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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은 직지인심(直指人心)’에 대한 깨달음

글/ 중국 헤이룽장성 대법제자

[명혜망] 나는 대법 중에서 여러 해 수련하는 동안, 대법은 심성에 중점을 두고 수련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복잡한 현실 환경 속에서 진정으로 ‘진선인(真·善·忍)’에 부합하거나 동화하기는 여전히 어렵다고 느낀다. 특히 정법시기 수련에서 대법제자들은 중생을 구원하기 위한 각종 항목과 생활 중의 크고 작은 일을 포함해, 해야 할 일이 많다. 그러나 ‘진선인’은 영원불변의 요구다. 자신의 내면을 진지하게 돌아보니 진정한 선, 진정한 자비, 진정한 무사(無私)와는 거리가 멀었다. 심지어 자신의 마음이 선하지 않고 진실하지 않음을 분명하게 느끼고, 상대방 관점이나 중생을 구원하는 기점에서 진정으로 중생을 위해 책임지고, 나아가 자신을 위해 책임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법제자의 선은 진심이고 진실하며, 진정한 본성의 진심에서 비롯되며, 이기심이 없고 자애로운 것이다.

우리는 오랜 생명의 역사 속에서 온갖 사상과 문화, 시시비비, 선악, 좋고 나쁨, 옳고 그름, 미추(美醜), 각종 취향 등 관념을 쌓아왔다. 그래서 온갖 사람과 일, 사물을 만나면 먼저 이러한 관념으로 옳고 그름, 시비, 미추를 판단하기 시작한다. 그로부터 발생하는 감정은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생명을 존중하지 않거나 소중히 여기지 않으며 보살피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혐오하거나 해치기도 하는데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대법 수련에서 정말 제거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런 후천적 관념, 완고한 사고 습관이다. 특히 우리 정법시기 대법제자는 사부님의 조사정법(助師正法)과 중생제도를 돕는 명확한 사명과 책임이 있다.

우주의 성(成), 주(住), 괴(壞), 멸(滅) 단계에서 ‘멸’ 시기 최후의 생명인 오늘날 인류는, 모두 이 정도까지 나빠졌기에 전통적인 도덕으로 오늘날 인류를 가늠하는 것은 거의 의미가 없다. 대법제자는 사람을 구하는 사명이 있을 뿐, 어떻게 사람을 구원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문제다. 그러나 우리의 원래 관념과 사고 습관이 무의식적으로 타인을 판단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은 중생을 구원하는 데 매우 불리하다. 특히 자신의 관념으로 어떤 생명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평가한다면, 그 생명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비우호적이고 자비롭지 못할 것이다. 겉으로는 선량해도 내면이 진정으로 자비롭지 않다면 상대방 본성의 선함을 일깨우지 못하고 구원하는 힘도 부족할 것이다. 다음은 착실하게 수련한 두 가지 사례다.

1. 약 1~2년 전, 현지 A 수련생이 박해받고 ‘처분보류’ 형식으로 집에 돌아왔다. 이 기간에 우리 지역의 많은 다른 제자들도 박해받다가 전염병으로 인해 모두 처분보류 형식으로 집으로 돌아왔지만, 전염병이 지나간 후에 다시 모두 감금되어 박해를 받았다.

그날 A는 처분보류가 종결돼 파출소에 출석해 서명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녀는 이것이 함정임을 알고 경찰에게 협조하지 않았으며, 오랫동안 유랑생활을 하다가 나중에 경찰에게 발각되어 납치됐다. 하지만 그녀는 대법제자들이 무사무아(無私無我)를 수련해 신우주의 기준에 도달해야 한다고 생각해, 진정으로 내심에서 우러나와 경찰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대법제자들을 박해해선 안 됩니다. 인과응보는 천리이며, 대법제자들을 잘 대해야 비로소 좋은 미래가 있을 겁니다.”

이전에도 경찰에게 대법 진상을 알렸지만 그때는 형식적으로 말했고, 단지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찰을 위해 진심으로 책임지고, 그들이 죄악을 저지르고 중생에 대한 사악의 박해를 방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는 자신의 해탈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중생 제도를 위해서인가? 전자는 이기적인 것이고 후자는 이타적인 것인데, 이것은 신구 우주 생명의 근본적인 차이다. 상대를 위하고 어떠한 사심도 없는 이것은 신우주 생명의 기준이며, 이 기준에 도달하면 구우주의 관할에 속하지 않는다. 그 결과 그녀는 무조건 풀려났고 더 이상 유랑생활을 할 필요가 없게 됐다.

이 이야기를 통해 ‘대법은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는 한 층의 의미, 즉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단지 진상을 알리는 그런 단순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마음에서 우러나와 중생에게 자비와 사랑을 전해줄 때만이 비로소 대법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대법의 진상을 사람들에게 더욱 강력히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자비 중에서 마음에 담은 것은 중생이지 두려움이 아니다.

2. 대법제자에게는 생활상 겪는 번거로움과 굴곡 등을 포함해 어느 것 하나 간단한 것이 없다. 구(舊) 생명은 대법제자를 시험하고 집착심을 제거하는 것을 도와준다는 명분으로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동시에,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생명을 도태시키려 한다.

한번은 우리 회사의 한 고객이 몇 시까지 그의 집 문 앞에 물품을 배송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이런 일에서 고객의 요청을 되도록 들어주려고 노력하지만, 그날은 너무 바빠서 도저히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나는 그 고객이 그다지 바쁘지 않으니 조금 늦게 배송해도 괜찮을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일이 커져서 고객이 전화를 걸어와 급한 일로 외출해야 하는데 아직도 배송되지 않았느냐며 화를 냈고, 이제 배송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는 또 온갖 악담을 쏟아냈고 말할수록 화가 치밀어 결국 관련 부서에 신고하겠다고 했다. 결국 일이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표면적으로는 사소한 일인데도 소란을 피우기 시작하자 끝이 없었다. 그 고객은 나에게 큰 원한이 있는 것처럼 끝까지 노발대발했다.

사실 각종 박해와 번거로움에 직면할 때 대법제자들이 냉정하게 살펴보면, 자신의 공간장이 아주 큰 압력을 받고 있으며 심지어 주변 사람들까지 공포와 불안을 느끼게 한다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것은 구 생명이 대법제자를 시험하려는, 이른바 고급 생명이 설치한 장(場)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대법제자들이 수련을 잘해서 일이 일어나기 전에 이 장을 대법의 자비롭고 평화로운 장으로 바로 세울 수 있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저녁이 되어 이 일을 생각할 시간이 생긴 나는 마침내 깨닫게 됐다. 이는 어떤 생명이 나와 이 사람의 역사적 은원(恩怨)을 이용해 빚을 독촉하는 형태로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것이며, 죄를 짓는 중생을 도태시키려는 것이 그 목적이다. 이러한 안배가 더욱 나쁜 점은 대법제자를 교란하도록 배치된 세인들이 상식을 벗어난 나쁜 행동을 하거나, 정상인의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고 어처구니없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대법제자도 수련 중의 사람인지라, 사람마음이 있으면 ‘이 사람은 결코 선한 사람이 아니구나’라는 식의 견해를 갖기 쉬운데, 이것은 구세력이 이 사람을 도태시키려는 의도에 더욱 부합한다. 나쁜 일은 그들이 꾸미고, 책임은 대법제자 여기로 떠넘기는 것이 바로 그들 구세력이 늘 사용하는 수법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많이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대법제자는 사람을 구원하려는 의도밖에 없는데 어떻게 이런 악랄한 배치가 이루어질 수 있는지 생각했다! 이어서 나는 우리 누가 누구에게 빚을 졌든지 모두 요구하지 않겠으니, 당신도 날 계속 교란하지 말고 대법 중에서 선해(善解)하자고 생각했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자 이 공간장이 갑자기 평온해졌고 사악의 배치가 깨졌음을 알게 됐다. 나는 일어나서 그에게 물품을 배달하러 갔다. 그랬더니 그는 만나자마자 내게 먼저 사과했고, 나도 사과하고 잘못을 인정했다. 그 후 우리 관계는 점점 더 좋아졌고, 그는 적극적으로 우리의 사업을 지원했다.

구세력이 안배한 목적을 간파하자 나는 더욱더 자신의 책임을 명확히 알게 됐으며, 배치되어 교란하고 파괴 작용을 일으키는 모든 사람을 관대하고 선하게 대할 수 있었다. 모든 원한을 선해하는 수련은 당연히 자신에게 달렸고, 이 모든 것은 사부님께서 하시며, 제자들은 다만 이렇게 중생을 구원하고 싶은 진심과 소망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이기심, 자기를 보호하려는 마음, 이익이 손상될까 봐 두려워하는 잡념을 떨쳐버리기만 하면 이런 법의 힘이 펼쳐 나올 것이다. 대법제자들이 진정으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헌신하고 중생을 아끼며 사랑해야 비로소 대법의 아름다움이 드러나게 된다.

대법은 직지인심이므로 개인의 제고 방면에 체현하는 것도 무척 중요하다. 우리가 어떠한 사람마음을 제거하려고 할 때 건성으로 법공부를 하고, 겉으로 심성을 지키는 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마음을 제거하려는 소망에 진정성이 없고 순수하지 않으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해도 소용이 없다. 나는 좀 명확해지자 사부님께 말씀드렸다. “사부님, 제가 어떻게 하면 사심을 버릴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만 일에 부딪혀 먼저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남을 위해 책임질 수 있는 것이야말로 자신을 책임지는 것인데, 어떻게 하면 매사에 중생을 제도하는 기점에 서서 문제를 생각할 수가 있습니까?” 법의 기준을 명확히 하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선택해야만 신우주의 무사무아(無私無我) 기준에 부합하는지 알게 되면, 모든 것이 순탄해지고 막힘이 없어지며, 사부님의 깨우침에 따라 점점 더 명석해질 것이다.

이상은 현 단계에서의 내 얕은 인식이다. 대법의 요구에 부합되지 않은 점은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바로잡아주시길 바란다.

 

원문발표: 2024년 2월 1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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