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서적 |

사부님께서 고해에서 날 구하셨고, 나는 진상을 알려 중생을 구한다

글/ 내몽골 대법제자 본인 구술, 수련생 정리

[명혜망]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를 수련하기 전, 저는 온갖 질병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결장염, 담낭염, 위염, 부종 등으로 음식을 먹지도 잠을 제대로 자지도 못했고, 설사로 몸은 뼈만 앙상하게 남았습니다. 걷기도 어려워 비틀거리며 겨우 움직였고, 한약이든 양약이든 수없이 먹어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집안 형편도 매우 어려웠습니다. 남편 혼자 인력거를 끌며 번 돈으로 온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제 약값과 세 아이의 학비까지 감당해야 했으니 생활고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1998년, 갈 곳도 희망도 없던 저에게 기적 같은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저는 9일 학습반에 참여해 사부님의 설법 비디오를 보게 됐고, 그것이 제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됐습니다. 사부님의 은혜는 한량없이 크셨고, 저는 그 은혜로 고통의 바다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법공부를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나자 온몸이 가벼워졌고, 질병이 사라졌으며, 몸과 마음이 모두 상쾌해졌습니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제도와 거대한 불은(佛恩)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00년, 저는 시내에서 장사하며 지역 수련생들과 함께 공원에서 단체 연공과 홍법 활동을 하던 중 시 공안국에 납치돼 보름 동안 불법 구금됐습니다. 풀려난 뒤에는 현지 파출소의 강요로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고향 향(鄕)에서는 대형 방송으로 제가 파룬궁을 연마하며 법을 어겼다는 허위 선전을 했고, 온갖 거짓말로 저를 비방했습니다.

이 일을 듣고 저는 향장(鄕長)에게 진상을 담은 편지를 썼습니다. 중공의 거짓말에 속지 않도록 진실을 알려야 했고, 그들에게도 구원받을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편지에는 이렇게 썼습니다. “대법은 저에게 진선인(眞·善·忍)의 기준으로 선량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쳐 주었고, 동시에 저를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주었습니다. 대법이 제게 베풀어 주신 은혜는 산처럼 무겁습니다. 이는 인류에게 백 가지 이로움만 있고 해로운 점은 하나도 없는 고덕(高德)의 대법이며, 중공이 선전하는 소위 사교(邪敎, 사이비종교)가 아닙니다. 중공의 모든 선전은 기만입니다. 정부의 지도자 여러분께서 시비를 명백히 분별하시고, 대법제자를 선하게 대하심으로써 스스로에게도 광명의 길을 선택하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정오에 편지를 향 정부에 전달했는데, 그날 저녁 파출소와 공안국, 향과 진(鎭) 정부, 그리고 대대의 사람들이 무려 20여 명이나 우리집에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영장도 제시하지 않고 집을 불법적으로 수색했으며, 저를 납치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대법 서적과 사부님의 설법 녹음테이프, 녹음기 등을 모두 압수해 갔고, 저를 구치소에 보내 또다시 15일간 불법 감금했습니다.

2002년 10월 14일 아침, 대대와 정부 직원, 파출소 경찰 등 7~8명이 느닷없이 우리집에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은 저를 데려가 ‘학습’을 시키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단호히 말했습니다. “누가 그런 쓰레기 같은 것들을 배우겠습니까?” 그리고 그들이 방심한 틈을 타 뒷마당 담장을 넘어 도망쳤습니다. 그들은 제가 사라진 것을 알고 당황하며 앞뒤 거리와 좌우 이웃집을 샅샅이 뒤졌지만 결국 저를 찾지 못했습니다. 동쪽 마당 이웃집 노인에게 저를 보지 못했느냐고 묻자, 노인은 처음에는 보지 못했다고 하더니, 두 번 더 물으니 “봤어요. 그녀가 둥둥 떠서 날아가는 걸 봤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오후 두 시가 넘도록 저를 찾지 못하자 결국 모두 철수했습니다. 저는 집에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모자를 쓴 채 친척 집으로 갔습니다.

저녁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지만, 감히 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마당의 풀더미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자정쯤, 그들은 다시 차를 몰고 와 20여 명이 집 앞뒤를 포위하고 친척 집까지 샅샅이 수색했지만, 이번에도 저를 찾지 못했습니다.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사이에 제 14살 아들이 파출소로 납치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이는 구타를 당했고, 양손을 쭉 뻗은 채 긴 의자에 수갑이 채워진 상태로 하룻밤을 보내고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아이가 걱정되어 낮에는 친척 집에 숨어 있다가 밤마다 집에 돌아와 아이의 안부를 확인했습니다. 아이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보고 안도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결국 고향을 떠나 먼 곳으로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차를 탈 수도 없었기에 온전히 걸어서 이동해야 했고, 밤중에 어둠을 더듬어 50km를 넘게 걷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차를 얻어 타고 이동했으며, 자동차 정류장에 도착해 시내로 들어가는 여객버스를 타려 했습니다. 그런데 막 버스를 타려는 순간, 두 대의 경찰차가 저의 사진을 들고 버스 문 앞에 서서 우쭐하게 말했습니다. “하하, 이번엔 도망 못 치겠군!” 하지만 결국, 사부님의 보호 아래 저는 그들 눈앞에서 여객버스에 올라 대도시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수련생을 찾았고 수련생의 도움으로 집을 구해 임시로 안정되게 지낼 수 있었으며 자료점을 설립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불법 체포를 가까스로 피했지만 제 마음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를 불법으로 체포하고 가로막아 박해하려던 이들은 다름 아닌 저의 부모 형제와 고향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악행을 저지르며 선량한 사람을 박해한다면, 결국 업보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거짓말을 폭로하고 그들의 양심과 선념(善念)을 일깨우기 위해 진상 편지를 써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사람들에 맞춰 내용이 조금씩 다른 8통의 진상 편지를 정성껏 작성하여 고향으로 보냈습니다. 저의 자비롭고 진실한 마음이 오래도록 먼지에 묻혀 있던 그들의 마음을 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집을 떠난 지 벌써 4개월이 넘었고 설날이 다가왔습니다. 저는 고향에 돌아가 설을 보내는 한편, 진상 자료를 배포하며 사람들을 구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섣달 스물일곱 날, 저는 2천여 장이 넘는 진상 전단을 메고 고향행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섣달 그믐날, 저는 아들과 함께 마을에 가서 반나절 동안 진상 전단을 배포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즉 설날 아침에 남편이 저를 무서워하며 집에서 쫓아냈고, 욕설과 고함까지 퍼부었습니다. 저는 어쩔 수 없이 친정으로 갔지만 아버지도 두려워하시며 저를 받아주지 않고 마찬가지로 욕을 하셨습니다. 저는 억지로 친정에서 하루 밤낮을 보낸 후 그 다음 날 밤 눈물을 머금고 진상 자료를 메고 친정을 떠났습니다.

칠흑같이 깜깜한 밤,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 속에서 저는 마을을 따라 걸으며 자료를 배포했습니다. 몇 개 마을을 지나니 이미 한밤중이 되었고, 너무 지쳐서 마을 가장자리 마당에서 풀더미와 밀짚더미를 보고 누워 잠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잤는지는 모르겠지만 추위에 깨어났습니다. 하늘은 여전히 어두워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온몸이 추위에 떨렸습니다. 저는 떨리는 목소리로 “몸을 고달프게 하고(勞其筋骨), 마음을 괴롭게 한다(苦其心志)”(전법륜)라고 중얼거렸습니다.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마당을 몇 바퀴 뛰었지만 개가 짖으며 쫓아왔고, 하늘이 너무 어두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습니다. 저는 풀더미에 다시 엎드려 잠시 있다가 ‘그래도 가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고 농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습니다. 땅은 고르지 않고 물길도 있어 걷기가 매우 힘들었고, 몇 번을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며 계속 걸었습니다.

산등성이에 도착했는데 길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간절히 청했습니다. ‘사부님, 제자가 길을 잃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사부님께서 제자에게 길을 알려주십시오.’ 무의식중에 제 다리가 남쪽을 향했고, 저는 그대로 남쪽으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걷자 멀리서 하얗게 얼어붙은 강이 보였고, 다시 방향을 틀어 앞으로 나아가자 마을의 불빛이 보였습니다.

그 마을은 집이 몇 채뿐이었고 저는 그곳에 진상 자료 몇 장을 배포한 뒤 다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얼어붙은 강을 건너 계속 걷다 보니, 어느 순간 앞쪽 10여 미터 거리에서 작은 사당과 커다란 고목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순간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듯한 공포를 느꼈지만, “사부님, 사부님!” 하고 크게 외치자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사부님께서 나쁜 영체를 제거해주셨음을 느꼈습니다. 저는 걷다가 울기도 했습니다. 다시 얼음 강가에 도착했는데 다른 길은 없고 오직 얼음 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얼음 밑에서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들리자 두려워 건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부님께서 이 길은 반드시 지나야 할 길이라고 깨우쳐주셨기에, 사부님의 말씀을 믿고 강을 건넜습니다. 건너고 나니 물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후 큰길을 따라 계속 걷다 보니 큰 마을에 도착했고, 집집마다 진상 자료를 배포했습니다. 또 몇 개 마을을 더 돌아다닌 후, 하늘이 점차 밝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지쳐 잠시 쉬고 싶어 30분 정도 앉아 있었더니 패딩 안에 땀이 얼어버렸습니다. 저는 급히 일어나 다시 마을을 찾아다니며 자료를 배포했고 하늘은 어느새 희미하게 밝아졌습니다.

낮에는 걸으며 전단을 배포하고, 밤이 되면 걷다가 지치면 마당의 풀더미 위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가 다시 마을을 찾아 전단을 나누곤 했습니다. 그렇게 며칠째 계속된 새벽녘, 사촌 동생이 사는 마을에 도착했을 때 저는 너무 지쳐 사촌 동생 집에서 잠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틀 밤과 하루를 매서운 칼바람 속에서 걷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추위와 배고픔을 견뎠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사부님의 가지(加持)와 보호가 없었다면 저는 도저히 이 모든 것을 해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길가에 앉아 신발을 갈아 신으려고 보니, 신발 밑창은 이미 반이 닳아 없어졌고, 뒤꿈치에선 피가 나고, 발바닥에는 물집이 가득했으며 발등에도 상처가 생겨 피가 배어 있었습니다. 저는 가져온 가죽 신발로 갈아 신고 사촌 동생 집으로 향했습니다. 마침 사촌 동생 집에서는 초닷새를 맞아 만두를 빚고 있었는데 모두가 만두를 먹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젖은 옷차림에 짐까지 짊어진 제 모습을 본 사촌 동생은 “정신이 정말 가상하네요, 존경해요”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저 “그냥 추워”라고만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화로에 불을 피워 제 패딩을 말려 주었고, 저는 따뜻한 온돌 위에 큰 이불을 덮고 단잠에 빠졌습니다. 몸도 따뜻해졌지만 무엇보다 마음이 더 따뜻해졌습니다. 사촌 동생의 환대와 배려로 인해 제 마음이 더욱 따뜻해졌습니다.

그 집에서 하루를 쉬고, 그날 저녁 다시 사촌 동생 마을과 인근 마을에 진상 자료를 배포한 후 자정이 넘어서 돌아와 푹 잠들었습니다. 다음 날, 사촌 동생은 현 소재지로 채소를 팔러 가야 한다며 집을 봐달라고 했지만, 저는 “안 돼. 아직 자료를 다 배포하지 못했어”라고 말하며 그들과 함께 차를 타고 출발했습니다. 큰 향진(鄕鎭) 소재지에 도착했을 때 저는 “여기서 내릴게. 여기서 배포할게”라고 말했습니다. 사촌 동생은 걱정하며 “괜찮겠어요?”라고 물었지만 저는 “괜찮아”라며 차에서 내렸습니다. 처음에는 대문 옆쪽에서 뜰 안으로 조심스럽게 전단을 넣었지만, 곧 ‘이것은 두려움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다잡고 대문 정면으로 다가가 당당하게 전단을 넣었습니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진상 자료를 전하며 대법의 진리를 알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진상을 듣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어떤 때는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저를 둘러싸고 “이 집에도 한 장, 저 집에도 한 장 주세요”라며 요청했고, 어떤 이들은 “그 집은 세배하러 갔는데 곧 돌아와요, 거기도 꼭 놓아주세요”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달려와 “저한테도 한 장만 주세요. 아직 못 받았어요”라고 했습니다. 중생들이 진상을 알고 구원되는 모습을 보며 제 마음은 너무도 기뻤고, 지금껏 느꼈던 모든 고생과 피로가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제도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마을에서 배포를 마친 후 목이 마르고 배도 고팠습니다. 작은 가게에 들어가 무언가 사 먹으려 했지만 가진 돈이 적어서 물은 포기하고 과자만 사야겠다고 생각하던 중, 아직 사지도 못했는데 마침 현 소재지로 가는 차가 지나가길래 급히 올라탔습니다. 현 소재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남은 90여 장의 자료를 역 근처에서 모두 배포했습니다. 여관에서 잠을 자려 했지만 주인은 만실이라며 방이 없다고 했습니다. ‘또 노숙을 해야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먼저 음식점에 들러 무언가를 먹고자 했습니다. 국수를 주문했더니 주인이 “국수를 먹으려면 반드시 반찬이 시켜야 해”라고 했고, 저는 “그럼 밥을 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바싹 마르고 딱딱한 밥 한 그릇에 절인 채소 몇 조각을 주었고, 저는 감사히 그것을 먹었습니다. 음식점 밖으로 나서는데 버스에서 내린 두 사람이 여관을 찾고 있어서 그들을 따라 함께 여관으로 갔고, 겨우 숙박할 곳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다음 날 저는 차를 타고 시내로 향했고, 그곳에서도 자료점 역할을 하는 한 수련생의 거처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나흘 후, 자료점이 공안에 의해 수색당했고, 저를 포함한 수련생 네 명이 함께 납치됐습니다. 저는 단식으로 박해에 저항했고 18일 후 집으로 풀려났습니다.

한 달 뒤 몸이 회복되자, 악한 무리들이 다시 저를 납치해 구치소로 끌고 갔습니다. 단식을 하며 협조하지 않자 악질 경찰들은 저를 ‘시체 침대’(고문 도구)에 묶었고, 저는 21일 동안 화장실도 갈 수 없게 했습니다. 고열이 계속되자 그들은 숨이 끊어질 듯한 저를 병원으로 옮겨 응급처치를 했습니다. 9일 후, 다시 구치소로 이송되어 계속 박해를 받았습니다. 제 팔이 길지 않다는 이유로 경찰들은 억지로 팔을 늘렸고, 두 달이 넘어가자 근육이 위축되어 뼈만 남았으며 온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됐습니다. 죄수들 또한 저를 때리고 욕했으며, 죄수와 경찰들은 제 코로 억지로 음식을 밀어 넣었습니다. 그들은 저를 식물인간처럼 간주했고, 결국 위험한 상태에서 불법으로 4년형을 선고한 뒤 들것에 실어 집으로 보냈습니다. 저를 집으로 보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갔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 저는 법공부와 연공을 지속했고, 1년 뒤 몸이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이상이 제가 대법을 얻은 초창기 수련 역정입니다. 놀랍고 무서운 일들도 많았고, 마음을 도려내는 듯한 고통도 있었습니다. 비록 수년이 지났지만 돌이켜보면 여전히 생생합니다. 만약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가 없었다면, 대법에 대한 정신(正信)과 정념(正念)이 없었다면 저는 이 길을 걸어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파룬따파가 널리 전파되는 시대에 태어나 사부님의 친히 제도하심을 받은 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과 자부심을 느낍니다. 사부님께서는 저를 지옥에서 건져 올리셨고, 중생을 구하고 우리를 성취시키기 위해 무한한 심혈을 쏟으시며, 우리에게 우주에서 첫 번째 칭호인 ‘정법시기 대법제자’라는 영예를 허락해주셨습니다. 생명이 얻은 영원한 행복과 영광은 인간세상의 언어를 모두 사용해도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사와 경외이며, 저는 그것을 영원히 갚을 수 없습니다. 제자는 오직 자신을 잘 수련하고,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길을 확고히 걸으며, 수련의 길에서 가시덤불을 헤치고 용감히 전진하여 사부님의 제도에 보답할 것입니다.

제자는 은사님께 삼가 절을 올리며 감사드립니다.

 

원문발표: 2025년 6월 1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5/6/11/492786.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5/6/11/492786.html

ⓒ 2025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