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본인 구술, 수련생 정리)
[명혜망] 나는 2004년부터 진상 자료 제작 항목에 투입됐다. 2014년에는 중공(중국공산당)의 누명으로 감옥살이 박해를 당했다. 억울한 수감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지 3개월 후, 수련생이 찾아와 다시 진상 자료 제작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진상 자료를 만든 지도 10여 년이 됐다. 진상 자료 제작이 나의 사명임을 안다. 이 사명을 완수하여 최상의 진상 자료를 만들어, 더 많은 인연 있는 사람들이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의 제도를 받을 수 있게 하겠다.
다음은 내가 대법 수련 과정에서 겪은 수련 체험을 간략히 정리한 것이다.
대법을 얻고 수련하며 좋은 사람이 되다
파룬궁을 수련하기 전, 나는 여러 질병에 시달렸다. 기관지염, 뇌신경통, 오십견, 요추 디스크, 담낭염, 요도염, 신장염 등이었다. 날씨가 조금만 추워도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연중 약을 달고 살며 질병의 고통에 시달려 괴로웠다. 집안일은 거의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집에서만큼은 내 말이 절대적이었고, 남편도 내 말을 들어야 했다.
1998년, 내가 40세 되던 해였다. 남편이 함께 친척 집에 가자고 해서 따라갔는데, 그곳에서 파룬궁을 수련하는 친척을 만났다. 그가 파룬궁이 얼마나 좋은지와 자신이 파룬궁 수련으로 얻은 혜택을 들려주었다. 그 순간 ‘이게 바로 내가 배워야 할 거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에게 배워도 될지 물었다. 남편이 답했다. “당신이 배우는 건 내가 관여하지 않을게. 단지 몸이 좋아지고 성격이 좋아지기만 하면 돼.”
당시 수련생이 공법을 한 번만 가르쳐주었다. 대충 따라 해봤는데 동작도 정확하지 않았다. 그런데 세 번 연공한 후 눈가에 생긴 골극(몇 년 된 것)이 사라졌다. 그때는 아직 《전법륜》은 구하지 못했고, 빌려온 《대원만법》만 보며 각 공법의 구결을 외웠다.
나중에 《전법륜》을 보게 됐다. 사람이 병에 걸리는 것은 자신의 업력(業力) 때문이며, 파룬궁을 수련하면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해도 대꾸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남편과 갈등이 생겼을 때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어떻게 하지? 연공을 하고 있는데 싸울 수도 없고 욕할 수도 없으니, 그냥 무시하자.’
혼자 집에서 법을 배웠다. 문제가 생기면 《전법륜》에 어떻게 나와 있는지 생각해보고 떠오르는 대로 실천했다. 요도염이 재발했을 때는 《전법륜》에서 말한 소업(消業)임을 알고 약을 먹지 않았다. 오전에 나타난 증상이 점심 낮잠 후 사라졌고, 약 없이도 나았다. 그후로 요도염은 완전히 사라졌다. 신장염이 재발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약을 먹지 않고 하루 만에 나았다. 연공하던 그해 가을, 기관지염이 다시 재발했다. 이것이 사부님께서 소업을 해주시는 것임을 알았다. 거의 두 달간 기침했고, 나중에는 피까지 토했지만 두렵지 않았다. 이것이 좋은 일이고 사부님께서 소업을 해주시는 것이며, 모든 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약 한 알도 먹지 않았는데 기관지염 증상이 사라졌다. 37년간 나를 괴롭혔던 기관지염이 그때부터 완치됐다.
이듬해에는 파룬궁 수련 후 모든 질병이 점차 나았다. 몸에 병이 없어 온몸이 가벼웠고, 어떤 일이든 할 수 있게 됐다. 매일 일해도 힘이 넘쳤고, 집에 있는 30여 무(畝, 1무는 약 200평)의 땅을 혼자서 관리했다. 밭의 풀을 모두 손으로 뽑았고, 집에는 10칸의 방을 짓고 3칸의 주택을 개조했다. 내가 일할 수 있게 되니 가정경제가 해마다 좋아졌다.
파룬궁은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 좋은 공법이며, 질병 치료와 건강 증진에 기이한 효과가 있음을 몸소 체험했다. 연공한 지 두 번째 해에는 두 아이를 데리고 함께 대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수련 전에는 가정사로 인해 시어머니와 원수처럼 지냈다. 시어머니의 행동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내가 옳다고 여기는 일이면 남편과 형제자매들이 모두 있는 자리에서도 시어머니와 서로 욕하고 싸웠다. 남편과 시동생들도 감히 뭐라고 하지 못했다. 나중에 시어머니의 아들들이 모두 결혼하자 시어머니의 네 칸 방을 두 시동생 가족이 두 칸씩 나눠 갖더니, 두 집 모두 시어머니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머물 곳이 없게 됐다.
시어머니가 짐을 들고 길에서 울고 있을 때, 이웃이 큰아들 집으로 가라고 권했다. 시어머니는 울며 말했다. “큰아들 집에는 제가 벽돌 한 장, 기와 한 장, 바늘 한 개, 실 한 오라기도 보탠 게 없어 갈 수 없어요.” 나중에 시어머니의 처지를 알게 됐다. 나는 내가 연공인이니 시어머니가 아무리 날 나쁘게 대해도 모셔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편과 함께 가서 시어머니를 모셔왔다. 그때 말씀드렸다. “어머님의 어떤 것도 원하지 않고, 그냥 어머님만 오시면 됩니다.” 시어머니는 매우 기뻐하며 우리집에 오셨다. 시어머니께 어떤 일도 시키지 않았다. 나중에 셋째 시동생 집에 아이가 생기자 시어머니가 그 아이를 돌봐주셨는데, 매일 우리집에 데려와 돌보셨고 나는 그 아이 밥까지 해주었다. 2년 넘게 시어머니를 모셨는데, 시어머니는 그 2년이 가장 복받은 시간이었다고 하셨다. 내가 선하게 대해드리니 시어머니는 매우 감동하셨다.
신앙을 견지하여 박해를 당하다
중국공산당(중공) 장쩌민(江澤民) 깡패집단이 1999년 7월부터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한 후, 나는 불법 강제노동으로 7개월 넘게 박해받았다. 집에 돌아오니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는 걸 알게 됐다. 남편은 내가 파룬궁을 수련하지 못하게 하며 말했다. “당신이 파룬궁을 배우지도 않고 수련하지도 않는다면 계속 당신에게 잘해줄게.” 그때 대답하지 않았는데, 남편이 가정을 택할 것인지 파룬궁을 택할 것인지 선택하라고 했다. 나는 둘 다 원한다고 대답했다. 남편은 “그건 불가능해. 당신이 파룬궁을 수련한다면 우리는 이혼해야 해”라고 했다. “파룬궁을 수련하는 게 어디가 나쁜가요? 당시 당신은 내 몸이 좋아지고 성격이 좋아지는 게 당신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했잖아요”라고 했다. 남편은 “당신이 파룬궁을 수련한다면 나는 (박해가) 무서워!”라고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혼했다. 큰딸을 데리고 17년간 살았던 집을 맨몸으로 떠났다. 처음 일자리를 구할 때는 숙식을 제공받으면서 내 아이까지 함께 받아줄 곳이어야 했다.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일자리를 찾았고, 월급은 적었지만 아이와 함께 머물 곳이 생겼다.
이혼한 후 작은딸은 아빠와 함께 살았는데, 모성애를 받지 못해 생활이 즐겁지 않았고 엄마를 그리워했다. 그 기간 작은딸은 심신에 상처를 받았다. 한번은 절벽에서 뛰어내리려 했는데 친구가 발견하고 즉시 껴안으며 말렸다. 또 한번은 부모가 이혼하려는 다른 여자아이와 함께 수면제 30알을 사서 자살하려 했다. 그 아이는 10알을 먹고 3일간 잠들었고, 내 작은딸은 20알을 먹었는데, 다음날 아침 정상적으로 학교에 갔고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런 일들은 모두 나중에 알게 된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내 작은딸을 이렇게 두 번이나 보호해주셨다.
나중에 작은딸은 우울증에 걸려 정신이 온전하지 않게 됐다. 그때 한 집에서 가정부 일을 하고 있었는데, 고용주가 나를 매우 신뢰했다. 이전에 여러 가정부를 고용했지만 얼마 못 가 해고했었는데, 파룬궁을 수련하는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고 집과 아이를 안심하고 맡겼다. 작은딸의 상황을 말씀드리니 고용주가 함께 지내게 해도 된다고 허락해주었다. 그러자 한 달 후 작은딸의 우울증이 완전히 나았다.
진상 자료를 만드는 것은 나의 사명
딸들이 취직한 후 나는 말했다. “지금 진상 자료를 만드는 사람이 적고, 다른 사람들은 가정 형편상 적합하지 않으니 내가 진상 자료를 만들어야 해.” 두 딸 모두 진상 자료 제작에 동의해주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가 진상 자료 제작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후 진상 자료를 전달하던 수련생이 박해받게 되어 고향을 떠나 시내로 가서 진상 자료를 제작하게 됐다. 딸들의 월급으로 생활비와 집세, 소모품을 샀고, 세를 얻은 집에서 진상 자료 제작을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며 수련생들이 필요로 하는 진상 자료가 점점 많아졌다. 이후 수련생이 매우 넓은 장소를 제공해주어 매일 대량의 진상 자료를 제작하게 됐다. 당시 진상 자료를 배포하는 수련생들이 많아서 아무리 많이 만들어도 수요를 충족시키기 어려웠다. 레이저 프린터 8대로 하루에 ‘9평 공산당’(공산당에 대한 9가지 평론) 책자를 300권 이상 제작했고, 잉크젯 프린터 7대로 진상 자료를 인쇄했다. 두 딸 모두 내 파룬따파 수련을 지지하고 진상 자료 제작을 지지해서 자주 돈을 보내주었다. 시간이 날 때면 진상 자료 제본을 도와주었고, 수련생들이 딸들 집에 진상 자료를 가지러 오기도 했다.
진상 자료를 만드는 과정에서 많은 신기한 일을 겪었고, 사부님께서 언제나 제자 곁에 계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해에는 진상 자료를 만드는 집의 창문, 빨랫줄, 자전거 등 곳곳에 우담바라 꽃이 피었다.
한번은 진상 자료를 딸 집에 가져다주려 했는데, 딸 집 열쇠를 깜빡하고 안 가져갔다. 딸 집에 도착해서 아무 열쇠나 꺼내 문을 열어보았는데 문이 열렸다. 진상 자료를 가지러 온 수련생이 믿지 못해 그 열쇠로 다시 열어보았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제서야 내가 진상 자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부님께서 문을 열어주신 것임을 믿게 됐다.
또 한번은 수련생에게 진상 자료를 전달하고 돌아왔을 때였다. 열쇠를 안 가져가서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리고 창문을 두드리며 아무리 불러도 안에 있는 수련생이 듣지 못했다. 사부님께 문을 열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딱’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또 한번은 진상 자료를 등에 메고 수련생에게 전달하러 가던 중이었다. 아직 가는 길의 3분의 1 정도가 남았는데, 막 교차로를 지나려는 순간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었다. 그때 ‘초록불이 몇 초만 더 있었으면 건널 수 있었을 텐데’라고 생각했는데, 그 즉시 신호등이 다시 초록불로 바뀌었다. 교차로를 막 지나자마자 다시 빨간불로 바뀌었다.
가정부로 일하며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을 돌볼 때였다. 두 시간마다 한 번씩 자세를 바꿔드려야 했고, 어르신 몸에는 눌린 자국이 있었다. 어느 날 수련생이 저녁에 함께 진상 자료를 배포하러 가자고 해서 밤새 자료를 배포하고 돌아왔다. 돌아와 어르신 몸을 살펴보니 눌린 자국이 하나도 없었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어느 겨울날, 수련생이 진상 자료를 배포하러 가자고 해서 급히 나섰는데, 두꺼운 겨울옷 입는 걸 깜빡했다. 수련생의 오토바이에 앉아 있으니 얼마나 추웠을지 짐작이 갈 것이다. 사부님께 간청하자 즉시 따뜻한 바람이 부는 것처럼 느껴져 전혀 춥지 않았다.
원문발표: 2025년 6월 2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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