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서적 |

갈등에서 벗어나 심성을 높이다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A 수련생의 소개로 B 수련생을 알게 됐다. 둘 다 협조인이었다. 처음엔 항목 때문에 B와 접촉했는데, 그녀와 A가 대립관계에 있고 성격이 강하다는 걸 알았다. 나중에 이사를 하면서 법공부 팀을 B 쪽으로 옮겼고, A는 그만뒀다. 당시 B는 난을 겪고 있었고, A는 그녀의 문제점들을 많이 얘기했다. 나는 A에게 직접 만나서 교류해야지 뒤에서 말하면 안 된다고, 선입견을 갖게 할 수 있다고 상기시켰다.

A가 자주 뒤에서 다른 수련생들을 평가하는 걸 봤는데, 심지어 속인의 험담 같기도 했다. 내가 직접 그 문제를 지적하자 그녀는 불쾌해했고, 우리 관계는 점점 멀어졌다. B 쪽에서 법공부를 하게 된 후, B가 점차 내게 불친절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고, 심지어 날 겨냥하는 듯한 행동도 있었다. 나는 B가 A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의심했지만, 그녀는 명확히 말하지 않았다. 나는 원래 사교에 서툴고 늘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다른 사람이 험담하는 것도 매우 신경 쓰는 편이다.

팀에서 암송을 제안하기도 하고 모두가 정진하도록 이끌고 싶었지만, 나중에 되돌아보니 그 안에 과시심과 강요하는 마음이 있었다. C 수련생은 사오(邪悟)한 사람의 영향을 받아 법공부 팀을 떠났다. 나는 A와 함께 그녀를 찾아가 돌아오라고 권했는데, 뜻밖에도 B는 내가 사오한 사람과 연관이 있다고 잘못 전했다. 나는 많은 오해와 격벽을 느꼈고, 내 마음속 집착도 보게 됐다. 수련은 자신을 수련하는 것이니 시비에 빠지지 말고 더욱 안으로 찾아야 하며, 매번 심성 시험을 정념으로 대해야 한다.

나는 줄곧 수련생들의 솔직하지 못함에 불만이 있었는데, 갈등이 깊어지면서 불만도 강해져 심지어 원한까지 생겼다. 과정에서 계속 안으로 찾으며 자신을 수련해 많은 집착을 제거했지만, 마음속엔 여전히 뭔가 개운치 않은 게 있었다. 마침 그때 명혜망에 ‘왜 신을 경외하는 사람이 고통을 받는가?’라는 글이 발표됐는데, 그 중 한 구절이 있었다. “욥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엘리바스가 지적한 악행이 욥의 실제 상황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걸 알 것이다. 그런데 욥은 이때 자신이 ‘흠이 있다’는 걸 깨달았을까? 아니다. 왜냐하면 엘리바스가 지적한 구체적 문제가 완전히 욥의 실제 상황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흠이 있다’는 이 말이 내 마음을 세게 두드렸다. 나도 비슷한 상태였다. 이런 상태가 내가 안으로 찾는 걸 막고 있었고, 때로는 얕게 찾더라도 여전히 불복하는 마음이 튀어나왔다. 왜 그럴까? 겉으로 보기에 상대방이 명백히 잘못했고, 수련인이 해서는 안 될 실수를 범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계속 암송하고 깊이 안으로 찾으면서 나는 발견했다. 다른 사람과 교류할 때 상대방 말이 내 인식과 맞으면, 자칭 ‘화룡점정’이라 여기는 총괄을 하려 하고, 인용까지 하며 이건 무슨 마음이라고 말하곤 했다. 누가 칭찬하면 자신이 고명하다고 여기며 우쭐했다. 이런 잘 드러나지 않는 사람마음들은 구세력이 파고들 틈을 주기 쉽다.

때로는 자신이 결백하다고 여겼다. ‘나는 남에 대해 논의하지 않았고, 단지 사실에 근거해 배경 원인을 분석했을 뿐이야.’ 사실 일단 발표하면 그 안에 참여한 것이다. 비록 당시 사람이 아니라 일에 대한 것이라고 했지만, 사람마음에 이끌린 입을 내가 통제할 수 있었을까? 게다가 나는 평소 말투가 신랄한 편이라(이는 당문화의 표현이다) 사람마음을 자극하기 쉽다. 이게 어찌 수련인이 마땅히 가져야 할 겸손하고 온화한 상태겠는가?! 그럼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아야 할까? 당연히 아니다. 사부님께서 법에서 아주 명확히 말씀하셨다. 내 생각에, 사건에서 각자의 느낌이 다르고 표현되는 상태도 다르므로, 우리는 되도록 감정색채를 띠지 않고 사물을 묘사해야 사물의 본래 모습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 이 과정도 자신을 끊임없이 순정하게 하는 수련 과정이며, 오직 대법에 의지해 무조건 안으로 찾아야만 도달할 수 있다. 개인적 요소가 없고 완전히 상대방을 위한 말이라면 갈등이 생기지 않는다. 정을 버려야 자비가 생긴다는 더 깊은 체득을 했다.

사실 자비로운 사부님께서는 일찍이 ‘전법륜’에서 석가모니가 제자에게 욕조를 청소하라고 한 예로 날 점화하셨다. 제자가 세 번 묻자 석가모니는 오직 한 마디만 했다. “내가 자네에게 청소하라는 것은 목욕통이네.” 설명하면 오히려 번거로움이 올 수 있다. 제자가 의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살생하면 안 되는 게 아닌가?’ ‘이건 자기모순 아닌가?’ 제자에게 정신(正信)이 있다면 저절로 정오(正悟)가 있을 것이고, 자신이 깨달은 것이 가장 견실하며, 집착도 억지로 함도 없이 모든 것이 연을 따를 것이다. 오직 자신의 정념을 견지해야만 긍정적 영향을 가져올 수 있고, 상대방을 바꾸고 수련시키려는 마음을 품고 극력 상대방이 이해하게 하려는 말은, 의심을 품은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의심하게 할 뿐이다. ‘도끼를 훔친 이웃’이라는 이야기처럼, 결백을 증명하려는 함정에 빠지는 것은 아직 자아를 내려놓지 못하고 자신의 명예, 이익, 정을 수호하려 하기 때문이다. 집착하는 마음으로 집착을 찾으려 하면 올바른 판단이 흐려져 갈등의 근본을 파내지 못해 심성 제고가 매우 느리고 오랫동안 돌파하지 못한다.

때로 수련생이 내게 불친절함을 보이며 심성상의 충돌이 벌어져, 넘어가지 못하면 팀을 떠나고 싶었다. 이건 갈등을 배척하고 고생하기 싫어하는 게 아닌가? 어떤 불만이든, 감정을 띤 표현은 모두 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사람의 마음[人心], 사람 염두[人念], 사람의 정[人情]이라 마의 교란을 받는다. 그 기간 한때 소침했는데, 나중에 깨달았다. ‘나는 갈등에서 벗어나야 하고, 나에게 자료 제작을 안 시키면 대면 진상을 알리러 가서 세 가지 일을 착실히 잘하자.’ 내가 정말로 갈등을 내려놓고 그 환경에서 벗어나 조용히 법을 암송하며 대면 진상 알리기에 노력하니 수련상 돌파가 매우 빨랐다. 다시 펜을 들었을 때는 마치 남의 경험을 보는 것 같아 마음에 파란이 일지 않았다. 이때 당초 자신의 심성 부족을 아주 명확히 볼 수 있었고, 그것이 외부 행위에 반영됐다.

예전에 이 경험을 써보려고 늘 했지만 잘 써지지 않았다. 잘 써지지 않은 것은 아직 억울하고 불복하는 마음이 있어서 늘 자신이 받은 상처를 생각하며, 글을 하소연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감정이 없어지니, 즉 정을 내려놓으니 인터넷도 매우 순조로워졌고, 올해 연달아 션윈을 세 차례 봤는데 그 중에서 많은 혜택을 받았다. 특히 그 주점이 영업정지 후 정비를 거쳐 재개업하는 프로그램이 내게 큰 계발을 줬다.

구세력이 설치한 난 중에서 제고하는 것과 사부님이 안배하신 중생구도 중에서 제고하는 것은 본질적 차이가 있다. 구세력은 대법제자가 수련 성취하길 바라지 않고, 오직 사부님만이 제자를 성취시키시기 때문이다. 몇 년을 허비하고서야 이 외부 갈등이 일으킨 내심 충돌을 정리한 것도, 자신이 일방적으로 ‘수련하면 마땅히 신처럼 돼야 하고 항상 정념으로 가득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련인들이 보여주는 복잡한 사람 마음들을 목격했을 때 당황하고 괴로워하며,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과거를 되돌아보니 내 근본집착이 점차 역력히 드러났다. 솔직히 말하면 고생하기 싫어하고 너도 좋고 나도 좋은 화목한 인간관계를 동경하며, 인간세상 중에서 잃어버린 것, 수련에서 내려놓아야 할 것을 붙잡고 놓지 않는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수련생에 대한 정에 집착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부모가 자기 아이와 남의 집 아이가 실수를 범할 때의 태도가 다른 것은 정 때문이다. 자기 아이가 잘못하면 마음이 조급해지고 걱정이 된다. 이런 마음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면 아이를 다그치거나 답답해하게 되는데, 이 모든 반응들이 아이에게 압박감을 주고, 잘못 대응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 남의 집 아이라면 그렇게 큰 압력이 없을 것이다. 자신의 문제를 의식한 후, 정말 ‘유암화명우일촌(柳暗花明又一村)’이었고, 사존께서 사람을 제도하시는 어려움과 간고함을 더 깊이 체득하게 되었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고도(苦度)에 무릎 꿇고 감사드린다.

적절하지 못한 부분이 있으면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바로잡아주시기 바란다.

허스(合十)

 

원문발표: 2025년 6월 1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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