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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법회] 박해 초기의 수련을 회상하다

글/ 중국 대법제자

[명혜망]

존경하는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것은 박해 초기의 저의 수련 체험입니다. 그 시절을 되돌아보며 수련을 처음처럼 하도록 독려하기 위해서 글을 써봅니다.

저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1999년 7월 22일 오후, 기독교 신자인 이웃이 우리 부모님 댁에 찾아와서 빨리 TV를 켜보라고 했습니다. 당시는 여름 방학이었고 저는 딸을 데리고 부모님 댁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기에 우리는 재빨리 TV를 켰습니다. 눈에 들어온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부님과 대법을 비방하는 중국중앙TV(CCTV)의 뉴스였습니다. 거짓말이 천지를 뒤덮을 듯했고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당시에 저는 멍해졌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정부가 어떻게 사실을 무시하고 눈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 가슴이 아프고 화가 나서 울고 싶어도 눈물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느꼈던 감정은 중공(중국공산당) 가짜뉴스의 말도 안 되는 내용에 극도로 안타까웠다는 것입니다. 그 후 며칠간 TV에서는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가짜뉴스가 방송됐습니다. 저는 먹을 수도, 잘 수도 없었습니다. 처음 며칠 동안은 TV를 보다가 이후에는 아예 보지 않고 다른 방에 피해 있었습니다.

제 부모님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십니다. 제가 대법을 연공하기 전에 부모님은 저에게 기독교를 믿으라고 하셨는데 저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TV에서 가짜뉴스를 보시고 사실이라고 믿고 저에게 큰 압력을 주어서 저는 자주 몰래 눈물을 흘렸습니다. 딸은 아직 어려서 이런 저를 보고 따라서 괴로워했습니다. 저는 더는 부모님 집에 머물고 싶지 않아 딸을 데리고 집에 가기로 했습니다.

1. 처음으로 진상 자료를 배포하다

집에 돌아온 후 저는 한 부부 수련생과 교류했습니다. 그들도 저와 마찬가지로 마음 아파하고 괴로워했으며 조급하고 분노했지만 어떻게 할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가짜뉴스가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하든 우리는 사부님과 대법을 믿고 사당(邪黨: 공산당)의 거짓말을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때 법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사부님께서 심신이 건강해지고 사람이 되는 이치를 가르치셨고, 일을 할 때 먼저 남을 배려하고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좋은 사람이 되도록 가르쳐 주셨다는 것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대법의 깊은 법리를 이해하지 못했고, 사부님께서 우리를 이끌고 높은 층차로 수련하게 한 진정한 의의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비방과 날조 선전에 직면해 어찌할 바를 몰랐고 오직 ‘사부님은 좋고 바르시다’는 한 가지 단순한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박해 이전에는 우리 지역에 많은 사람이 파룬궁을 수련했지만, 박해 이후에는 많은 사람이 두려워서 수련을 포기했습니다. 토론하고 의논할 수련생을 찾지 못해 보도원을 찾아가 교류했더니 보도원은 자기도 움직이지 않았다며 다른 사람도 움직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법공부를 많이 하면서 저는 대법제자로서 사부님과 대법이 비방당하고 박해받을 때 법을 실증해야 한다는 것을 점차 깨달았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轉法輪)’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마의 교란이 있는 정황에서만 비로소 당신이 수련해 나갈 수 있는지 없는지, 당신이 진정하게 도를 깨달을 수 있는지 없는지, 당신이 교란을 받는지 받지 않는지, 이 한 법문에 견정(堅定)할 수 있는지 없는지 체현해 낼 수 있다. 거센 파도가 모래를 일듯이 수련이란 곧 이런 일로서, 남은 것이야말로 진짜 금이다.”

저는 법을 실증하기 위해 나가서 연공하려 했으나 TV에서 전국 각지 대법제자가 연공하러 나왔다가 현지 경찰에 납치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 우리 지역은 상대적으로 편벽한 데다 저는 법을 늦게 얻어서 외부 수련생들과 접촉하지 않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나중에 수련생의 남편이 사부님의 결백을 호소하기 위해 그의 집 삼륜차로 우리를 태우고 베이징으로 가자고 해서 우리는 모두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는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사부님께서 우리가 법을 실증하려는 마음을 보시고 이듬해에 외지 수련생 한 분을 우리집에 오도록 배치하신 것 같습니다. 그 수련생은 명혜망에서 다운로드한 기사 세 편을 갖고 왔는데, 글 제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내용 중 한 편은 사부님께서 우주의 모든 중생을 구하기 위해 9개월 동안 우주의 악을 없애면서 머리카락이 백발이 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니 눈물이 뚝뚝 떨어졌고 참을 수 없어 소리 내서 울었습니다. 또 다른 기사는 파룬궁에 관한 기본적인 진상에 관한 것이고, 또 다른 기사는 대법제자들이 어떻게 세상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리는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 기사에서 계발을 받아 저는 수련생들과 즉시 현지 복사 가게에서 ‘파룬궁 기본 진상’ 기사를 200부 인쇄해 사람들에게 배포하기로 했습니다. 동시에 수련생들을 일깨워주려고 교류문장 10여 부를 복사했습니다.

어느 날 밤, 저는 딸과 함께 이 문장을 제가 접촉할 수 있는 수련생들에게 주러 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받고 어떤 사람은 받지 않았습니다. 그중 한 명은 우리가 그녀 집 창가에서 오랫동안 불렀는데 그녀가 온돌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지만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집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집에 가는 길에 당시 가로등이 없었는데, 저는 길가에 장시간 쌓여 있던 모래더미에 실수로 걸려 넘어졌습니다. 통증이 너무 심해서 오랫동안 일어날 수 없었고, 딸이 저를 세게 끌어당겼습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옷이 찢어지고 오른쪽 팔뚝이 까져서 피가 났으며 오른쪽 어깨를 움직이기가 어려웠는데, 법공부와 연공을 통해 빨리 나았습니다. 나중에 사부님의 각지 설법을 공부하고 나서야 이해하게 됐습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당시에 내가 당신들에게 형용했듯이, 일초일목(一草一木)마저도 다른 공간의 사악한 생명이 붙어서 당신이 길을 걸어가면 나뭇가지조차 당신의 얼굴을 후려치고 그 풀조차도 당신을 걸어 넘어지게 했으며, 공기는 모두 사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각지 설법4-2003년 애틀랜타법회 설법) 저는 이것은 사악이 대법제자가 정체(整體)를 이루지 못하게 교란하고 방해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어느 날 자정쯤, 저는 잘 접은 진상 자료를 갖고 집 밖으로 나갔습니다. 고개를 들고 별이 총총한 그윽한 하늘을 바라보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고 정말 좋았고 기뻤습니다. 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주민들의 문손잡이에 진상 자료를 잘 걸어뒀습니다. 주변 환경은 매우 조용했고 저는 자료를 배포하면서 사람들이 진상을 보고 거짓에 속지 말기를 기원했습니다. 빠르게 배포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신나서 뛰었습니다. 이때 저는 진정한 대법제자가 된 것 같았고 사부님께서 치르신 큰 대가를 저버리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처음으로 진상 자료를 배포했을 때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 느낌과 마음이 아직도 생생해서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 후 저는 다른 곳으로 가서 진상 자료 400부를 인쇄했고, 수련생 부부와 협력해 사부님의 보호와 도움으로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순조롭게 배포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박해를 부정할 줄 모르고 환희심이 생겨 사악이 틈을 탔습니다. 경찰은 우리가 처음 자료를 복사했던 복사가게를 찾아냈고, 여주인이 우리에 대해 알려줘서 저와 수련생 부부는 불법적으로 집을 수색당하고 한 달 반 동안 구치소에 감금됐습니다.

2. 육친 정을 내려놓으니 고난 속에 광명이 있다

구치소에 불법 감금된 첫 주에 저는 혼란한 육친 정의 고비에 직면했습니다.

월요일 아침에 친정 오빠와 남편, 딸, 큰 시누이 부부, 작은 시누이 등 10여 명의 친척과 친구들이 저를 보러 구치소에 왔습니다. 그들은 저에게 수련을 포기하라고 설득하러 왔습니다. 큰 시누이는 만나자마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수련을 그만두고 가족과 아이를 생각해 서명하라고 간청했으나 저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큰 시누이의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고개만 끄덕이면 된다고 했지만 저는 여전히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반나절 저를 설득했고 오빠는 소리 지르며 제가 이기적이고, 가족에 대해 정도 없으며, 남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며 꾸짖었습니다. 주위에는 구치소 경찰 몇 명이 서서 제가 어떻게 하나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사부님께 제가 육친 정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도록 도와주십사 간청드렸습니다.

남편은 제가 파룬궁을 수련한 후 좋은 점이 많았고, 파탄 직전에 있던 가족도 구했기에 저를 설득하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딸아이는 소리 없이 계속 울더니 어른들이 주의하지 않는 틈에 저에게 달려와 조용히 물었습니다. “엄마가 이렇게 하는 것이 맞아요?” 제가 단호하게 “엄마가 틀린 게 아니야”라고 하자 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 꼭 견지하세요”라고 했습니다. 딸의 말을 듣고 저는 마음이 매우 편해졌습니다. 저는 사실 딸이 어린 나이에 엄마를 떠나면 어떻게 할지가 가장 걱정이었습니다. 사부님께서 딸을 보살펴주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감옥 경찰들은 기대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자 면회를 중단하고 가족들을 돌려보냈습니다.

수요일 오전에 남편과 딸, 작은 시누이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만나자마자 작은 시누이는 제 딸에게 강제로 무릎을 꿇고 제게 수련하지 말고 서명하고 집에 가자고 애원하라고 했는데, 딸은 아무리 강요해도 무릎을 꿇지 않았고 저를 설득하지도 않았습니다. 작은 시누이가 제 딸의 등을 때려서 딸은 울기만 했습니다. 남편이 여동생을 당기며 “왜 아이를 때려?”라고 했고, 저도 작은 시누이에게 “아이를 왜 때리니”라고 외쳤습니다. 딸은 울면서 “엄마와 함께 (감방으로) 들어가 있을래요”라고 했습니다. 당직 경찰이 이것을 보고 재빨리 저를 안으로 밀어 넣어서 면회는 허둥지둥 끝났습니다. 감방으로 돌아온 후 저는 딸이 억울함을 당한 것을 알고 안쓰러워서 울었습니다. 이때 저는 딸도 어린 대법제자이기에 사부님께서 꼭 보살펴주실 것이고, 반드시 좋아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금요일 오전, 부모님이 직접 저를 만나러 오셨습니다. 그날 오전 감옥경찰이 저에게 면회가 있다고 알려주어 누굴까 생각했는데 나와보니 친정 부모님이었습니다. 부모님은 많이 늙어 보였고 머리에 서리가 앉았습니다. 예전에 아버지의 눈은 흑백이 분명했는데 회백색으로 변했고 얼굴이 초췌해 보이셨습니다. 부모님을 보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버지는 몇 마디 하시더니 목이 메어 더는 말을 잇지 못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리셨습니다. 저는 마음이 쓰려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 자제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면회장에는 많은 경찰관이 지켜보고 있었기에 그들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 없었습니다. 사부님께 도와주실 것을 청하자 갑자기 마음이 평온해졌습니다. 사악은 아무런 효과가 없자 부모님을 쫓아내고 저를 다시 감방에 보냈습니다.

한 달 반 뒤, 저와 수련생 부부 3명은 정정당당하게 구치소에서 나왔습니다. 집에 돌아와 보니 부모님, 남편, 딸, 가족 모두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사부님께서 그들을 보호해주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부님의 은혜는 너무나 커서 갚을 수 없습니다.

3. 베이징에 청원하러 간 짧은 5일

한 달 반이 지나자 오빠는 저를 구치소에서 곧장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추수를 돕게 하고 딸을 만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때 딸이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딸이 좀 더 철이 들었을 것으로 생각하며 만날 장면을 상상해봤습니다. 저는 그리움을 견디며 일하는 내내 ‘홍음(洪吟)’, ‘논어’ 등 경문을 계속 외우고 더는 딸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일을 마치고 집에 가게 됐는데 제 마음은 이미 딸에게로 가버렸습니다. 딸을 보니 여전히 활기차고 귀엽고 똑똑하고 고집이 셌으며, 공부도 여전히 잘했습니다. 위대하고 자비로운 사부님께 감사드렸습니다!

나중에 법을 열심히 공부한 후 저와 수련생 부부는 모두 베이징에 가서 법을 실증해야 한다고 느꼈지만 아직 기회가 오지 않아 가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수련생 부부가 불법 압수된 대법서적을 가지러 공안국에 갔다가 경찰에게 불법 감금됐는데 두 가지 선택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는 즉시 구류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각각 보증금 500위안씩을 내고 5일간의 청원 시간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수련생은 돈을 빌리러 온다는 구실로 우리집에 와서 이 사실을 저에게 알렸고, 경찰은 그들을 따라 우리집까지 왔습니다. 돈을 낸 후 수련생 부부는 우리집에 와서 교류했습니다. 우리에게 청원하라고 하는데 어느 지방 정부가 감히 파룬궁 안건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이는 베이징으로 가서 청원하라고 분명히 우리를 일깨워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그날 밤 떠나기로 했습니다.

떠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긴장되고 가슴과 손발이 떨렸는데 억지로 참으면서 진정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저는 길에서 먹으려고 떡을 많이 구웠습니다. 딸이 학교에서 돌아온 뒤 우리가 베이징에 간다는 것을 알고 자기도 가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겁나지 않냐고 하자 딸은 겁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저도 딸을 집에 혼자 두는 것이 걱정됐습니다. 남편도 외지에 일하러 갔기에 저는 딸을 데리고 가기로 했습니다. 그해 딸은 겨우 열 살이었는데 아주 좋아했습니다.

식사할 때 한 입도 삼키지 못해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억지로 죽을 조금 마시고, 수련생 부부가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어두워진 후에 어떻게 떠날지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때는 공기도 꽁꽁 얼어붙은 것 같았고 기분도 매우 우울했으며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완전히 어두워진 후 수련생 남편이 택시를 불러 재빨리 외지로 향했습니다. 우리 넷은 기차역에 들어가지 않고 택시를 타고 더 먼 곳에 가서야 기차를 타고 성도(省都)까지 갔습니다. 성도 수련생들이 우리를 맞아주고 현수막도 준비해주어 각자 소매에 하나씩 넣어 두었습니다.

기차역 대기실에서 기차를 타기 위해 개찰하던 중 현지 경찰이 우리를 가로막았고 부부 수련생 중 남편을 제압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빨리 도망갈 수 있도록 시간을 지연시키기 위해 경찰 두 사람의 옷을 힘껏 잡았습니다. 개찰하느라 통로 곳곳에 가방이 쌓여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고, 우리는 사람들의 흐름을 거슬러 되돌아 달려갔으나 곳곳에 여행 가방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어 달리기 어려웠습니다. 딸은 어려서 가방에 걸려 계속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행히 이 줄의 의자 반대편에도 통로가 있어서 우리 셋은 그 의자를 넘어가 사람이 없는 통로에서 뛰어서 훨씬 빨랐습니다. 낯선 곳이라 어디로 달려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대기실 쪽으로 들어오는 사람들과 반대편으로 달리면 된다는 것은 알았습니다. 저는 수련생과 딸 중 한 명이라도 놓칠세라 왼손과 오른손으로 수련생과 딸의 손을 각각 잡았습니다. 달리고 또 달렸는데, 그 장면은 영화처럼 스릴이 넘쳤습니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로 우리는 마침내 대합실에서 뛰쳐나왔는데 심장이 목구멍까지 쿵쾅쿵쾅 뛰는 것 같았습니다.

눈이 많이 내려 방향을 알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서둘러 택시를 탔고 저는 한 지역을 기억해보려고 애썼습니다. 그곳은 제가 유일하게 아는 외딴 마을이었습니다. 운전자는 너무 멀고 눈도 많이 와서 가기를 꺼렸습니다. 우리는 돈을 더 내겠다고 했습니다. 작은 마을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불이 켜진 곳에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인적이 드문 곳에서 헤맸습니다. 이때 저는 여전히 매우 긴장했습니다. 얼마 후 딸이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딸아이의 복통은 점점 심해졌고 허리도 펴지 못하게 됐습니다. 역에서 화장실을 찾았는데 딸은 “아프기만 하고 나오지 않아요”라고 했습니다. 수련생은 “이건 사악이 우리를 베이징에 가지 못하게 교란하는 거예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고민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먼 길을 나가본 적이 없는 시골 여성이고 한편으로는 제 딸도 데리고 갔는데, 길에는 경찰이 추격하고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저는 딸에게 “집에 갈래, 아니면 베이징으로 갈래?”라고 물었습니다. 딸은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조용하고 단호하게 “베이징으로 가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천천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음 행보를 고민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저에게 큰 역을 택하지 말라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작은 마을 기차역에서 단거리 표를 샀습니다. 꽤 큰 도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역은 곧 텅 비었는데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습니다. 사복경찰을 만날까 봐 낯선 사람에게 감히 말을 걸지도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40~50대 여성이 따라와서 “여관에 묵으실 건가요?”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나쁜 사람일까 봐 “아니요”라고 대답하고 얼른 두 사람을 끌고 나갔습니다. 우리가 문의하면서 매표소에 도착해 버스 시간표를 확인하려 할 때 그 여성이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나서 자진해서 어떤 버스를 타고 어디로 가야 할지 아주 자세히 알려줬습니다. 우리는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기차 편을 논의하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그 여성은 이미 사라진 후였습니다. 저는 문득 사부님께서 저에게 길을 알려주시려고 누군가를 보내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부님께 정말 감사했습니다!

우리는 베이징행 표를 사지 않고, 베이징을 경유하는 중소도시행 표를 샀습니다. 그곳에서 잠시 쉬면서 정리하고, 간단히 식사하고 오후에는 역에 가서 베이징 서부역까지 가는 표를 세 장 샀습니다. 우리는 순조롭게 서부역에 도착했습니다. 내리는 사람이 많아서 어느 출구로 가야 할지 몰랐는데 아주 늠름한 30대 남성이 다가와서 “저를 따라오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셋은 그의 뒤를 바싹 따라가 순조롭게 역을 나왔습니다. 제가 그에게 감사를 표하려고 할 때 그도 금세 사라졌습니다. 밤이 늦어서 밥을 먹을 여유가 없어서 급히 여관을 찾았습니다. 사부님의 안배로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신분증이 필요하지 않은 작은 여관을 찾았는데, 당시에 이런 곳은 정말 드물었습니다. 세 시간 넘게 휴식을 취한 우리는 날이 새기 전에 조용히 여관을 나섰습니다. 저는 얼마 남지 않은 돈을 세 몫으로, 1인당 한몫씩 나눴습니다. 저는 우리가 헤어지면 각자 이 돈으로 차를 타고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아무도 말하지 않고 조용히 모든 일을 했습니다.

오전 9시쯤 지하철을 타고 천안문광장으로 갔는데, 천안문광장이 바로 코앞에 있는 것 같았지만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때 멀지 않은 곳에서 20대 청년을 만났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지하 통로 계단을 올라가면 천안문광장에 도착한다고 알려줬습니다. 그날 광장에는 사람이 많지 않고 사복경찰이 많았으며, 제복을 입은 경찰도 있었는데 멀지 않은 곳에 한 명씩 있었습니다. 광장에 사람이 많아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현수막을 펼치려 했는데,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생각만큼 인파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경찰은 우리를 조사했고 사복경찰들도 수시로 호출기를 들고 우리를 쳐다보았습니다. 우리는 관광객인 척하고 사진도 몇 장 찍었습니다.

11시쯤 우리 셋이 광장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우리 고향에서 온 경찰 세 명이 대각선으로 건너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현수막을 펼치지 않으면 너무 늦을 것 같아서 다시 긴장됐습니다. 우리는 간단히 논의한 후 깃대로 빠르게 걸어갔습니다. 우리 셋은 등을 맞대고 세 방향으로 깃발을 펼쳤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마음속에 깊이 묻어뒀던 목소리를 마침내 꺼내 외쳤습니다.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真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 우리 사부님과 대법은 결백합니다! 파룬따파는 정법(正法)입니다!”

그 외침은 하늘에 울려 퍼졌습니다. 저는 땀구멍이 모두 열리고 피가 위로 솟구쳐 얼굴이 불그레해진 것을 느꼈고, 눈물이 얼굴을 적셔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2분도 안 되어 경찰 여러 명이 달려와 현수막을 빼앗아 갔습니다. 경찰은 딸의 손을 등 뒤로 비틀고 손으로 딸의 입을 막았습니다. 저는 큰 소리로 “아이를 놔줘요!”라고 외쳤습니다. 이때 광장 곳곳에서 수련생들이 나와서 현수막을 들고 외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일어났습니다.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그 직후 경찰차가 굉음을 내며 달려왔고 우리를 강제로 차에 태워 첸먼(前門) 파출소로 끌고 갔으며, 곧 현지 경찰이 우리를 데려갔습니다. 베이징 주재 사무실 여관에서 경찰은 우리를 불법 심문하고, 저와 수련생들을 몸수색했으며, 심지어 제 딸을 방에 혼자 데려가 자백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제가 경찰의 불법 심문에 협조하지 않자 ‘610(파룬궁 탄압기구)’ 주임은 제 뺨을 두 번 심하게 때렸습니다.

경찰과 대화하면서 저는 그들이 우리가 베이징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무장경찰과 교통경찰을 비롯한 많은 경찰을 파견해 우리를 추적하고 차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베이징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도착해 베이징역에서 이틀 밤낮 지키고 있었는데, 경찰들은 대부분 추위에 떨어서 감기에 걸렸습니다. 우리는 베이징으로 가는 길에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사부님의 보호로 건강하고 정신 상태도 매우 좋았습니다. 경찰은 줄곧 우리를 둘러싸고 포위했지만 우리가 베이징에 무사히 도착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사부님께 감사드렸습니다!

맺음말

이 글을 쓰면서 그 당시 일을 회상할 때마다 여러 번 눈물이 났습니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로 저는 25년 수련하는 내내 매우 행복했습니다. 사부님께서 항상 제 곁에 계시기에 어떤 상황에 직면하더라도 마음은 항상 따뜻하고 안정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제도하시기 위해 노심초사하셨습니다. 제자는 사부님의 자비로운 제도에 어긋나지 않을 것입니다. 요즈음 수련이 느슨해졌는데, 이러한 사람마음을 버리고 자신을 잘 수련해 더 많은 사람을 구하고 원만해 사부님을 따라 돌아가겠습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원문발표: 2023년 11월 1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3/11/10/46779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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