 못한 사람으로 보일까 봐 두렵고, 제가 사실은 거짓으로 수련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날까 봐 두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교류 글을 쓰는 것도 참으로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저는 이런 생각들이 모두 비이성적이며 동시에 정념이 부족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자신을 수련인으로서 자격이 있는지 의심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흔들림 없이 굳건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을 저는 잘 압니다. 제가 굳건한 마음만 있으면 자연스럽게 잘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에서 결과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제 안에 있는 굳건한 마음을 불러내야 합니다. 그 순간에 저는 자신에게 상기시켜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야지, 나 자신을 위해서는 안 된다. 사람의 감각은 환상일 뿐이다. 반드시 굳건한 마음을 지켜야 한다.’
최근 저는 설법 한 구절을 읽고 마치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제가 인간으로서 품고 있는 감정이 정법과 비교하면 얼마나 작고 어리석은가를 깨닫게 됐습니다. ‘각지 설법10-맨해튼 설법’에서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처음으로 사람에게 주어진 기회이고, 또한 창세의 목적이다. 특히 무량무계(無量無計)한 운운중생(芸芸眾生) 중에서 당신은 이 대법의 한 제자가 될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잘 걷지 못하는가? 대법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사전 서약을 완성하라.”
지금 저는 매체 안에서의 제 역할에 대해 조금 갈림길에 서 있는 느낌입니다. 이 부분은 그동안 교류에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지만, 사실 문제의 뿌리는 똑같았습니다. 바로 두려움과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잘하지 못할까 봐 두렵고, 실패가 두렵고, 비판받는 것이 두렵고, 힘든 일을 하는 것이 두렵고, 사람들 앞에 드러나는 것이 두렵고, 이런저런 평가를 듣는 것이 두렵습니다. 저에게는 사심이 너무 많았습니다. 제 생각과 ‘내가’ 관리층으로부터 무엇을 받아야 하는지에만 지나치게 매달렸고, 먼저 그분들을 생각하거나 매체가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그들이 떠안고 있는 피할 수 없는 책임들을 헤아려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진정으로 집중해야 할 것은 ‘내가 어떻게 하면 더 잘 협력할 수 있을까’, ‘어디에서 더 많이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매체가 더 성공적으로 운영되어 우리를 기다리고, 우리에게 기대하고 있는 중생들을 더 많이 구할 수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매체만의 일이 아닙니다. 이번 시련은 지금 너무나 엄중하여 전체 대법 수련생 집단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저는 결과는 반드시 좋을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 전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반드시 이 일을 진지하게 대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 중요한 시기에 저는 더 노력하고 더 엄숙하게 세 가지 일을 잘하고, 진심으로 제 집착심을 없애겠다고 다짐합니다.
제가 잘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여러분께서 꼭 지적해 주시어 제가 수련의 길을 제대로 걸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수련생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원문발표: 2025년 7월 1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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